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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1970년대의 풍납토성 일대를 항공촬영한 모습을 비교하였다.
1925년(을축년) 7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서울에
383.7㎜의 큰비가 내려 많은 가옥이 침수되고 이재민이 생겼다.
이 당시 비가 잠시 그쳐 사람들은 젖은 옷을 말리고 침수된 곳을 매만지고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흘뒤인 7월 15일저녁부터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개부심'한다고 생각했으나
집중호우로 변하여 19일까지 5일간 365.2㎜의 강우량을 나타냈다.
'개부심'은 장마로 큰 물이 난뒤 한동안 쉬었다가 다시 퍼붓는 비가 명개을
부시어 낸다는 우리 말이다. 명개는 갯가나 흙탕물이 자나간 자리에 앉은
검고 부드러운 흙을 일컫는다. 이른바 1,2차 홍수로 일컬어지는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인도교의 최고수위가 11.66㎜를 기록했다. 이 기간 중 강우량은 753㎜였으니 서울 지역 연평균 강수량의
반이 열흘 사이에 쏟아진 셈이다. 이 반복된 폭우로 한강이 범람해 이촌동·뚝섬·송파·잠실·신천·풍납동 지역 대부분이
사라지다시피 했고 용산·마포·양화진 일대도 물에 잠겼다.
을축년 대홍수가 지나고 풍납토성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한강 물이 빠져나가면서
풍납토성의 서북벽이 무너진 채 각종 유물과 함께 땅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안 남쪽 흙더미에서는 항아리 속에 담겨진 채 출토된 청동초두 1점을 비롯해 금귀걸이 구리로 만든 쇠뇌
백동(白銅)으로 만든 거울, 과대금구, 보라색 유리옥, 4등분한 원형 무늬가 있는 수막새 등이 나온 것이다.
커다란 토성의 성벽만이 노출돼 있던 풍납 토성이 홍수를 만나서 은밀하게 간직하고 있던 백제의
속살 일부를 살짝 드러낸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서온 일제 식민사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이 유물을 토대로 "풍납토성이 바로 백제 초기 도읍지이자 그 도성인 하남위례성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895년 명성왕후 살해사건에 선봉에 섰던 '낭인' 중 한 명이다.
아유카이 후사노신가은 1934년 11월 [조선]이란 잡지 제234호에
'백제고도안내기'라는 일본어 글을 싣고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다'라고 획기적인 주장을 편 것이다.
그는 풍납토성을 초기 백제의 도성으로 보는 이유로 두 가지를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풍납토성에서 나온 청동초두다.
초두는 자루가 달린 솥이란 뜻으로 자루솥
이라고도 부른다. 약 술 음식 등을 끓이거나
데우는 데 사용한 용기라고 알려져 있다.
대홍수로 서쪽 벽이 무너지면서 드러난
청동초두나 금귀걸이 유리구슬 등 유물을
결정적인 증서로 제시하면서 풍납토성을
백제의 왕성이라고 아유카이는 주장한 것이다.
"북쪽으로 한수(한강)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즉 서해)로 막혀있고
동쪽으로는 큰 산이 막아 있는 땅"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에서
온조가 도읍지를 결정하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아유카이는 풍납토성을 초기 백제의 왕성임을
거듭 주장한다.
그는 도쿄외국어대 조선어과 1회 졸업생으로서 조선의 문화재를 수집하여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할 만큼 문화재에 조예가 깊었다. 일본의
임나본부설에 의해 조선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삼국사기의 기록을 조작이라 부정하고 백제의 설립을 3-4세기로 주장하던 식민사학자였다.
그가 풍납토성의 유물을 본 후 1934년에 삼국사기의기록을 인정하는 논리를 편 것이다.
삼국사기를 조작이라고 부정하던 사람이 그것을 번복하는 위례성을 인정했으니 획기적일 수밖에 없다.
조선총독부에서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1936년에 풍납토성의 성벽과 그 내부 모두를 고적(古跡)으로 지정했다.
한국의 이병도박사는 1939년에 진단학보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서 아유카이의 주장을 부인하고 삼국사기 기록상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으로 보았다.
"풍납토성에서 초두를 비롯한 일련의 유물들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해서
그 곳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본디 유물이란 이 곳 저 곳으로 유동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도성 여부를 논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풍납토성은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사성’이었어요."
"풍납토성에서 초두를 비롯한 일련의 유물들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해서
그 곳이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본디 유물이란 이 곳 저 곳으로 유동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도성 여부를 논할 거리는 되지 못합니다.
풍납토성은 백제가 초기에 고구려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사성’이었어요."
사성은 원래 '배암들이' 성으로 불렸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배암들이가 '바람들이'로 변하고 이 바람들이가 한자표기로
風納(풍납)이 됨으로써 풍납토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광복 후에도 이병도의 주장인 사성설이 설득력을 얻었지만
풍납토성의 명칭은 그대로 두고 성벽만 사적 제 11호로 지정했다. 도성 안의 왕궁 등 도시는 제외한 채.
이병도는 일찌감치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를 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있던 곳이라고 천명해두고 있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결코 하남위례성이 되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사학계에서 이병도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풍납토성은 사성이다’라는 이병도의 대전제를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후학들이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해 충남 천안(직산)의 위례산성이라는 설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기록에 의해 경기도 하남의 이성산성과 춘궁동 일대,
송파구의 몽촌토성 등 학자마다 주장이 달랐다.
정약용이 직산 위례성보다 광주 춘궁동일대가 위례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춘궁동도 왕궁으로 주목받게 된다.
춘궁동 이성산성은 1986년 한양대 박물관 김병모 박사팀이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4년까지 11차례에 걸쳐 발굴하여 많은 유물과 유적을 찾아냈으나
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의 명문의 목간과
신라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 608년에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하남시에서는 2010년 9월에 12차 발굴을 시도하여 하남시 유적 제 1호인 이성산성의 성격 규명에
여전히 힘을 쏟고 있다. 서울이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면서 바로 몽촌토성이
유적지로 각광을 받았다. 1983년에 처음으로 성격파악을 위한 기초조사 이뤄졌고
84년부터는 여러 대학들이 연합 발굴 형식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몽촌토성 발굴 작업 역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
83년이후 87년까지 서울대 박물관이 주도한 6차례의 연차발굴이 이뤄지면서
몽촌토성은 가장 유력한 하남위례성 후보지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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