일방적인 설교가 아닌 함께 만들오가는 설교가 참 좋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설교인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에 성장과 부흥을 부르짖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잘 아시는 것처럼, 초대 교회는 교회가 로마와 유대교로부터 핍박을 받는 시기였습니다.
기독교로 개종을 하거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믿는 다는 것은 가난과 죽음을 결단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들이며 노예처럼 자유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신앙 생활을 하거나, 또는 교회일이나 신앙생활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날 일하지 않으면 그 날은 굶어야 했습니다.
매일 모여서 신앙 생활하는 것, 또는 로마의 눈에 띄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철저하게 가정교회로 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핍박으로 인하여)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목표는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피곤합과 가난함과 핍박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신실하게 주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환영하며 사는 삶,
로마의 힘과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과 사랑과 섬김으로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전도하면 삼 천명, 때로는 오 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날마다 믿는 자들이 더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입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가복음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후편인 사도행전에서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맞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쓰자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누가는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 삼 천명, 오 천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사도행전도 오늘 우리가 말하는 성장과 부흥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우리는 다양함과 건강함 그리고 성숙함이 아닌 성장과 부흥을 말할까요?
크리스텐덤! - 제국화된 기독교!
기독교는 로마에 의하여 차별과 베제를 받았던 공동체였습니다.
주류와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늘 경계 밖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 황제에 위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경계 밖에서 핍박을 받던 기독교가 콘그탄티노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주류가 되고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 사회에서 주류가 되고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차별과 핍박을 당하던 기독교가 로마의 힘으로 인하여(복음이 아닌) 환영과 환대를 받는 주인공이 됩니다.
그리고 힘을 가진 교회는 차별받는 자들에서 차별하는 자들이 됩니다.
힘을 가진 교회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공을 꿈꾸는 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달려오면서 교회는 더 큰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교회는 더 큰 힘을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하여 건물을 더 크게 짓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더 커지고 더 화려해지고...
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가장 미련한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미개인으로 부르며 마녀 사냥을 합니다.
드디어 가장 큰 힘을 가진 교회는 이제는 황제까지 임명하는 절대 권력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 시절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크리스텐덤!
교회가 하나님의 가치관을 버리고 제국의 가치관으로 변질된 가장 슬픈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로마의 핍박이 끝나고 교회가 로마의 국교가 된 가장 축복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로의 회복
어떤 운동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닙니다.
크리스텐덤에 물들어 있는 교회가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회복되는 것
성장과 부흥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닌 서로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서로를 환대하며 환영하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이것이 교회로의 회복이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언제나 신실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패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은 목표를 잊지 않고 걸아갔다는 것!
실패와 실수는 목표를 잃어버리고 목표가 변질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회복되는 것이 지금도 목표라고 한다면 잘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모양, 저런 모양,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겠죠?!
아브라함이 때로는 애굽으로 때로는 세겜으로 때로는 여기로 때로는 저기로 갔던 것 처럼!
전 이것이 답이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가의 삶을 비난하거나 판단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설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목표이기에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서로 대회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길 원하며 설교를 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수준의 차이를 인정하듯이,
서로의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무엇이 더 세상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유익한 것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을 인정하고 동의할 때 까지 잠잠하게 기다려주고....
서로의 신앙을 공유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제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전 누군가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에 그 모습을 더하여 더 아름답고 풍성한 교회를 세우고 싶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독특한 경건한 모양을 갖춘 교회들!
정말 많습니다.
1. 그소망 교회 (그리스도 소멍 교회) 이택환 목사 (장로교 통합)
2. 안양 더함 교회 신성관 목사 (성경교)
3. 예쁜 손을 향한 교회 박재찬 목사 (감리교)
4. 루터 중앙 교회 최주훈 목사 (루터교)
작은 교회 운동 등
오늘 페북에서 읽었던 글인데 귀한 도전을 주는 글이라 공유해 봅니다.
<교회의 예배에서 교회의 표지와 직분의 역할>
* 이 글은 장로교회의 정치 원리를 따른 것이기에 모든 교회에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1. 참된 교회의 표지와 예배
... 교회의 예배란, 주일날 오전에 전 세계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보편적 예배를 가리켜 공예배라고 부릅니다. 이 예배는 교회의 세 직분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로 구성되는 직분자들의 봉사에 의해 진행됩니다.
