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여섯
참선과 중도
말한이 활성 | 엮은이 김용호
일러두기
1990년 11월 10일 부산<고요한소리>, 1993년 10월 31일 서울 <고요한소리>, 2001년 3월 31일 남원 역경원에서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김용호가 엮어 정리하였다.
▶ 차 례
참선과 중도·5
어떤 자세로 앉는가?·5
앉음은 중도·9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가?·11
의(意)를 챙겨 상(想)을 재운다·20
온몸을 경험하며 호흡한다·22
‘온몸 경험’도 중도·27
왜 호흡을 관하는가?·32
호흡으로 가라앉힌다·35
잡념은 어떻게 묶는가?·40
절망 마시오·45
어떤 자세로 앉는가?
자, 가부좌 자세로 앉아보세요. 결가부좌가 어려우면 반가부좌를 하세요. 다리가 짧고 허벅지가 굵은 체형이라면 결가부좌는 다리와 골반에 무리가 따를 수 있으니 반가부좌가 좋습니다. 반가부좌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위에 얹으면 됩니다. 될 수 있으면 무릎 위까지 발이 올라오도록 하세요. 몸이 불편하신 분은 굳이 결가부좌를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허리를 펴서 곧게 세우는 것이 기본입니다. 꼬리뼈부터 엉덩이뼈가 끝나는 데까지 등마루를 이루는 뼈대가 척량골(脊梁骨)인데 이 척량골을 수직으로 딱 세워서 지표면과 곧게 수직이 되도록 합니다. 척추의 기둥이라고 해서 척량골이라고 합니다. 몸이 앞으로 숙여지면 대개 배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척추의 기둥을 세우면 몸이 똑바로 앉는 느낌이 듭니다.
허리를 바로 펴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졸고 있거나 금심 걱정을 하면 벌써 허리가 척 꺾이지요. 허리를 바로 펴고 근심 걱정을 하려고 해보십시오.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끌어안고는 번민하고 있는 모습이지요. 허리를 굽히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번민하거나, 망상에 빠져 있거나, 혼침 상태인 것입니다. 불교의 반가사유상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한 듯해도 이는 삼매가 제대로 이루어진 이후에나 가능한 깊은 사유의 자세인 것입니다.
허리를 펴면 자연히 상체가 바르게 되고, 호흡도 달라집니다. 사람에 따라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데, 기울지 않게 하려면 팔을 뒤로 돌려서 손을 맞잡고 이마를 바닥에 닿도록 숙여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미추골을 그 자리에 둔 채로 상체만 일으킨다는 식으로 몸을 일으켜보세요. 그러면 자세가 딱 바르게 됩니다.
처음 앉는 분일수록 각별히 주의해서 좋은 자세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무리가 따르면 가급적 그 자세에 가깝게 되도록 노력은 해보세요. 무리하지는 마시고 편안하게 바르게 하되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합니다.
양손은 편안하게 앞에 두고, 상체가 좌우 어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받치고 있다는 생각으로 양 엄지손가락을 마주 닿게 합니다. 그러면 몸의 균형도 잡히고 좌우의 기가 통해서 명상을 오래 할 수 있습니다.
바른 자세를 취했으면 자세는 그대로 둔 채 힘이 들어가거나 긴장한 곳이 없는지 살펴보세요.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내려가면서 힘을 쭉 빼십시오. 힘이 들어갔다는 것은 무리가 가해졌다는 말이고, 무리가 가해지면 결국 병이 됩니다. 어디든지 힘이 모이면 그대로 병이 됩니다. 잠깐 앉는 것이 아니고 평생 동안 습관을 들여야 하므로 무리가 따르지 않도록 힘을 빼십시오. 어디에도 힘을 주지 않으면서 자세는 발라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 대목이 힘듭니다.
보통은 위를 쳐다보고 앉게 되는데, 이러한 자세는 좋지 않으므로 턱을 밑으로 약간 당기십시오. 턱을 당기면 머리 정수리 부분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자세가 됩니다. 특별히 노력할 것은 혀인데, 혀를 말아서 그 밑바닥을 입천장에 붙입니다. 훈련하여 습관이 되면 힘들이지 않고 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눈인데, 집중하려고 노력하면 눈에 힘을 주게 되지요. 그래서 눈이 제일 피로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니까 그때마다 힘을 빼도록 하세요. 본래는 눈을 감아야 하는데, 감다 보면 자꾸 졸리지요. 그래서 반개(半開), 즉 눈을 반쯤 뜨는 것을 권합니다. 크게 뜨면 시야가 열려서 뭔가를 보게 되니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아주 감지는 말고 희미하게 뜨는 것입니다. 그냥 멀거니 뜬 채 눈길을 1~2미터 전방에 던져놓고 고정하지 않으면 그게 반개 상태입니다. 감은 것도 아니고 뜬 것도 아닌 상태인데 이때 뭔가를 보지 않도록 합니다. 졸지만 않으면 감아도 무방합니다.
처음 앉는 분들은 대개 몸이 유연하지 못하니까 선방에서도 요가 같은 것을 많이 합니다. 몸을 더 유연하게 만들어 좋은 자세로 잘 앉아서 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 이대로 한 시간 앉아 있어봅시다.
