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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세가(皇甫世家)의 소가주(少家主)
빙백용녀와 헤어진 단사영은
이틀동안 길을 도와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을 향해 가고 있었다.
두 번째 원수 흑절신제 소섭랑을 찾아 제남으로 가는 길이었다.
-흑절신제(黑絶神帝) 소섭랑(蘇燮郞)!
산동성을 비롯해 하북성, 산서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마방(魔幇) 흑련(黑聯)의 련주인 흑절신제 소섭랑은
절대십천 가운데 한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마존(魔尊)이다.
그가 련주로 있는 흑련은 일종의 마도무림의 연합체이다.
산동, 하북, 산서 삼성의 흑도방파들이 스스로 또는 굴복에 의해
흑절신제의 휘하에 들어온 거대마세가 바로 흑련이다.
단사영은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은 깊어졌고 산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단풍의 아름다운 정취에 취할 정서가 그에겐 없었다.
오직 피를 부를 생각뿐이었다.
이때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였다.
챙챙!
그것은 틀림 없이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였다.
(이 깊은 산중에 웬 싸움이란 말인가?)
단사영은 호기심이 일어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사영이 싸우는 곳에 이르러 보니 한 명의 삼십대 남의인이
다섯 명의 인물들에게 습격을 받고 있었다.
남의인을 공격하는 자들을 본 순간 단사영의 눈에서 붉은 불이 켜졌다.
(저들은 흑련의 무리들이 아닌가,
흑련의 무리라면 절대 살려두지 않겠노라 하늘에 맹세한 나다.
더욱이 남의인의 무공은 정대하다.
이로 미루어 그는 백도의 협사가 분명하니 모른 척 할 수 없겠군…)
과연 남의인을 공격하는 자들의 흑의는 흑련 특유의 복장이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흑련이라면 이를 가는 단사영이다.
더욱이 남의인은 벌써 지쳐서 기진맥진해 있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놔둔다면 틀림없이 해를 입고 말 것 같았다.
그의 무공은 상당히 훌륭한 편이었으나 흑련의 무리들 역시 고강하여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펑!
이때 남의인이 앞에 있는 장한과 일장을 맞부딪쳤다.
이 순간, 남의인의 뒤에서 다른 장한 하나가 남의인의 목을 노리고 장검을 후려쳐 갔다.
쌔액!
남의인의 목이 뎅강 잘려져 나가려는 순간
쨍!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남의인의 목을 공격하던 장한의 검이 날아가 버렸다.
[앗! 웬놈이냐!]
흠칫 놀란 장한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저지한 사람을 았다.
장한의 눈에 머리를 아무렇게 치렁치렁 흘려내린 흑의인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남의인을 구하기 위해 나선 단사영이었다.
[너는 누구냐?]
흑련의 장한 하나가 갑자기 나타난 단사영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인지는 염라대왕이 가르쳐 줄 것이다.]
단사영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흑련의 무리 하나가 그에게 검을 날리며 외쳤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냐?]
추앗-
공기를 가르는 검기가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의 검기가 채 단사영에게 닿기도 전에 돌연 장한은 가슴을 안고 쓸어졌다.
[으윽!]
장한의 가슴은 반으로 쫘악 쪼개졌다.
대체 언제 손을 썼는지 모를 번개와도 같은 단사영의 출수였다.
이것을 본 남의인이 힘을 얻었는지 망연해 있는 다른 흑련의 인물들에게 덤벼들었다.
단사영도 역시 쌍장을 휘둘렀다.
꽈우우우…
공기가 진동하고 돌풍의 회오리바람이 그의 장심으로부터 쏟아져나왔다.
흑련의 무리들은 불청객이 동료 하나를 단칼에 무찌르고
자신들을 향해 엄청난 장경을 내쏟자 혼비백산했다.
게다가 여태까지 기진맥진해 있던 남의인마저 사기백배하여 덤벼들자
그들의 손발이 일시 어지러워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으악!]
[컥!]
남은 네 명의 흑련 장한들은 방비할 겨를도 없이 피떡이 되어 황천으로 향했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진하게 풍기는 가운데
다섯 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땅을 젖셨다.
이윽고 흑련의 무리들이 모두 죽자
남의인은 단사영에서 포권의 예를 취하고 말했다.
[제 이름은 황보군(皇甫君)이라고 합니다.
소협께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협의 존성대명을 알고 싶습니다.]
[단사영이라고 하오.]
단사영은 자신을 그대로 소개했다.
굳이 자신의 강호출도를 숨기고 싶지가 않았다.
찰라 황보군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스쳐지났다.
