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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2]
동학소설
고요히 흐르는 금강
이상면, 작가, 전 서울대 교수
제6화 길을 찾아 나섰다
최윤의 외갓집 동네 사기막골. 멀리 삼도봉(三道峯)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의풍분지에 안개가 드리워져 마치 거대한 호수 같았다. 백두대간에서 용해(龍海,龍華)처럼 입쌀농사가 되는 두 곳으로 유명해 난세에 도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네 아비가 살던 데가 바로 요 아래 장간지(獐子)여. 그 밑에 노루목(獐項)을 거쳐 영월로 영주로 다니곤 했지.”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바로 요 아래 살았어요?”
“그럼, 가까이 살다가 서로 눈이 맞았던 게지. 네 언니 연화가 털보 아재가 업어준다고 얼마나 따랐는지 몰라···.”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이종··만이 작별인사를 하고 말에 올랐다. 최윤이 말고삐를 놓으려 하지 않자, 종만이 한 손으로 안장 손잡이를 잡고 몸을 한껏 기울여 그녀의 허리를 안는다. 최윤은 얼굴을 한껏 치켜들고 눈을 감는다.
“다시 만날 때까지···.”
인사는 그리 했지만, 난세에 앞날은 장담할 수 없는 것. 이제 신양동 집으로 돌아가면 필경 어디론가 이사를 가야 할 텐데, 잘못하면 서로 연락이 닿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실 손씨가 가자고 한 곳이 충주 음성 어디라고 했더라? 외서촌(外西村) 봇들(洑坪)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해월신사를 찾아가 알려드리는 게 좋지 않겠는가···. 충주 외곽을 벗어나 한 촌로에게 ‘외서촌’ 동네가 어디냐고 물었다.
“허허, 외서촌은 동네가 아녀. 옛날 음성현을 말하는 거여. 외서촌 속에 면이 4개나 있어. 임진왜란 때 7년이나 난리를 겪는 통에 인구가 줄어 현이 폐지되고 충주 관할로 들어갔던 거지···.”
과연 음성(陰城)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피난민들이 찾아들 만한 곳이었다.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니 무극장터가 나왔다. 서남녘으로 펼쳐진 들판에 대여섯 동네가 흩어져 있었다. 멀리 물막이 보(洑)도 보였다.
한 촌로에게 봇들(洑坪) 한씨 댁을 물었더니, 과일나무가 많은 기역자집을 가리켰다. 이종만이 말을 타고 문밖에 나타나자, 소실 손씨가 소리쳤다
“아, 도련님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게,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따님을 외가에 모셔다드리고 신양동(新陽洞)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찾아뵙고 가려구요.”
사랑방에는 손천민 손병희 김연국이 둘러앉아 있었다. 해월신사는 종만의 손을 잡고 좌중을 보며 말했다.
“장차 이종만 군이 훌륭한 장군이 될 거요. 과거 복시에서 무술에 만점을 받았다 하오. 과거에 급제한 거나 다를 바 없소.”
손병희가 한마디 한다.
“이제 동학교단에서도 장군이 나왔군요.”
“청주 관졸한테 혼나셨다고 들었는데···?”
“그놈들이 조카를 찾기에 없다고 했더니, 조카댁을 잡아가려고 해서, 숙부인 나를 잡아가라고 호통을 쳤지요. 관아로 가자고 나서니까 관졸들이 따라옵디다. 중간에 주막이 있기에 약주나 한잔 하고 가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기에 진탕 먹여놓고 술이 취해 못가겠다고 하니까, 나를 업고 갈 수밖에···. 취조관이 신사의 행방을 묻기에, 제자된 내가 안다 한들 그것을 실토하는 것이 도리냐고 호통을 쳤더니, 그냥 가라고 합디다.”
저녁 식사 후, 이종만이 그만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들 자고 가라며 만류했다.
“아닙니다. 저 아래 진천 부창리에 제 친구 이상설(李相卨) 집이 있습니다.”
손병희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내가 바로 그 아래 청주 북면 대주리에 사는데···.”
“저의 집은 청주 남면 관터(館基里)에 있습니다.”
해월신사가 한 말씀 한다.
