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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소송과 고문서(朴秉濠)
*目次*
一. 머리말
二. 일제 강점기의 소송과 고문서
三. 고문서 증거에 의한 소송의 사례
1. 본관의 다툼Ⅰ
2. 본관의 다툼Ⅱ
3. 종통의 다툼(譜訟)
四. 맺는말
一. 머리말
문서는 발급자와 수령자 간에 문서 내용의 의사 표시가 전달됨으로써 문서의 본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며 그 사명을 다한다. 그러나 문서에 따라서는 시간적 효력이 일시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이 있다. 예컨대 관직이나 직책을 임명하는 문서는 그 관직이나 직책에 종사하고 있는 동안 효력이 있으며 직무 명령은 수명자가 그 명령에 따른 의무를 완수할 때까지 효력이 있으며 이들 문서는 관직이나 직책이 바뀌거나 종료한 경우, 임무를 완수한 후에는 증거문서 즉 고문서의 성격을 띠게 된다. 권리나 특권을 부여하거나 이를 확인하는 문서, 재산적 권리의 창설이나 이동에 관한 문서는 의사 표시의 목적이 달성된 뒤에도 그 권리의 법적 체제가 존속하는 한 영속적인 효력이 있다. 또 소송문서·판결문도 영속적 효력이 있다. 그러하여 영속적인 효력이 있는 문서도 주권자의 이동과 보호 법제의 소멸로 인하여 증거 문서인 고문서로 된다. 그러나 시간적 효력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증거문서인 한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법적 효력이 승인될 수도 있다.그리하여 시간적 효력을 다한 문서 즉 고문서는 역사 연구의 제일차적 사료로서 그리고 고문서학의 연구 대상 자료로서, 혹은 예술적 자료로서 중요한 학문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이 글에서 지칭하는 고문서 는 시간적 한계로서 대한제국시대를 포함한 조선왕조시대까지의 고문서이며 크고 적고 간에 이른바 사료 가치를 지니는 고문서이다. 또 여기서 현대 라 함은 1910년의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까지를 뜻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의 고문서가 현대 법 체제 하의 법원에서 소송상 서증으로서 제출되고 법관에 의하여 채택됨과 동시에 법관에 의하여 혹은 감정에 의하여 그 진정함이 증명되어 채택되는 내용을 고찰함으로써 우리 고문서의 현대적·법적 가치와 효용을 음미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판결 자료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한 흠이 있으나 글의 목적하는 바의 일부라도 소개되어 학술 발표회의 주제에 부응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二. 일제 강점기의 소송과 고문서
갑오개혁 이후의 대한제국시대에는 모든 법제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되었으므로 서서히 일제식 근대적 제도가 자리잡게 되었고 隆熙3年(1909) 7월에는 사법 사무가 통감부에 위탁되고 11월부터는 통감부 裁判所令에 의하여 새로이 재판소가 구성되어서 운영되었고 병합이 된 후인 1912년에는 법원이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으로 개칭되어 광복 당시까지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재판제도가 바뀌었고 실체법, 절차법은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대한제국 때까지의 거의 모든 권리의무관계는 제도개혁과는 관계없이 명칭을 달리한 채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고 따라서 분쟁이 있는 경우에는 그 권리·의무의 실체적 관계의 존속이 승인되는 한, 소송 상의 이익이 보장되었다. 말하자면 부동산의 권리관계, 가족·종족 관계상의 권리 관계는 연속성이 있었고 소송상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구법상 보호되었던 실체 관계를 재판함에는 구법시대의 법, 관습, 관례에 대한 가치판단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일본인 판사들에게는 생소하고 난해하였기 때문에 유권적인 해석이 재판의 전제로서 요구되었다. 그래서 구법관계가 전제로 된 경우에는 각급 법원, 법원장, 재판장, 재판소의 각부는 조선총독부에 대하여 조회를 하면 통감부의 법전조사국, 조선총독부의 취조국장, 정무총감, 중추원 서기관장,중추원의장, 중추원이 회답을 하고 법원은 이들 회답에 의거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이 조회에 대한 회답을 모은 것이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간행한 민사관습회답휘집(1933. 12)인데 여기에는 당시의 민사에 관한 회답 324건이 수록되어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법원의 조회에 대한 회답이며 그것은 1909년부터 1930년까지의 회답이다. 즉 일제침략 후 약 30년 간에 조선시대의 문서·기록이 증거와 감정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회답에서 표명된 것은 문서기록의 의의, 효력, 관습에 대한 법원으로서의 권위와 효력이 부여되어 있었다. 참고로 문서에 관한 회답과 조선고등법원 판례의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啓字(1911. 4. 8. 취조국장회답)啓字는 啓奏에 대한 재가의 뜻을 타나내는 경우와 군주의 명령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를 적거나 날인하는 것이다. 황실에 속하지 않는 토지·가옥 중 국유물은 啓字문서에 의하여 인민에게 하사할 수 있었으나 인민의 소유물을 啓字문서로 하사한 경우에는 그 토지·가옥의 소유권은 啓字문서에 의하여 이전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7궁에 속한 부동산을 啓字문서를 하사한 때에는 곧바로 신민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지만 기타의 궁가의 것은 啓字에 의하여 부동산소유권을 취득하지 않는다. 한국 황제가 신민에게 하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신민이 소유하는 부동산은 보상하지 않고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
(2) 한성부윤의 立旨(1916. 4. 12. 중추원회답)종전에 한성부윤은 관할 외의 토지에 대하여 입지를 발급한 사례가 있으나 이는 월권처분이며 따라서 그 입지와 당해 관찰사 또는 군수가 발급한 입지가 부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당해 관찰사나 군수가 발급한 입지가 진정한 것이다.