앉음은 중도
요새는 여러 곳에서 가부좌로 앉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앉는 방법이나 호흡하는 방법은 친숙하게 알고 있을 겁니다. 힌두교에서도 그렇고, 기공이나 요가학원에서도 그렇고, 서양 신비주의자도 다 이런 식으로 앉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앉는다고 해서 다 불교 수행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불자로서 앉는다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가 앉아 정진한다 함은 힌두 요가를 하는 것도, 건강비법을 훈련하는 것도 아닙니다. ‘법을 알겠다’는 마음에서 앉아야 불교 수행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의 길, 즉 팔정도를 이해하고 앉을 때라야 비로소 불자로서의 앉음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팔정도가 곧 중도입니다. 또한 그렇게 앉으면 그것도 중도입니다.
공부하려고 하면 앉습니다. 앉아서 마음을 모으지요. 서 있을 때는 활동적이고, 누워 있을 때는 너무 정적이어서 곧 잠이 옵니다. 앉음은 서 있음도 아니요 누워 있음도 아닌 중도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취하는 자세는 이 세 가지입니다. 서거나 눕거나 앉거나, 그 중 ‘섬’도 아니요, ‘누움’도 아닌 ‘앉음’이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 있을 때 성한 것은 활동성인데 그 대신에 부족한 것은 고요함이지요. 누워 있을 때는 고요함이 성한데 활동성이나 깨어 있음은 약합니다. 두 가지를 살리려면, 즉 깨어 있으면서 고요하려면 앉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서 앉는 겁니다.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가?
그런데 앉을 때 ‘무엇을 목표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앉느냐’ 하는 점이 끝까지 중요한 문제입니다. ‘앉는 방법이 어떻고, 자세가 어떻다’ 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알파벳을 외웠다고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앉는 것은 수행을 실질적으로 하기 위한 과정일 뿐 실수행에서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각 부파마다 수행목표와 그 목표를 해석하는 입장이 다를 수 있으니 공부하는 마음가짐이나 인식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요즈음 위빳사나(vipassana)가 유행인데, 부처님이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말을 쓰신 적이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경에는 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위빳사나’라는 단어를 쓰긴 쓰셨어요. 어떤 의미로 쓰신 것이냐 하면, 위빳사나는 일종의 지적 능력이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어선 마음이 어떠한 법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빠알리 경에 나오는 위빳사나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빠알리 경에는 후세에 첨가된 것이 분명한 장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란 말이 나옵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 이분법으로 설정되어 있어요. 이 부분이 근거가 되어 오늘날 ‘사마타 수행’이니 ‘위빳사나 수행’이니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린 바와 같이 저의 생각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부처님은 수행 기법을 가르치려 노력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당시 부처님 제자들은 벌써 어디선가 공부를 많이 하고 온 분들이거든요. 초기의 부처님 제자들은 자기 제자를 몇 백 명씩 거느린 분들이에요. 사리불도 부처님을 찾아올 때 제자를 250명이나 거느린 스승이었어요. 목건련도 그렇고 다들 수행의 대가들이지요. 그분들 보고 부처님이 ‘이렇게 앉아라, 저렇게 앉아라’ 했겠습니까?
그런데 후대로 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들이 들어오니까 수행 기법도 가르칠 필요가 생겼겠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주로 제자들이 담당했을 겁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앉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일종의 문화예요. 요가 문화 같은 거지요. 나무 밑에 가서 앉는 것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든 하지 않는 사람이든 다 해요. 산야신(힌두교의 남성 출가자)도 앉고, 고행자도 앉고, 어는 종파든 다 앉습니다.
앉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앉는냐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기본으로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팔정도를 가르치신 겁니다. 공부를 몇 십 년 하고 온 사람들에게 팔정도를 가르치셨어요. 필정도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절대로 필요합니다. 참선을 몇 십 년 하면 할수록 팔정도에 의지하지 않으면 야단납니다.
초심일 때는 그렇게 예민한 문제가 아닙니다. 조금 시행착오가 생겨도 괜찮아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의식의 집중력이 강해지고 터가 잡혀갑니다. 우리가 향상을 도모한다 함은 나 자신의 습관과 싸우는 겁니다. 앉는 것도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인데 이게 잘못된 습관으로 굳어지면 나중에 고칠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나중에 바로잡기란 열배 백배 어렵습니다. 백지 상태에서 바로 그리기도 어렵지만 잘못 그린 그림 위에 다시 그림을 잘 그리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한참 공부를 하다가 어떤 경계에 부딪히고 집착심이 생기고 번뇌에 빠져들면 고치기 쉽겠어요? 화두를 드는 사람이 화두 제목 하나 바꾸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습관이 쉬 고쳐지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처음이 가장 좋은 시절이지요. 분명하게 끊을 것은 끊고 치울 것은 치우고 해서, 적어도 의식의 정리는 반듯하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처음 한 걸음이 그렇게 중요하니까 선종에서도 ‘호리의 차가 있으면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毫釐有差 天地顯隔]’라고 하지 않습니까. 처음의 떨끝만큼 차이가 나중에는 천리만리로 벌어지는데 이 천리만리를 다시 되돌리기가 쉽겠습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법은 처음부터 명확하고 분명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저기서 남들은 ‘참선해서 한 소식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런 건 전부 그 사람들에게 양보해버리세요. ‘경험했다’느니 ‘봤다’느니 하는 사람들, 어떤 면에서는 참 불행한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잘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바로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팔정도를 해야 합니다. 처음에도 팔정도, 중간에도 팔정도, 끝에도 팔정도! 부처님의 팔정도는 참 신통하고 대단합니다. 그 길을 따라 나아가면 진리가 실현된다는 게 부처님이 확언하시는 바입니다.