“우리가 다 연락선이 닿으니 일을 도모하기가 수월할 것 같구먼. 이종만 군은 장차 장군이 될 몸이고, 그 부친은 고관을 지낸 분이니, 안위를 고려해서 무슨 임직을 맡기거나 성명을 기록에 남기지 말도록 합시다.”
이종만은 남으로 30리를 달려 부창리(夫唱里)로 이상설 집을 찾아갔다. 동생이 나와 반갑게 맞이한다.
“대부님,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충주에 다녀오는 길일세.”
“그렇지 않아도 제가 신양동으로 찾아뵈려던 참이었습니다. 서울 상설 형님이 저더러 시골에 있지 말고 상경하여 신학문을 공부하라고 해서. 고향집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차에, 상설 형님이 대부님 의향을 여쭈어 보래서요···.”
“그야 어려울 게 없지. 외지에서 사는 것보다 큰집 문중에 와서 살면 좋지.”
“하인들이 농사를 지어드릴 테고, 소출은 얼마 안 되지만 그냥 쓰시면 되겠습니다.”
“아닐세, 전에도 가을에 백미와 대두를 서울로 보내던데, 전보다 배는 더 보내드려야지.”
이튿날 이종만은 신양동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께 진천 건을 말씀드렸다.
“네가 이제 다 컸구나. 관졸들이 이곳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일단 진천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진천 부창리는 경주 이가 집성촌이라, 우리 고향 동네 관터(館基里)와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상설이 청도 있으니 게서 당분간 있다가 다른 데로 가면 된다.”
“아버지, 고모 댁이 있는 회인 북면 수곡리(首谷里)는 어떨까요?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금강이 발원하는 대수산(大首山)이 있어 경치도 좋습니다. ”
“나한테는 수곡리가 좋다. 고모도 있고 선산도 있고···.”
이종만네는 며칠 후 신양동을 떠나 진천현 부창리(龍亭里)로 이사했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관아에서 신양동에 들이닥쳐 신사의 행방을 찾더란다···. 진천 부창리는 외서촌 봇들(洑坪)처럼 큰 산을 배경으로 평야를 가까이 두고 있어서 살기에는 좋지만 집성촌이라 은신처로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이종만네는 고모 댁이 가까이 있는 회인 북면 수곡리로 가기로 했다. 이듬해 1890(경인)년 봄, 선산 남록에 터전을 마련해 집을 짓기로 했다. 너른 텃밭과 연못이 있고, 줄줄이 논이 이어진 아늑한 산골. 마루에 앉으면 대수산 위로 해가 스칠 듯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종만은 그해 늦가을 고모가 중신한 신평 이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일가친척과 분지의 여러 문중에서 하객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종만에게 가장 중요한 귀빈은 서울에서 온 이상설. 과거 초시가 끝나고 시향 차 왔다고 했다.
“대부, 명문가 미인을 신부로 맞이했으니 복도 참 많으시네.”
“그간 백두대간 두메산골로 전전하느라고 결혼이 좀 늦었지.”
이상설은 물론 축하하러 먼 길을 온 것이었지만, 최근 무과 초시를 거른 것을 책하러 온 면도 있었다.
“대부가 서울에 오실 줄 알고 마냥 기다렸었는데···.”
“음, 알지 모르지만, 최시형 선생이 지목에 걸려 신양동 집으로 피신해 몇 달 사셨는데, 관아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우리도 덩달아 혐의를 받게 되었다네.”
“아이고, 그러면 어떡하지?”
“세월이 좋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복시에서 무술에 만점을 받았으니 진천에서 선비들과 교류를 좀 하면 될 것 같은데···.”
“고맙네. 글공부도 하면서 세상이 좋아지기를 기다려야지···.”
*
이종만이 진천 부창리(夫唱里)로 이사 온 지 얼추 반년이 지났다. 이상설 가에 하인이 있어서 농사일에도 걱정이 없었다. 지목에 걸려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으니, 글공부에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말 타고 각처에 유람을 다니며 이인을 만나 세월을 묻고 지리공부를 하는 게 일이었다.
신묘(1891)년 여름 어느 날, 누가 동네 마애석불 옆에 초당을 지어놓고 사는 것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울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어서, 혹시 길손이 병이 든 게 아닌가 하고 접근해보기로 했다.
“아니, 손병희 형님 아니십니까?”
“이종만 장군···. 저 못 일어나요. 사흘이나 굶었소···. 양식이 떨어지는 바람에···.”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조치를 하겠습니다.”