[단사영! 혹시 소협께서는 철혈검제 단선배님의 일점혈육이신
다정공자가 아니십니까?]
놀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황보군의 말을 들으며 단사영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사영이 시인하자 황보군의 눈에 경악이 출렁였다.
[아…오년 전 검성이 참화를 당할 때 그 종적이 홀연히 사라졌다더니…
으흠!]
말을 하던 황보군은 돌연 헛기침을 하며 뒷말을 삼켜 버렸다.
검성의 참화는 강호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당사자인 단사영에게는 아픔이기 때문에 말을 끊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황보군의 사문이
매우 엄중한 예법을 지닌 정파(正派)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 경황중에 상대의 아픔 구석을 피한다는 것은
단숨에 이뤄지는 성정(性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사영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오. 황보형.]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본인은 개의치 않소.]
[흠흠!]
단사영이 오히려 담담하게 나오자
괜시리 게면쩍어진 황보군은 헛기침을 몇번하고는 은근히 물었다.
[단형께서는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제남으로 가고 있는 중이오.]
[마침 잘됐군요. 나도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오.
같이 동행해도 되겠소?]
단사영은 황보군의 서글서글한 첫인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이 제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단사영은 문득 오년 전 강호를 종횡할 때 들은
황보세가 소가주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섬전번쾌(閃電飜快) 황보군(皇甫君)!
수많은 무류(武流) 가운데 강함만을 추구하는 열혈무가(熱血武家)가
백도무림에 있으니 바로 황보세가(皇甫世家)다.
황보세가는 뇌(雷)와 번개(電)의 기운을 무학으로 승화시킨
뇌전십팔풍(雷電十八風)이란 검법으로 유명하다.
뇌전십팔풍은 각기 삼절(三絶) 육초(六招)로 나누어져 있다.
삼절이라 함은 번개의 힘을 이용한 빠름의 무류를 지닌 쾌절(快絶),
우뢰의 힘을 이용한 붕절(崩絶),
가히 빠름과 패도적인 힘을 겸비한 패절(覇絶)을 말한다.
삼절은 각각 육초로 나누어져 있어 이를 합쳐 뇌전십팔풍이라 부른다.
하지만 워낙 그 오의가 심오해 황보세가 천 년 역사 속에
뇌전십팔풍을 모두 대성한 고수는 단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
대부분 황보세가의 사람들은 삼절 중 한 가지를 택해 이름을 떨쳐온 것이다.
그런 미완(未完)의 검법에 도전한 사람이
당금 무림에 등장하니 그가 바로 섬전번쾌 황보군이다.
황보군은 나이 십팔 세에 이미 쾌절을 대성했다.
그의 그러한 성취는 황보세가 역사 이래 전무후무한 일이다.
황보군은 이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붕절에 도전했다.
허나 붕절 육초식 중 전삼식(前三式)을 완성했을 뿐
더 이상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강호종횡하며 영명을 떨칠 수 있을 정도건만
그는 돌연 폐관에 들어갔다.
가공하여 가히 하늘이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무학을 지니고도
이를 익히지 못해 초일류가 아닌 일류무가로 만족하여야 하는
황보세가의 한(恨)과 염원(念願)을 자기 손으로 풀고자 하는 의지의 발상이었다.
단사영은 과거 얼핏 들은 바가 있는 황보군에 대한 얘기를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황보형께선 뜻한 바를 이룬 듯하구료.]
그의 음성은 진지했다.
그런데 황보군의 얼굴에 수심이 짙게 드리워지는 게 아닌가?
[후… 그랬으면 오죽 좋겠소이까,
호언장담한 채 페관에 들었지만
우매한 재주로는 도저히 패절을 익힐 수 없었소이다.]
[허면 이미 쾌절과 붕절을 대성했단 말이오?]
[쾌, 붕의 십이초를 대성했긴 하지만 실상 가장 무서운 패절을 익히지 못했소이다.]
[쾌절과 붕절을 동시에 익힌 것만으로도 황보세가 역사상 전무하다고 들었는데…]
[전무한 것은 아니오,
천 년 역사 속에 두 가지 절기를 모두 대성한 선대 조상분들도 여럿 계셨소이다.]
[헌데 강호에 소문이 나길…]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하외다.
그 분들은 명예를 추구하기 보다는
후대를 위해 강호에 출입을 금한 채 패절에 계속 도전하다가
홀로 유명을 달리하신 진정한 황보세가인들이었소이다.]
[………]
[그랬기에 그분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 분들이 남기신 해법(解法)을 통해
본인이 짧은 시간에 쾌절과 붕절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외다
. 만약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마 나 또한 폐관에 든 채
붕절을 익히기 위해 지금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 것이오. 허허허…]
[음…그랬구료…]
단사영은 나직이 신음했다.
