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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설교집 4. 오래 참음 (끝없는 열정)
(갈 5: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오늘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네 번째 특징으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마크로뒤미아, 즉 "오래 참음"에 대해서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한다는 것이지요. 그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아홉 가지라는 것인데 그 중 네 번째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이 왜 성령의 열매인가? 이것은 사람의 성격이나 사람의 결단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의지적인 결단으로 오래 참는 것과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깨달을 때 성령의 열매가 맺히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성경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의 현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알게 되고 그 때에 우리가 올바른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 기도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그냥 "아! 이런 뜻이겠구나"하면서 자신이 가진 상식대로 하나님의 뜻을 넘겨짚고 성경대로 기도한다고 할 때 엉뚱한 기도를 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일은 너무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할 수 있는 큰 오류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고, 그 중에서 성령의 열매의 특징 아홉 가지를 말씀하시는 이 단어들은 아주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게 해주신다는 성령의 열매의 놀라운 의미를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죠. 야고보서를 보시겠습니다.
(약 5: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 사도가 오래 참음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11절 보시면 인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전까지는 오래 참음을 말씀하셨는데 11절에서는 인내라고 말씀을 하세요. "이건 계란하고 달걀하고 차이가 아닐까?"
제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국어 시간에 장학사들이 참관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어떤 학생이 질문을 했어요. 표준말 시간이었는데, "선생님 계란하고 달걀하고 어떤 게 표준어입니까?" 장학사들이 뒤에 죽 서 있으니까 국어 선생님이 당황하셔서 잠깐 혼돈이 일어난 거예요.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을 못하시는 거죠. 하나는 우리말이고 하나는 한자어잖아요. 당연히 둘 다 표준말이지요. 그럼 여기서 인내는 한자어고 오래 참음은 우리말인가? 그게 아니고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그걸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히포모네"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를 비교하면서 오래 참음이 인간의 결단과 의지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우리가 보고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할 때 그 특징은 인내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보고, 그걸 명확히 볼 때 "아 우리로 하여금 마크로뒤미아라는 것을 가지게 해주시는 하나님은 이런 소원을 가지게 해주셨구나. 따라서 하나님께 마크로뒤미아를 우리가 가지게 해주실 것을 간구할 때 이런 신의 성품이 생기는 것이겠구나"하면서 우리가 소망을 정확하게 가지게 되고, 우리가 함께 간구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음이라는 신의 성품을 가진 자들로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하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이 오래 참음은 인간의 결단과 의지에 대한 단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단어입니다.
(렘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보듯이 이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성품이기도 하겠지요. 신약에서도 보겠습니다.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우리의 회개와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새로운 피조물로의 거듭 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이 길이 참으심, 즉 마크로뒤미아라는 특성은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지요. 따라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아까 보았던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인내라는 단어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7절부터 8절은 우리에게 오래 참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이고 - 10절에서는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 그래서 오래 참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던 선지자들을 언급을 하고 그 다음에 11절에 "히포모네", 즉 인내라는 새로운 단어를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에요? 욥이 등장합니다. 욥은 오래 참음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은 없는 사람이고 인내라는 인간의 의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른 거예요. 지금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은 욥처럼 인내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인 오래 참음을 받아서 발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성경에는 약속이 있고 명령이 있는데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령할 때에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살라는 의미인 것이지, 우리에게 결단해서 그렇게 행동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존재로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이 먼저 기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즉 오래 참음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혀서 오래 참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오래 참으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결국 무슨 얘기가 되요? 