의식은 어떻게 두는가?
그러고 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의식을 어떻게 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부처님은 의식을 두는 방법에 대해서 ‘빠리무캉 사띵 우빳타뻬트와(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apetvā)’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빠리(pari)는 ‘주변’이고 무카(mukha)는 ‘입’ 또는 ‘얼굴’입니다. ‘입(얼굴) 주변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라는 뜻입니다. ‘두루’라는 뜻도 있으니까 ‘두루 입(얼굴) 주변에 사띠를 확립하고’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 일반적으로는 ‘얼굴 전면에 의식을 집중하고’라고 해석합니다. 의식을 자기 얼굴 앞에 세우는 겁니다. 영어로는 ‘in front of’인데, 이 말은 학생들이 한 교실에 쭉 앉았는데 그 중에 제일 앞에 앉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학생들을 마주해서 앉듯이 마주하는 것을 ‘in front of’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식을 앞에다 마주 세워 자기를 돌아보는 겁니다.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듯이 의식을 마주 세워서 나를 본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나를 보는데, 구체적으로는 육입(六入) 중 오입을 보는 겁니다. 눈·귀·코·혀·몸, 즉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을 본다는 겁니다. 안·이·비·설·신은 온 세상이 들어오는 경로입니다. 일체 세상 일체 주변이 나에게 들어오는 경로가 이 다섯 가지거든요. 그래서 보통은 오감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오입 또는 오처(五處)라 합니다. 아야따나(āyatana)이지요, 다섯 아야따나를 본다. 의식이 앞에 서서 다섯 아야따나를 지켜본다. 거기에 무엇이 들어가고 무엇이 나가는가를 본다. 그렇게 의식을 둔다는 겁니다. 의식, 즉 마노(mano)를 그렇게 유지하는 것을 사띠(sati)라 합니다.
그러면 마노는 무엇인가? 벌써 우리가 매우 본격적인 불교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불교에서는 ‘나’를 바깥세상과의 접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할 때 안·의·비·설·신·의로 봅니다.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는 당시 인도의 어떤 학파에서도 다 인정하던 감각기관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의(意)라는 감각기관 하나를 더 보탰어요. 의라는 감각기관, 즉 마노입니다.
그러면 이 마노라는 감각기관의 기능이 뭐냐? 바로 법을 아는 기능입니다. 즉, 가치세계, 정신세계를 아는 것이 마노의 기능입니다. 우리말에 ‘소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지요. 소에게 아무리 경을 읽어줘 봐야 소는 눈만 끔벅끔벅 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에게 ‘야, 인간아! 너 그래서 되겠니?’라고 하면 어린애도 알아듣지요. 꾸지람을 들으면 기가 죽고 미안해하는 건 인간이 의(意)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의라는 기능이 있기에 꾸지람이든 칭찬이든 알아듣거든요. 거기서 윤리 도덕이 생길 수 있고 해탈 열반도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의라는 근(根)을 가졌다고 하는 겁니다.
원래 마노의 기능은 ‘감각기능 즉 아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의(mano)를 뜻(meaning)으로 이해해서, ‘의미(意味)’라는 말이 생겨버렸어요. 그러면 의미는 ‘의(意)의 맛’이고, 의가 ‘’아는 맛이 되는 셈이므로 법 자체가 되어버려요. 법을 아는 게 의인데, 우리는 “너, 그 뜻 아니?”라고 할 때의 뜻이란 개념으로 의를 쓰고 있지요. 그렇게 되면 의는 감각기관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의, 즉 마노를 챙기는 것이 사띠입니다. ‘사띠를 확립하고’라는 말은 결국 ‘의를 챙기는 데 의식을 집중하고’라는 말이 되겠지요. 의가 법을 아는 마음이니, 결국은 ‘법을 아는 마음을 딱 챙겨서’라는 뜻이지요. 이것은 불교의 아주 기본적인 테마이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의(意)를 챙겨 상(想)을 재운다
마노를 챙긴다는 것은 산냐(saññā 想)의 놀이터 구실을 하는 의처(意處 mano āyatana)를 의근(意根 mano indriya)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마노는 법을 보는 기능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수(受)와 상(想), 즉 느낌과 인식으로 바깥 대경만을 봅니다. 상은 바깥 대경을 인식하는 능력이지요. 바깥 대경을 보고 백 년을 앉아봤자 공부가 될 리 만무합니다.