자신의 영리보다는 가문을 먼저 생각하여
죽는 그 날까지 뇌전십팔풍을 해법하려 했던 수많은 황보세가인들의 염원은
오직 황보세가의 이름을 천 년 만 년 강호에 남기기 위함 뿐이리다.
이때 황보군이 입을 열었다.
[기실 제남으로 가는 이유는 제남땅 태산(泰山)에 오르기 위함이오.]
[태산?]
[태산제일봉인 관일봉은 이 대륙에서 제일 먼저 태양이 뜨는
강한 양성지운(陽性之運)을 지닌 열지(熱地)요,
그런 열지엔 자연 양정(陽精)을 영양분으로 하여 자생하는
영물(靈物)이 있기 마련인 법,
우연한 기회에 태산 관일봉 부근에
음양생기초(陰陽生氣草)가 자생한다는 정보를 얻은 가주께서
본인의 출관을 명한 것이오.
음양생기초의 열매는 태양의 정분을 흡수한 양물 중 가장 극양한 양물이오.
그것을 복용하면 능히 패절을 익힐 수 있소.
하여 태산으로 가던 길에 단형을 만나게 된 것이오.]
[음양생기초가 태산 관일봉에 자생한단 말이오?]
[가주께서 얻으신 정보는 정통한 것이오.
분명 음양생기초가 자생하고 있소.]
황보군의 음성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단사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뇌리를 굴렸다.
(음양생기초라면 강호인은 물론 세상 사람들 모두 탐을 내는 영초인데…)
-음양생기초(陰陽生氣草)!
대자연의 신비가 잉태시킨 영초(靈草)다.
뿌리를 지심(地深)에 두어 음기(陰氣)를 흡수하고,
뜨거운 양기(陽氣)를 잎으로 빨아들여
작은 호두알만한 영매를 맺게 하는 음양생기초는
분명 하나의 풀이지만 그 풀 속엔 음과 양이 극성이 함께 융화되어 있는
영초 중에 영초다.
음양생기초의 열매는 극양(極陽)을 토대로 하여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공능을 가져다 준다.
음양생기초의 뿌리는 극음(極陰)의 무공을 익힌 자에겐 공능을 준다. 하여
강호인이라면 눈에 불을 키고 아다니는 영초가 바로 음양생기초다.
황보군이 음양생기초의 열매를 탐내는 이유는
황보세가의 뇌전십팔풍이 양성을 지닌 무학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 순간 단사영의 머리에 새겨지는 것은
음양생기초의 정보를 대체 어떻게 황보세가에서 알아냈냐는 의문이다.
황보군의 말을 듣고 추리해보면 그 정보는 황보세가가 알아낸 것이 아닌
외부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것이다.
문득 단사영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단사영은 걸음을 옮기며 황보군에게 물었다.
[황보세가의 재정이 크게 휘청였겠구료.
그들의 입맛은 제법 까다롭다고 하던데…]
믿도 끝도 없이 내던진 말이다. 헌데 그 말에 황보군의 얼굴이 크게 변했다.
[허억! 어떻게 그 사실을…]
[오래 생각해 볼 필요도 없지 않소,
강호인들이라면 음양생기초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터!
결국 대륙 제일의 정보통인 암흑상영(暗黑商營)이
그 정보를 황보세가에 판 것이 아니겠소. 허허허…]
[허어… 오 년 전 다정공자는 문무를 겸비함은 물론 강호 정세에도 정통하다 하여
가히 만사무불통지였다 하더니만 과연 명불허전이구료.
그렇소, 그 정보를 본가에 판 쪽은 단형 말마따나 암흑상영이었소.]
황보군의 말에 단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상영(暗黑商營)!
그들은 강호인이면서도 강호인이 아니다.
그들은 상인이지만 역시 상인이 아니다.
그들은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는 자들이며
백색도 검은 색도 아닌 회색인(灰色人)들이다.
그들이 다루는 상품은 정보(情報)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그들의 이목을 벗어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파는 정보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게는 서방의 계집질에서부터
넓게는 황실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다루는 그들의 정보망은
가히 거미줄을 방불케 하는 조직망에서 나온다고 한다.
하나 그 뿐이다.
더 이상 강호에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갖가지 정보를 얻고 싶어하지만
암흑상영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쌀알 찾기보다 더 힘들다.
그들은 정보를 들고 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직접 찾아와 거래를 트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댓가는 엄청나고 뒷끝이 깨끗하기로도 유명하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지닌 암흑상영은 이 시대에 있어 가장 뜨거운 감자라 불리운다.