(3) 입지·완문과 분묘(1921. 8. 29 중추원서기관장회답)한성부윤이 그 관할 외의 토지에 대해서 발급한 입지 또는 완문도 유효하다. 완문·입지·입안 등으로 墳墓龍虎내의 入葬을 금한 때에는 그 구역이 大典에 정한 바의 步數를 넘은 경우라 하더라도 관례상 유효하다. 입지 또는 완문으로 정한 분묘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던가 또는 심히 광대한 때에는 현지에 가서 그 기재에 비추어 또는 산세를 참작해서 결정한 것이다. 분묘의 한계를 측정함에는 보로 계산하며 주척 6척이 1보이며 주척 1척은 곡척 6촌 6분이다.
(4) 완문중의 글자의 뜻(1916. 8. 16. 중추원서기관장회답)완문기재의 4표중 九峯山下라 함은 그 산의 아래를 지칭하는 것이지 산의 전체 또는 중복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5) 절목·완문의 효력(1917. 6. 12. 정무총감회답)구한국시대에 군수·부사 또는 관찰사는 토지의 경계 또는 소유에 관한 쟁송을 재결하며 완문 또는 절목을 부여했다. 완문·절목은 사실을 조사해서 부여함이 원칙이나 일방의 신청만에 의하여 부여한 일도 있다. 완문·절목은 누구에게나 대항할 수 있었다. 관찰사가 상사의 명령에 따라 부사가 부여한 절목과 상반하는 절목을 부여한 때에는 유효하며 전의 절목은 그 효력을 잃는다.
(6) 한성부윤의 직무권한(1922. 6. 7. 중추원서기관장회답)한성부의 관할 구역은 한성 내에 한정되며 현금의 경성부의 구역과 거의 동일하다. 토지에 관한 사건에 대해서는 한성부는 그 구역에 불구하고 입지·입안을 발급한 권한이 있었다. 한성부윤의 입지·입안은 당해 관찰사 또는 군수의 완문·입지등을 근거로한 경우에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7) 折半한 賣買文記(1928. 3. 19. 중추원서기관장회답)賣買文記에 2필지 이상의 토지가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어떤 필지를 매매하는 경우에 文記를 양단하여 그 한쪽(매매목적토지가 기재된 부분)을 신문기와 함께 매수인에게 교부하는 일이 왕왕 있으나 1필의 토지를 매도할 때에 그 文記를 절반해서 매수인에게 교부하는 관습이 있음은 아직 듣지 못했다.
(8) 禮斜의 효력(1929. 8. 31. 중추원 회답)한국시대에 장례원에서 발급한 예사(입안)는 제사·호주·재산의 상속에 대해서도 그 예사에 기재된 문언에 따라 확정 판결과 거의 동일한 효력이 있다. 다만 예사는 후에 왕왕 취소되는 일이 있다.
(9) 奴名(1929. 7. 3. 중추원서기관장회답)구시대에 양반가에서 법률 행위 또는 소송 행위를 할 경우에 사용하는 奴名은 所有奴의 이름으로 하는 경우든, 家長이 소유한 奴名으로 하는 경우든 불문하고 항상 1인의 이름을 정하여 사용하며 미리 여러 종류의 奴名을 정해두는 일은 없다. 이 奴名은 호주 또는 택호의 변경 또는 명의노의 존부에 관계없이 수대에 걸쳐서 계속 사용하는 일이 있다. 어떤 명의노의 사망 기타로 변경하는 일도 있으며 일정한 관습이 없다. 그러나 어떤 노의 이름으로 매수한 부동산을 매각하는 경우에는 실제로 그 노의 유무에 불구하고 그 노명으로 매각하는 것이 통례이었다. 이 경우에 사용하는 노명은 주인의 택호 혹은 성 밑에 그 이름만을 쓰는 것이 통례이나 성명을 병기하는 일도 絶無하지는 않았다.
(10) 토지투탁의 효력(1912. 12. 18. 정무총감회답)구시에 한 私人이 그 소유토지를 궁가에 투탁한 것은 표면상 궁가의 소유인 것처럼 꾸미는 수단일 뿐이며 소유권이 궁가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3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궁가의 소유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11) 사패지(1914. 7. 23. 정무총감회답)구한국시대에 일정한 구역을 정해서 토지를 사패한 경우에 그 구역내에 있는 민유지는 사패를 받은 자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12) 山主의 뜻(1914. 11. 24. 조선고등법원판결)산주라는 문자는 분묘소유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산판소유자도 지칭한다.
(13) 전답문건의 전당(1911. 6. 16. 조고판)전답문권을 전당한 경우에 당연히 流質約款을 포함한 것으로 하는 관습은 없다.
(14) 牌旨(배지)의 성질(1909. 9. 3. 조고판)배지는 매매의 유인장에 불과하며 매매청약서 혹은 예약서 또는 매매의 대리위임장이 아니며 배지발행자가 매수의 의사표시에 대해서 승락 즉 매각의 의사표시를 함으로써 매매계약이 성립한다.