집에 와보니 쌀은 없고, 마침 설삶은 보리밥을 소쿠리에 식혀 놓은 것이 있었다. 급히 보리죽을 쑤기로 했다. 죽이 다 되자 항아리에 담아서 품에 안고 이내 석불로 달려갔다.
“형님, 이거라도 우선 드시지요···.”
“장군, 고맙소. 은혜를 잊지 않겠소···.”
이종만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디딜방아에 벼를 찧게 했다. 쌀이 얼추 두어 말이 되자, 자루에 담아 인근에 사는 이종석을 시켜서 석불 옆 초당에 있는 손병희한테 갖다 드리게 했다. 손병희는 이종만이 쌀자루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이종석에게도 고마워서 자기가 아는 모든 수련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어 했다.
기력을 되찾은 손병희는 가을이 되자 공주로 가서, 여름 동안 전라도 순회를 마치고 동막에 돌아와 있는 해월을 만났다. 전라도 순회에서 큰 성과가 있었으니 북쪽에서도 포덕을 해야 한다며, 자기 동네로 모시고 와 인근 용산리 금성동에 머물게 했다. 과연 해월은 외서촌으로 가서 미산리 신재연(辛在淵,在蓮) 집을 중심으로 포덕을 많이 했다.
임진(1892)년 새해가 되자 신임 충청관찰사 조병식이 척사령을 내려 동학을 탄압했다. 손병희는 용산리가 청주 접경에 있어 위험하다며, 신사를 십여 리 북쪽 부창리 이종만의 이웃 이종석 집에서 지내도록 안배했다. 신사는 탄압을 염려해 각 포에 통문을 보내 3월 10일 대신사 제례를 각자 집에서 지내도록 했다. 박해로 유랑하는 도인들이 말로만 들은 장내리로 헛걸음을 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교도들이 금구 원평 김덕명 가로 몰려든다고 했다.
이종만은 신사께 부창리는 청주가 지척이라 머물 곳은 되어도 오래 은신할 곳은 못 된다고 진언했다.
“중화지역 남쪽은 추풍령이 있어 동서 교통이 편리하고 도계(道界)에 걸쳐있어 은신에도 무난할 걸로 보입니다.”
결국 논의 끝에 해월 신사는 5월 보름께 공성면 효곡리 윗왕실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종만은 하인과 우마를 동원해 신사 내외와 아들 덕기 내외가 이사하는 것을 도왔다.
“언제 한가하거든 의풍 처가에 가서 우리 윤이 좀 데려다 줘···. 그동안 많이 컸을 텐데···.”
*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이종만은 말을 달려 충주를 거쳐 의풍 사기막골로 향했다. 아침 일찍 떠났건만, 영춘 고개를 넘으니 어느덧 해가 기울어 소백산 긴 그림자가 의풍분지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종만이 말을 타고 사기막골에 접어들자, 시냇가에서 나물을 다듬던 최윤이 벌떡 일어나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글썽인다.
“보고 싶었어요···. 이게 꿈인가요?”
최윤을 데리러 왔다고 하자, 외할머니는 아쉬워했다. 외사촌 내외가 옹기를 팔러 영월 장에 갔으니 며칠 있다 올 거라며, 더 머물다 가라고 권했다. 외할머니는 먼 길에 시장할 거라며 금세 밥상을 차리잔다. 보리밥을 열무김치에 어린 상추와 여러 산채를 비벼서 정찬을 들었다. 아직도 해거름, 최윤은 종만의 엄지손가락을 꼭 잡더니 밖으로 나가잔다.
“의풍장터에 한번 가보실래요?”
벌써 15살, 최윤이 어릴 적에는 종만이 품에 안고 말을 탔지만, 이제 훌쩍 자라 그녀를 말 뒷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내 뒤에 앉아서 바지 허리끈을 두 손으로 꼭 잡거라···.”
의풍장터는 분지 중앙을 흐르는 냇가에 있었다. 사행하는 냇물을 따라 말을 몰았다. 냇물이 타원을 그리며 흐르다 말미에 그친 듯, 조금 남긴 조그만 고개를 노루목(獐項)이라고 했다. 북으로 높다란 정남향 분지에 화전민촌이 보였다.