취한다면 세상 전부를 얻는 것과 같으나
워낙 구름 속의 신룡인 양 신비로워 찾을 수 없는 자들!
그들이 바로 암흑상영의 거래자 회색상인들이다.
암흑상영에선 음양생기초의 존재를 파악하고는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황보세가와 흥정을 한 것이 분명했다.
단사영은 황보군을 직시했다.
[황보형에게 기연이 닿길 빌겠소.]
[고맙소이다. 단형.]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걷는 사이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조그만 마을에 도착하였다.
자그마한 촌락(村落)인지라 주루라고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곳
단 하나뿐이다.
주루는 무척 붐볐다.
단사영과 황보군은 시장한 터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단사영은 젓가락을 멈추고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곳에는 한 명의 아리따운 백의소녀(白衣少女)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우락부락한 장한이 서너 명 앉아 있었다.
그녀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준수하게 생긴 금의청년이었다.
백의소녀는 무료한 듯 주루 안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단사영과 눈길이 마주치게 되었다.
(아…멋진 미장부다. 저 차가운 듯한 얼굴이 더 매력적이다. 어멋! 날 보고 있어…)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는 그녀는 몹시 유혹적이었다.
단사영은 시선을 백의소녀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무심한 듯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백의소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刻印)되어 있었다.
헌데 이건 또 무슨 기운인가?
검은 눈동자 속에 서려 있는 백의소녀의 모습엔
왠지 모를 그리움이 담겨져 있는 게 아닌가?
그 그리움은 오랫 동안 헤어졌던 정인(情人)을 다시 만날 때 나타나는 그런 종류였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백의소녀가 아름다운 미소녀임은 분명하지만
그녀 나이는 잘해봐야 열여덟 정도밖에 되어보이지 않는다.
문득 단사영의 입가에 쓸쓸함이 번졌다.
(운지(雲芝)…벌써 그녀를 보지 못한지 오년이 지났구나.
아마 지금은 사랑하는 지아비를 모시고
아들 딸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 현모양처가 되어 있겠지…
하나 이제는 다시는 만나서는 안 된다.
운명은 그녀를 잊으라고 내게 말했다. 아니 그녀를 저주하라고…)
단사영은 술잔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죽엽청이 무척 썼다.
(잊자, 오 년 전 그 날, 나의 사랑도 무너졌다. 그리고 내겐 사랑이란 사치다.
난 오직 원수를 아 다니는 복수귀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백의소녀를 고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백의소녀는
공교롭게도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던 한 여인의 모습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기 때문 쉽게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운지(雲芝)…
절대십천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현자(賢者)이며
어쩌면 절대십천 중 가장 뛰어난 절대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분분한
천우대존(天宇大尊) 사마장청(司馬長靑)을 아버지라 부르는 유일한 혈육,
사마운지(司馬雲芝)…
사마운지와 다정공자 단사영의 사랑얘기는
오 년 전 강호의 아름다운 얘깃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 년이란 세월 속에 서로 잊혀져 버린 얘기일 뿐이니…
그런데, 그 주루 안에는
이러한 단사영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한 명은 약 십칠 세 가량의 소년(少年)이었다
. 소년은 주루의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여인 뺨치는 준미수려한 용모를 지녔다.
누가 보아도 귀공자(貴公子)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단사영이 처음 주루 안에 들어올 때부터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단사영이 백의소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소년은 힐끗 백의소녀를 바라보며 연신 나지막한 냉소를 날리는 것이었다.
[흥!]
그러나 그러한 그의 행동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한 사람은 약 오십 세 가량의 초노인이였다.
황의를 걸친 초노인은 음식을 시켜 놓고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단사영이 하는 행동을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이때 백의소녀의 곁에 앉아 있던 금의청년의 눈썰미가 꿈뜰거렸다.
단사영이 자기 곁에 있는 백의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
금의청년은 단사영을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도 단사영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백의소녀의 얼굴만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음식에 열중해 있던 황보군도 단사영의 이상한 행동을 느꼈다.
[단형, 웬일이오?]
[아, 아니오.]
단사영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벌써 상당히 친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마치 친한 친구처럼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체하겠소.]
황보군이 단사영을 향해 충고 했을 때는 단사영이 음식을 다 먹고 난 후였다.
단사영은 힐끗 백의소녀를 바라보았다.
백의소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곁에 있는 금의청년만 계속 단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갑시다.]
단사영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가 계산대 앞에서 음식값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그의 곁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단사영을 예의 주시하던 황의노인이었다.
그런데 돌연,
[이크!]
