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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쿰부 3 패스, 로왈링「베가님」 스크랩 6.쿰부히말로 들어서다/루크라(2840m)-팍딩(2610m)
베가 추천 0 조회 275 16.09.06 21:4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긴장해서인 지 늦게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가 채 되지않아 눈이 떠졌다.

여유있는 준비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갔지만, 어째 와 있어야 할 쿡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할수 없이 우리끼리 출발을 했다.

아무래도 택시가 없어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것 같다고 하신다.

어째 이런 일이....ㅠㅠ

 

 

 

 

공항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다.

혹시나 공항으로 직접왔나 두리번 거렸지만 쿡은 눈에 띄지 않았다.

더이상 지체할 수도 없다.

서둘러 짐의 무게를 재고 수속을 밟았다.

식자재와 장비등을 포함 무려 오버챠지가 책정된 무게는 110kg이나 되었다.

헉!!

하긴 무거운것은 배낭에 다 집어넣고도 카고백 무게가 20kg이었으니까...

거기다 식자재와 버너등 식기류, 카투만두에서 구입한 장비들까지....@#$%

당연히 예상되었던 오버챠지다.

 

셔틀버스를 타고 비행기 승차장으로 갔다.

오~마이 갓!!

세상에 저 비행기를 타고 간단 말이야??

 

 

 

 

 

 

 

말로만 듣던 14인승 비행기...

그나마도 너무나 낡아서 과연 우리를 안전하게 루크라까지 태워다 줄까...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제서야 야박하리 만치 왜 그렇게 철저하게 짐의 무게를 체크해야 했는 지 이해가 갔다.

이렇게 해도 1년에 1건 이상은 추락사고가 난다하니....ㅠㅠ

만약에 짐을 맘대로 싣게 했다면 정말로 비행기를 안타고 '지리'에서부터 걸어가는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나마도 우린 수속을 너무 늦게 밟는 바람에 이미 비행기에 실을 짐의 용량이 다 차서 짐을 함께 싣고 가지도 못하게 됐다.

그렇다고 다음 비행기로 우리 짐이 그것도 한꺼번에 온다는 보장도 없다.

최악의 경우는 짐이 오늘 다 안올수도 있다는것....ㅠㅠ

 

쿡도 함께 가지 못하지, 짐도 우리랑 같이 싣고 가지도 못하지.....

그야말로 홍콩 공항이 태풍으로 폐쇄되어 말레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서 1박을 하고 거기서 카투만두로 가야한다는 소릴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처음 들을때와 똑같이 착잡한 심경이었다.

대장님 얼굴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와는 달리 수심으로 가득하셨다.

 

 

 

 

카투만두의 날씨가 흐려서 뭐 보일까싶었어도 재빨리 올라 타 뷰포인트라는 왼쪽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행기 내부는 겉에서 본것보다도 훨씬 더 허접스러웠다.

겨우 앉을 수 있는 낡은 자리....

완전 수동으로 조종하는것 같은...훤히 보이는 조종석...

 

그래도 들?으로 가득한 승객들은 벌써부터 카메라를 꺼내들고 뿌연 창으로 들어오는 조그만 비행장과 아날로그식 처럼 보이는 조종석을 찍고 난리법석이다.

ㅎㅎ

하긴 언제 이렇듯 문도 없는 조종석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순간 나도 카메라를 꺼내들고 싶긴했지만 구름이 가득 낀 밖의 날씨에 실망스러워 그냥 참기로 했다.

 

이륙은 제대로 할까...싶었던 비행기는 날렵하게 떠 올랐다.

이내 카투만두의 정경이 한 눈아래로 펼쳐졌다.

신기하게도 먼지 투성이인 카투만두의 풍광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니,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녹음 짙은 청정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보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농경지와 모형처럼 보이는 가옥들은 작은 탄성 마저 일케했다.

와우~~

 

조금 더 지나자 이젠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의 구릉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환상적이고도 장엄함 마저 느끼게 하는 다랑이 밭의 향연이 펼쳐졌다.

거기다 카투만두의 하늘을 메웠던 구름들이 머얼리 높이 솟은 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그야말로 매혹적인 향연을 펼쳐주었다.