(15) 舍音의 성질(1910. 4. 2. 조고판)사음은 그 관계한 땅에 대해서 본주를 위해서 수조등을 하고 그 인도를 끝마칠 때까지는 대리점유를 하는 것이며 법률상 의의는 관리인과 다르지 않다.
(16) 舍音의 관리권의 범위(1920. 6. 8. 조고판)사음은 수확조의 매각의 수탁이 조선의 관습상 사음의 전답관리사무 중에 포함된다고 함은 당원이 인정하지 않는 바이다.
(17) 幼學의 뜻(1913. 9. 23. 조고판)유학이라는 것은 은거의 뜻이 없다.
(18) 妾의 姓의 冠稱방법(1912. 5. 12. 조고판)조선에서 첩은 항상 자기의 성을 관칭하며 남편의 성을 관칭하지 않음이 관습이다. 따라서 첩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 남편의 성을 冠稱하는 이유로는 되지 않는다.
(19) 系譜의 改變(1912. 7. 30. 조고판)계보는 그 일족의 계통을 밝히는 것이므로 마음대로 개변해서는 안되지만 소지자가 함부로 개변한 경우에 일반 族人은 물론 종손이라 할지라도 그 복구를 청구할 권리가 없다.
(20) 上疏에 대해서 내린 상속회복의 명령(1014. 7. 24. 조고판)상소에 대해서 내린 명령은 판결과 동일시할 것이 아님은 물론 구한국시대에도 이를 판결과 동일시한 관습이 없다. 또 그 명령으로 破養을 취소하고 상속회복을 명령하더라도 이미 성립한 파양 행위를 당연 무효가 되게 하지 않는다.
(21) 위조문권의 귀속자(1912. 6. 13. 조고판)위조문권은 누구의 소유에도 속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므로 증거에 의해서 타인의 소유에 속하지 않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三. 고문서 증거에 의한 소송의 사례
문서의 시간적 한계를 1910년까지의 것으로 한정하는 전제에 선다면 조선시대의 문서를 고문서로 보게 된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고문서는 원칙적으로 일응 그 본질적 효력은 물론 시간적 효력도 종료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고문서가 현대의 소송에서 증거로서 그 효력이 문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고문서 중에서 통치체제의 교체나 법제의 근본적 개혁이 있은 뒤에도 법적 증거력을 기능하고 승인 받았던 것이 부동산 특히 토지의 재산권에 관한 고문서이었는데 이 고문서들도 증명제도,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사정제도, 등기제도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들 제도의 실시 초기에는 법적 분쟁이 폭주하여 소송상 증거로서 효력을 발휘했으나 현재는 그 분쟁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소송에서는 조선시대 고문서가 증거로서 제출되는 일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소송에서 제출되었던 각종 고문서가 현대의 소송에서 다시 본질적인 증거로서 재기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조선시대의 譜訟즉 宗統에 관한 다툼이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다툼은 족보의 위조에 의한 종통분쟁, 본관에 대한 다툼, 적서의 분쟁 등인데 이 분쟁들은 사실상의 분쟁으로서 계속되고 있기도 하지만 오랜 원한이 쌓여서 폭발된 경우에는 법적 분쟁으로서 법원에 제기된다. 여기에는 한국의 특수한 사정이 역사적으로 연속되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조선후기인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사족사회에 뿌리내린 유교적 종법적 가족제도·종족제도는 필연적으로 장자, 장손에 의한 조상제사의 영속 즉, 종통의 계승, 계후자 입양의 보편화, 묘산과 묘위토 설정의 일반화, 족보의 지속적인 간행에 의한 종통과 종족의 확인, 적서분쟁의 강화로 특징 지웠으며, 이러한 가치들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강화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1970년대까지는 큰 변화 없이 존중되었고 오늘날에는 실정법적 보호를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특징으로서 규정되고 있다.여기서 소개하는 종통분쟁의 사례는 많은 사례의 일부에 불과하며 본인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일 뿐이다. 특히 종통에 관한 다툼은 일제시대 초에는 종손권 확인사건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1933년 3월 3일의 조선고등법원 판결에 의하여 호주상속 및 재산상속의 제도가 확립된 오늘날 이외의 제사상속의 관념은 선대를 봉사하고 조상의 제사를 봉행할 도의상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이다. 단지 타인에 의해서 자기가 종손임을 부인당하거나 따로 제사를 지내는 자가 있는 경우에 강제로 타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종손임을 인정하게 하거나 타인이 지내는 제사의 정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종손인 지위에 수반하여야 할 호주권 또는 재산권의 승계를 다투는 것이 아닌 한 곧바로 종손임의 확인을 구할 법률상의 이익이 없다. 라고 선언 한 것을 계기로 종손권 확인을 청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종손권 확인을 위하여는 호주상속회복, 소유권이전등기말소, 묘비철거, 묘역출입금지, 손해배상 등의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고 이 소송에서 本案을 심리하기 위한 전제로서 종손임을 확인하는 것이 선결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송판결은 공표되는 예가 거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례를 소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그러한 판결을 인지하였더라도 판결문 중에 증거로 제출된 고문서는 갑○호증, 을○호증과 같이 표시되고 문서명을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무슨 고문서가 증거로서 제출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도 없는 형편이다.