황포노인이 무엇에 걸린 듯이 넘어지면서 그에게 부딪쳐 왔다.
[노인장!]
단사영이 얼른 부축해 주자
황포노인은 몹시 미안한 듯이 연신 손을 부비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소이다.]
단사영은 재빨리 주루를 빠져 나왔다
. 백의소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한시바삐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황보군은 그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으나 별로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하나의 객잔을 찾아들었다.
객방(客房)에 든 단사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운기조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운기조식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 하였으나
자꾸 아까 보았던 백의소녀의 얼굴과 사마운지의 얼굴이 겹쳐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이나 자자.]
마침내, 단사영은 중얼거리며 일어서서 옷을 벗었다.
이때 그의 소매 속에서 뭔가 굴러 떨어졌다.
툭!
그것은 작게 말려진 종지 쪽지였다.
단사영은 얼른 허리를 숙여 소매 속에서 떨어진 종이조각을 집었다.
-오늘 밤은 조심하시오.
편지의 사연은 간단하였다.
그 한 줄의 사연 말고는 보낸 사람의 성명이라던가
무슨 기호라던가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해 보았으나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쪽지를 누가 자기 소매 속에 넣었는지조차도 알 길이 없었다.
그 순간,
쉭!
창문을 뚫고 한 줄기 검광(劍光)이 날아들었다.
단사영은 깜짝 놀라며 몸을 피하였다.
검광은 소리도 없이 그의 침상에 박혔다.
침상에 박힌 것은 한 자루의 단검(短劍)이었다.
[흥!]
가볍게 냉소한 단사영은 단검을 뽑아들었다.
단검에는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동쪽 밖 관왕묘(關王廟) 앞으로 나와라.
단사영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우선 가 보기나 하자.]
단사영은 경장을 갖추고 여섯 자루의 장검을 멘 다음 창문을 통해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촌락의 동쪽엔 제법 수풀이 우거진 야산이 자리해 있었다
. 야산 중턱에 한 채의 사당(祠堂)이 달빛을 받으며 세워져 있었다.
단사영은 그곳이 관왕묘(關王廟)임을 짐작하고는 몸을 날렸다.
관왕묘에 도착하여 보니 사방은 깜깜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열심히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다.
[흐흐흐…]
근처의 컴컴한 숲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사영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숲 속을 응시했다.
찰라 단사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 앞에 어느 틈엔가 세 명의 백발노인들이 우뚝 서 있었다.
모두가 둥그스름한 얼굴에 불그레한 혈색,
그리고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빛 등은
그들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흑련 사람들만이 입는 특유의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흑련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저들은 흑련 총본영에 있는 우내삼마다.)
-우내삼마(宇內三魔)!
고목시마(枯木屍魔).
혈해악살(血海惡殺) 지천무(地天茂).
광불독군(狂佛毒君).
강북 마도 무림의 연합체인 흑련 안엔 무수한 절정고수들이 많다.
하나 흑련의 정예라고 하면 당연 총본영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을 말한다.
우내삼마는 총본영의 호법 수준의 절정고수들이다.
그들 우내삼마는 여간해서는 강호에 출입을 하지 않는다.
한데 이 순간 단사영은 주변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새삼 인식하였다.
우내삼마 말고 또 다른 절정고수가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 것이다.
(이놈들은 총력을 기울였다.)
허나 그는 여전히 침착을 잃지 않은 채 담담하게 입을 떼었다.
[우내삼마가 모두 자리에 모인 셈이군.]
우내삼마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단사영을 품자형으로 에워쌌다.
혈해악살 지천무가 부르짖었다.
[네놈이 바로 오 년 전 행방이 묘연해진 검성의 소성주 단사영이 분명하냐?]
[그렇다. 본인이 바로 단사영이다.]
[후후후…그렇다면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다.]
단사영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그는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띤 채 우내삼마를 응시했다.
[후후후…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광불독군이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단사영! 네놈의 정신이 약간 어떻게 된 게 아니냐?
천하에서 우리 우내삼마의 합공을 받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후후후… 허나 처음으로 오늘 너희들은 나에게 패할 것이다.]
[미친 놈!]
깡마르다 못해 차라리 뼈에 가죽을 씌웠다 말하는 것이 더 옳은
고목시마가 음랭하게 부르짖었다.
[네놈과 길게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
노부의 고목마공(枯木魔功)으로 네놈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말을 마치자마자 고목시마의 신형이 유령같이 움직였다.
쉬익-
어느새 고목시마의 쌍장은 무서운 음한지기(陰寒之氣)를 동반한 채
단사영의 전신을 물샐틈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하하하… 과연 우내삼마의 무공답게 훌륭한 수법이다.]