 

급기야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뿌연 창으로 찍히든 찍히지 않든 그건 상관없었다.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때까지만해도 히말라야의 풍광에 취해서 과연 우리 비행기가 루크라 공항에 잘 착륙을 할것인가는 생각조차 못했다.

 

 

 

 

 

 

 

 

 

 

거대한 히말라야 봉우리를 지나더니 산 꼭대기에 그림같은 마을이 펼쳐졌다.

와아~ 저긴 또 어딘데 저렇게 아름다워~

채 그 말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그곳이 악명 높은 루크라 공항이란걸 알아차렸다.

조종석에서 바삐 조종대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천정에 붙어있는 기어같은것을 잡고 당기고...

그야말로 완전 아날로그 시대인것 같은 느낌....

 

시선이 분주했다.

조종석으로.... 그림같은 풍광의 창밖으로....

 

드디어 착륙 성공....

일제히 터진 박수소리가 작은 기내안을 가득 메웠다.

 

쏜살같이 승객들은 내렸다.

경찰들이 급하게 승객을 비행장 밖으로 인도했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을 다니는 비행기 회사가 몇개가 되는 지 연신 비행기가 착륙하고,  이내 비행기는 또 이륙하였기 때문이다.

 

빨리 내치는 경찰들 사이로 잽싸게 몇컷을 카메라에 담고 뒤로 돌아선 순간

또 한번 나를 놀래키던 장면....

 

헐~~

바로 철책 담벼락에 빼곡히 달라붙어 있는 일을 구하는 포터들이었다.

뭐라고 표현할까....

엑소더스??

마치 어디로 탈출하려 안간힘 하는것 같은??

 

 

 

 

 

포터들을 뒤로 하고 우린 공항 바로 옆에 있는 히말라야 롯지로 올라갔다.

아침도 먹을겸 이곳에서 쿡과 짐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함께 할 포터와 키친보이들까지...

 

롯지의 다이닝 룸은 아주 정갈하니 근사했다.

아침을 커피와 토스트로 간단히 먹고 나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위해

길게 연결되어 있는 의자에 누웠다.

마침 우리외에 손님도 없으니 이래 저래 잘 되었다 싶다.

 

깜빡 깊은 잠에 들었었나??

온 몸에 느껴지는 한기에 그만 잠에서 깻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아직 쿡과 우리의 짐 소식은 잠잠하다.

 

그러던 차에 대장님이 만면에 미소를 담고 들어오셨다.

다행히 가장 우려하던 우리의 모든 짐이 한꺼번에 왔다는 것이었다.

오오~~~

그러나 아직 쿡이 오지 않는다.

과연 뒷 비행기에 좌석이 있어서 올 수는 있는건가~

그나마도 다행인 것이 루크라 공항 날씨가 좋아서 연신 비행기다 착륙하고 이륙하는 것이었다.

 

아!! 이때다.

다이닝룸 문이 열리더니, 보조 쿡인 왕다가 만면에 미소를 띄며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모험담을 얘기하듯 뭐라 뭐라 네팔어로 대장님께 한참을 설명한다.

비행기 좌석이 하나 나서 쿡인 덴쟈대신 보조 쿡인 왕다가 먼저 온것이고 덴쟈는 다음 비행기로 올것이란 거였다.

 

 

 

왕다가 오니, 미리 계약된 포터와 키친보이들이 찾아들었다.

아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들이  질 식자재거리들을 나눠 담는 사이 난 밖으로 나가 멋진 루크라 공항 주변을 걸었다.

여전히 날씨는 좋아 마치도 LCD화면을 보듯 맑고 선명한 주변 풍광인데, 하늘엔 구름이 가득 몰려 들어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탄 첫비행기 착륙후 정신없이 드나들던 비행기가 딱 멈추었다.

아직 쿡이 안왔는데....불안한 조짐이 든다.

 

그런데 왠 사람들이 공항 철책에 다닥 다닥 붙어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좀 이상한 생각이 든다.

가까이 다가가서 무슨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공항 옆에 있는 헬기 착륙장에 헬기가 추락을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사람은 죽지않았는데, 급히 다른 헬기가 환자를 수송중해 가는 중이라고....