우리는 생래적으로 상 놀음을 하고 있어요. 철학을 하는 것도 상이요, 예술을 하는 것도 상이요, 신문을 보고 생각하는 것도 다 상입니다.예를 들면, 내가 이 물건을 봅니다. 이 물건에도 세속적 가치가 묻어 있어요. 비싼 거다, 좋은 거다, 최신이다, 예쁘다, 모양이 좋다, 값이 얼마다, 외제다 등등 온갖 가치가 다 묻어 있지요. 그걸 보고 앉아 있는 것을 백 년 해봐야 공부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바로 이 산냐를 그치고 마노의 법을 아는 능력, 그 순수한 기능을 살리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나 같은 마노라도 느낌과 인식이 노는 무대로서의 마노는 수와 상의 놀이터[意處]일 뿐입니다. 마노가 수와 상을 위한 무대로서의 기능을 그치고, 즉 수와 상을 몰아내고 마노 그 자체를 마노답게 기능하도록 의근(意根)으로 바꿔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 놀음을 그쳐야 합니다. 상 놀음을 그치게 만들고 마노를 마노답게 되도록 만드는 것이 사띠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띠는 마음 챙김, 정확하게 의(意) 챙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띠가 섰다, 사띠가 강하다’ 하는 것은 그만큼 ‘산냐가 약해져 쫓겨가고 있다’ 또는 ‘산냐가 마노라는 무대에 와서 멋대로 방자하게 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온몸을 경험하며 호흡한다
지금 우리는 그런 변화를 위해 공부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앉으라는 것도 그런 자세가 의근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앉아서 호흡은 가장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것이 참 좋습니다. 억지로 하면 안 돼요. 정신집중을 하려고 너무 애쓰면 상기병(上氣病) 같은 큰 병이 생길 수 있어요. 또한 송공한다 해도 무당이나 정쟁이가 되어버릴 수 있어요. 신들리기 딱 쉽습니다. 아주 위험해요. 각자 자기에게 편하게 호흡을 하면 됩니다. 천천히 걷는 것이 좋은 사람이 있고 조금 빨리 걷는 게 좋은 사람도 있듯이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게 호흡하면 됩니다. 올바른 자세를 확립하고 호흡은 편안하게!
남방 위빳사나 전통에서는 의식은 코끝 아니면 코끝을 흐르는 숨결이 닿는 윗입술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코끝에 의식을 집중하면 현대인들은 자꾸 상기되기 쉽습니다.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상기되어 열이 막 올라오고 머리가 빠개질듯이 아프지요. 이것이 자리를 잡아버리면 앉기만 해도 습관적으로 상기 등에 시달리게 되어 공부가 힘들어지지요.
그래서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 같은 분은 의식의 초점을 낮추는 것이 좋다고 해서 배꼽이나 하단전에 의식을 집중하라고 가르칩니다. 붓다고사 이래로 내려오는 납방의 가르침은 코끝에 의식을 집중하라는 거였지요. 의식을 어떻게 집중하느냐? 붓다고사는 이런 비유를 듭니다. ‘성문에 성문지기가 있다. 이 문지기가 시내에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나가는 사람이 누군지 다 점검한다. 나가는 사람을 따라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는 사람 따라 시내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 딱 서 있다.’ 그렇듯이 우리 의식도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보고, 길게 내쉬면 ‘길게 내쉰다’고 보면서 여기서 떠나지 말라. 이게 붓다고사 전통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라.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코끝에서 멈춰 지켜보라’라고 한 남방 쪽 입장과는 다릅니다. 온몸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호흡이 길게 쑤욱 들어가면 의식도 따라 들어가면서 지켜봐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온몸’이라는 말의 해석을 놓고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온몸이라는 것은 호흡의 온몸이다. 호흡의 처음, 중간, 끝 부분을 계속 보면서 있어라. 이게 온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남방 전통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절대 어기면 안 되는 철칙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나 《염신경(念身經)》을 비롯해 《염처경》, 《안반수의경》 등을 보면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리라.” 여기에서 온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입니다. 이렇듯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수행법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따를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어떤 쪽을 따를 것인가? 마하시 사야도를 따를 것인가? 붓다고사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사리불 시대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저는 근본불교를 취하는 입장이예요. 저도 처음에는 마하시 사야도의 책을 보고 붓다고사의 《청정도론》도 보았어요. 어떤 수행법을 따르느냐는 수행의 방법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불교를 공부하느냐?’ 하는 문제까지 연결됩니다.
정신 집중을 가장 효율적으로 빨리 이루는 데에 역점을 둬버리면 결국은 숙달된 테크니션이 되는 것이지요. 정(定) 전문가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 전문가, 집중 전문가가 되려고 불교에 들어왔나요? 아니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수행하느냐는 ‘불교가 뭐냐, 해탈이 뭐냐’ 하는 데까지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테크니션이 보는 해탈과 윤리 도덕자가 보는 해탈은 다르지 않겠어요? 인도에 가면 정 테크니션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그런테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차원이 어떤지는 문제가 많겠지요. 대개 테크니션들은 안목이 좁잖아요.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입니다. 정 전문가도 결국은 안목이 좁아지기 쉽지요.
