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은 부산이다 / ‘최동원 정신’
부산에서 자이언츠에 대한 인기는 불가사의에 해당한다. 과거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하며 돌풍을 일으키자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사가 자이언츠의 인기를 분석하겠다며 부산으로 몰려든 적이 있다. 그때 다양한 분석이 등장했지만 딱히 “이거다”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 풀리지 않던 고리를 최동원이 떠나가며 가르쳐주었다. 자이언츠의 인기, 부산사람들의 야구사랑의 저 밑바닥엔 바로 최동원이 있었던 것이다. 최동원이 우리 곁을 떠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인터뷰 하는 시민들은 막 울었다. 그런데 그 눈물 속엔 그리움도 있지만 미안함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최동원에게 미안했던 만큼 자이언츠를 사랑한 것 아닐까.
우리는 그를 잊고 살았다. 그가 온 몸을 던져 수많은 밥상이 뒤집힐 만큼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었음에도 그가 자이언츠에서 쫓겨날 때 우리는 그를 덤덤하게 보냈다. 그렇게 떠나간 그는 라이온즈에서 후배선수들 눈치 보며 지내다 야구를 접었다. 은퇴식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산을, 자이언츠를 잊지 않았다. 그의 소원은 자이언츠 감독을 하는 것이었다.
‘부산사나이’라는 말이 있다. 최동원이 바로 부산사나이다. 부산사나이의 조건을 꼽자면 우선 ‘말보다 행동’일 것이다. 최동원이 그랬다. 1984년 코리안시리즈에 1,3,5,6,7차전에 등판해 홀로 4승을 거둬 팀을 우승시킨 것뿐이 아니다. 프로입단 전 실업 롯데에 데뷔하자마자 전기리그에서 12승1패를 거둬 팀을 우승시키고 그해 말 챔피언 결정전에서 1주일간 팀의 6경기에 모두 등판하며 42이닝을 혼자 던져 팀을 우승시킨다.
연세대 재학시 동아대와의 준결승에서는 14회 0대0인 상태에서 해가 지자 자고 나서 또 등판해 18회 김봉연의 홈런이 터질 때까지 던져 팀을 결승으로 밀어올렸다. 그는 몇 시간 후 벌어진 성균관대와의 결승에서도 완투승을 거두며 팀을 기어코 우승시켰다. 이틀간 27이닝, 사실상 세 경기를 완투한 것이다. 그는 자다 깨서 던졌고 밥 먹고 또 던졌다. 이길 때까지 던졌다.
부산사나이의 또 다른 조건은 의리 아닐까. 사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이 다소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지만 최동원은 이를 숭고하게 승화시킨 사람이다. 당시 연봉 육칠백만원짜리 선수가 수두룩했고 많은 동료들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최동원은 1억원을 받는 부자였지만 이런 선수들의 현실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에겐 엄청난 손해가 올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선수협의회 결성에 나섰던 것이다. 결국 그 댓가로 그는 롯데에서 쫓겨났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엔 혼자서라도 나섰다.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뜨거울 때 시민들의 대열에 홀로 합류했다. 내 기억에 그는 민주화 대열에 동참한 유일한 운동선수였다. 또 그는 결과만을 보고 행동하지 않았다. 1991년 광역의원선거 때는 서구에서 출마했다. YS의 텃밭에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올 정도로 신념의 사나이였다.
부산이 지금 여러모로 어렵다. 제2의 도시라 하기에 쑥스럽고 과거와 같은 수출의 최전선도 아니다. 사실 최동원이 부산을 떠나면서 부산의 전성기도 막을 내렸다. 지금 부산엔 최동원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의 불꽃 투혼이 필요하다. 그의 의지와 집념이, 또 개인의 이익보다는 팀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보듬을 따뜻한 마음과 헌신적 리더쉽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최동원 기념 야구박물관'을 만들자는 부산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은 고무적인 일이다. '최동원 정신'을 담을 상징적 공간이자 전국 최초의 야구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지금이 적기다. 죽은 최동원을 되살리는 것이 '부산의 르네상스'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부산일보-동아대교수 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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