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2일째.
학생들이 아직 친구들과 낯설어서 그런지 첫날은 조용히 잠자리에 든 것 같다.
아침 식사시간에 늦지 않게 나와 아침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엔 생기가 돈다.



아침은 간단하게...

후쿠오카 시내의 모습

신사의 입구 '도리이' 하늘천자를 닮았는데, 이곳 부터는 신들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무나카타대사
송미대사(마쓰오다이샤)는 신라계 도래인으로 짐작되는 진씨(하타씨)의 씨족신사로 신라의 경주로 비정되는 소시모리로부터 왔다는 일본의 폭풍신 스사노오의 딸들이나 대(對)신라 해상 교통로의 수호신인 무나카타 삼여신 중 하나인 이치키시마히메(나카쓰시마히메)를 하타씨가 마쓰오에 모신 데서 기원했다고 한다.
무라카미천황 재위기 황실로부터 패백을 봉험받는 16개의 신사 중 하나였으며 교토의 수호 신사로써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최고위 신사를 의미하는 관폐대사(칸페이다이샤)에까지 올라서는 중요한 신사다.
마쓰오다이샤의 경내에는 무나카타 다이샤와 오키노시마섬등의 국보나 중요문화재를 수장(収蔵)하고 있는 전시관인 신보관이 있다.
국보로는 금반지, 금동제 심엽형행엽, 삼각연 신수경, 금제 수직기구등이 있다.
무나카타 역사 산책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한 해상 루트의 거점이었던 무나카타지역은 유적의 보고(宝庫). 그리고 항해의 무사를 빈 신사 불각이 유구한 역사를 현대에 전하는 문화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무나카타 다이샤(큰 신사)·헤쓰미야신사(辺津宮)
길의 신‘무나카타 다이샤’는 헤쓰미야 신사(辺津宮):이치키시마 히메노카미(市杵島姫神) 나카쓰미야신사(中津宮):다기쓰히메노카미(淵津姫神)[오시마섬]오키쓰미야신사(沖津宮):다고리히메노카미(田心姫神)[오키노시마섬]의 삼신사로 이루어진 일본 최고(最古)의 신사중의 하나. 고대부터 무나카타의 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지켜지고 계승된 향취높은 문화 지역.
웅대한 현해탄에 면한 아름다운 해안선이 이어진 겐카이(현해)는 고대로부터 중국대륙이나 한반도와의 문화교류의 거점 무나카타 어부족(宗像海人族)의 땅으로서 중요한 곳이다. 게다가 가네자키와 고노미나토 지노시마등의 어항을 가져 옛 부터 대륙과의 교역이나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 했던 지역이다. 물결이 거센 현해탄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던 어부족의 지역이기 때문에 항해의 무사를 빌고 무나카타 다이샤등이 건립 되었다. 국보나 국가와 현 지정인 중요문화재도 다수 남겨져 있고 가네자키나 고노미나토의 윤무등의 무형문화재등 귀중한 역사를 소중히 계승하고 현대에 이어받은 문화의 향취 높은 곳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 신사는 옛 신라인들이 일본으로 넘어와 한반도와 교역을 위해 해상교통로의 수호신을 섬기던 곳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류는 이렇게 이루어졌네요.

신사에 들어가기 전 입과 손 등을 이 물로 깨끗이 씻고 들어가야 한다고 하네요.



일본 가족들이 신사에 뭔가를 빌러 왔네요.


소원을 적은 글들

무나카타대사 신보관(보물 전시관)


신사의 정문을 지키는 개(한쌍으로 되어 있는데, 한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고, 한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다.)

청동거울, 무덤에 소장품으로 많이 남겨져 있다.