결국 회개하라는 말씀이 됩니다. 회개하라. 오래 참는 자로 돌아서라는 말씀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욥을 등장시키면서는 "히포모네"라는 다른 단어를 씁니다. 이 "히포모네", 즉 인내는 인간의 특징입니다. 인간이 참고 견디고 하는 것이 바로 "히포모네"고, 하나님의 성품인 오래 참음이 바로 "마크로뒤미아"입니다. 따라서 "마크로뒤미아"는 인간에게는 없는 성품입니다. 없는 것인데 임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지금부터 성경 여러 곳에서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 즉 오래 참음이라는 신의 성품을 성령의 열매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이 약속의 의미가 무엇이고, 이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이고, 이것이 성취된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인가를 성경에서 쭈욱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18:24~26)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내게 참으소서" 여기서 동사가 "마크로뒤메오"라는 동사입니다. 신의 성품으로써 나를 오래 참아 달라고 종이 탄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 용서를 해줍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신의 성품으로 용서를 해주는데 이 종이 나가서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나서 멱살을 잡고 쥐고 흔들다가 옥에 넣어버리죠. 왜 옥에 넣어버립니까? 오래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오래 참았는데 이 종은 오래 참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조금 빚진 자기 동료를 옥에 넣어버리는 것이지요. 결말이 어떻게 됩니까?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오래 참음이라는 성품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마크로뒤미아를 가지고 살라는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원래 마크로뒤미아라는 특징이 있습니까? 없단 말이지요. 그 사람은 마크로뒤미아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이 임금이 내 마크로뒤미아가 너에게서 나타나지 않고 예전처럼 네가 계속 살기 때문에 너에게 해주었던 나의 은혜는 철회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너는 옥으로 들어가야 된다. 내가 너에게 베풀어주었던 마크로뒤미아, 오래 참았던 것이 너도 나처럼 오래 참지 않는 것이 확인된 이상 내가 너에게 계속 오래 참을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일만 달란트 비유가 나왔는데, 용서라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하는 용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그 오래 참음에 대한 얘기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용서도 신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인 마크로뒤미아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까 야고보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욥처럼 인내하는 것밖에 못합니다. 욥처럼 인내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처럼 마크로뒤미아 할 수는 없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오래 참음이라는 것이 인내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히브리서 보시지요.
(히 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여기서도 오래 참음은 마크로뒤미아란 말이지요. 마크로뒤미아는 이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전제 조건으로서 이 마크로뒤미아가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크로뒤미아를 받지 못하면, 아까 일만 달란트 비유도 같지만, 하나님의 성품인 마크로뒤미아를 우리가 받아서 그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으면, 약속의 기업을 받기가 어렵다. 이렇게 진행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욥이 했던 인내하고 신의 성품인 마크로뒤미아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히포모네"와 "마크로디미아"는 어떻게 다른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도 인내를 합니다. 그렇죠?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그런 격언도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인내를 합니다. 인내를 할 때 무엇을 위해서 인내를 합니까? 자기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인내를 합니다. 사람들이 인내를 하는 것은 결국 자기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서 인내를 하는 것이지요. 자기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서 인내를 하고, 그 인내가 선한 열매를 맺느냐, 악한 열매를 맺느냐는 것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하는 얘기고, 사람들의 인내는 모두 무엇을 맺어요? 무엇을 결과합니까? 사람들의 인내는 모두 바벨탑을 결과합니다. 그 바벨탑이 하얀 바벨탑이든 까만 바벨탑이든 빨간 바벨탑이든 파란 바벨탑이든 종류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두 바벨탑에 불과하단 말이지요. 가이사의 세계 사람들의 인내는 모두 바벨탑을 쌓는 데에 필요한 것들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욥의 인내를 말씀하실 때 이 욥의 인내는 아주 특이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특이한 것을 가지고 있냐면 자기 바벨탑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인내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인내는 모두 자기 바벨탑을 쌓기 위한 것인데 왜 욥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인내를 하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바로 하나님이 주신 환난 때문입니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여기서 인내가 히포모네입니다. 아까 욥에 있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히포모네라는 단어를 씁니다.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가 아니고 히포모네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지요. 이제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단어 하나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성령의 열매에 이어서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육체는 인간의 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정욕은 정, 그리고 탐심은 인간의 의지입니다. 