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앞에서 / 정완영
아무리 바다가 넓어도
돛배 하나 없어 봐라.
갈매기 불타는 저녁 노을
고깃배 없어 봐라.
그것이 바다겠는가,
물만 가득 사막이지.
아무리 바다가 멀어도
저 항구가 없어 봐라.
흔드는 손 흔드는 깃발
뱃고동이 없어 봐라.
그것이 바다겠는가,
파도뿐인 물굽이지
친구 생각 / 김일연
등나무에 기대서서
신발 코로 모래 파다가
텅 빈 운동장으로
힘빠진 공을 차 본다.
내 짝궁 왕방울눈 울보가
오늘
전학을 갔다.
강강술래 / 송선영
돌아라 휘돌아라 메아리도 흥청댄다
옷고름 치맛자락 갑사댕기 흩날려라
한가위 강강술래 서산마루 달이 기우네.
소녀꽃장수/김사옥
새벽길 이른 아침
꽃장수 소녀가 간다
칠보화관으로 꽃 광주리에 받쳐 이고
향그론 그의 목소리
꽃을 사라 외친다
잠자리 / 이근배
사뿐 사뿐 사뿐
가만 가만 가만
거미줄 채를 쥐고
가슴도 달싹 달싹
큰 마당
빙빙 맴돈다
잠자리를 쫓는다
앉을까 말까
챌까 말까
잡힐 듯 또 파르르
마음 졸인 술래잡기
잠잘아
고추 잠잘아
고기 고기 앉아라
비오는 날/권갑하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창가를 맴돈다
친구는 지금쯤
무얼하고 있을까
지웠다 다시 그려보는
친구얼굴 내얼굴.
한산도의 밤 / 이우종
그 날의 하늘처럼
달은 둥실 떠 있는데
한 뼘의 거릴 두고
돌아 누운 이 한밤엔
낭랑히
들려만 오는
님의 소리 북소리.
그 늘 / 하 청 호
나는 커다란 그늘이 되고 싶다.
여름날 더위에 지친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여린 풀과, 어린 개미, 풀무치, 여치,......
그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직 작아
조그만 그늘만 드리우고 있다.
언젠가 나는 크고 튼튼하게 자라
이 세상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을
내 그늘 속에 품어 주고 싶다.
햇빛이 강하고 뜨거울수록
더욱 두터운 그늘이 되어
그들을 품어 주고 싶다.
산새 / 임종찬
빛 고운 깃으로도
안 접히는 생각들을
부리로 쪼아보다
발톱으로 비집다가
먼데 산 푸른 빛 띠고
가만 울어도 보는가 .
낮이면 둥지 안에
햇살 가득 길어놓고
밤이면 까만 눈동자
별을 박아 지새우고
때로는 능선을 가르며
날개치고 있어라.
분꽃/이은상
빨강이 노랑이로 어여삐 단장하고
게으른 잠을 자다 저녁밥 지으렬 제
살포시 그 잠을 깨어 방글방글 웃는다.
대성암(大城庵) / 이병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서리 빨간 딸기 파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 끝에 부딪치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깊은 바위굴에 솟아나는 맑은 샘을
위로 뚫린 구멍 내려오던 공양미를
이제도 의상을 더불어 신라시절 말한다
별이 쨍쨍하고 하늘도 말갛더니
설레는 바람끝에 구름은 서들대고
거뭇한 먼산 머리에 비가 몰아 들온다.
봄 / 이영도
아이는 봄 따라 가고 고요가 겨운 뜰에
봉오리 맺은 가지 만져도 보고 지고
무엔지 설레는 마음 떨고 일어 나서라
금낭화/홍성란
양제역 개찰구를 나온 꼬부랑 할매 둘
천길 계단 올려다보니 입 떡 벌리고 있다
이쪽으로 가시면 엘리베터 있어요.
오른쪽 가리키고는 총총걸음 올라와 보니
양산 곱게 쓰신 두 할매 비탈길 내려간다
이제 가시네요. 아이구 또 만났네 젊은이 복받을겨
암만 암만''''''
금낭화 염치 없이 살짝 주머니를 열었다
아지랑이/조오현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 설 길도 없다
불러봐야 사방은 허공 낭떨어지
우습다
내 평생 살아온 것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득한 성자/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대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날
그 하루도 산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해도
성자는 하루살이 떼
숲/조오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산은 골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하고
나무는 겉껍질 속에 애벌레를 기르고
우리 식구 / 유성규
엄마의 손등에선
고소한 냄새가 나고,
우리 아기 콧등에선
코코질 냄새가 난다.
이 냄새
땅에 뿌리면
무슨 꽃이 필까요?
봄 / 이영도
아이는 봄 따라 가고 고요가 겨운 뜰에
봉오리 맺은 가지 만져도 보고 지고
무엔지 설레는 마음 떨고 일어 나서라
오리새끼 / 허 일
조르르 엄마 뒤를
줄지어 따라간다
조르르 폴짝폴짝
연못으로 뛰어든다
조르르
풀 위에 앉아
미끄러져 나간다 .
