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 사일동(四一洞)의 벗들
조장빈 / 산악문화연구소
사일동도(四一洞圖)
〈사일동도(四一洞圖)〉는 권섭(權燮)이 북악십경(北岳十景)의 하나로 설정한 사일동(四一洞)을 그의 손자 권신응(權信應)이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이 수록된 《옥소북악십경(玉所北岳十景)》은 8폭짜리 화첩으로,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바 있다.
그림의 산봉우리에 백악과 동(洞)의 입구에 청람대(靑嵐臺)가 표기되어 있는데, 청람대(青嵐臺)는 백악의 천석명(泉石名)이 아니라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본가를 뜻한다. 그는 외직을 전전하다 강원도 화천의 곡운(谷雲)에 은거했고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자 회양부사(淮陽府使)로 부임한 후 1682년(숙종 8년) 임기를 마치고 한양 장의동(藏義洞)에 청람대를 지었다.
신정(申晸)은 「청람정사 상량문(靑嵐精舍上樑文)」에서 그가 화음동 정사로부터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와 보내온 편지에 “백악산 서쪽 줄기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높직하여 전망이 탁 트인 것이 집을 짓거나 누대를 세울 만 하니 이제 막 작은 집을 하나 짓고 그 이름을 청람대라 하였네.”라며 곁에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가 있고, 서로는 백운동과 근접하였으며 북으로는 백악산의 작은 언덕이 집 뒤 주봉을 이루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창의문으로 오르는 자하동의 우측 계곡으로, 지금의 청운동 청운벽산빌리지 단지 내 남쪽을 말한다.
김수증은 이곳을 사랑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청평(清平)을 읊은 '청람은 자취 없어 뜬 영화 보내네[青嵐無跡遣浮榮]'라는 시구에서 취하여 곡운의 곡운정사(谷雲精舍) 뒷산을 청람(青嵐)으로 개명하고, 다시 주돈이(周敦頤)의 뜻을 취해 서울집을 청람대라 명명했다.
창의문으로 오르는 청운벽산빌리지 길에서 돌아본 자하동(위). 길이 우측으로 꺾이는 부분의 좌측이 사일동 입구다. 벽과 지붕색이 ‘붉은 노을(紫霞)’을 대신했다. 아래 좌측: 인왕산 자락에서 본 사일동 계곡(사진의 원). 좌측 낮은 산봉우리 끝자락이 창의문이다. 아래 중앙: 자하동 갈림길이다. 아래 우측: 사진의 우측이 청송당지와 인접한 지역의 가옥이며 중앙의 산봉우리가 백악이다. 좌측 가옥들은 빌라 단지 남쪽면과 닿아 있다. 동(洞)의 물길은 빌라 단지 남쪽지역을 흘러내린다.
권섭은 노론 명문가의 후손으로, 14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한 이후 백부 권상하(權尙夏)에게 의탁하며 학문에 전념하였고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에게 수학하였다. 이 무렵 평생지기로 송강 정철의 5세손인 정용하(鄭龍河)와 교류하였으나 그는 32세에 처사로 이른 생을 마쳤다.
권섭이 설정한 북악십경(北岳十景)은 북악과 인왕산 일대의 명승으로 사일동은 정용하의 집 맞은편인 백악의 작은 계곡이다. 이병성은 「제이인동심편후 (題二人同心篇後)」에서 정용하에 대해 “평소 함께 어울려 놀았던 자취가 글로 나타난 것은 겨우 《사일동기(四一洞記)》와 빗속에서 지은 시 몇 편뿐이다.〔平素從遊之跡。發見於文字者。只四一洞記。雨中詩數篇而已。〕”라고 하여, 권섭과 정용하, 이병성 그리고 이병성의 형인 이병연이 함께한 것으로 보이는 사일동 유람 후에 기문을 썼고 언제고 권섭이 권신응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 사일동도다. 그는 권섭과 정용하와의 우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가 북동(北洞)에 온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고인이 된 친구 정재문(鄭載文)을 만나게 되었다. 이따금 그와 함께 마을의 선비와 벗들에 대해 논평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재문은 늘 권조원(權調元, 권섭)의 문장과 품행을 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나 또한 조원을 알게 되었는데, 조원이 재문을 칭찬하고 말하는 것 역시 똑같았다. 북동 마을에는 본래 선비와 벗들이 많아 서로 교유하고 왕래함이 수풀처럼 무성하고 성했다. 그러나 유독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허여(許與)함이 깊었다. 이후 2년 뒤에 재문이 죽으니 조원의 슬픔이 극심했다. 조원은 이미 상복(素帶)을 갖춰 입고 마을 사람들의 조문을 받았으며, 그의 묘소를 마련해 장례를 치러주고 남겨진 처자식을 어루만지고 돌보아 주었다.”
정용하 사후 권섭은 ‘무명옹(無名翁)’이라 호를 쓸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으며 이병성은 그들의 교유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삶과 죽음을 초월한 언약(死生之契)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정용하와 ‘死生之契’의 우정을 나눈 권섭은 1750년경에 제작한 《기회첩(寄懷帖)》 발문인 「題寄懷帖」에서 “나에게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한 사람이 있어서 도의(道義)로써 뜻이 맞았는데,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슬픈 마음 금할 길 없어 '유영강토지평석(游泳講討之平昔)'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소서(小序)와 소율(小律)이 있다.”고 하여 요절한 평생지기인 벗 정용하를 그리며 그의 누정과 청풍계(清楓溪)에서 공부하며 노닐던 <악록강토(岳麓講討)>, 〈풍계유영(楓溪游泳)〉 그리고 이병성도 함께한 도봉서원 유람을 그린 <쌍시래왕(双詩來往)>과 〈불문공음(不聞跫音)〉 4편의 그림(권신응 작)을 남겼다.