단사영의 신형은 어느새 번개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스스스스-
괴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신형이 수십 개의 그림자로 분리되었다.
고목시마가 나직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호웃! 이제보니 잔마신영보(殘魔神影步)를 익혔구나.]
고목시마는 입술을 지그시 문채 쌍장을 더욱 기괴하게 휘둘렀다.
[애송이 놈! 어디까지 도망치나 보자!]
꽈르르릉…
찰라 실로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고목시마의 장자개비같은 팔이 순식간에 여덟 개로 나뉘어지더니
가공한 음향과 함께 단사영의 전신요혈을 짓쳐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굉장한 수법이다.)
단사영은 내심 감탄을 하면서 즉시 그자리에서 전신을 돌풍처럼 회전시켰다.
[자살혈강(紫煞血 )!]
화류류류륭…
무서운 파공성과 함께 두 고수의 장력이 정통으로 충돌했다.
콰르르-!
귓청을 찔러 놓을 듯한 음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단사영은 양 팔이 약간 뻐근함을 느꼈다.
그는 약간의 충격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 하나 고목시마의 상태는 대단히 비참했다.
고목시마는 자그마치 일곱 걸음이나 후퇴한 채
입가로 시뻘건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 혈해악살과 광불독군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안색은 몹시 침중하게 굳어져 있었다.
(놈을 경시하지 말라던 흑절신제님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아무래도 우리가 합공하지 않는 한 놈을 꺾기는 불가능하겠구나.)
혈해악살은 즉시 고목시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견딜 만하오?]
고목시마는 무서운 살기가 어린 눈으로 단사영을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직 천초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이다.]
고목시마는 마치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서서히 단사영에게 접근했다.
[흐흐흐… 애송이 놈! 과연 네놈은 노부가 만난 상대중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허나 노부 역시 이대로 순순히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혈해악살과 광불독군도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린 채 단사영의 곁으로 접근했다.
[죽어랏!]
츄아앗-!
고목시마가 냉갈을 터뜨리며 제일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그 뒤를 이어 혈해악살과 광불독군도 가세를 했다.
단사영은 여전히 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허나, 마치 격랑처럼 밀려오는 우내삼마의 공격에
그는 전신이 터질 듯한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즉시 잔마신영보를 전개하여 그들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하는 한편
자살혈강과 유성탈혼장을 혼합하여 그들의 공격을 맞받았다.
콰르르릉- 펑-
엄청난 파공성과 폭음이 잇달아 울렸다.
이것은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대혈투(大血鬪)였다.
일세를 주름잡은 천하의 대흉마 우내삼마와
오 년 만에 강호로 돌아온 복수귀 단사영!
그들의 결투는 실로 무림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보기 힘든 결투였다.
양 편은 서로 조금도 꿇리지 않은 채 거의 수백 초를 싸우고 있었다.
우내삼마는 싸우면 싸울수록 어떤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으… 세상에 채 약관도 되지 않은 놈이
천하에 적수를 찾기 힘든 우리 세 명의 합공을 받고도 끄덕이 없다니…)
단사영 역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음…만약 내가 혈왕의 문을 열지 못했다면
이들의 합공을 절대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수백 초가 경과했다.
이미 그들의 싸움으로 인해 주위는 온통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때, 혈해악살은 아무리 공격해도 단사영이 조금도 패한 기색이 없자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두 사람을 보며 소리쳤다.
[안 되겠소, 놈을 잡으려면 즉시 현천환허살진(玄天幻虛殺陣)을 펼쳐야할 것 같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목시마와 광불독군은 안색을 싸늘하게 굳히며
약정된 방위(方位)를 이동시켰다.
찰라 그들의 전신으로부터 웅장한 기운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고오오오…
우내삼마의 합공을 더욱 극대화 시키기위해
그들 스스로 창안해낸 현천환허살진(玄天幻虛殺陣)!
혈해악살은 양손을 단전(丹田)에 댄채 조금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고,
고목시마는 양 손을 상하로 뻗어 건(乾)과 곤(坤)으로 각기 가르키고 있었다.
또한 광불독군은 양 팔을 양 옆으로 쭉 뻗은 채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단사영은 그들의 자세를 보고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실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살기를 느낀 것이었다.
(음, 보아하니 보통 수법이 아닌 것 같다.)
혈해악살이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단사영, 영광으로 알아라!
현천환허살진은 우리가 평생토록 단 한번도 시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 진법으로 네놈을 지옥으로 보내주겠다.]
말을 마치자마자 혈해악살의 입에서 무서운 폭갈이 터저나왔다.