과연 그게 해탈의 길일까요? 어떤 분들은 ‘해탈을 하면 넓어지니까 그때까지 좁혀야 한다’고 얘기하는데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엔 넓은 문은 처음부터 넓고, 좁은 문은 처음부터 좁습니다. 부처님 법이 정말 넓은 문이라면 처음부터 넓게 잡고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온몸 경험’도 중도
예를 들면 ‘이 뭐꼬’ 하는 수행법을 봅시다. 우리나라 선종에서 하는 ‘이 뭐꼬’도 벌써 추상 개념입니다. 여기는 산냐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어요. 상, 즉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타나는 것을 대상화시켜 인식해요. 관찰의 대상이 되든 사고의 대상이 되든 대상화시켜서 인식하는 것이 상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상 놀음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있는냐? 우선 대상의 범위가 굉장히 커져버립니다. 무한대로 넓어져 바깥으로 한없이 뻗어나가서 저 우주를 담고도 좁은 거지요. 그러면 장쾌한 맛은 있겠지만 사실은 이미 바깥에 정신을 뺏겨버리는 겁니다. 상 놀음을 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쉬워요. 그래서 선지식들이 상놀음에 대한 경책의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몸의 어느 한 군데에 집중하면 정신집중을 일으키기에는 좋겠지만 너무 좁아져버립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온몸’이라고 했어요. ‘온몸’은 나라는 존재를 담는 전부인데, 바깥에 비하면 좁고 몸 어느 한 부분에 비하면 넓지요. 그러니까 온몸을 경험한다는 것도 중도(中道)입니다. 앞에서 ‘앉는 것’이 중도라고 했는데, ‘온몸을 경험하며 호흡한다’는 것도 중도입니다. 그러면서 산냐를 중지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중도는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산냐는 우리의 통상적 인식인데,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그릇이 있다고 합시다. ‘그릇’이라는 말에는 이미 어떤 관념이 담겨 있습니다. ‘물그릇엔 물이 담겨 있고’ ‘이태리 그릇은 비싸고’ ‘유리그릇은 위생상 좋고’…… 별별 관념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관념으로 그릇을 보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축적된 정보나 관념들에 젖어서 보니까 있는 그대로 못 봅니다. ‘그릇’이라는 이름도 우리가 붙인 것이지요. 이 그릇이 대답할 능력이 있다면 ‘나는 그릇이요’라고 스스로 말할까요?
결국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못 보고 우리가 붙인 이름으로, 우리 관념으로, 우리 편할 대로 일방적으로 우리 식으로 봅니다. 주관적으로 본다 이 말이지요. 있는 그대로, 과학적 객관성까지도 넘어서 정말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보는 습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관적 버릇을 하나하나 찾아내어서 그것을 밀쳐내고, 아무런 주관의 개입이 없이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중도로 보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인식한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바깥의 뭔가를 눈으로 본다는 것도 이미 상상입니다. 인식 자체도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전의 경험을 온통 동원해서 ‘저게 뭐였고, 이름이 뭔데’ 하면서 아는데, 이처럼 과거 기억이 작용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 인식입니다. 그런 과거의 경험, 미래에 대한 예상, 바깥에 대한 추측을 떠나야 실다운, 실질적 지혜의 지각, ‘참다운 봄’이 시작됩니다.
무엇이든 경험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상상만 해서는 안 되지요. 불교 공부는 상상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세속 공부야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불교 공부는 상상의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상식(想識) 놀음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아프다’라는 사실은 현재 여기서 아픈 것이니까, 과거의 기억을 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거지요. 그러나 저 사람이 아픈 것을 내가 직접 느끼지 못하지요. 그러면 과거 내 경험을 다 동원해서 상상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가 아프냐? 그렇게 따지면서 내 경험의 전부를 동원해야 합니다. 그건 상상이지요.
내 몸은 상상이 필요 없어요. 있는 그대로 딱 확인할 수 있는 이 몸, 바로 이 몸을 총동원하여 가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딱 중(中)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도 안 되고 어느 한 부분에만 빠져도 안 되니까, 온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게 근본불교의 입장일 것입니다.
부정관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보고 있거든요. 머리카락이 있고, 피부가 있고, 뼈가 있고, 살이 있고, 발톱이 있고……, 모두 내 몸이고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상상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똥오줌을 보는 것이거든요. 몸의 서른두 가지 부분을 다 확인할 수 있어요. 그걸 관찰할 따름입니다. 그걸 벗어나면 안 되고, 또 그 중 한 부분에 너무 빠져서도 안 돼요. 이게 중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부터 시작해서 경험 대상까지 중도로 일관해서 계속 나가는 것, 이게 공부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러분이 앞으로 참선할 때는, 입정(入定)하기 전에 한 5분이라도 반드시 자비관을 염하라는 부탁을 꼭 드립니다. 자비관은 산냐의 논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주관이 잘 안 생깁니다. 아무리 오래 해도 해가 없어요. 때가 끼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때가 끼면 있는 그대로를 못 보고 색 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자비관도 중도로 보기 위한 훈련입니다.
왜 호흡을 관하는가?
부처님은 《염처경》을 빌롯해 《염신경》, 《입출식념경》 등 중요한 경에서 ‘바와나(bhāvanā)’라는 실질적 수행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고요한 장소에 가서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염을 앞에 세우고 신(身)을 수관(隨觀)하라.” ‘신을 수관하라’는 ‘몸을 아누빠시(anupassi)’하라는 말의 번역입니다. 아누빠시는 영어로 contemplate로 번역하는데, ‘어디에 다가가서 본다’는 뜻입니다. 놓치지 않고 줄기차게 따라 붙으면서 잠시도 한눈팔지 않고 지켜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켜보는 대상을 하나로 말할 때는 신, 즉 몸을 지정합니다. 더 부연할 때는 네 가지를 말합니다. 그 네 가지는 신·수·심·법(身受心法)입니다. 그 대상을 어떻게 지정하든 간에, 요는 ‘항상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겁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단정한 자세로 바르게 앉아야 합니다. 이렇게 앉으면 호흡이 고르게 되면서 제대로 자리 잡힙니다. 그래서 ‘신념(身念)’이라고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신념’이 바로 ‘호흡념’ 즉 ‘호흡관’이 되는 것이지요. 보통 ‘수식관’이라고 합니다.