바로 인간의 지정의, 즉 인격 자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탐심이라는 단어를 어떤 단어를 쓰냐 하면 "에피뒤미아"라는 단어를 씁니다. 아까 "마크로뒤미아"와 "에피뒤미아"가 비슷한 단어입니다. 마크로뒤미아와 에피뒤미아가 접두사만 다르고 뒤미아는 동일한 겁니다. 그런데 마크로뒤미아는 성령의 열매고 에피뒤미아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할 것이냐? 갈라디아서 5장 안에서 극단적으로 서로 대치가 되고 있는 두 단어입니다. 좀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뒤미아라는 단어는 열정, 그리고 의지, 이런 말입니다. 그럼 앞에 마크로가 붙으면 좋은 것이고 에피가 붙으면 나쁜 것이냐? 그런 의미는 전혀 없어요. 에피뒤미아할 때 "에피"라는 것은 "어디를 향하여' 이런 말입니다. 마크로뒤미아는 마크로스와 뒤미아가 합쳐진 말입니다. 마크로는 "길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말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미크로스, 영어에서 마이크로죠. 여기서 마크로뒤미아가 되었든 에피뒤미아가 되었든 모두 무슨 뜻이냐 하면 "뭔가를 위해서 열정을 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에피뒤미아는 뭐가 나쁜 뜻이라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랬느냐? 에피뒤미아는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빌립보서인가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할 때 욕망이라고 하는 단어로 에피뒤미아를 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을 에피뒤미아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에피뒤미아 자체가 십자가에 못 박을 대상이 아니고 영어로는 모두 "desire"(열망)를 쓴단 말이지요. 그런데 "desire"가 쓰일 때 그 내용상 "divine desire"가 있고 "sinful desire"가 있는 겁니다. 신성한 하나님의 디자이어가 있고 즉 하나님의 열망이 있고 인간의 죄악된 욕망이 있단 말이지요. 따라서 에피뒤미아라는 단어 자체도 나쁜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할 때의 탐심이라고 번역된 에피뒤미아는 내용상 sinful desire라는 죄악된 욕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단어가 모두 세 개가 나왔습니다. 오늘 성령의 열매를 의미하는 오래 참음(마크로뒤미아)-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열망을 의미하는 에피뒤미아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 다음에 인내라는 단어로서 인간의 의지와 결단을 의미하는 히포모네, 그렇게 모두 세 단어가 나온 겁니다. 이 단어들 사이의 차이를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 때 우리에게 맺힌다는 성령의 열매의 특징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인내는 가이사의 세계 사람들이 하는 바벨탑을 쌓기 위한 인내와는 다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가 보았던 욥의 인내라든가, 로마서에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할 때의 인내는 어떤 인내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환난으로 인해서, 그 환난을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회개시키기 위한, 나를 개조시키기 위한 징계로서의 환난이라는 것을 믿고 꿋꿋이 참는 것입니다. 견디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가지신 소원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 환난을 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묵묵히 참아내는 겁니다. 욥처럼 그것을 묵묵히 참아내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정의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할 때의 그 인내입니다. 그 인내는, 하나님이 주신 환난을 꿋꿋이 참아낸다고 할 때의 그 인내는 인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동원되는 인간의 성품이에요. 그 "히포모네'라는 게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귀하게 쓰이는 인간의 성품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기 위해서 그 인내를 발휘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 인내를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령한 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개조되는 것이지요. 그 과정을 이를 악물고 참는 거예요. 그래서 점차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고 나면, 우리 안에 뭐가 생기게 되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게 되면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씀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할 때 그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 소망이 뭐예요? 나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 소망을 가지게 되면 내 삶이 어떻게 되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면서, 거기에서 내가 할 역할을 찾아서 꿋굿이 해나가는 겁니다.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내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내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꿋꿋이 살아나가는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마크로뒤미아입니다. "오랜"이라는 "마크로"와 "열망"이라는 "뒤미아"가 붙여져서 어느 하나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그 믿음을 가지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 - 그것이 바로 마크로뒤미아입니다. 따라서 이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하느냐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그 믿음이 전제 조건이 될 때 그 믿음의 기반 위에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에 동참하는 삶의 모습이 바로 마크로뒤미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가아사의 세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마크로뒤미아라는 것이 나타날 일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부 뭐만 있어요? "히포모네"만 있는 것이죠. 그 히포모네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다 무엇을 이루어요? 자기 바벨탑을 이룹니다. 자기 바벨탑을 쌓기 위한 자기 인내는 주변에 어떤 일을 일으킵니까? 다른 사람을 짓밟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죠. 경쟁해서 이겨야 하니까. 처참하죠.
