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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의 길
나는 이 《입보리행론(bodhicaryāvavatāra)》의 가르침을 꾼누 린뽀체(주01) 뗀진 겔첸에게서 받았다. 꾼누 린뽀체는 이 가르침의 위대한 전수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는 빠뚤 린뽀체(주02)로 부터 전해 받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빠뚤 린뽀체가 《입보리행론》을 설법할 때마다 많은 꽃잎으로 이루어진 노란 꽃들이 피어나는 등의 상서러운 징조가 일어났다고 한다. 나에게 이러한 위대한 불교 고전을 설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샨띠데바(주03)는 이 책을 내면서 대화하는 형식으로 지었다. 그는 자신의 무기들을 자신을 향하게 해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전투를 벌였다. 따라서 우리가 이 고전을 통해 정신적으로 한 걸음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샨띠데바가 했던 것처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붓다에 귀의하고 경전에서 뽑은 구절들을 같이 낭송함으로써 각각의 장을 시작해보자.
악행을 버리고
덕행을 닦아
마음을 조복하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별, 신기루, 혹은 불꽃과 같이,
마술로 일어난 환영, 이슬, 혹은 물거품과 같이,
꿈, 섬광, 혹은 구름과 같이,
모든 이루어진 것들을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 게송을 낭송할 때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함과 현상에는 실재하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끝을 맺는다.
이 공덕으로 우리가 일체지를 얻을 수 있기를
우리의 적인 해로운 행동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생로병사의 파도에 시달리는 모든 생명이
삶의 바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반야심경》, 문수보살을 찬탄하는 게송 그리고 만달라의 봉헌을 낭송한다.(주04) 이러한 게송들을 낭송할 수 없는 분들은 간단하게 붓다의 자애에 댜해서 생각하고, 반야부(般若部) 경전들의 가르침인 공성(空性)에 관해서 고찰한다.
끝으로, 삼귀의를 하고 발보리심의 서원을 세 번 함으로써 우리의 서원을 일신한다.
붓다, [붓다의 가르침인] 다르마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깨달음을 얻을 날까지 귀의합니다.
보시 등의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모든 생명의 복지를 위해 우리가 불성을 얻을지이다.
이제 《입보리행론》을 시작하자.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스승 붓다께서는 깨달음을 얻겠다는 서원을 일으키면서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세 무량겁 동안 선업을 쌓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에 태어나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깨달음을 일으키셨다. 붓다가 광대하고 심오한 다르마의 바퀴, 법륜을 굴리신지 이제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불교의 길은 세계의 종교 전통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로 자리 잡았다.(주05)
붓다의 가르침은 두 가지 방향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천과 관점이다. 실천이란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종교를 떠나 보편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관점이란 상호의존의 원리를 일컫는다. 행복과 괴로움 그리고 이를 경험하는 존재들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영원한 창조자에 의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사실상 모든 현상은 그 현상과 관련 있는 원인으로부터 일어난다. 이 사상은 모든 불교의 종파에서 견지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보통 우리 불교도의 관점은 상호의존의 관점이라고 말한다.
상호 의존의 관점은 마음을 활짝 열어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경험한 것은 원인의 복잡한 관계망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행복과 슬픔 같은 것이 단 하나의 독립적인 원인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좋은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접촉할 때, 우리는 당장 저절로 행복해져야 한다. 반대로 나쁜 것과 접촉할 경우, 슬퍼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기쁨과 슬픔의 원인들이 무엇인지 찾고 목표로 삼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화와 집착을 정당화할 좋은 이유도 찾을 수 잇을 것이다. 그 반면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원인들과 조건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할 때, 우리가 원하거나 화를 낼 어떠한 단일 개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집착 또는 화와 같은 고통을 일으키는 단일 개체를 찾는 것은 더욱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의 관점은 우리의 마음을 보다 편안하고 열려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마음을 닦고 이 상호작용의 관점에 점점 더 익숙해짐으로써, 우리가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굴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는 차츰차츰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 다른 생명을 덜 해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앞에서 낭송했듯이 경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악행을 버리고
덕행을 닦아
마음을 조복하라.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가장 하찮은 악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피해야 하며, 아무리 작은 선한 행동이라도 하찮게 보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원하는 행복과 우리가 모두 피하고자 하는 괴로움은 바로 우리의 행동, 혹은 업(業, karma)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늘 그렇듯 우리의 행동에 의해 계획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은 다시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젊을 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한 모든 것이 우리가 나이 들었을 때 겪는 행복과 괴로움의 원인이다. 게다가 이번 생에 한 모든 것이 다음 생의 행복과 괴로움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겁의 행동들이 미래 겁에 우리가 경험할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것이 업의 법칙, 혹은 인과법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광대하고 심오한 수행의 길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마음을 조복시키ㅐ는 모든 방법을 아는 것이다. 증오의 해독제는 자애(慈愛)의 명상이다.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의 추함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다. 자망의 해독제는 오온(五蘊)의 명상이다. 무지(無知)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호흡의 움직임과 상호의존성에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요동치는 마음의 근본은 현상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는 무지, 혹은 어리석음이다. 실재에 대한 오해를 정화시킴으로서 그 마음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마음을 닦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을 탈바꿈할 수 있다.