‘수식관’이라 하면 따를 수(隨) 자를 쓸 때도 있고 셀 수(數) 자를 쓸 때도 있어요. 셀 수(數) 자를 쓸 때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수를 세며 정신 집중을 하는 호흡법의 한 방법을 말하지요. 따를 수(隨) 자를 쓸 때는 ‘식(息)을 따라다니면서 관하라, 즉 수관해라’라는 말입니다.
앞서 ‘온몸울 경험하면서 내쉬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필이면 왜 호흡을 관해야 할까요?
사실 호흡과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기능면에서 서로 연관된 불가분의 관계,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호흡을 통제해서 몸을 통제할 수 있고, 몸이 건전한 자세로 있게 되면 마음도 건전해집니다. 결국 호흡을 통제해서 마음을 통제할 수 있고, 마음이 통제되면 몸도 통제됩니다. 그런 뜻으로 이 셋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바로 다스리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호흡은 바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관리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일체화시켜서 관리, 조정, 제어된 상태에 두려고 노력하는 것이 실질적인 수행입니다. 제가 지금 수행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수행’, 이 말은 공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무겁고 겁나지요.
호흡으로 가라앉힌다
‘수행, 수행’ 하다 보면 나중에는 수행 노이로제에 걸려요. 그래서 수행은 점점 어려워지고, ‘나는 그런 것 못 할 것 같아.’ 이렇게 되지요. 그것은 식(識)이 명색(名色)에 대해서 벌이는 또 하나의 놀음이에요. 식놀음을 바로 보고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해요. 명이 무엇인가.
명은 신기루입니다. 부처님이 오온 중 상(想)을 신기루라 하셨는데 상뿐만 아니라 수(受 venadā)·상(想 saññā)·사(思 cetanā)·촉(觸 phassa)·작의(作意 manasikāra)를 가리키는 명(名 nāma), 즉 일체의 이름이 신기루입니다. ‘수행’이라는 말도 또 하나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름을 반복하다 보면 거기에 개념이 붙고, 그 개념에 사로잡히다 보면 점점 어려워지지요. 시험을 앞둔 고3 학생들이 시험 노이로제에 걸린 것과 똑같아요. 그것이 다 명색 놀음에 빠진 겁니다.
‘그처럼 수행을 신화화하거나 절대 영약으로 만들거나 하지 말라! 맹목적 무지에 의해서 되풀이되는 이름[名]의 습관적 확대 재생산 과정을 중단하라! 그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명에 수(受)·애(愛)·취(取)가 더 긴밀하고 빠르게 진행되어 유(有 becoming)를 빚어낸다’는 말입니다.이것이 반복되면 마침내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되어버리고, 영락없이 또 다른 윤회라는 쇠사슬의 고리에 매여 생사를 되풀이하게 되어버립니다.
공부란 뭐냐? 명색으로 구분해서 무엇이든 찢어발기는 분별의 나락에 빠진 삶을 좀 더 집중적으로 파악하고 하나로 뭉쳐 이해하고 나서 마침내 그것을 던져버리도록 노력하는 게 공부입니다.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십이연기의 순(順)과정을 중단시키도록 노력하라. 그게 수의 단계든, 애의 단계든 취의 단계든, 거기에 마음이 갈 때 그 마음을 붙잡아라.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라. 붙잡아서 그놈을 딱 들여다봐라. 들여다보면 사라진다’ 이 말입니다. 그놈이 바로 신기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절박한 상황도, 심지어 내 몸의 병까지도 신기루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는 것이 신기루 아닙니까. 업이라는 게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붙은 탄력이지 달리 무엇입니까? 그게 병도 되고 운명도 되고 팔자도 되고, 인생살이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촉(觸)·애(愛)·취(取)를 어느 시점에서든 붙잡고 늘어져라. 나쁜 놈이 제멋대로 놀아나도록 놓아두지 말고 형사처럼 그놈을 꽉 붙잡아두란 말입니다. 그러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 몸을 반듯하게 바른 자세로 제어하라. 결가부좌가 왜 좋은가 하면, 오래 앉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 자세이기 때문입니다.결가부좌를 하면 자연히 허리가 곧추서게 됩니다. 이 자세가 되어야 호흡이 정상적이고 길어져 안정됩니다.