그래서 이 마크로뒤미아-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뜻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이 가지게 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사람, 그것을 본 사람만이 한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자기 삶을 실을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 크리스찬에게, 또는 하나님의 뜻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크리스찬에게, 그저 나 잘 되고 내 새끼들 잘되고 대한민국 잘되었으면 좋겠고 인류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뭐 이런 황당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크로뒤미아가 임하겠어요? 마크로뒤미아가 임할 수가 없습니다. 마크로뒤미아가 작용할 데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꿋꿋하게 나아가는 것은 뭘 가지고 나아가는 거예요? 마크로뒤미아가 아니라 히포모네를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냥 자기 고집이죠. 자기 신념, 자기 의지지요. 그래서 자기 신념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서로 다른 것처럼 -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인간의 신념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신념을 가지고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것은 히포모네고,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을 받고나서 하나님의 뜻이 우주적인 차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나서 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히포모네가 아니라 마크로뒤미아입니다. 따라서 이 마크로뒤미아 - 오래 참음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고 신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이론적인 얘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현실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현실적인 말씀은 제 경험부터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 경험이 대단한 것이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이런 경험이 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사람마다 그 모양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아주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천에 가서 사람의 말로는 가히 이르지 못 할 말을 듣고 내려온 사람입니다. 왜 듣고 내려왔겠어요? 성서를 기록해야 하니까. 성경을 기록해야 하니까 특별한 말을 듣고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중에 그 이후에 누가 또 특별한 말을 듣고 내려오면 어떤 일이 생기겠어요? 성경 밖에 있는 말을 성경처럼 권위를 두어서 말하게 됩니다. 그럼 뭐가 생기게 되죠? 이단이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스미스(?)라는 사람인데 몰몬교의 창시자죠. 몰몬교는 스미스라는 19세기 미국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어디 가서 땅을 팠더니 황금 판 위에 새겨진 몰몬경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몰몬교라고 부르죠. 말일 성도 그리스도교라고 부르죠. 몰몬경을 받았다는 겁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위해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주셨던 특별한 체험 이후에는 그런 식의 체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의 체험을 누군가 하게 되면 이단이 하나 서는 거예요. 그런 체험은 있을 수가 없고 그 뒤의 체험들은 모두 종속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저도 그 종속적인 체험 중의 하나를 경험했고 그걸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 김용호라는 사람은 저런 놀라운 체험을 했구나"라고 그런 눈으로 보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럴 분들도 여기 계시지 않지만, 제가 좀 조심스러워서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고, 이제부터 이 오래 참음에 대한 제 체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오래 참음이라는 신의 성품이-신의 성품이라고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외람되지만-성령의 열매가 저에게 맺히기 위해서 두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체험을 하기 전의 제 모습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전도사이면서도 교회에서 도망을 가서 지리산에 일주일 동안 숨어 있다가 갈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교회로 돌아오곤 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오락가락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오래 참음이라는 마크로뒤미아가 맺혀지기 전에는 제가 은혜도 받고, 어떤 일정 수준의 체험도 있고, 제 인간적으로 의지도 있고, 또 인내력도 있고, 고집도 있고, 꿈도 있고, 이런 것들로 인해서 전도사가 되었는데 전도사가 되고 나서도 제가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교회에서 도망쳤다는 것이지요. 