일반적인 붓다의 가르침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대승 불교에 따르면,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그가 가르침을 세 번에 걸쳐 불법의 바퀴를 굴리셨다고 한다. 첫 번째로 붓다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근본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를 가르치셨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근원의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그리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두 번째로 법륜을 굴리시면서, 그는 공성과 수행의 길에 대한 심오하고 자세한 가르침을 피셨는데, 이는 반야부 경전들에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 법륜을 굴리시면서, 그는 공성을 보다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가르치셨다. 《여래장경如來藏經》등의 경전들에서, 붓다는 나 자신인 주체와 대상인 객체 사이에 이분법적 사고가 없는 절대적인 자성에 대해서 마씀하셨다. 이것이 또한 미륵(彌勒, Maitreya)의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의 주제이기도 하다.
괴로움인 번뇌(주06)의 근원에 관한 이해는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현상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두 번째 법륜을 굴릴 때, 붓다는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는 현상에 대한 매우 상세한 분석이 번뇌에 대한 더 투철한 이해로 이끌고 마침내 훨씬 더 정확한 공성의 통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 앎은 다시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더 심오한 이해로 이끈다.
세 번째 법륜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이 세 번째 법륜은 우리가 모두 장래에 깨달을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강조한다.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혹은 불성(佛性)이라고 불리는 이 가능성은 우리가 무시이래로 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완전히 다른 씨앗 혹은 원인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버섯과 같은 어떤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개달음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일체지를 얻을 수 있는 토대 혹은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법륜에 속해 있는 문헌들은 현상의 공성에 관해서 설명하지만, 세 번째 법륜에 관련된 《여래장경》과 다른 가르침들은 마음의 명료하고 밝게 빛나는 측면인 지혜를 강조한다.
붓다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처음 가르치신 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모든 가르침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그의 가르침을 보다 자세히 가르칠 때, 상대방의 능력과 자질에 맞게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친 길은 아주 다양하고, 그가 말한 것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냐에 따라 심오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르침들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가르침들이 특정한 자질을 지닌 어는 제자에게 알려준 것들인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식별한 후 붓다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가 논리적이지 않거나 혹은 상호 모순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가르침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해에 맞게 상대적으로 표현된 진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반면에 만일 그의 가르침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전혀 모순이나 오류가 없다면, 그러한 가르침은 궁극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신심(信心), 즉 믿는 마음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지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 진실된 믿음은 합리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어야 한다. 단순히 맹목적으로 어떠한 깊은 고찰도 없이 “귀의합니다” 혹은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다. 합리적인 탐구를 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가르침이 특정한 상대에게 맞추어진 것, 혹은 상대적인 것이지, 아니면 궁극적인 의미를 가르치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를 전혀 분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불교의 경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의지처를 말하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맞추어 설한 가르침에 의지하지 말고 궁극적인 뜻에 의지하라.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일상의 지적인 이해와는 다르게, 마음의 참 모습은 명료함과 앎으로 어떠한 장애물에도 걸림이 없다. 대승 불교의 수행은 전적으로 이 마음의 진면목에 대한 이해에 기반 한다.
티베트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부터 무상요가 딴뜨라가지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다른 불교 전통에 의해 보전되어왔다. 첫 번째 단계는 성문승(聲聞乘)으로(주07)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길을 가르친다.
두 번째 단계는 대승(大乘)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六바波羅蜜)로 이루어져 있다. 세 번째 단계는 금강승(金剛乘) 혹은 진언승(眞言乘)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그리고 행, 소작, 요가, 무상요가딴뜨라의 네 종류의 딴드라를 단계적으로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수 세기 동안 불교는 여러 나라에서 번성해왔지만, 성문승, 대승 그리고 금강승을 모두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는 나라는 티베트였다. 사실 한 수행 기간에 이 세 단계의 수행을 모두 하는 것도 가능하다. 더불어 티베트의 학자들은 수행의 측면을 절대 소흘히 하지 않았으며, 숙련된 수행자 역시 학문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완벽한 전통 안에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가르침을 편 뛰어난 스승들에 의해 서로 다른 전승들이 일어났다.(주08)
그렇게 티베트불교는 낭마빠의 오랜 전통[구파(舊派)]이 있고,(주09) 까담, 사꺄 그리고 까규의 새로운 전통[신파(新派)]이 있게 되었다.(주10) 현겔룩빠 전통은 까담빠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종파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경전 전통을 따르는 현교(顯敎)와 딴뜨라의 전통을 따르는 밀교(密敎)의 전통을 잘 조화시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주11) 븬교의 전통은 불교가 티베트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존재한 토속 신앙으로, 이 역시 붓다의 가르침의 완벽한 세트를 보전하고 있다.