1. 본관의 다툼 Ⅰ
조선 태조 때에 삼도수군절제사로 활약했던 金贇吉(김빈길 시호는 양혜공)을 공동조상으로 하는 자손 중 한 파는 김빈길은 소가야국 말로왕을 시조로 하는 固城金씨 34세손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파는 김빈길은 낙안군 김수장을 시조로 하나 樂安金씨의 8세손이라고 주장하는데 김빈길의 후손인 김열이 성원총보(만성보의 일종)의 편찬시 김빈길의 본관을 낙안으로하는 단자를 바쳐 낙안파는 순조 4년(1804)부터 낙안김씨대동보를 만들어서 낙안김씨로 행세해 왔다. 이에 대해서 고성김씨파들은 순조 28년(1828) 9월에 김빈길의 본관이 고성이므로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예조에 상서하고 증거로서 김빈길의 증손인 김질통의 호구와 그의 8세손인 진사 김홍여의 試紙의 封內, 홍치년간(성종 20년∼연산군 11년)의 장적을 첨부하였다. 예조는 동년 10월 6일에, 김빈길의 본관이 고성임을 확인하고 낙안측이 본관을 낙안으로 한 것은 홍치년간의 장적을 보지 못한 때문이니 예조의 제사를 보여주면 의의가 없을 것이라고 하여 본관이 고성임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고성파들은 예조의 제사를 근거로 하여 족보를 간행하였다. 그 후 낙안파는 광무 11년(1907)에 고창군수에게 소지를 내고 또 전라북도관찰사에게 의송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 후 양파는 공동조상인 김빈길의 묘소에서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합의한 일도 있으나 분쟁이 종식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82년 3월 9일에 낙안파들은 김빈길의 묘소의 비석에 새겨진 고성김씨라는 글자등 50여자를 망치로 부셔 없앴다. 이에 1983년에 고성파 16인은 원고로서 낙안파 3인을 피고로 하여 김빈길 묘소의 출입금지 및 손해배상 소송을 전주지방법원에 제기하였으며(83가합68, 83가합530) 피고들은 이에 대하여 反訴를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원고의 출입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이에 낙안파는 1988년에 고성김씨대종중과 종원 3인을 상대로 하여 김빈길의 묘소와 묘소가 있는 임야의 소유권이 있으며, 위 임야와 묘소 내에 통행권이 있으며, 고성김씨들은 그 묘소에 설치된 모든 석물을 철거할 것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였다.패소한 낙안파는 즉시 광주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989년 11월 23일 제 1심과 같은 이유로 역시 패소하였다.1983년부터 1989년까지 7년여간 계속된, 그리고 1828년부터 160여 년에 걸쳐 계속된 분쟁을 통하여 고성파는 44건, 낙안파는 235건의 고문서, 고기록, 전적등을 書證으로서 동원하였다. 현대의 소송에서 결정적인 증거력을 발휘한 고문서는 예조상서와 그 제사이며 이는 현대소송에서 갑 제19호증의 1로서 제출되었다. 비록 예조에 상서한 때에 첩부했던 호구단자, 시지의 봉내, 홍치년간의 장적은 현재에 전하지 않으나 예조의 제사에서 제출했음을 확인하고 있으므로 전주지방법원과 광주고등법원의 재판에서도 가장 유력한 증거로 채택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김빈길의 장자인 원량의 자손인 고성파는 차자인 희량의 자손인 낙안파에 승소함으로써 김빈길의 본관이 고성임이 확정된 것이다.참고로 제1심인 전주지방법원에서의 감정사항은 1. 예조에 올린 상서 및 그 제사의 해독과 해석, 2. 예조가 소송을 수리할 수 있는 法司로서의 권한이 있는지 여부, 3. 예조제사의 효력, 4. 本件에 관한 제사의 효력이었다.
2. 본관의 다툼 Ⅱ
이 재판사례는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와 경주김씨 백촌공파 종중간의 공통조상의 본관 및 종통을 둘러싼 사건이다. 두 종파는 모두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김문기와 그 아들 김현석을 공동조상으로 하나, 김문기 이하의 본관을 김녕(원래는 김해)으로 하는 것과 경주로 하는 차이가 있고 또 김녕김씨파의 종통은 김문기- 김현석-김충립- 김충지- 김영시- 김논학 등으로 종통이 순차로 이어지고 경주김씨파는 김문기-김현석- 김계훈- 김자용- 김희년- 김양봉 등으로 종통이 순차 이어진다. 쟁점은 김문기, 김현석의 종통을 어느 파가 계승하여야 하는가에 있다.