못하겠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지리산에 일주일 동안 갔다 온 얘기는 여러분 대부분들 아시는데. 그렇게 계속 흔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 흔들리는 것이 언제 종결이 났냐 하면,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환상을 보면서 종결이 났습니다. 그 환상이 뭐냐 하면, 지난번 함께 기도원에 갔을 때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렸었지요. 저에게서 엄청난 때가 씻겨져 나가고나서 붓대롱에 매달린 눈같이 흰 붓털이 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제가 하나님 손에 매달린 붓대롱의 붓털이 되어 있더란 말이죠. 하얗게 씻겨진 붓털로서 붓 대롱에 매달려 있고 제 눈 코 입이 거기 붙어 있는 그 환상을 보고나서는 그 후로는 도망친 적이 없어요. 저는 그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아!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용도로 선택을 하신 거구나"하고 내가 그걸 이해하게 되니까 내가 더 인내가 강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도 여러 강렬한 체험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하필 제가 붓털로 변한 그 환상을 보여주신 이후에는 흔들림이 없었는가? 그때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가 맺힌 걸로 제가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나타난 현실적인 결과가 이제 교회에서 도망치는 일은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지요. 교회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마크로뒤미아가 맺힌 것이지요.
그리고서 두 번째는 그것만으로 불충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보여주셨냐 하면, 기도원에서 제가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애들 엄마가 사라지는 일이 있었지요. 자기는 사명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 사명을 감당하러 가겠다고 갑자기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서 저에게 찾아온 게 뭐냐 하면 공황장애라는 게 일시적으로 찾아왔어요. 아내가 사라졌다는, 그래서 제가 혼자 남았다는 그 상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극심한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포의 특징은 "이 우주 공간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아이덴티티가 상실되는 것이었죠. 나라는 존재가 현실로 잘 인식이 안 되는 거예요. 거기서 오는 공포는 엄청나게 큰 공포더란 말이지요. 그게 신정론에서 말하는 존재의 불안정성이 극도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공포가 엄청나게 밀려오니까 기도원 예배당의 강대상 밑에서 일주일을 있었습니다. 공포 때문에 예배당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어요. 일주일을 계속 기도하는데 일주일째 되는 날 그 상황이 종료되는 체험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게 어떤 체험이냐 하면, 제가 우주 공간 속에서 먼지처럼, 자기 포지션이 없이, 나라는 아이덴티티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여전히 있다가, 갑자기 블랙홀 같은 게 눈 앞에 나타났어요. 그러면서 제가 그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빨려 들어가면서 보니까 제 앞에 또 다른 우주가 펼쳐져 있었어요. 그 다른 우주도 별들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제가 아주 그 쪽으로 가버리면 뭔가 일이 잘못될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제 몸뚱이가 반쯤 빠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 나왔습니다. 다시 돌아오면서 그 환상은 없어졌는데 그 순간부터 저의 존재의 불완정성 문제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완전히 끝이 나고, 저는 공황장애였다고 생각이 드는데, 내 존재의 불안정성 문제 때문에 생겨나는 그 공포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 뒤로.