[동(動)-!]
우우우--우우우--우우우--
동시에 진법은 발동했다.
혈해악살은 단전에 모은 양손을 기이하게 뻗었다.
그의 장심으로부터 무서운 소용돌이를 동반한 장풍이 단사영을 향해 날아왔다.
쏴아아아앙…
단사영은 함부로 상대하지 못하고 신형을 허공으로 띄웠다.
순간, 광불독군이 양 팔을 뻗은 그 자세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으며
단사영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음!]
단사영은 위기를 느꼈다.
그것은 그가 예전에는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무거운 위기감이였다.
얼핏 동북방 방향에 허점이 엿보였다.
그순간 그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計)다!
내가 동북방으로 도망치는 순간 날 잡으려는 수작이다.)
과연 그러했다.
만약 그가 동북방으로 몸을 피했다면 영낙없이 고목시마가 발출해낸
을목강살(乙木剛殺)이 단사영의 몸을 휘감아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틈엔가 혈해악살은 구유혈천공(九幽血天功)을 펼치며
단사영의 명문혈(命門穴)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광불독군도 다시 자세를 꺼꾸로 하여
단사영의 백회혈을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천환허살진은 진법의 이름이 말해주듯 환각과 허실이 뚜렷하지 않는 진법이다.
그때그때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진법이다.)
단사영은 내심 부르짖으면서 신형을 무서운 속도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진법의 오의를 깨달은 이상…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단사영의 양손은 어느새 투명한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너무나 투명해 실핏줄이 파랗게 보일 정도였다.
파파파파팟-
투명한 청옥수(靑玉手)가 허공을 누비며 귀청을 찢는 듯한 파공성이 터지는 순간,
[으윽-]
[헉-]
세 마디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장내는 다시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들었다.
허나 보라! 우내삼마의 모습은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전신에 걸친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날리고 있었다.
그 떨어진 옷자락 사이로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반면 단사영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우내삼마를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우내삼마! 지옥으로 갈 준비를 하라!]
단사영은 서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우내삼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의 눈으로부터 지독한 공포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사영이 발출해낸 푸른빛의 수강(手剛)이 우내삼마의 몸을 스치는 순간
그들은 오장육부가 파괴되는 엄청난 중상을 입은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조차 없다.
이 순간 단사영의 입에서 재차 냉랭한 살음이 터졌다.
[가랏!]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가공할 만한 중력이
단사영의 장심에서 터져나오며 푸른 번갯불처럼 작렬했다.
콰르르르릉! 번쩍-!
우내삼마의 안색은 아예 흙빛이 되었다.
그들은 아예 단사영의 공격을 받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끝났구나.)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헌데 어느 순간 한 줄기의 흑영이 번개같이 단사영의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단사영이 뻗어낸 장력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었다.
쾅-!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단사영은 양팔이 시큰함을 느끼면서 뒤로 서너걸음 물러났다.
(도대체 어떤 자가 나의 공격을…)
그는 경악에 잠긴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단사영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자는 백발이 성성한 괴노인이었다.
하얀 백발은 길게 드리워져 허리까지 뻗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
실처럼 가느다란 두 눈에서 음산한 빛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종잇장같이 얇은 입술은 약간 벌어진 채 흉흉한 괴소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백발노인이 나타난 순간 우내삼마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좌총령(左總令)님!]
순간, 단사영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좌총령이라고? 음, 그럼 이자가 흑련의 좌우총령 중 좌총령인 지옥인마란 말인가!)
이때, 괴노인은 단사영을 향해 무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네놈이 구운룡주를 지닌 단사영이란 애송이냐?]
[그렇다.]
[그럼 네가 바로 철혈검제 단천학의 아들이겠군…]
[그렇다.]
[좋다.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과연이었군,
너는 노부가 누군지 아느냐?]
[지옥인마(地獄人魔) 두천악(斗天岳)!]
[후후후…무척 맹랑한 놈이군,
노부를 알면서도 태연함을 유지하고 게다가 노부의 이름을 함부로 내뱉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지옥인마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점차 짙어지고 있었으니…
-지옥인마(地獄人魔) 두천악(斗天岳)!
그는 폭풍천마(暴風天魔) 가율(賈律)과 함께
흑련의 이대총령이란 신분에 있는 전대거마(前代巨魔)다.
원래 그들은 건곤마존과 함께 강호의 마도천하를 주도해온
십팔마종(十八魔宗) 중 두 사람이었다.
