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약속
갈라디아서 3:13-18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여러분, 혹시 오래된 등기문서나 땅문서를 서랍 깊숙이 보관해 두신 적 있으십니까.
세월이 지나 종이는 누렇게 바래고 도장은 흐릿해져도, 그 문서 자체는 여전히 법적인 효력을 갖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사람이 바뀌어도, 정식으로 확정된 문서는 누구도 함부로 찢거나 고쳐 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하나의 문서, 그러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확정하신 약속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서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여기 "저주"라는 말이 낯설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신명기 27장의 마지막 저주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완벽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저주를 피하는데, 우리 중 누가 그렇게 살았습니까.
새벽마다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봉사를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이 정도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겠지" 하는 계산이 스멀스멀 올라오지 않으십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은근히 하나의 법으로 변질될 때가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마치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내는 상급처럼 여기는 태도입니다.
십일조와 기도와 봉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조건"으로 삼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못 지키면 죄책감에 눌리고, 지켰다 싶으면 은근히 교만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저주의 논리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놀라운 반전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신명기 21장은 나무에 달린 시체를 저주받은 것으로 규정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그 저주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헬라어로 "속량하셨다"는 단어는 원래 노예 시장에서 값을 치르고 사람을 사서 자유롭게 하는 장면에서 쓰이던 말입니다.
우리가 저주 아래 팔려 있던 존재였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정확히 교환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그분이 받으시고, 그분이 누리시던 복을 우리에게 넘겨주십니다.
14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무언가를 더 해서 복을 받아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지셨기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흘러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은혜의 실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던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먼저 아들을 보내어 대신 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의 정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언젠가 취소될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바울은 15절부터 18절까지 아주 흥미로운 논증을 펼칩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정식으로 작성한 유언장도 함부로 고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여러 자손들"이 아니라 "한 자손", 곧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씀의 논리를 단순히 문법 규칙 하나로만 이해하기보다는,
바울이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실체에 비추어 옛 약속을 다시 읽어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고,
그 약속이 성취된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 약속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요.
바울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폐기하지 못하나니 그리하면 약속은 파기하리라."
언약이 먼저이고 율법은 나중입니다.
율법이 언약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18절 말씀대로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이기 때문입니다.
유업, 곧 우리가 받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은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순전한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불변성입니다.
언약은 사람이 흔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는 날에도, 여러분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그 언약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을 지키시는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붙들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의 오늘이 우리의 노력으로 그 언약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약속 위에서 반응하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부터 시작해봅시다.
오늘 하루, 여러분이 신앙생활 중 은근히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알아주시겠지" 하고 계산하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한 가지만 찾아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이번 주에는, 기도 시간에 요청과 계획을 나열하기 전에 먼저
"주님, 이 약속이 저를 향해 이미 확정되어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십시오.
그리고 이번 달에는, 여러분이 감당하고 있는 봉사나 헌신 중 하나를 택해서,
그것을 하는 이유가 인정받기 위함인지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인지 스스로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마음의 자리를 바꾸어 보십시오.
우리는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저주의 자리에 대신 서 주셨고,
그 약속은 사람이 손댈 수 없이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흔들림이 그 약속을 흔들지 못합니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우리의 견고함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그 약속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