그리고서 뭐가 달라졌냐면, 그 두 가지 체험으로 제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냐면,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는 것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 없는 날들이 계속되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돌발적인 무슨 일이 벌어지든, 누가 갑자기 나타나든,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고 거기서 한 퍼즐 조각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내가 그 사명을 감당해 가려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온전한 퍼즐 조각으로 쓰신다는 그 상황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이 지금 10년이 지나왔습니다. 그건 하루 24시간 내내예요. 단 한 순간도, 일 년 중 단 하루도, 하루 중 단 일 분도, 일 초도 거기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습니다. 계속 가는 거죠. 이 오래 참음이라는, 마크로뒤미아라는 상태는 - 인간적으로 제가 표현을 하겠습니다 - 최고의 상태입니다. 더 이상 뭐가 부러울 것도 없고, 더 이상 어떤 결핍을 느낄 일도 없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그 상황입니다. 나의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가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차원의 섭리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는, 매 순간 눈으로 보는, 단 한 번도 의심이 가지 않는 이 상황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 마크로뒤미아라는 성령의 열매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존재의 안정성,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내가 동원되고 있는, 하나님에 붙들려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고 계시고 있다는 것이 매 분, 매 초 확인되는 이 삶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극한의 복입니다. 그래서 제가 몇 번 말씀드렸지요. 저는 이 일이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고요. 그 표현이 그렇게 합당한 표현은 아닌 것 같아서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는 표현이고, 괜히 뭐 비장한 결단, 아주 인간적인 냄새가 날 수도 있는 표현이라서 제가 잘 쓰지 않기는 합니다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 우리에게 약속하신 삶,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우주적인 차원의 삶입니다. 내 인생, 내 가정, 대한민국, 뭐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류의 역사? 먼지 같은 거죠.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인류의 역사는 하찮은 거예요.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 일이 진행이 되는데 비교할 것이 없어요. 이 오래 참음의 성령의 열매가, 마크로디미아라는 신의 성품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와 보조를 맞추면서 살아가게 되면 목숨을 던지는 거요? 하찮은 일이죠. 내 목숨 하나 던지는 게 뭐 그리 거창한 일입니까? 하찮은 일이죠. 그런 삶이 진행되는 것이죠.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오래 참음의 마크로디미아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면, 그러면 사람들이 울고불고 웃었다 울었다, 기뻐했다 슬퍼했다, 희로애락으로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는 삶이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울 일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웃을 일도 아니고, 그게 나를 기쁘게 하는 일도 아니고, 그게 나를 슬프게 하는 일도 아니에요. 울고 웃고 할 일이 없어지는 겁니다. 우주적인 차원의 엄청난 일이 진행되고 있고, 거기에 내가 동원이 되어 있는 이 마당에 이것 때문에 웃었다, 이것 때문에 울었다 할 일이 아닌 거죠. 그렇게 진행이 되는 겁니다. 제가 두 번의 체험 이후에 10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지만, 다들 떠나고 허 전도사하고 나하고 둘이 남아도 상관없다는 것이죠. 만약에 하나님께서 허 전도사를 먼저 데려가시고 나 혼자 남아도 상관없다는 거죠. 우주적인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는데 상황과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누가 같은 은혜를 받아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서 진행된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고 나 혼자 덜렁 남았다, 그래도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누구 눈치 볼 일도 없는 거고, 여기 뭐 몇 명이 모여야 된다는 그런 꿈도 없는 거고, 순간순간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데, 뭐 주변적인 상황에 가치를 두겠어요? 가치 둘 일이 없는 겁니다.