삼십여 년 전 철혈검제 단천학에 의해 마도천하가 붕괴되자
십팔마종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대산(五臺山)에 은거한 지옥인마와 폭풍천마를
흑련으로 끌어들인 흑절신제 소섭랑은
그들을 흑련의 이대총령으로 봉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우내삼마에 이어 지옥인마까지 나섰다는 것은
흑련 사상 전무(全無)한 일이다.
하지만 흑절신제 소섭랑은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사영이 전설의 혈왕지문(血王之門)을 열었을 것이라 단정했기 때문이다.
혈왕의 전설을 벗길 수 있는 혈왕정(血王鼎)을
철혈검제에게서 빼앗기 위해 검성을 기습 공격한 흉수 가운데 한 사람이 흑절신제다.
오 년 동안 종적이 묘연했던 단사영이 느닷없이 강호에 나타났으니
흑절신제로서는 자연스럽게 단사영이 혈왕의 무공을 연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력을 기울여 단사영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단사영은 점차 긴장이 고조됨을 느꼈다.
그는 전신에 내공을 극도로 끌어올린 채 상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허나, 그 침묵 속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가공한 살기가 내재되어 있었다.
일각(一刻), 이각(二刻), 시간은 점차로 지나가건만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옥인마의 태연했던 얼굴도 지금은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 역시 단사영이 보통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어느 순간,
[차앗!]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눈 앞에 하얀 그림자와 검은 그림자만이 어른거리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콰르르릉-
경천동지할 폭음이 천지를 뒤흔듬과 함께 두 마디의 짤막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윽!]
[으음…]
절정고수의 싸움은 길게 끌수도 있지만 막상 끝내려면 단숨으로 끝난다
. 지옥인마와 단사영은 똑같이 칠보를 후퇴한 채 전신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했으며
입가로는 붉은 선혈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웩!]
지옥인마가 먼저 피를 토해냈다.
단사영도 선혈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나 이를 악문 채 그것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그러나 눈 앞이 어질하고 마치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이때 누군가가 그에게 일장을 갈긴다면
그 자가 삼류고수라 하더라도 단사영은 그 공격을 피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상태를 짐작한 우내삼마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어려 있었다.
혈해악살이 먼저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단사영, 오늘로써 너의 목숨은 끝이다.]
단사영은 코웃음을 날렸다.
[흥, 혈해악살,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만수무강에 이로울 것이다.]
단사영의 음성은 나직했다.
조용히 흘러나온 말이었으나
이 순간 듣는 혈해악살은 귀청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을 받아야만 했다.
(으윽…!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안색이 창백한 단사영이지만 두 눈빛만은 살아있어
흉흉한 안광을 폭사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혈해악살은 함부로 출수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바로 그 때였다. 어디선가 음산한 어조가 들려왔다.
[혈해악살, 물러서라!]
[……!]
혈해악살은 움찔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지금 지옥인마 옆에는 한 명의 음산한 혈의노인(血衣老人)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우총령인 폭풍천마(暴風天魔)였다.
폭풍천마는 단사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노부는 너의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너의 무공은 노부의 예상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났구나.]
[과찬이다.]
단사영은 담담히 대답했다.
폭풍천마는 두 눈에 언뜻 살기가 스치며 지나갔다.
[흐흐흐… 허나 오늘 네놈은 결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과는 두고봐야 하는 법.]
폭풍천마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단사영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나왔다.
[으하하…단사영! 실로 네놈은 방약무인하기 짝이없구나!
석년 네 애비도 감히 우리 앞에서 이토록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다.]
[……]
[좋다! 네가 과연 노부의 십초를 받아낼 수 있다면 네놈의 방자함을 눈감아 줌은 물론
이곳을 무사히 떠날 수 있음을 보장하마!]
말을 마치자마자 폭풍천마의 오른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단사영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진 그의 오른손이 돌연 시뻘건 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단사영은 그 광경에 가슴이 섬뜩했다.
[흐흐흐……애송이 놈! 노부의 혈사폭풍공(血絲暴風功)을 받아봐라.]
폭풍천마의 그의 손에서 시뻘건 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슈슈슈슈슛--
단사영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져 버렸다.
그는 전신에 금강부동신공(金剛不動神功)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온몸을 보호함과 동시
쌍장을 들어 혈왕지학 중 혈광쇄혼공(血光碎魂功)을 발출하려고 했다.
헌데, 그가 혈광쇄혼공을 내뻗으려는 찰라
극렬한 고통과 함께 내공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윽!]
전신의 혈맥이 무섭게 팽창되면서 기혈이 솟구쳤다.
단사영은 정신이 아찔해옴을 느꼈다.
그가 이러는 사이에 폭풍천마의 장력은 그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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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잘봅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잘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