《입보리행론》은 모든 티베트불교 종파의 스승들이 높이 추앙하는 논서이며, 아마도 그븐들 중 백 명 이상의 스승들이 이 논서에 관한 주석을 쓰셨을 것이다. 내가 이《입보리행론》에 대한 가르침의 전통을 꾼누 린뽀체로부터 전수받을 때, 그는 종종 잠양 켄체 왕뽀의(주12) 제자인 미냑 꾼상 소남이(주13) 쓴 훌륭한 주석서를 언급했다.
《입보리행론》은 붓다가 법의 바퀴를 세 번에 걸쳐 굴린 것을 응축하고 있다. 나는 《입보리행론》을 낭독해 그대들이 가피의 원천인 정신적 전승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나는 이 논서를 글자 하나하나까지 설명하지 않는 대신 중요한 부분에 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가르침을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물질적인 이익 혹은 명성을 얻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듣는 것은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천신 혹은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들처럼 다음 생에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만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내쳐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런 생각을 접고 셀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위해 일체지를 얻겠다는 굳은 서원을 세우고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논서에서 가르치는 심오하고 광대한 수행의 길을 반드시 닦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발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바람직한 행동들이 수승한 깨달음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소원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듣는 동안에라도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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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꾼누 린뽀체(1855~1977)는 인도에서 태어나 티베트에서 공부했으며, 달라이라마를 가르친 스승들 가운데 한 명이다.
(주02) 빠뚤 린뽀체(1808~1887)는 동부 캄 지방에서 태어난 훌륭한 스승이다. 그는 샨띠데바와 자비의 보살 첸레직(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그는《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오기열 역, 지영사, 2012)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03) 샨띠데바는 8세기경 인도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날란다 사원에 머물면서 그가 처음 이 책을 가르친 것도 날란다 사원의 승려들이다.
(주04)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들의 가장 짧은 요약본이며 공성에 대한 가르침의 정수를 담고 있다. 문수보살을 찬탄하는 게송(Śrījñānagunabhadraanāmastuti)은 지혜의 붓다에 대한 기원문으로 불교 문헌을 공부하기 전에 낭송된다. 만달라는 우주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법문을 청하 때 법을 설하는 스승에게 봉헌된다.
(주05) 다르마의 바퀴, 즉 법륜은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가르침을 펴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 장의 후반부에 더 자세한 설명이 나올 것이다.
(주06) 역자주: 원문에서는 부정적인 감정(negative emotion)이라고 티베트어를 번역했으나, 앨런 웰레스(Alan Wallace)는 불교 용어인 번뇌(kleśa)를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만으로 번역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번뇌를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범위가 작은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역자의 경우 일반 불교 교양서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번역하지만, 여기에서는 번뇌로 번역한다.
(주07) 역자주;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
(주08) 티베트불교의 종파런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가르침을 법제자에게 전하는 스승의 전통을 일컫는다. 종파는 어떤 특정한 문헌 혹은 일련의 가르침에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종파는 붓다의 가르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입보리행론》에 대한 달라이 라마가 전승받은 전통은 샨띠데바로부터 나와 빠툴 린뽀체로 이어지고, 다시 켄뽀 생가(1872~1927), 꾼누 린뽀체 그리고 달라이 라마 자신에게로 이어진다.
(주09) 역자주; 닝마빠 혹은 구파(舊派)로, 8세기에 산따락쉬따(,Śāntarakṣita)를 도와 토속종교인 뵌교를 신통력으로 물리친 밀교승인 빠드마삼바바(Padmasaṃbhāva)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종파이다.
(주10) 역자주; 신파(新派)란 랑달마의 폐불 이후 11세기 후반, 12세기 초부터 인도에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온 스승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종파를 일컫는다. 간략한 테베트불교의 역사에 대한 소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이종복, “종파로 보는 티베트불교”, 불교평론, 2014 가을호.
(주11) 역자주; 원저에서 현교와 대승이라고 해쑈으나, 전후문맥상 현교와 밀교를 잘못 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현교와 밀교로 한다.
(주12) 잠양 켄체 왕뽀(1820~1892)는 지난 세기 티베트불교 중흥을 이끈 슨임이다. 이 위대한 스승은 리베, 또는 초종파 운동을 찬시한 분들 가운데 한 분이시다.
(주13) 미냑꾼상 소남은 근 20년간 빠뚤 린뽀체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위대한 겔룩빠의 학승이다. 그의 《입보리행론》 주석서는 가장 상세하게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宗眞 寫經 合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