물론 ‘꼭 그래야 한다. 안 하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면 이익이고 안 하면 그만큼 손해일 뿐이지요. 그러니 강박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하면 이익이 된다더라. 짧은 인생에 이왕이면 빨리 이익을 보자’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돈 몇 푼에 생명도 바치는 시대가 아닙니까?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 중요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앉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호흡부터 제대로 장악하고 몸의 자세도 제대로 익혀서 오래 일심을 유지하려는 겁니다. 정법을 갖추려고 하면 정좌를 해야 하고, 정좌를 하면 마음도 자연히 안정되고 고요해지지요. 고요야말로 불교에 들어가는 기본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야 인생이 고요해지고, 인생이 고요해야 금생에 향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뭐, 이 바쁜 세상에 언제 고요할 틈이 있나’라고 하시겠지만, 그것 또한 명색에 속은 것입니다. 바쁜 세상은 없습니다. 바쁜 체 시늉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명색입니다. 명색을 놓고 식이 ‘바쁘니 어쩌니’ 하고 있는 겁니다. 바쁘다는 것은 사실 근거도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하철을 타고 앉았건 집에서 변기에 앉아 있건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한 자세를 취하라는 것이지요. 길을 걸으면서도 고요하도록 노력하고, 일을 하면서도 고요하도록 노력하라는 겁니다. 정념을 갖추라는 뜻을 쉽게 말하자면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요해지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우리가 불필요한 여러 일에 정신을 팔아 마음이 분주하고 들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서 거기에 매여 헐떡거리면서 ‘팔자가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보입니다. 고요해야 그게 보인다는 겁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책을 보고, 게다가 발을 굴리면서 음악에 장단까지 맞춘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고요해질 수 있겠어요. 물론 자기들은 ‘집중하고 있다’고 해요. 그러나 그것은 습관성 집중이겠지요. ‘참 집중’은 고요해져야 합니다. 고요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방법은 딱 하나
호흡을 고요히 가다듬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잡념은 어떻게 묶는가?
호흡을 고요히 가다듬고 앉아 있어도 잡념이 들지요. 잡념이 당연히 들지요. 우리는 망상 덩어리니까요. 식(識)이라는 놈은 잡념도 들게 하고 지켜보기도 하는데, 이 식은 한 순간에 한 가지밖에 못 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잡념이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식은 한 찰나에 생겨났다가 다음 찰나에는 망상으로 외출을 나갑니다.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요.
보통은 식이 저쪽에 바깥에 가서 노는 게 여태까지의 습(習)입니다. 우리 중생이 그동안 해온 짓은 저기에 가서 노는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애를 꿇어앉힌 것하고 똑같아요. 어린애는 어떻게든 엄마 몰래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부처님은 ‘길들지 않은 야생 코끼리가 숲속에 가서 놀고 싶은 것과 똑같다’고 비유하셨어요.
야생 코끼리를 붙잡아다 마당으로 데리고 와서 길을 들여요. 왕이 전쟁 때 타고 나가는 코끼리로 길들이기 위해서지요. 말뚝을 박아 놓고는 이놈을 붙잡아다가 말뚝에 끈으로 묶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고 나선 먹이기도 하고 굶기기도 하고 매질도 하면서 길들여나가요. 그런데 코끼리가 원체 힘이 세서 툭하면 묶은 끈을 끊고 도망가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코끼리가 도망갔으니까 포기하고 앉아 있나요? 전쟁은 언제 터질지 모르고, 왕은 빨리 전투용 코끼리로 만들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쫓아가서 다시 붙잡아 와야지요. 그 길밖에 없지요. 우리의 생각도 망상으로 나갔으면 쫓아가서 잡아오는 겁니다. 그것을 ‘챙긴다’라고 합니다. 쫓아가 잡아와서는 다시 묶어요. ‘염처’라는 말뚝에다가 ‘사띠’라는 끈으로 묶어요. 호흡은 염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호흡을 관하는 것입니다.
호흡에 묶어놓아도, 끈은 약해서 코끼리는 툭 끊고 나가버려요. 하루에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십만 번이라도 나가지요. 나갔다 하면 챙겨 와야 합니다. 그런데 코끼리 길들이는 자도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형편인지라, 코끼리가 나간 지 한참이 지나도 나간 줄도 몰라요. 모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어, 나갔네’ 하면서 쫓아가지요.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놓치고 있다가 겨우 한 번 챙길까 말까 합니다.
그것은 코끼리 잘못이 아닙니다. 코끼리가 금방 내 말 들어주는 법은 없지요. 코끼리 보고 아무리 사정해도 안 되고 굶겨도 안 돼요. 힘이 세거든요. 힘이 세니까 길들이는 것이지, 힘없는 놈 같으면 전쟁터에 데리고 갈 수 있겠어요? 힘이 세니까 길들일 만한데, 그렇게 힘이 세니까 자꾸 끊고 나가요. 그러나 하루에 한 번이라도 챙기면 챙기지 않던 관거와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챙기면 나중에는 다섯 번, 열 번, 백 번 챙기게 돼요. 그렇게 계속 챙겨서 하루에 천 번 챙긴다면 하루에 한 번 챙기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금방 알아차리게 되지요. 나갔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니까 금방 잡아오지요. 금방금방 잡아오면 마침내는 이놈도 ‘아, 지독한 주인이다’ 하고는 포기하고 체념합니다. 체념이 되니까 순하게 길들여져요. 이제는 화살이 날아와도 도망가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길들이는 겁니다. 천 번 만 번이라도 쫓아가는 겁니다.
팔정도 중에서 ‘항상’이라는 말이 붙는 단어는 정념(正念)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말해야 할 때 바른 말 하면 되고, 생각해야 할 때 바른 생각을 하면 되는데, ‘항상 뭔가를 유지하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은 단지 정념에 대해서뿐입니다. 사다 사또(sadā sato). 항상 염을 유지하라. 잠시도 염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이렇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때의 염은 중도심입니다. 이 정념이 바로 중도와 가장 계합(契合)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데는 타협도 중용도 없지요. 몸가짐에서도 적당한 타협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중(中)’이라는 말이 반드시 필요하지 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진을 통해서 해탈하겠다고 애를 쓰다 보면 마음이 급해지고, 조바심치게 되고, 발을 뻗고 울게도 되고, 더 극단적인 고행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밤을 새우며 용맹정진하고……,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가운데 ‘중’입니다.