악록강토(岳麓講討) / 풍계유영(楓溪游泳)
악록강토의 누정은 정용하의 안경당(安慶堂)이고
풍계유영의 장소는 김상용(金尙容)의 청풍계 태고정(太古亭)이다.
권섭은 그림의 현장이 자신의 풍정이 담긴 곳임을 후세가 알아주기를 바랐다지만, 세간에는 그가 실경산수에 관심을 갖게 된 데 큰 영향을 주었던 벗의 인왕산 그림을 두고 ‘조선의 브로맨스’라고 둘러대는 말재주에만 눈길이 가 있다. 정작 그의 손자 권신응이 그린 권섭과 정용하의 금란(金蘭) 같은 교우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을 알고, 그 현장을 찾는 이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거친 그림이고 흔적도 없는 사일동을 짐작하기 어려운 탓도 있겠다. 사일동기를 보지 못했고 제화시 번역이 안 되었지만, 지난달 동령폭 유산기를 들고 청풍계 입구를 출발하여 사일동을 거쳐 창의문을 오르며, 문득 이 둘의 우정이 담긴 그림과 장소를 언급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주석]
1. 권섭(權燮, 1671~175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조원(調元), 호는 옥소(玉所) · 백취옹(百趣翁) · 무명옹(無名翁) · 천남거사(泉南居士).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 노론 명문가의 후손으로 일생을 전국 방방곡곡 명승지를 찾아 탐승(探勝) 여행을 하며 보고 겪은 바를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2.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다. 김상헌의 손자이자 김광찬(金光燦)의 장남(長男)으로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외직을 전전하다 은자의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
3. 신정(申晸, 1628~1687), 호는 분애(汾厓)),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이민서(李敏敍), 민유증(閔維重), 김수증(金壽增) 등과 교유하였다.
4. 화음동정사(華川華陰洞精舍)는 조선 현종 때의 문신·학자인 김수증(金壽增)이 1689년 기사환국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 화악산(華嶽山) 북쪽 절경을 이룬 계곡을 이용하여 사(舍)·암(庵)·정(亭)·대(臺) 등을 짓고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하던 곳이다. 강원도 기념물 제63호.
5. 청송당(聽松堂):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이 공부하던 서재의 이름으로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업고등학교 내에 있었다.
6. 고전번역DB 『문곡집(文谷集)』에 〈큰형님과 작은형님을 모시고 청람대에 모였다가 성완의 시를 차운하다〔陪伯氏仲氏會靑嵐臺 次成琬韻〕〉에서 “봄꽃 모두 흩날려 푸른 숲 이룸에 / 春花飛盡綠成林, 암대의 열 이랑 그늘을 앉아서 사랑하노라 / 坐愛巖臺十畝陰, 하늘 밖 푸른 봉우리로 화악산 솟았고 / 天外碧峯華岳聳. 버들 가 그윽한 골짜기에 백운산 깊은데 / 柳邊幽洞白雲深, 지팡이 소리 읊은 사옹의 시구 누가 이을까 / 筇音孰繼思翁句, 솔바람에 청로의 마음 오히려 생각나누나 / 松籟猶懷聽老心, 한가한 날 서로 만남이 참된 해후니 / 暇日逢迎眞邂逅, 장단구로 화답해도 좋을시고 / 不妨相和短長吟”고 번역하였고 각주에 “[주C-001] 청람대(靑嵐臺) : 필운대 부근에 있던 누대, [주D-002] 화악산(華岳山) : 원문의 ‘화악(華岳)’은 강원도 춘천에 소재한 화악산, [주D-003] 백운산(白雲山) : 경기도 영평현의 백운산, [주D-004]지팡이 …… 시구 : 원문의 ‘사옹(思翁)’은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가리키는데, 그가 지은 〈절에서 자다〔宿僧舍〕〉”고 하였는데, 이는 북악의 청람대를 화악의 별서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주C-001] 청람대(靑嵐臺)는 백악의 자하동 입구 우측으로 청송당과 이웃한 자리이며, [주D-002] 화악산(華岳山)의 화악은 삼각산의 이칭이며, [주D-003] 백운산(白雲山)의 백운은 인왕산백운동을 말하고 [주D-004] 시의 현장 또한 인왕산 백운동으로 운백(雲伯) 조준룡(曺俊龍)의 초당(草堂)을 방문한 시가 〈방조운백(訪曺雲伯)〉이다.
7. 권상하(權尙夏, 1641~1721) 기호 성리학계의 대표적인 학자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다.
8. 정용하(鄭龍河, 1671~1702)로 자는 재문(載文),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일찍이 숙부인 장암(丈巖) 정호(鄭澔)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리학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권섭과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다.
9. 이병성(李秉成, 1675~1735) 호는 순암(順庵), 형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고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참고]
1.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2. 윤진영, 玉所 權燮의 소장 화첩과 權信應의 회화, 藏書閣(제20집),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첫댓글 자료 잘 감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