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준비한 사진들은 안성초등학교의 1920∼30년대 교사(校舍)와 이 학교에 적을 두었던 학동(學童)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일전에 안법학교의 옛 모습을 소개했지만 사실 안성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근대식 교육시설은 사립 안성소학교(현 안성초등학교)다.
안성초등학교는 쇠락을 거듭하던 대한제국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거리던 광무(光武) 6년(1902년)에 당시 안성 주민들이 희사한 기부금을 재원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2년 후인 1904년 공립으로 전환된 안성소학교는 다시 2년이 지난 후에 이름도 안성공립보통학교로 바뀌고, 국권을 상실한 후 방치되었던 인근의 객사(客舍)*를 보수하여 교사로 활용함으로써 명실공히 근대적 대중교육 기관으로 거듭 태어났다.
이 학교는 일본인의 교육을 위해 일본인들이 1909년에 안성에 설립하였던 안성공립심상고등소학교(安城公立尋常高等小學敎, 후일 안성심상소학교)에 맞서 한국의 어린이들을 교육한 안성의 유서 깊은 교육기관임은 새삼 말할 나위 없다.
<사진 1>은 1920년대 초 안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졸업기념 촬영 사진이다. 맨 앞쪽 의자에 앉은 이들은 교사들이다. 그 뒤로 맵시 있게 한복을 차려입은 8명의 남학생과 7명의 여학생. 이 학교에서 소정의 교과 과정을 모두 마친 졸업생들의 모습이다. 물론 이들이 당시 졸업생들의 전부는 아니다.
정식 교사(校舍)도 없이 민가를 매입하여 시작한 안성소학교 초창기에는 학생수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이 사진이 촬영된 1920년대 초반 들어 교육의 수요가 크게 신장되었다. 당시 안성교육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던 김태영 선생이 생생히 전하고 있는 것처럼, 1920년대 초반에는 "향학열이 극도로 팽창하야 입학지원자가 정원의 5배에 달"할 지경이었고, 1925년에 이르러서는 학급수 13학급에 재학생수도 800명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히 새로운 건물을 지어 부족한 교실들을 충당하기도 했다.
까까머리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일본군인들이 쓰던 일본식 교모를 쓰고 있다. 글쓴이도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같은 형태의 모자를 쓰고 학교를 다녔으니 1세기 가까이 일본의 군홧발에 묻어온 모자를 머리에 이고 다녔던 셈이다. 사진의 상단에 이 사진의 내력을 밝힌 "안성공립보통학교 남자 12 / 여자 6회 졸업기념촬영"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남자 12회 졸업생들을 기준으로 하면 이 사진의 촬영 시점은 1921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안성초등학교에서 간행한 『100년사』(2003)에는 이 사진을 수록하고 "1회 졸업생(1911년)"이라고 적어넣었다.**
이 사진을 1921년에 촬영한 것이라고 제목에 명시한 것은 아무래도 초창기인 만큼 여학생들의 교육이 원활치 않았을 것을 감안하여 남학생들의 졸업년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다. 더구나 이 학교에 여자부가 가설(加設)된 해는 일본인 교장 나카야마 겐이치(中山源市)***가 교장으로 있을 때인 1914년이다.****
<사진 2>에 보이는 두 장의 사진은 교육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난 1920년대 초반 이래 새로 지은 교사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들이다. 위의 사진은 안성초등학교를 비롯한 몇몇 기관에서 간행한 책자에도 수록된 사진이다. 그런데 한결같이 1914년의 교사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1910년대 초반의 사진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사진 3>은 연대가 확실한 사진이다. 1935년 말이나 이듬해 초에 촬영된 사진이다. 정황으로 판단하건대 <사진 2> 위쪽은 촬영 시점이 아래의 사진보다 이후의 시점일 뿐더러 오히려 <사진 3>과 비슷한 시기(1930년대 중반)에 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그 근거는 교문 좌우에 자리한 미루나무(?)의 수형(樹形)이나 교문 기둥의 모양으로 볼 때 오히려 <사진 3>의 촬영시점과 근사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얼핏 보아 <사진 2>의 위쪽 사진이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담고 있어서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진이란 보존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것만을 연대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진 3>은 비봉산 자락을 원경에 두고 손바닥만해 보이는 교정에서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일전에 조회가 일제의 군국주의적 잔재라 하여 폐지한다는 내용을 접했다. 험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사실이 불현듯 상기시키는 참담한 소회가 어찌 없을까보냐만, 학창시절의 조회는 글쓴이의 연배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사진 4>는 <사진 3>의 ①과 ②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①은 1935년 교장으로 취임한 일인 하타치 사쿠노스케(旗智作之助) 선생이 조회에서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②는 아직 취학하지 않은 마을의 소녀들로 보인다. 이른 아침 양지바른 계단에 모여, 아마도 지루했을 교장의 훈시를 듣고 있는 오빠들 이야기를 알콩달콩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빛바랜 흑백사진이지만 이들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으로 생생히 목도하니 문득, 이 소녀들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80대의 나이를 바라보는 고령일 것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이 연재가 지속되는 한 안성초등학교의 옛 모습은 두고두고 더듬을 요량이니 일단 오늘은 여기서 접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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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보개면 신양복리로 이건(移建)된 안성객사 백성관(白城館)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안성초등학교였다. 이 객사는 나중(1931년 경)에 명륜여중으로 옮겨졌다가 1995∼6년 현재의 터에 안치되었다. 1920년대의 객사 사진도 확보하고 있으니 기회가 되면 이 연재에서 소개할 생각이다.
** 고사진과 같은 시각 자료들은 시기가 거슬러 오를수록 희소하기 때문에 1910년대 사진이라면 연구자 입장에서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주목하기에 족하다. 그러나 『100년사』에는 1910년대에 촬영된 것이라고 한 사진이 4장 수록되어 있지만 하나같이 연도 표기에 의문이 드는 것들이다. 절대년대를 단정하기 어려울 때 여러 정황을 추찰(推察)하여 근사한 시점을 가급적 명시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하지만, 이 경우처럼 졸업생의 회수가 분명히 적시되어 있는데도 잘못된 시점을 기록하는 것이 못내 석연치 않다. 해당 기관의 공식 발간물일진대 고자료들에 아무렇게나 연대를 적어넣어도 좋다고 여기는 태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 이 이의 이름 또한 『100년사』에 자주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中山源'이라고 적혀 있다. 안성초등학교 본관에 역대 교장 사진을 걸고 이름을 달았는데 여기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 참조 : 『안성기략』, 84쪽 : 『100년사』에는 1911년 여학생들의 입교를 허락했다고 기록했으나, 전거의 제시가 없을 뿐 아니라, 당시의 기록(『안성기략』)이 더 정확할 것으로 여겨 여기서는 이 해(1914년)를 여학생 입학의 허용 시점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