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다(2023) / 김민홍 제6시집(5)
36) 저물녘
'저물녘'이란 제목으로 쓴 시가 몇 편 있지
저물녘에도 돌아오시지 않던
어머니에 대한 詩
아버지는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만 계셨고
타지로 일 나가신 어머니 대신
하루 반 되쯤 팔아 온
보리쌀로 저녁을 지으시던 외할머니
저물녘, 눈이 빠지게
좁은 골목길만 바라보던 소년
언덕배기 외딴집에 스며들던
노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람 쳐다보기 바빴던 청년기를 훌쩍 넘긴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지쳤을 무렵부터이니
타고난 시인이나 예술가는 아닌 셈
지금도 습관처럼 저물녘이면
노을 보다 기다림이 먼저 찾아온다네
딱히 돌아올 사람도 없는데!
37) 접촉 불량
오래된 오디오 스피커가 말썽이다
접촉 불량, 소리가 나왔다, 안 나왔다,
혹은, 소리가 커졌다, 작아지곤 한다
스피커를 바꾸거나 수리해 볼까 하다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라서 그냥 참고
듣는다. 사는 곳이 공동주택이라
소리를 키워 들을 수도 없으므로
세상과의 접촉 불량, 소통 불량은 아예
방법이 없다, 내 손으로 수리할 수도,
새 세상으로 교체할 수도 없으므로
그렇다고 소외에 적응된다는 말은
아니니 문제다, 세상 건너갈 때까지
그럴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난들 이렇게 살고 싶겠어?
39) 짬뽕 한 그릇
전엔 짬뽕을 좋아했지
특히 아주 매운 맛이 강한
짬뽕 국물
위와 목이 약해지면서
멀리하긴 했지만
운동화도 튀기면 먹을만하다는
허접한 농담이
왜 내겐 난해한 은유로 읽힐까
짬뽕 한 그릇에 일만 원을 넘어선 것도
한 번도 가볼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나라
우크라이나 전쟁 탓이라더군
별 입맛이 없어도 한 끼 떼워야
상용하는 약을 먹을 수 있는
극동의 먼 나라 늙어가는 사내의
사소한 한 끼조차 위협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갑자기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내 나라를 무참하게 점령한
이웃 나라가 떠오르더군
39) 반장 선거
담임 시절
학기 초 반장 선거가 있을 때마다
똑똑하고 소신이 있는 아이는 떨어지고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아이가 당선되곤 했다
자신들과 좀 다르거나, 좀 튀면
일종의 거부감이
손익공동체처럼 형성되기 때문이겠지
'그래, 인사가 만사야!'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도 뽑고.
시의원, 구의원도 뽑는다
40) 미아역에서
평소 잘 안 가던 미아역에서
널 기다리고 있었네
근처 수유시장에서 깨강정도 좀 샀지
너에게 주려고
낮 열두 시, 미아역에서 만나
순대국 한 그릇 하자던 일주일 전의 약속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고
너는 오지 않았네
2월, 아직 서늘한 바람과
햇살 몇 점 미아역 입구에
떨어져 있었네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는 너를
어슬렁거리며 기다리다
돌아서려는데 낯선 번호로 부고가 왔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너의 아들이었네
약속장소가 갑자기
아산병원 영안실로 바뀌었네
41) 음악회
- 행위예술가 김석환 아우에게
불러주는 곳마다
삐죽 얼굴을 디미는 이유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노래가 아직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불러보지 못한 노래는
내 속에 그냥 남아서
오늘만큼 늙어가고
나는
허튼소리 같은 노래 몇 곡
부르고 돌아가네,
끝내
부르지 못한 노래 속으로
42) 민망하다
앞산 너머 길음동, 그 너머
성신여대 지나 대학로 지나
낙원악기 상가
내가 종종 악기를 수리하거나
부품을 구입하기 위해 외출하는
동선이다
서울서 사십 년 넘게 살았어도
이 외의 동네는 잘 모른다
가끔 양평이나 양수리로
지인을 만나러 가기도 하지만
그들이 날 만나러 오진 않는다
가더라도 대부분 강가만 어슬렁거리거나
바람 소리만 주머니에 넣고 돌아와
한동안 만지작거린다
태어나서 초중고를 다닌 대전은
한 해에 한두 번 들리지만
고향 같던 친구가 떠난 뒤론
잘 가지지 않고
초중고 동창회도 날 모르니
연락조차 온 적 없다
음악 하는 선배의 카페가 있는
횡성이나
행위예술과 그림을 그리는 후배의
따스함이 배어있는
평택이
요즈음 나의 가장 먼 동선이다
지하철도 4호선 외에는
거의 타 본 적이 없으니
그 외의 노선은 낯설다
맘 편히 전화 걸 곳도
전화 올 곳도 없다
민망하다!