1) 조선시대의 소송경과
이 양파간의 분쟁·소송은 정조 23년(1799)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단종사화시에 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은 사형되고 그 손자들은 관노로 정속되고 16세 미만자는 외방에 保授되었다가 16세가 되면 관노로 정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후손들은 관노신분에 있거나 도망하여 숨어살고 있었다. 숙종 43년(1717)에 그 후손의 격고상언에 의하여 김문기는 신원되고 영조 7년(1731)에 이조판서의 관작이 회복되고 정조 2년(1778)에 좌찬성으로 증직되고 충의의 시호가 내려지고 그 자손들은 관노의 신분에서 해방되고 군역 등 천역을 면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상도, 황해도, 충청도 등지에서 김문기의 종손임을 자처하는 자가 여러 명 나타나 종통시비가 생겨서 소송으로 번지게 되었다.김문기와 아들 김현석이 사형된 뒤 김문기의 처인 선산김씨는 공신 유수가에 자부인 안동권씨는 역시 공신인 권람가에 종으로 주어졌다. 이는 대명률 모반대역조에 따른 것으로서 15세 이하의 아들, 모, 딸, 처첩, 조손, 형제자매, 며느리는 공신가에 노비로 주며 재산은 몰수되고, 백숙부, 조카는 류3천리 안치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김현석의 처인 안동권씨는 태종의 딸인 경안공주의 손녀이며 따라서 권람은 권씨의 5촌 당숙이며 태조는 외5촌 당숙이 된다. 김문기의 현손인 희년과 덕년은 금고에서 풀려서 중종29년(1534)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희년은 청풍현감을 지냈다.정조 23년(1799)에는 김명규 등이 시호교지를 받아 보관하고 있으므로 김녕파 종중에서 제소하여 복관작 있는 곳에 시호교지도 함께 모시라 는 왕의 전교에 따라 김녕파 종손가에서 양 교지를 보관하게 되었다. 순조 24년(1824)에는 경주파의 선대인 김성언이 김녕파 종중의 선대인 김치신을 상대로 종통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옥천군수와 영동현검이 김성언을 폐소시켰으며 순조 33년(1833)에 김성언이 또 제소하여 승소하게 되자 김문기의 사당과 그 생가 옛 터에 세운 유허비와 김관(김문기의 부)의 묘비 등을 철거해 버렷다. 한편 김성언의 자인 김진황은 부의 묘를 김문기의 부인 김관의 묘역에 몰래 설치하자 김치수는 헌종 10년(1844) 10월에 김진황을 상대로 분묘굴이 및 종통에 관한 소송을 제기하여 충청감사의 승소판결을 받았다.이렇게 소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경주파 김희년의 자손인 김상익과 그 일족들은 헌종12년(1846)에 수로왕계 김해김씨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국가의 허가를 받아서 김문기·김현석을 공동조상으로 하여 경주로 본관을 바꾸고 족보를 간행하였다. 이에 김치수·김의형등은 헌종 14년(1848)에 김상익을 상대로 족보위조죄로 처벌하고 족보를 찾아내어 불태울 것을 장흥부사, 전라감사, 예조에 제소하였으며 철종 1년(1850) 정월에는 족보발행한 김황을 상대로 무주부사에게, 철종 3년(1852) 2월에는 김해를 버리고 경주로 개관입적한 자들을 상대로 남원부사와 진안현감에게 제소하였다. 또한 용담에 거주하는 자들이 신도비와 유허비를 파괴했으므로 이들을 상대로 용담현령에게 제소하고 철종 4년(1853) 3월에는 전라감사에게 비석파괴자들을 상대로 의송을 제기했고 11월에도 비석파괴자들을 상대로 태인현감에게 제소하였다. 그러나 이들 제소에도 불구하고 피고들이 출정하지 않으므로 소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위와 같은 소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김녕김씨파의 선대들은 김문기의 본관인 김해를 관향으로 하고 있었는데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의 혼동을 피하고 또 김문기의 후손을 사칭하여 투탁입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김해의 고호인 김녕 으로 개관하기로 결의하고 헌종 5년(1849) 12월에 예조에게 개관허가를 신청하였으며 종중에서 상의하여 선처함이 마땅하다는 개관허가의 제사를 받고 4년 후인 철종 4년(1853) 6월에 충청감사에게 개관허가신청을 하였는데 종중사이기 때문에 감사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제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예조의 제사와 충청감사의 제사를 근거로 하여 종중결의로써 김녕 으로 개관하여 각처의 종원에게 그 뜻을 통문으로 알렸다.위와 같이 조선시대의 김문기의 자손을 자처하는 자들은 김문기의 본관인 김해를 칭하는 파와 김희년 이후 청풍김씨를 칭하는 파와의 분쟁이었는데 헌종 14년(1848)부터는 김해김씨와 경주김씨로, 그리고 철종 5년(1853)경부터는 김녕김씨와 경주김씨로서 종통을 다투게 된 것이다.이 조선시대의 소송에서는 양파에서 각자 자기 주장의 진실성·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모든 문서를 동원·제출하였고 가계와 嫡傳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손이 실려있는 선외가의 족보를 비롯하여 호적도 증거로서 제출되었다. 양파는 서로 승소와 패소를 거듭하였으나 판결의 확정을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소송제도상 三度得伸法이 있었으나 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의 재판관들로서도 임진왜란 이전의 문서증거가 없기 때문에 판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2) 현대의 소송