세상에 내가 잠시 잠들어 있던 사이에 헬기 추락이라니...

그 잠깐 사이에 하늘에 구름은 잔뜩 끼고....

정말 10시반만 되어도 구름이 몰려들어 착륙이 불확실하다더니....

참으로 신기한 히말라야의 기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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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의 쿡인 덴쟈도 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워낙에 걸음이 빠르기 때문에 내일 올 수만 있다면 우리를 따라잡는건 금방이니 걱정할 필요는 크게 없었다.

우린 점심을 넉넉히 먹은 뒤 드디어 대망의 트래킹을 시작했다.

 

 

 

 

<첫번째 관문-체크 포인트를 거치고 있다>

쿰부히말의 시작점인 루크라는 안나푸르나 시작점이었던 '비레탄티' 와는 상당히 느낌이 달랐다.

물론 이곳은 루크라 공항이 워낙 날씨가 불투명해서 하염없이 이곳에 머물며 비행기가 뜨길 바라거나 우리처럼 미처 오지 못한 짐을 기다려야 하기때문에

롯지가 잘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렇겠지~

깨끗한 돌길 옆으로 정갈하게 지어진 롯지에서 트래킹의 출발이 시작되니...

암튼 정갈한 건물들과 쇼핑센타....심지어 까페-스타벅스까지 있으니....

놀라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진짜 스타벅스는 아니었고, 소위 짝퉁 스타벅스였다.ㅋㅋ

모양과 색깔, 글씨체까지 같으나 가운데 그림이 여인대신 히말라야 산이 있고, 둥그런 테의 글씨도 루크라가 써있다. ㅋㅋ

글쎄...커피맛은 어떨까...한 잔 마시고 출발할걸 그랬나~

당연히 맛이 최고일거야~

대망의 쿰부히말에 첫발을 내 딛는 감동스런 순간에 뭔들 생애 최고의 맛이 아니겠어~ ㅋㅋ

 

 

 

ㅋㅋ..

이거 뭐할때 입는 옷일까....

평상복인가??

 

 

 

 

 

 

 

 

 

본격적인 트래킹이 시작되는 지점의 파상 라무 세르파의 기념비이다.

문 위 동상의 여인- 파상 라무( PASANG LHAMU) 는 네팔 여성중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세르파 다.

3년 연속 도전했으나 매번 정상을 앞두고 좌절을 겪은 후, 1993년 4월 22일, 드디어 네 번째 도전 끝에 정상에 네팔국기를 꽂았다.
그러나, 결국 정상 등정을 마친 후 안타깝게도 하산 길에 그녀는 사망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망후 네팔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예부터 셰르파족은 희생정신과 용감성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불리어왔다

그들 세르파족의 고향 -쿰부 히말라야...

비단 이곳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첫발을 내딛는 모든 이가 용기있는 이 여성을 추모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왕 '파상라무'( PASANG LHAMU)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좀더 그녀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까??

 

 

히말라야 자락에 솔루와 쿰부라 불리는 마을이 형성된 지 몇 백 년동안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고산족을 셰르파족이라 부른다.

 

예부터 셰르파족은 희생정신과 용감성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불리어왔다. 이들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 지척에 있었음에도 몰랐다가 1852년 영국인에 의해 처음 측량이 이루어지며 알게 되었다. 측량대장의 이름을 빌어 에베레스트라 이름 붙은 세계 최고봉을 이들은 ‘사가르마타’ 라고 부른다.
셰르파족은 히말라야를 찾아온 외국인들을 그들이 원하는 지역까지 안내하거나, 여태껏 자신들이 신으로 여겨왔던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하나둘씩 정복을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셰르파족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 셰르파 남자들의 역할은 고산등반 가이드로서 외국인 원정대에 고용되어 일정기간 등반을 한 대가로 주 수입원을 삼는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이 집을 장기간 비울 때 엄마로서 자식들을 돌보는 일과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간의 고정관념을 뒤집은 여성이 있다. 여성 셰르파족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녀로 인해 한동

 

 