중도를 벗어나지 않고, 즉 팔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재로 너무 조급하게 쫓아가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지 않고, 반대로 만만디 거북이걸음으로 허송세월 하지도 않는 것, 그것이 정념입니다. 경전 《상응부》의 제일 첫 경에 보면 어떤 천신이 내려와서 부처님에게 물어요. ‘그 험난한 흐름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십니다. ‘나는 급하게 서두르지도 않고 느리게 지척거리지도 않았기에 건널 수 있었다.’[SN 1:1] 그렇게 정념은 항상 하되,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가는 것입니다.
절망 마시오
만일 여러분이 24시간 중에 18시간을 이렇게 노력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저 분만 지속해도 참 장합니다. 5분, 10분 하다가 잘 안 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단 몇 분이라도 한다는 그게 굉장한 것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해나가면 챙김의 지속시간이 자꾸 길어질 뿐만 아니라, 마침내 생활태도와 마음 자체가 차분해지고 여유로워집니다. 여유를 갖고 가다듬다 보면 생활에서 불필요한 잡동사니를 많이 제거해낼 수 있고 쓸데없는 짐을 많이 벗어버릴 수 있고 안정된 시간을 오롯이 누릴 수 있어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요. 하루 저녁만이라도 한 번 앉아보십시오.
물론 참 힘들지요.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참 힘들어요. 하지만 절망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절망하기에는 너무나 위대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들여다보면 정말 보잘것없고 세상에 나쁜 것, 약한 것들은 다 나한테 모인 것 같아요. 겉은 멀쩡해도 인간은 대개 열등감을 안고 씨름하는 존재입니다. 사춘기 때부터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날까지 살고 있다고요. 법을 만나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법을 만나면서 사춘기의 열등감에서 벗어나 제2의 탄생을 하는 겁니다.
남은 다 잘하는 것 같은데 여기 못생긴 이놈만 공부도 못 하고, 나쁜 생각과 나쁜 버릇 덩어리이고……. 이런 생각이 인간을 바참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눌어붙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어른이 되어서도 열등감에서 못 벗어나요.
과감하게, 법을 만나서 과감하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열등감이란 아무 의미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학생 때 성적이 좋아서 우월감을 느꼈다. 성적이 나빠서 열등감을 느꼈다.’ 이게 근거가 있는 말인가요? 시험제도 탓이지 열등감 느낄 이유가 못 되요. 있는 그대로 보면 시험은 시험이고, 답안을 몰라서 못 쓴 것도 그냥 그뿐이지 그것이 열등감이 되어야 할 이유가 아니에요. 인간이 이렇듯 비참하지만 실상 비참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등감을 가르치고 만드는 교육제도 속에서 멍이 들었을 뿐이지요.
법 왕궁에 와서는 그런 것을 다 씻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에게 열등감이 있구나. 열등감의 근원이 무엇인가’라고 있는 그대로 분석해야 해요. 그게 바로 정정진(正精進)입니다. 이 열등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아버지 재산이 없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입학시험 낙방에서 비롯되었다, 친구와의 용모 비교에서 비롯되었다 등등 별의별 원인들이 있을 겁니다. 우월감, 열등감 모두가 분석을 해보면 근거가 없어요. 폐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정진입니다.
정정진을 제대로 하려면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잘 안 들어가지지요. 그래서 사띠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띠 훈련을 통해 여간해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배짱과 뱃심, 태연함과 무관심에 도달합니다. 그것을 ‘우뻬카(upekhā)’ 즉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평정심은 칠각지 중에서 최상승입니다. 좋든 나쁘든, 어떤 상태든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태연하게 볼 수 있는 뱃심과 여유를 ‘우뻬카’라 해서 불교 수행의 최상의 요소로 취급합니다. 우리는 참선수행을 통해서 우뻬카를 키워나가자는 겁니다.
마침내 내 자신의 열등감과 우월감의 요소들을 모두 다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집요하게 끝까지 그 뿌리까지 지켜보면서 쓱쓱 걷어내고 앉아 잇을 때, 그때 우리 공부가 잘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열등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공부도 못 해요. 열등감이 하나도 없다? 그건 바보지요. 열등감이 있으니까 그놈을 상대로 캐내기도 하고 씨름도 하다 보니 마침내 여러 자질의 향상을 성취하게 되는 겁니다. 중생이 못났으니까 향상을 하는 거지요. 다 이루어지고 갖추어져 있다면 뭣하러 더 향상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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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이 활성 스님
1938년 출생. 1975년 통도사 경봉 스님 문하에 출가. 통도사 극락암 아란야, 해인사, 봉암사, 태백산 동암, 축서사 등지에서 수행 정진. 현재 지리산 토굴에서 정진 중. <고요한소리> 회주
엮은이 김용호
1957년 출생.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문화비평, 문화철학). <고요한소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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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여섯
참선과 중도
초판 1쇄 발행 2017년 4월 13일
말한이 : 활성
엮은이 : 김용호
펴낸이 : 하주락·변영섭
펴낸곳 : (사)고요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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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85186-85-5 00220
값 1,000원
<고요한소리>는
]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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