위 양파간의 분쟁은 1982년에 다시 재연되었다. 즉, 순조 4년(1804)에 김해김씨파의 김도형(김치수의 부)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마곡리에 있는 김문기의 조부인 김순의 묘에 묘비를 세워 관리해 오다가 1976년 9월경에 김녕김씨 종중에서 낡은 묘비를 철거하고 묘비·상석등을 새로 설치하고 김녕김씨 종중과 김순의 둘째 아들인 김지를 공동조상으로 하는 김녕김씨 대사성공파 종중이 공동으로 김순의 묘를 수호·관리해 오고 있으며 양 문중원 4명에게 명의 신탁하여 오고 있었다. 그런데 경주김씨종중과 김재문은 김재문이 김순의 23대 종손이므로 관리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김녕김씨종중과 그 종원으로서 김순의 21대 종손인 김진대를 상대로 하여 묘비등 시설물의 철거와 위자료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를 1982년에 청주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82가합35) 이 소송에서는 경주김씨 종중과 김재문이 승소하였고 김녕김씨종중과 김진대는 이에 불복하여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였고(82나4690) 김재문이 불복상고하였으나 역시 대법원은 김재문의 상고를 기각하였다.(82다카1934)1983년경 경주김씨종중에서는 경주김씨 백촌공파 대동보를 발간했는데 그 首卷, 卷之一및 경주김씨 백촌 김문기선생 종통고증록등에는 우리의 파조이신 백촌공의 종통을 어지럽히는 사이비 무리들이 다시는 이러한 방자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 사이비 백촌후손이란 무리들이 나타났고 우리가 잃어버린 선조님 묘소를 그들의 묘소인양 불법으로 입비하는가 하면 우리의 종통까지 말살하려는 간계로 혹세무민하고 있읍니다. 고 있고 김충립 이하는 김문기·김현석의 후손이 아닌 날조 손이므로 백촌공 손이 아니라고 기재하고 있다.이에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는 1986년 위와 같은 족보의 卷之一배포금지 및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를 서울지법에 제기하여 패소하였고(1988. 3. 2. 86가합263)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역시 패소하였으므로(90나12788)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며 대법원은 1990년 2월 27일 환송판결을 하였다.(89카12275) 사건이 환송된 서울고등법원에서는 다시 재판하여 1997년 1월 31일 원고 승소판결을 하였다.(90나12788) 경주김씨 백촌공파 종중은 이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97년 7월 22일에 상고기각판결이 선고되었다.(97다13542)이 소송에서 김녕파에서는 348여건, 경주파에서는 195여건의 고문서, 고기록이 증거로서 제출되었다. 조선시대 소송에서 증거로 제출된 소지, 의송, 상서, 보책등이 이 소송에서도 거의 그대로 증거로서 제출되었다. 김녕파가 제출한 고문서 중에서 특히 주목할 문서는 改貫신청에 관한 예조상서와 충청감사 의송이다. 또 함풍 7년(철종 8년,1857) 4월에 김문기의 자손인 김치수 외 6명이 예조에 대하여 예조가 보관하고 있는 김문기의 신원과 그 자손들의 군역등 잡역물침에 관한 수교를 등급해 줄 것을 신청한데 대하여 예조가 수교를 등급한 受敎傳準帖이다. 이 帖은 신청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각 수령에게 帖下된 것이다. 그 밖에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수장하고 있는 漢城府謄給 2건이 증거로서 제출되어 있다. 하나는 가경 21년(순조 16, 1816) 9월의 한성부등급인데 경상도 지례와 성주에 거주하는 김종옥과 김치하등이 황해도 문화, 안악, 해주, 봉산, 재령에 거주하는 김씨들이 김문기의 자손이라하여 한성부에 신청하여 김문기의 복관·증직교지를 등출 받아 시호교지를 수령하려 하므로 이들이 김문기의 자손이 아님을 한성부가 소장하고 있는 장적에 의하여 바로잡아 줄 것을 청구하는 소송을 정조22년(1798)3월 3일에 제기하였는데 순조 16년(1816)까지 계속된 소송의 소지와 제사를 등급받은 것이며 등급문서의 길이가 15미터이다. 다른 하나는 을사(헌종11년, 1845) 7월 경상도 지례에 거주하는 김치수 등이 영동에 거주하는 김성언등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한성부가 보관하고 있는 각종 문서를 등급 받은 것이며 등급문서의 길이가 11미터이다.이 소송에서의 감정사항은 위의 문서 외에도 8건의 소지, 1건의 의송, 1건의 통문, 시호교지, 증직교지 등 10여건의 고문서가 문서의 내용, 형식등으로 보아 그 眞正성립 여부를 감정하는 것이다.
3. 종통의 다툼(譜訟)
서울민사지방법원 81가합6793 소유권이전 등기말소청구사건은 하양 허씨간의 종통 즉 원고와 피고 중 어느 편이 종손을 비롯한 종파인가의 다툼이다. 원고는 하양허씨 문경공파 종친회이고 피고는 허상 외 29인이다. 문제는 원고와 피고의 어느 쪽이 許稠(허조)→許詡(허후)의 종통을 계승하는 가인데 이 소송은 이미 조선 순조 16년(1816)에 비롯된다.