안 네팔 전체에 파문이 일었다. 남편과 3명의 자녀를 둔 파상 라무(Pasang Lhamu), 그녀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팔인들조차도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과거 세 차례 네팔 여성이 도전한 사례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후 네팔 국민영웅 돼

필자는 파상 라무 셰르파를 우연한 기회에 만난 적이 있는데, 첫인상은 차분하다는 것이었다. 네팔에는 외국인들에게 전문적으로 집을 소개하는 브로커들이 있다. 이들은 집 계약이 성사되면 집주인에게 한 달치의 집값을 소개비 명목으로 받는다. 나는 이사하기 위해 그런 브로커에게 적당한 집 소개를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필자가 “나도 산이 좋아 네팔에 오게 됐다“고 소개하자 자기도 네팔 여성 산악인임을 강조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셰르파족은 외국 산악인들의 등반 안내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 아쉽다”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집안을 둘러보고 있는 필자에게 3층에 있는 큰 방으로 안내했다. 방 벽에는 에베레스트 앞에 그녀가 셰르파 복장을 하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에베레스트를 향한 그녀의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집이 길 옆이라 소음과 매연이 심해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헤어질 때 그녀가 한 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네팔 여성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와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93년 4월22일 라무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세 번 실패에 이은 네 번째 도전에 올린 개가였다. 그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자 네팔 국민들은 ‘국가 영웅(Rastriya Bibhuti)’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라무가 하산 도중 사다 셰르파와 남봉 근처에서 비박중’이라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져왔다. 불길한 소식은 얼마 후 불행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시신은 실종된 지 18일만에 같이 등반했던 셰르파들이 발견했다.
당시 상황은 매우 참혹했던 것 같다. 그녀는 8,000m 고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고자 조금이라도 더 숨을 곳을 찾기라도 하듯 남봉 근처의 바위틈 속에 상반신을 묻은 자세로 발견됐다. 함께 비박했을 사다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셰르파들은 수색을 포기하고 파상 라무의 시신만 베이스캠프로 옮겼다. 당시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가 현지에 있었는데, 우리 원정대가 비협조적이었다는 엉뚱한 기사가 네팔 일간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파상 라무가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대한 것은 1990년 프랑스원정대 대원으로 참가했을 때다. 당시 프랑스 대원은 8,000m에 도달하기도 전에 고산병으로 인해 등정을 포기해 라무 혼자만 등정을 시도하게 됐다. 그러나 프랑스팀 리더는 대원이기는 하나 네팔 셰르파 여성 혼자만 등정에 나서는 일이 자존심이 용납치 않았는지 그녀에게 하산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다음해인 1991년 네팔에선 처음으로 셰르파 여성이 대장인 에베레스트등반대가 조직됐다. 물론 대장은 라무였다. 그러나 라무는 이 두번째 등반에서 정상을 불과 100m 남겨둔 8,750m 지점에서 앞을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악화돼 돌아서야 했다. 그녀는 이 때 셰르파 리더인 소남 치링 사다와 함께 남봉까지 내려와 비박한 후 다음날 하산했다.

이듬해인 1992년 세번째로 등반대를 꾸린 그녀는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1년 전 소남 치링 사다와 비박했던 지점에서 다시금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듯 세 해 연속된 시도에서 실패한 그녀는 1993년 네번째 시도에 나섰고, 그토록 갈망하던 에베레스트 정상에 4월22일 오후 2시15분 네팔 국기를 꽂았다.
그러나 정상에서 하산하던 중 사다 소남 치링이 8,750m를 지나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파상 라무는 2차 원정 때 비박했던 지점인 남봉에서 소남 치링과 다른 1명의 셰르파와 더불어 비박에 들어갔다. 한 번 살아서 내려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다음날인 4월23일 동이 트자 셰르파 1명이 C4로 내려왔고, 마침 한국 여성원정대 대원과 셰르파들이 등정을 위해 C4에 올라왔다. 하지만 한국 여성대가 도착한 시각은 이미 오후 3시로, 구조에 나서기는 늦은 시각이었다. 게다가 C3에서 올라가느라 지친 여성대가 곧바로 700m의 고도차가 나는 남봉까지 구조에 나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날씨가 나빠지고 있었다.
한국 여성대원 두 사람은 8,000m 고소는 처음이었다. 때문에 다음날 한국 여성대 셰르파들과 동국대팀 셰르파, 네팔팀 셰르파들이 구조에 나섰으나 강풍과 분설로 인해 8,400m 지점에서 포기했다고 한다.