이때 목사는 설교로, 장로는 세례에 참여할 자들과 성찬에 참여할 자들을 문답 혹은 구분하는 일로, 집사는 연보를 모아 구제 및 자비의 사역을 하는 일로 각각 예배에서 봉사하게 됩니다.
이 직분자들에 의해 참된 교회의 표지가 선명하게 구현됩니다. 곧 온전한 말씀의 선포와 온전한 성례의 시행과 정당한 권징의 시행은 다름 아닌 교회의 공예배를 통해서 구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가리켜 참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참된 교회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지를 드러내는 교회의 세 직분이 봉사하는 공예배를 통해서 가장 완전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2. 참된 교회의 표지를 수행하는 교회의 직분
교회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삼중직과 관련됩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교회는 교회의 직분을 맡길 자를 선택합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으로부터, 장로는 그리스도의 왕직으로부터, 집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부터 각기 그 의미를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언제나 이 세 직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가리켜 교회의 항존직이라고 합니다.
혹 교회에 목사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상태를 가리켜 허위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허위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집행하기 위해, 그리고 당회를 통해 권징의 사역을 봉사하기 위해 임시 당회장을 노회가 파송하게 됩니다. 이때 임시당회장은 장로와 더불어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예배와 관련해 세례 및 성찬을 집행하게 됩니다. 물론 이 당화를 통해 설교 및 권징도 행사하게 됩니다.
혹 교회에 장로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이웃 교회에서 각각 1인의 장로를 두 개 이상의 교회에서 2인 이상을 초빙해서 당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당회를 통해서 세례와 성찬을 집행하고 교회의 표지를 수행하게 됩니다.
3. 항존직으로서 교회 직분의 독립성
설교는 목사의 직분을 맡은 이가 하게 됩니다. 혹 목사가 어떤 이유로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당회의 지도 아래 이웃 교회의 목사를, 혹은 노회나 총회 안에 있는 목사를 초빙하게 됩니다.
설교는 목사의 직분에게 맡겨진 고유사역이기 때문에 꼭 목사를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곧 교회의 항존직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한 직분이 다른 직분을 침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목사가 장로의 직분이나 집사의 직분을 침해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장로가 목사의 직분이나 집사의 직분을 침해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집사가 목사의 직분이나 장로의 직분을 침해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공예배가 아닌 주일 오후에는 당회의 지도 아래 때로는 장로나 강도사나 전도사가 가르칠 수 있습니다. 주일 오후예배는 교회의 공예배 성격이 아닌 교리 학습과 같은 의미의 집회라는 점에서 이것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강도사(혹은 목사 후보생)는 노회와 당회의 지도 아래 목사의 수업을 받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가 속한 당회의 지도 아래에서 교리공부 시간에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혹 당회의 지도 아래, 목사가 출타 중일 경우에 공예배에서 강도사(혹은 목사 후보생)가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배에 대한 이해의 부족입니다. 공예배는 오로지 교회의 표지를 드러내고 교회의 직분이 함께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목사를 통해서 (노회나 총회 소속의 목사를 초청해) 설교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4. 참된 교회의 표지와 직분과 예배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참된 교회는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이 올바르고 정당하게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의 항존직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독립성을 가지고 예배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공예배를 통해서 비로소 참된 교회의 표지가 구현되고 항존직으로서 교회의 직분자들이 독립적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질서를 존중합니다. 이 질서는 교회의 직분 그리고 교회의 표지를 동시에 구현하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 예배만이 교회의 공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의 예배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드러나지 않거나 교회의 삼직이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올바른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첫댓글 저는 연보를 모아 구제및 자비의 사역을 담당하면 되는군요! 역시 교회는 공예배를 통해 참된 교회로 설수 있네요. 교회안에 질서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제 감이 좀 옵니다.
성경 한권이면 충분하다던 칼빈의 말이 생각나네요. 다른 교회가 아닌 말씀의 질서속에세워질 참된 교회를 꿈꾸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