1) 조선시대의 소송
후는 단종복위와 관련하여 세조에게 김종서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하여 거제에 안치한 뒤 교살 당했다. 이 때 그의 아우인 訥(눌)의 장자인 慥(조)도 자살하였으며 그 가족들도 연좌형에 처했다. 그 후 영조 23년 정월에 김재로가 허조의 복관을 건의하였고 정조 14년 2월 19일에는 허조의 관작을 회복하고 홍문관 부제학을 추증하고 그의 봉사손을 녹용하도록 했는데 이는 유학 허묵의 상언이 계기가 된 것이며 정조 15년 2월 21일에는 허후와 허조를 장릉 배식단의 정단에 배식하게 하고 허연령과 허구령도 별단에 배식하도록 했다. 한편 허후의 자손들은 영조 27년(1751) 신미에 괴산에 거주하는 허해가 족보(신미보)를 간행했는데 허후는 자녀가 없는데 눌의 제2자인 담을 후의 계후자로 등재하였다. 그 후 장릉지, 명신록 등에는 慥(조)가 詡(후)의 친생자로 되어 있으므로 순조4년의 갑자보, 순조 14년의 갑술보에는 조를 후의 친생자로 하였다. 그런데 순조 16년에 괴산의 허걸이 담- 정- 인을 종통으로 만들기 위해서 담을 후의 계후자로 하는 병자보를 발간하고 순조 20년에는 조를 후의 계후자로 하고 정을 조의 자로 바꾸었다. 헌종 12년(1846)에는 허일이 자기를 종손으로 하는 병오보를 간행하였다.하양 허씨들은 순조 16년의 병자보의 발간을 발단으로 하여 허후- 조- 연령- 충- 보- 소로 이어지는 종통임을 주장하는 파(이른바 하양파)는 후- 담- 정- 인으로 이어지는 파(이른바 괴산파)와 순조 16년에 소송하였고 순조 20년에는 경진보를 발간한 허질을 상대로 소송하였으나 종통을 병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헌종 12년에는 병오보의 발간자인 허일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확정적인 판결이 없었다.그 후 철종 14년(1863)에 하양파들은 자기들을 종통으로 하여 허조와 허후의 문집을 발간하려 하자 허일 등 괴산파가 문집간행의 중지를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문집간행 중지의 승소판결을 받았다. 이에 하양파들은 불복하여 반격의 소송을 제기하여 2월부터 소송을 진행시켜서 6월 11일에 하양파들은 직접 예조에 상서했으며 예조는 하양파가 정당하니 괴산파가 간행한 족보는 모두 관정에서 불태우라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경상감사에게 지시했다. 9월 22일에는 경상도 유생 730명이 하양파의 편에 서서 피고들을 엄벌하고 문집을 간행할 수 있도록 명령할 것을 경상감사에게 제소했으나 감사는 9월 24일자로 公議에 맡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하양파가 예조에서 받은 승소판결을 감사가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명쾌한 해결을 보지 못한 채 현대에 와서 재연하게 된 것이다.
2) 현대의 소송
1981년에 조선시대의 하양파의 후손인 하양허씨 문경공파 종친회는 조선시대에 제출했던 문서·기록을 그대로 증거로서 신청했고 피고들은 조선시대 괴산파의 후손으로서 당시에 제출했던 문서·기록을 역시 증거로서 제출했다. 모두 66건의 문서·기록인데 소지 11, 의송 8, 예조상서 5, 교지 16, 왕지 3, 査官과 會査官의 첩보 2, 분재기 1, 준호구 3, 감결 1, 통문 3, 상서 1, 장적등급소지 4, 첩보 1, 족보 6, 하양허씨보계변증(융희1년 목활자본) 등이다.이 소송에서의 감정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하양허씨 신해대동보와 김해허씨 신사보를 비교하면 상당한 부분 그 이름이 유사한 바(1) 稠의 9세손 면부터 구명도생 책으로 김해허씨로 변관하였다가 다시 하양허씨로 복관하였다는데 우리나라 고대의 관습상 이와 같은 변관 및 복관이 가능한지 여부.(2) 위 두 족보를 대비 분석하여 과연 신해대동보가 하양허씨 문경공파의 족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여부.
2. 하양허씨 신해대동보에 의하면 稠- 詡- 慥- 延齡- 忠으로 그 가계가 이어지는바 허조·연령·구령 3부자가 단종복위에 연루되어 처형된 사실에 비추어 당시의 법제로서 충 이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지 여부.
3. 위 1, 2항의 감정결과에 비추어 과연 충이 연령의 아들이라고 기재된 부분이 신빙성이 있는지 여부.
4. 숙모지, 단묘충의록 기타 감정참고 자료에 비추어 허연령의 사망당시 나이가 9세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
5. 신미보, 허묵의 초간보, 괴산 허걸의 병자보, 경진보, 거창 허일의 병오보의 기재에 비추어 문경공 허주의 자 후의 하계와 허조의 하계가 매우 변동이 많은 바(1) 위 족보들이 날조하여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2) 위 감정결과에 비추어 허정이 조의 아들이라고 기재된 족보의 신빙성 유무.위와 같은 감정을 함에 있어서 이용 할 수 있는 공기록은 조선왕조실록뿐이며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 의금부등록, 형조를 비롯한 관계 관아의 기록, 장적을 비롯하여 보송이 행해졌던 당시에 증거로서 법정에 제출되어 채택되었던 기록류, 문서류도 족보와 소지류, 첩보류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다. 오직 당시의 재판기록 원본이 왕조실록에 버금 하는 신빙할 수 있는 문서이다. 더욱이 문서 중에는 인명을 변조한 부분이 있고 담당 색리의 수결이 없는 문서도 있다. 특히 하양허씨보계변증이라는 목활자본은 당시의 보송에서 등장된 거의 모든 문서·기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변조되거나 정확하게 위문서의 내용대로 수록하지 않은 것이 많다. 따라서 그것은 원문서와 대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참고로 감정사항에 대한 감정의견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변관 및 복관
통상의 경우에 개성명이나 개관은 이례에 속하나 전란이나 천재지변을 당하여 유기된 고아로서 부모나 조상을 알수 없는 경우에는 호구신고 시에 성관을 창설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타인에게 수양된 경우에는 수양부의 성관을 따르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이 후에 본래의 성관을 알게 되었을 경우에는 관의 허가를 받아서 본래의 성관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자손들이 후에 본래의 성관을 알게 된 때에도 국가의 허가와 종중결의에 의하여 복관하는 것이 공인되었다. 원고의 선대인 하양파는 특진까지는 본관이 하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자인 면부터 그 5대손까지 김해로 하였으나 5대손 때에 인척인 회재 이언적후손가의 비문과 임진왜란 이전의 경상도장적을 수장하고 있는 안동부의 장적을 등급받아 하양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영조 44년에 복관했으며 피고들의 선대도 임진왜란 당시 보첩을 잃어서 김해가 본관인줄 알고 입적하였으나 역시 안동부에 수장된 장적의 등본에 의하여 하양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순조 27년(1828) 5월에 예조에 복관신청을 하여 그 승인을 받아서 복관하였다.