일본이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 들일 당시 교두보 역할을 해왔던 오키노시마섬

신보관에 전시된 유물들(ㅇ

국보인 금반지








코우로칸(鴻臚館) 유적지
규슈(九州)의 요부코(呼子)에 있는 나고야성(名護屋城) 박물관에 “당(唐) ㆍ 신라(新羅) ㆍ 발해(渤海)와의 교류”라는 전시 테마가 있다. 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7세기 후반 일본은 법령제(法令制)에 기인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따라서 중국 당나라와의 교류와 함께 신라 ㆍ 발해와의 왕래도 활발히 추진하였다. 규슈(九州)에 있는 코우로칸(鴻臚館)이 당(唐) ㆍ 신라(新羅)와의 교류의 창구였다.」
‘코우로칸’(鴻臚館)은 일본고대의 아츠카(飛鳥,536-701), 나라(奈良,710-753),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794-1047)에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사절단과 상인들을 접대했던 일종의 영빈관(迎賓館)이었다. 또, 일본에서 당나라나 신라로 파견하는 사절단을 환송하는 시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코우로칸’은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후쿠오카(福岡-옛 이름 筑紫)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유적의 존재가 확인 된 곳은 후쿠오카의 ‘코우로칸’ 뿐이다.
후쿠오카의 ‘코우로칸’은 아츠카(飛鳥) ․ 나라(奈良)시대에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대군, 소군, 관(筑紫大郡, 筑紫小君, 筑紫館)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헤이안 시대(平安 時代)에 중국의 외교시설인 ‘코우로지’(鴻臚寺)를 모방하여 ‘코우로칸’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코우(鴻)’의 의미는 ‘크다’는 것이고, ‘로(臚)’는 ‘전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7세기 후반에 하카다 만(博多 灣)에 돌출한 구릉지에 세워진 이 ‘코우로칸’은 커다란 계곡을 남북으로 가른 산등성이를 이용해서 남관(南館)과 북관(北館)을 설치하였고, 계곡은 수로로 활용 되었다. 이 ‘코우로칸’은 7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약 400년간 대외 교섭의 창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코우로칸의 유적지

옛 건물을 재건한 상태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


오늘의 점심은 초밥 정식 - 학생들은 초밥을 처음 먹어본 애들도 있어서 잘 먹지를 못하네요. 고추냉이가 맵다고 하면서...


시원한 냉우동

계란탕 안에는 고기와 새우 등이 푸짐하다.
겐코보우루이 유적지
마리노아시티(유원지)방면의 해안을 따라 겐코보우루이가 구축(복원)되어 있다. 겐코보우루이란, 13세기 카마쿠라 막부가 두 번에 걸친 몽골(원나라)의 침략을 막기위해서 해안가에 구축한 진지다.
1274년 음력 11월 몽골, 고려, 여진, 한족 등으로 구성된 약3만명의 다민족 연합군이 마산항을 출발해서 쓰시마를 정벌하고, 이어서 하카타에 상륙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에서 태풍을 만나 많은 병사가 수장되었고, 결국 일본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하늘이 도운 바람, 즉 ‘카미카제’라고 한다.
1281년 고려군을 주력으로 하는 동로군 약 4만과 구남송군을 주력으로 하는 강남군 약 10만, 합계 약 14만의 대군으로 재차 정벌에 나섰으나, 카마쿠라 막부 12만 대군과 하카타 연안 20km에 이르는 견고한 방루 구축, 강남군의 지연도착, 폭풍, 강제 동원된 다민족 연합군 병사들의 불만과 사기저하등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겐코보우루이 유적지
이토국 역사 박물관
이토국은 2000년전 지금의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지역에 번영했던 도시국가..
바다에 인접해 있고 넓은 평야지대에 방어하기 쉬운 지형으로 번성했고, 특히 국제교류가 활발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과 매우 가까워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도상에선 쿠야칸코쿠(가야한국)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한국하고 그다지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인지라,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 바로 이토국이다.



예전엔 이런 배를 타고 교류를 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지석묘 형태의 묘와 깨진 청동 거울

이토국 역사 박물관에서는 가야에서 많은 문물을 전달받았고.. 고분에서 출토된 대부분이 가야의 수입품들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안녕'이라고 내게 인사를 해준 귀여운 일본 꼬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