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하는 날
도심 한복판
즐비한 아파트 사이로
오랜 세월 지켜온 둥글 넓적한 야산엔
아침부터 기계 소리 요란하다
동네 어르신들 모여들어
잔칫날인 양 반가워하고
바람에 실려오는 향긋한 풀냄새
마음은 벌써 아득한 시절로 달린다
뉘 집 조상님들이신가
풀 숲 속에서 숨바꼭질 하셨나
파르라니 깎은 머리 마주 보며
하하 허허 껄껄껄 웃으시네.
어느 한센인 이야기
아주 어린 나이에 오빠는 나를 데리고
멀고 먼 역을 거쳐 이곳까지 왔었지
어머니는 나를 위해 밤 새 블라우스를 만들어주셨다
어디서 구했을까
하얀 무명천으로 만든 블라우스
그렇게 아름다운 옷을 본 적이 없었다
나를 위해 만든 세상에 단 한 벌
너무 외롭고 아파 많이도 울었지
마음, 그 마음 하나 둘 곳이 없어
밤 새 안고 뜬눈으로 지세웠지
그리움, 아프면서도 사라질까 겁났었지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나
손과 발이 되어주며 살았던 세월
신은 그 마저도 시샘하였던지
요단강을 건너 데려갔다
인생은, 아무 잘못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짓밟아 버릴때가 있더라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
나에게만 향하는 화살이 아니었다는걸
우린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 소리를 듣기 위해서 내려온
특별한 존재란 걸
너무 늦게 깨달은거야
벚꽃 흐드러진 봄 날
연초록 새싹들이 손을 흔든다
반가워 반가워
세상은 아름다워 아름다워...
단종 비가 (悲歌)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받은 왕위는
믿었던 숙부에게 빼앗기고
천추에 맺힌 한(恨) 가슴 깊이 품고
유배된 땅, 영월 청룡포
삼 면은 강이요
한 면은 험준한 절벽
나룻배 없으면 건널 수 없는
육지속의 작은 섬
두 가지로 나뉜 소나무에 걸터앉아
오열하는 그 모습 하도 슬퍼서
관음송도
하늘 가리고 울었으리
어소향해 허리 굽히고 서 있는
관음송 바라보니
바람결에 흘려온 슬픈 이야기
단종애사 떠올라 애잔하구나
흐르는 눈물로
한탑 한탑 쌓아 올린 망향 탑
오랜 세월 졸인 가슴
까맣게 그을렸구나
비정한 숙부를 향한
원망과 아픔이
선돌을 넘지 못해
긴 세월 굽이굽이 출렁거리네.
고독한 날들
남들 잠든 밤이면 깨어나 일하고
출근하면 한가로이 퇴근한다
텅 빈집 대낮에 홀로 잠들고
뼈마디 쑤시는 세월은 좀먹어간다
빈 방에 홀로 누우면 흐르는 적막
째깍거리는 초침속으로
영원히 묻혀버리는 건 아닌지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들
모두가 떠나버린 뒤
고요가 소름으로 다가와도
어찌하지 못한
마른 낙엽 같은 숨결.
명품 바이올린
로키산맥 해발 삼 천 미터
생명이 살기엔 역부족인
수목한계선
뼛속 스며드는 칼바람 맞으며
생존 위해 무릎 꿇고 자란 나무
수 천번 울부짖으며
마디마디 옹이지고
뒤틀린 가지 허공으로 텅 비워
맑고 맑은 절묘한 선율 득음하여
명품 바이올린으로 태어난다네
우리 인생도 그러하리
고난없이 살아온 사람보다
역경과 아픔
겪어본 사람의 향기가
더 진하고 아름다우리.
김 태경
한국 문인회원
청시 회원
원불교 문인회원
시집 《사슴섬》《윤회의 강 》
시인의 말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벌써? 늘 입에 달린 말이다
무정한 세월은 열심히 흘러간다
모든게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
첫댓글 멀리서도 시를 잊지 않고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