“저기가 아버지가 결혼 전에 사시던 장간지(獐子)예요. 그 위로 올라가면 사기막골이구요.”
어느덧 어두워져 돌아가야 할 시각, 말이 겅정겅정 걸음을 재촉했다. 최윤이 오르막에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자, 종만의 허리를 벌컥 껴안으며 앞 바지춤을 덥석 움켜잡았다. 말이 요동칠 때마다 그녀가 밀고 당기는 바람에 바지끈이 점점 느슨해진다. 그녀의 두 엄지손가락이 본의 아니게 종만의 아랫배 밑으로 깊이 내려가곤 하더니, 어느 순간 말이 내리닫자 두 손이 사타구니로 푹 들어갔다. 최윤이 놀라서 얼굴을 붉히며, 전처럼 앞으로 안아서 태워달란다.
최윤이 말에서 내려 치마를 바짝 걷어 올렸다. 미끈한 그녀의 허벅지, 밑이 갈라진 속곳 가랑이를 한껏 벌려 발 하나를 박차에 얹더니, 손을 내밀며 끌어올려 달란다. 종만이 한 손으로 최윤의 손을 잡고 몸을 기울여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잡아 끌어올렸다.
말이 다시 겅정겅정 걷자 최윤은 앞 안장 손잡이가 너무 낮아 불안하단다. 종만이 한 손에 두 고삐를 모아 잡고 허리를 껴안자, 간지럽다고 야단이다. 종만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앞 치마춤을 덥석 움켜잡고 한껏 끌어올려 허벅지 위에 앉혔다. 말이 요동을 치자 굵고 긴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배 밑으로 깊숙이 내려갔다. 말이 내닫자 엄지가 푹 빠져 사타구니를 덮쳤다. 엉겁결에 엄지를 오므렸지만, 도리어 굽힌 엄지 모서리가 일을 더 일으키는 형국. 치마춤을 놓았다간 그녀가 앞으로 꼬꾸라지질 판.
최윤은 몸을 꼬며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달아오른 얼굴을 숙인다. 말이 요동치자, 느슨해진 치마춤을 잡은 손이 자꾸 밑으로 푹푹 빠진다. 종만이 풀어진 치마춤을 움켜잡고 그녀의 밑을 자주 추켜올리면,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미끈한 몸을 좌우로 비틀어 요동쳐 일으킨다. 그 바람에 치마가 벗겨지자, 종만은 터진 속곳 밑이라도 잡아 보려고 애를 쓴다. 그녀가 풍만한 엉덩이를 뒤로 뺐다가 앞으로 훑듯이 내리미는 통에, 풀려있던 종만의 바지춤이 흘러내린다.
“흐ㅁ···. 흐ㅁ···.”
“숨이 차시나 봐요···. 좀 쉬어 가실래요?”
“음···, 음···. 한적한 곳이구나···. 말을 세워 볼게.”
“밑이 걸려 많이 배기네요···. 제가 돌아앉아 볼게요.”
종만이 말을 세우더니, 두 팔로 고삐를 잡아 올리고 두 무릎을 세워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종만의 무릎을 잡고 일어나는 것 같더니, 이내 뒤로 미끄러져 내려 풀린 속곳이 밑에 걸렸는지 벗겨지고 만다. 그의 허벅지로 기어올라 몸을 일으킬 것 같더니 이내 무릎 위에 몸을 던져 쓰러진다. 축 늘어져, 가끔 엉덩이를 들며 내리며 이리저리 휘젓곤 한다.
얼마 후, 비몽사몽간 언제 중심이 잡혔는지···, 그 위에서 한동안 잔잔히 유영하더니···, 이내 사르르 미끄러지듯 그를 품고 내려잠긴다.
용해 솔면이에서 며칠을 보내고 효곡리 왕실에 오니, 신사가 손님 두엇과 무슨 논의를 심각하게 하고 있었다.
“대신사께서 순도하신지 30년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신원이 안 되어 교도들이 방랑을 하고 있는데, 어쩌면 좋지요?”
“수년 전 불란서와 조약이 체결되어 예수교가 사실상 허용되었는데, 동학이 이런 꼴로 있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네. 좀 기다려 보면 때가 올 것일세···.”
“지금이 때가 아니면 무슨 때가 언제 다시 오기를 기다리실 셈입니까?”