오직 불타는, 애끓는 것은 뭐겠어요? 여러분도 나처럼 되어야 하는데 - 그것 하나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불타는 열망 -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은 "내가 리더고 너희들은 날 따라와라" 이런 얘기가 아니고, "여러분도 나처럼 되어야 합니다"라는 것이지요. 이 오래 참음, 존재의 안정성과 하나님과의 연합과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의 진행에 같이 동참하게 된 오래 참음이 맺힌 사람은 소원이 딱 하나에요. 뭐겠어요? "저 사람도 나처럼 되어야 하는데. 저 사람도 저렇게 울었다 웃었다, 희로애락의 소용돌이에서 완전히 원수 사탄 마귀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저 삶에서 빠져나와서 이 마크로뒤미아를 차지한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그 생각 밖에 없는 거예요. 누굴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보더라도 측은해 죽겠고, 이명박 대통령을 보아도 불쌍해 죽겠고,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육교 위에서 애기를 업고 구걸을 하는 아주머니나 그 육교 밑을 벤츠를 타고 지나가는 회사 회장님이나 똑같이 불쌍한 거예요. 똑같이 불쌍한 겁니다. 너무너무 처절한 겁니다, 모두.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나처럼 만들 수 있나? 어떻게 하면 저 사람도 나처럼 마크로뒤미아를 받을 수 있는가? 거기에만 모든 정신이 가 있는 겁니다. 다른 것들은요? 다른 것은 다 무시해라? 그게 아니고, 다른 것들은 모두 거기에 필요한 도구들이니까 부차적으로 소중한 겁니다. 내 직업도 거기에 동원되는 귀한 직업이니까 부차적으로 내 직업도 중요한 것이고, 내 건강도 중요한 것이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간 관계들도 중요한 것이고, 부모님도 나처럼 되어야 하니까 부모님도 귀중한 분들이고, 내 자식들도 나처럼 마크로뒤미아를 가진 존재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내 자식들도 귀하게 섬기는 것이고, 그 전에 있었던 내 주변에 있던 것들 중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나서 하찮게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이제는 더 소중한 존재들이 되는 것이고, 내 직업도 이 일이 진행되는 데 필요한 재물을 벌어들이는데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내 직업도 더욱 소중한 직업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다 수단으로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다 이 일의 수단으로 동원되기 때문에 귀중한 것들로 변하게 되는 것이죠. 속세를 떠나서? 수도원에 가서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산다? "나는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까 난 이제 세상에 대해서 진절머리가 났어." 그건 뭘 잘못 안 사람의 얘기에요. 이 세상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를 던져버리는 겁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되기 위해서. 이 일이 진행되고 있는데 뭐 세상 사람들의 밥이 되겠다는 그런 얘기를 하냔 말이지요. 그건 택도 없는 얘기에요. 이건희 회장도 불쌍해 죽겠는 판인데 누구한테 밥 한 끼 주는 게 지금 목표가 될 수 있습니까? 단지 수단일 뿐이지요.
이 마크로뒤미아 - 오래 참음이라는 신의 성품을 우리가 받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마크로뒤미아라는 신의 성품을 받게 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다 던지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주적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섭리에 조그마한 퍼즐 조각으로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죠. 별 일이 다 일어나도 이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퍼즐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만에 빠진다면 그건 또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퍼즐 조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퍼즐 조각은 온전한 퍼즐 조각입니다. 이 온전한 퍼즐 조각의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 마크로뒤미아입니다. 울고 웃고 하는 삶은 이제 끝난 거예요. 나를 괴롭히는 일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고,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 나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지는 겁니다. 오직 내가 섬길 사람들만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약속과 일맥상통하는 마크로뒤미아의 약속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 그 일이 진행되는 데 있어서 최고의 훼방꾼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죠. 뭐. 내가 행복하고 싶다는 내 야무진 꿈. 그게 계속 훼방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 일이 우리 주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진리를 나누고 진리를 공유하고, 함께 성찬을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서로 권면하고, 서로서로 중보기도하고 할 때에 이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빛을 반사해서 비추어 주는 빛이어야 되는 것이지요. 우리 스스로 발광한다고 생각을 하다간 진짜로 발광하기 쉽죠. 우리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우리는 반사하는 겁니다. 이번 사순절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진행하시는 것에 감사드리고, 이어지는 성찬에서 귀한 일을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저희들이 동원되는 온전한 퍼즐 조각들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나님 뜻대로 하실 때, 저희가 평안과 감사 가운데서 꿋꿋하게 따라가는 가운데 이 신비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일들을 이루심으로, 구덩이 속에서 수렁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물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빛을 우리로 인해서 보게 되는 그 일도 이루시옵소서. 이번 사순절에 주시는 은혜가 이 세상에 비추는 은혜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 저희와 같은 은혜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연결되게 하시옵소서. 놀라운 일을 이루심에 감사드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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