43)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여기에 있다
간혹 그곳에 가기도 하지만
곧바로 돌아온다
그곳은 항상 내겐 낯선 곳
그곳과 여기의 차이는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곳이 궁금해지고
그곳에 가면
금방 여기로 돌아오게 된다
나는 항상 여기에 있다
혹시 그곳에서 연락이 올까
휴대폰은 늘 켜 놓고 있다
나도 때론 그곳에 있고 싶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면
그곳은 증발하고
그곳이 있었다는 흔적만 읽고 온다
만약 내가 그곳과 여기의 차이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쯤
나는 여기도,
그곳에도 없을 것이다
44) 나도 모른다
내 노래가 그대에게 닿기를
서너 곡 중 한 곡이라도
교감할 수 있기를
나는 지금도 원하는 걸까?
평생 음악을 놓지 않았지만
한 번도 음악에 생계를 기대본 적이 없는
나의 한계는 내가 제일 잘 알지
때론 모욕과 멸시
때론 시기와 질투
때론 따돌림과 조롱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
후회는 없지만
늘 리허설도 음향 점검도 없이
올라가는 무대
단 한 번도 내 노래가
내 양에 찬 적은 없었지
내가 아는 건
점점 늙어가는 목소리와
허접하게 꼬이는 손가락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는 것
그래도 나는
여전히 기타를 놓지 못하고 있지
이유는 나도 모른다
45)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비슷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것들
바람이 분다
겨울바람도, 가을바람도 아니고
봄바람, 여름바람도 아닌
바람이 분다
세상이 사이비로 가득 찰 때
바람이 부는 게야
사이비 종교, 사이비 정치, 사이비 경제,
사이비 순대국, 사이비 만두국, 사이비 냉면,
사이비 설렁탕, 사이비 칼국수, 사이비 통닭,
사이비 詩人, 사이비 음악가, 사이비 예술가,
사이비 사랑,
그런데, 사이비를
구태여 구별해서 어쩌자는 거야?
사이비 역사, 사이비 과학, 사이비 철학의
바람이 분다,
어느 시대나 사이비가 창궐했었지
사이비,사이비,사이비
삼박자 바람이 분다.
46) '텅 빈'이란 말을 좋아했지
이유는 잘 몰라, 아마 무언가에서
도피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텅 빈' 말의 공명이
나를 잊게 만들어 주길 바랬을 거야
실패하고 돌아온 젊은 날의
내 골방은 텅 비어있었지
용기가 없어서, 운이 없어서
실연한 경험은 없지만
미리 실연당한 텅 빈 내 골방
겨울이면 어김없이
새마을연탄보일러는 얼어 터졌고
난 연례행사처럼
한 차례 몸살을 앓았지
관절 마디마디가 저리던 밤
머리맡에 물 한 잔 떠다 주는
여자가 있다면
평생 함께 살 거라고 다짐했었지
그런 여자는 없었어
그러니 세상에 난 빚이 없는 셈일까?
'텅 빈'이라는 관형어 뒤에 이어지는
명사는 어떤 초월의 공간 같아
요즘도 습관처럼 체언이 생략된
'텅 빈'이 읊조려지더군
아마 아직도 무언가에서 도망가고 싶은 거겠지?
텅 빈 세상은
오직 내 속에만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