 

무전기도 제대로 못 갖추고 등반

이렇게 해서 라무는 죽음을 맞고 말았다. 아니, 첫날 밤 이미 그녀는 숨이 다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여성을 포함, 수많은 사람의 등정을 용납했던 에베레스트는 자신의 정기를 받아 태어나고 자란 파상 라무만은 끝내 자기 품 속에 품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그녀는 만류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뿌리치고 원정길에 올랐다고 한다.
필자가 분개하는 것은 네팔 관광성의 처사다. 같은 시기에 등반했던 인도 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는 입산료를 면제해 주면서 같은 국민인 네팔 여성 등반대에는 입산료 전액을 다 납부하게 했다. 이들의 처사가 훗날 문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죽은 라무가 다시 살아서 돌아올 리 없다.
입산료 전액을 내려다보니 등반경비가 태부족이었고 결국 무전기조차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남편 소남 셰르파의 울부짖던 모습이 선하다.
18일이 지나서 그녀의 시신은 남봉 근처에서 발견됐다. 3회에 걸쳐 함께 등반한 동료 소남 치링을 버리지 않고 함께 비박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동료의식은 모든 셰르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녀의 시신은 카트만두로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내년 4월이면 파상 라무가 죽은 지 10년이 되는 해다. 남편인 소남 셰르파는 그녀가 죽은지 2년 뒤 9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해 탐셰르쿠라는 트레킹회사와 예티라는 항공사를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녀를 자신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C2에서 라무와 함께 등반하려고 떠날 채비를 하자 라무는 “우리 부부 중 한 명은 살아야 아이들을 돌봐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나는 등반하기 위해 여기에 왔으니만큼 등반을 해야 하지만 당신은 아니니 남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C2를 떠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날 아내가 한 말이 유언이었던 것 같다는 소남 셰르파는 그 날 이후 아내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무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월간산 [398호] 2002.12

 

 

 

 

 

 

파상 라무의 동상으로 조금은 숙연해진 맘으로 힘찬 발길을 내딛는다.

트래킹 짐이 아닌 일반 가게의 짐을 나르던 포터들이 그 무게의 힘겨움을 잠시 내려놓고 쉬고 있다.

여늬 트래킹 짐 보다 그 무게감이 훨씬 더 느껴진다.

알고보니, 무게에 따라 요금이 책정되다 보니, 좀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 자기가 질 수 있는 최고치의 무게를 지고 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심지어 70kg의 무게를 지고 간다고 했다.

덩치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았으나 알고보니, 고기라서 그 무게감이 엄청났던 것....

 

와우~

저긴 또....

무거운 합판을 지고 가네~

정말 안나푸르나 갈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광이야~

얼마나 무거울까....

덩치까지 커서 정말 자칫하다간 압사당할 것 같기도 하다. ㅠㅠ

 

오호~

그런데 일반 트래커들의 짐을 지는 포터들과는 또 상당히 다른 모습이 있네~

무거운 무게감을 지탱하기 위해 진 지팡이가 휴식할때는 무거운 짐의 버팀을 해주는 버팀목이 되는구만~

오오~

정말 굿 아이디어야~

 

 

 

 

 

아!!

꽃으로 둘러쌓인 롯지들의 풍광이 너무  이쁘네~

해발 2800m 히말라야인데도 우리네 들에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피어있어.

그러고 보니, 길섶 자동차 배기가스가 종일 품어내는 곳에서도 생생하게 피어있는걸 보니 코스모스의 생명력이 매우 강한것 같아~

너무나 청명한 산군아래 사방이 꽃으로  피어있는 이 길을 걷고 있노라니, 절로 노랫가락이 흥얼거려진다.