2. 신해대동보와 김해허씨 신사보
두 족보를 비교한 결과 충부터 정해·유해까지의 11대에 걸친 계서가 대체로 동일하나 신해대동보는 하양파가 갑술보 및 그 후의 재판결과를 근거로 한 것이므로 원고인 하양파의 종족에 관한 한 하양허씨 문경공파의 족보이다. 즉, 김해허씨 신사보에는 충이 思可의 자로 되어 있으나 문과방목의 여러 책에는 하양인으로 문과에 급제한 輔의 부는 충이며 보는 亮의 부로 기재되어 있다.
3. 충 이하 자손들의 과거응시
연좌형에서 방면되면 허통됨으로 과거에 응시 할 수 있으며 청요직을 제외한 관직에도 등용될 수 있는 바 충 이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세조실록에 의하면 세조 12년부터는 허조의 연좌인들은 방면·허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충이 연령의 아들인지 여부
충이 연령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선 시대의 재판에서 인정되었던 바 당시의 모든 문서증거의 원본이 현존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 그 사실에 신빙성을 보강하거나 혹은 번복부정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병오보에 관한 소송에서 원고들은 안동부 소장의 장적에서 許邵의 장적을 등급받았는데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幼學許邵年貳拾玖戊申本河陽父通訓大夫前草溪郡守輔祖生員忠曾祖正郞延齡그런데 오늘날 이 장적은 전하지 않는다.
5. 연령의 사망당시 나이가 9세인지 여부
허연령은 피화당시 9세라고 볼 수 없으며 16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령과 구령이 慥의 子로서 연좌처교 되었음은 세조 2년 6월 7일의 실록기사와 동학사 魂記에 비롯되는데 이 사실은 숙종 37년에 박경여·권화가 공편한 장릉지에도 동학사 혼기를 인용하였고 정조 15년 2월에 연령과 구령이 장릉배식단 별단에 배식되고 정조어명으로 15년 4월에 편찬한 장릉지와 정조 20년의 어명에 의한 莊陵誌補草稿의 기록도 동학사 혼기에 말미암은 것인데 사실이야 어떻든 국가에 의하여 공인된 사실이며 따라서 연령은 16세 이상일 것이다.
6. 여러 보책의 날조여부와 족보의 신빙성
신미보, 허묵초보, 병자보, 경진보, 병오보는 稠와 詡로 이어지는 大宗의 종통을 계승하기 위한 목적에서 詡의 아래 계통에 변동이 가해졌으며 하양파의 종통주장 이전에 간행된 신미보와 허묵초보를 제외한 보책은 부분적으로 그 타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또 精이 慥의 아들이라고 기재된 족보의 신빙성은 희박하다.
四. 맺는말
조선시대의 고문서가 현대의 소송에서 서증으로서 제출된 경우에는 그 眞正文書임이 증명되어야 하고 모두 현대문으로 번역되어서 증거로서의 효용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특히 조선시대의 소송이 현대에 이어지는 경우에는 조선시대에 제출되지 못한 문서도 새로 발굴되어 제출되기도 하며 매우 귀중한 문서도 발굴·소개되기도 한다. 따라서 고문서의 법률적 가치는 연면하게 생명력을 갖게 된다. 서양에서 문서가 재판상 재판 외에서 진위감정을 거침으로써 문서가 법률적 가치를 갖게 되고 거기에서 고문서학이 탄생·발전하였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현대의 소송에서 고문서의 법적 성격과 가치를 재인식하게 된다.오늘날의 소송에서 종통분쟁사건 외에도 手記나 文記가 중요한 증거로서 등장하는 예가 있고, 또 晋州鄭氏鄭(정분)의 후손들도 종통분쟁으로 오랫동안 소송을 하였음을 알고 있고 재판 외에서 본관논쟁을 하는 씨족도 있다. 고문서학회로서는 일제강점기의 소송사례도 남김없이 발굴하여 정리할 것이 중요한 과제이며, 고문서를 주된 증거로 하여 소송한 사례들을 수소문하여 정리해 둘 필요도 있다. 앞으로 여기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소송이 있을지는 예측하기 곤란하나 종법가치관이 쇠퇴·소멸되지 않는 한 그리고 종중이나 종중재산에 관한 분쟁을 자주 대법원에까지 끌고 가는 현실을 감안할 때 고문서의 사료적 가치 외에 그 법률적 가치도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民事慣習回答彙集, 조선총독부중추원, 1933. 12
朝鮮高等法院判例要旨類集, 司法協會, 194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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