친구야 눈빛만 봐도/이정환
봄이면 꽃피는 소리 두 귀는 듯는단다
겨울날 눈 내리는 소리
두 귀는 듣는단다
친구야 눈빛만 봐도
네 마음의 소리 들린단다
비 맞고 찾아온 벗에게/조운
어젯밤 비만해도 보리는 무던하다
그만 갤 것인지 어이 이리 굳이 오노?
봄비는 차지다는데 질어 어이 왔는고?
비 맞는 나뭇가지에 새엄이 뾰족 뾰족
잔디 속잎이 파릇 파릇 윤이 난다
자네도 비를 맞아서 정이 치나 자랐네
오리새끼 / 허 일
조르르 엄마 뒤를
줄지어 따라간다
조르르 폴짝폴짝
연못으로 뛰어든다
조르르
풀 위에 앉아
미끄러져 나간다
황진이별곡/홍성란
신은 석양을 그리다가 망쳐버렸다
앞 뒷산 붓자락에 먹물 반쯤 남겨버린
이런날 이른 별빛도
목메이는 설움이다
아니 서러운 건
별도 아닌 눈물도 아닌
시드는 꽃이다
팽팽한 자존이다
처절한 이 포복도 까딱 않는 님이다
오동꽃/이병기
담머리 넘어드는 별빛은 은은하고
한 두개 소리없이 나려지는 오도꽃을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산행/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나무/이형기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공사장 끝에서/이시영
"지금 부숴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흙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화살과 눈길/고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십년 동안 가진 것
몇십년 동안 누린 것
몇십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들길/도종환
들길 가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만나거든
거기 그냥 두고 보다 오너라
숲속 지나다 어여쁜 새 한 마리 만나거든
나뭇잎 사이에 그냥 두고 오너라
네가 다 책임지지 못할
그들의 아름다운 운명 있나니
네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굽이굽이 그들의 세상 따로 있나니
나의 하느님/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가고파/이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 옷 잎혀 웃고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봄 오는 소리/정완영
별빛도 소곤소곤
상추씨도 소곤소곤
물오른 살구나무
꽃가지도 소곤소곤
밤새 내
내 귀가 가려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철령 높은 봉에 / 이항복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 원루를 비 삼아 띄어다가
임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바다/박필상
바다는 엄마처럼
가슴이 넓습니다.
온갖 물고기와
조개들을 품에 안고
파도가
칭얼거려도
다독다독 달랩니다.
바다는 아빠처럼
못 하는 게 없습니다.
시뻘건 아침 해를
번쩍 들어 올리시고
배들도
갈매기 떼도
둥실둥실 띄웁니다.
가을 / 이병기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일어나네
벼 이삭 수수 이삭 오슬오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 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 두고
젖 먹는 어린 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어머니 회갑에/조운
아버지 일찍 여윈 우리들 칠남매를
한 이불에 재워놓고 행여나 깨울세라
말 없이 울어 새우신 적이 몇 번이나 되시노?
우는 애, 보채는 애, 등에 업고, 품에 품고
여름 비, 겨울 눈을 마다 하지 않았건만
봄바람, 가을 달이야 좋을 줄을 아셨으리
벽에 금이 날로 높고 철마다 옷이 짧아
크는 것만 좋아하고 늙는 줄은 모르시다
오늘의 배발을 만지시며 속절없이 하시네
고향생각/이은상
어제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하자 하고 갯가로 나가더니
그 배는 멀리 떠가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개를 숙그리니 모래 숙인 물결이요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게 뭉게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가을/이병기
거뭇한 바위틈에 발간한 단풍가지
삼각산 봉우리마다 석양이 비치는데
은은이 어느 골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들마다 늦은가을 찬바람이 일어나며
벼 이삭 수수 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 머리 해 그림자도 바쁜듯이 가누나
천마산협/이병기
곱게도 드는 단풍 산 봉마다 뻘거지고
으름과 다래넝쿨 아직도 짙은 녹음
으늑고 후미한 골에 물이 졸졸 흐른다
나무숲 침침하여 낮도 또한 밤과 같다
풀섶에 우는 벌레 행여나 놀랄세라
발자옥 소리도 없이 조심조심 걷노라
돌바닥 험한 길에 발은 점점 부릍는다
어둑한 숲 속으로 좁은 골을 벋어 나니
하얀 옥 깍아 세운듯 봉 하나이 솟았네
봉숭아/김상옥
비오자 장독대에 봉숭아가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것인가
세세한 사연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보며 하마울까 웃으실까
눈 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봉숭아/이병기
꽃과 잎을 따다 손끝에 매어두고
고운 그 물빛이 행여나 더러들가
밤에도 조심스러이 밤을 사려 드느니라
벽공/이희승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하고 금이 갈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듯
저렇게 청정무구 드리우고 있건만
산샘/이호우
가을 산빛이
고이도 잠든 산샘
나뭇잎 잔을 지어
한모금 마시고는
무언가 범한듯 하여
다시하지 못하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