 

 

 

 

 

 

 

 

 

'옴마니 반메 훔' 이란 경전을 새긴 라마스톤을 삼단을 쌓아 지붕 석으로 돌을 얹어  마무리 하고,

'옴마니 반메 훔' 을 새긴 대형 마니차를 세워 지나는 이로 하여금 기도하게끔 만들어 놓은 곳....

종교에 상관없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곳이다.

 

그럼 마니차를 힘껏 돌리며 기도를 하고 가야지~

그 어느때 보다도 기도가 절실할 때 이잖아~

 

마니차는 돌릴때 마다 종소리가 나며, 그 종소리로 인해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불가의 진리를 터득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헐!!

그런 줄도 모르고 진리도 마다한 채 그저 내 욕심으로 가득한 기도만을 또 구했다는...ㅠㅠ

 

 

 

 

'옴마니 반메 훔'의 '옴'은 시작과 과정과 끝을 의미하는 가장 근본적인 우주를 뜻하고,

'마니'는 진주 보석이라는 뜻으로 지혜를 의미하며,

'반메'는 축생의 위치에 윤회하는 어려움이 제거되어 고통에서 벗어나는 자비를 뜻하고

'훔'은 모든 진언의 성스러운 소리를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다.

 

즉 지혜는 불이의 일체를 이루고,

불가의 설법토대로 부정한 마음을 바꾸라는 의미다.

심오한 깊은 뜻이 담긴 '옴마니 반메 훔'을 네팔 사람들은 입송으로 붙고 산다.

 

 

 

 

 

 

얼마 가지않아 또 '옴마니 반메 훔'이 적혀있는 라마스톤 제단이 보인다.

네팔인들은 이렇듯 늘 불교의 진리를 오며 가며 걸으면서 깨닫는가 보다.

세상의 온갖 물질의 유혹들과는 멀리 떨어져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칠 수 밖에 없는 이 거대한 히말라야 대자연속에서....

그래서 이렇듯 어려움속에 살면서도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는 경이로운 삶의 여유를 갖게 되나 보다.

마니차를 돌릴때 마다 멀리 멀리 그 진리가 퍼져 나가서....

 

 

 

이제는 조금은 현대식인 롯지의 건물과는 다른 티벳식 창이 돋보이는 집들이 보인다.

예쁘게 그림을 그리고 창을 한껏 장식하는 티벳인들.....

세련된 현대식 건축물 보다도 순수한 이들의 삶의 모습이 느껴져 훨씬 눈길이 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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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6.09.06 22:00

    첫댓글 블로그 글을 스크랩했더니, 이곳 화면이 작아서 사진 옆으로 붙여 쓴 글들이 매우 읽기가 어렵네요.
    원문보기를 클릭해서 보면 제 블로그 글의 큰 화면을 볼 수 있습니다.

  • 16.09.07 09:52

    그렇군요~ 근데 사진옆에 있는 작은 글들이 오히려 정겹고
    집중(?)을 하게 되는 맛도 있습니다 좋은데요^^

    군대에서 행군하다가 군장(베낭)을 맨채 바닥에 앉아 잠시 쉴때
    철모를 벗어 군장과 땅사이의 공간에 놓으면 버팀이 됐던 기억이 저 포터들을 지팡이에서 느껴집니다
    ㅎㅎ 사람의 꽤란 비슷하군요

    자연도 멋있지만 힘들면서도 활짝 웃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들 잘 보았습니다^^

  • 작성자 16.09.07 22:20

    하아~
    군대의 추억이 히말라야를 걸으면서도 떠올려지는군요~
    신기하게도 눈에 선해지는데요~ㅎㅎ

    히말라야가 두려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너무나 이쁘고 평화로운 곳으로 받아 들여졌지요.
    특히 초반 여정은 그랬어요~
    복이 많게도 우리의 여행 컨셉도 그랬구요~
    히말라야인데 말이죠~
    때마침 홍성대 대장이 이끈 로체원정대팀을 만났었어요.로부제에 잠시 내려왔던 대장님을 뵙고 담날 베이스캠프를 찾아갔어요. 그때 말씀마다 우리의 여유로운 여정에 '얼마나 좋으냐고...' 했던 생각이 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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