“내가 때가 아니라면 일단 그런 줄 알고 좀 기다려 보게···.”
서장옥과 서병학이 장모와 함께 얼굴을 붉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간 후, 해월이 비로소 최윤과 종만을 반갑게 맞이하며,
“금방 와서 피곤하겠지만, 내일 청성면 포전리에 가서 김연국에게 상의 좀 하고 싶으니 한번 오라고 전해줘.”
“저도 연화 언니와 형부가 보고 싶어요.”
“언니 집에서 좀 지내다가, 장내리에 가서 네 큰 어머니를 돌보고 있거라.”
이튿날 이종만은 최윤과 말을 타고 수봉재를 넘어 청산으로 향했다. 게서 북으로 이십 리 산길을 올라가면 포전리다. 의풍에서 황혼에 사기막골로 올라갈 때는 말이 겅정거리는 통에 최윤이 종만의 앞에 앉아도 뒤에 앉아도 어색했지만, 이제는 여러 날을 함께 한 사이. 어색하기는커녕 멋과 묘기까지 부릴 수 있다. 종만의 두 허벅지 위에서 앞으로 앉으나 돌아앉으나 리듬을 한껏 탈 수 있어 좋기만 했다. 말이 달리는 중에도 최윤은 밑이 갈라진 속곳 가랑이를 한껏 벌려 종만의 허벅지를 넘나들며 방향을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마주보고 안긴 채 말을 타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몇 년에 한번이라도 이렇게 뵐 수만 있다면···, 저는 만난을 무릅쓰고 그 꿈을 안고 살 거예요···.”
*
이종만은 최윤과 함께 포전리와 장내리에서 여러 날을 보내고, 이내 산길로 말을 몰아 회인 북면 수곡리 집으로 갔다. 아버지께 그간 있었던 일을 알려드렸다.
“각처에 민란으로 유랑민이 늘어나 다들 도인이라며 장내리로 원평리로 몰려든답니다. 해월신사께도 청주 서장옥과 충주 서병학이 찾아와 서학은 허하면서 동학을 금하는 것을 말이 안 된다며 교조신원운동을 하자고 권했습니다.”
“서학은 서양 열강이 지지해 주는데, 동학은 누구 하나 돕는 데가 없어 변을 당하고 있구먼···.”
이종만이 진천 부창리로 돌아가 쉬고 있던 어느 날 손병희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장군, 요전에 아사지경에 처했을 적에 신세 많이 졌소. 그 은혜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거요. 일전에 손천민과 왕실로 신사를 찾아뵈었더니, 장군과 따님이 함께 오신 날 서장옥과 서병학이 찾아와 교조신원운동을 하자고 하여 아직 때가 아니라고 했더니, 얼굴을 붉히며 갔다고 하데요.”
“예, 서장옥은 전에도 몇 번 본 일이 있지만, 서병학은 처음 보았는데 말과 행동이 다 앞서는 사람 같데요.”
“그런 사람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실수가 나올까 염려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손천민과 함께 신사를 모시고 교조신원운동의 중요성에 관해서 의논을 했습니다. 신사께서 이미 외서촌 신재연(辛在淵,在蓮)에게 편지를 보내 인재를 십여 명 선발해서 명단과 주소를 보내달라고 했어요. 전라도 편의장 남계천(南啓天)한테도 그런 지시를 내렸구요. 조만간 손천민의 소실이 있는 청주 솔뫼(松山里)에 봉소도소(奉疏都所)를 차리고 준비에 들어갈 것입니다.”
“솔뫼요? 저의 고향집이 게서 바로 냇물 건너 관터(館基里)에 있습니다.”
“참 잘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도모하자면 경호가 필요하고 문장을 지으려면 학식이 있어야 하는데, 손천민이 글을 좀 해서 대개 해나가겠지만, 제 생각에는 댁의 어른께서 감수를 좀 해주시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예, 지금 회인 북면 수곡리에 계신데, 제가 관터 집으로 모시면 됩니다.”
10월 중순 각 포접에 공주 상소 취회를 알리는 입의통문(立義通文)이 발송되었다. 이어서 손천민이 서병학과 서장옥이 기초했다는 의송단자(議送單子) 초안을 들고 관터로 이규성을 찾아가 감수를 요청했다.
“문장이 좀 장황하고 초점이 약간 흐린 것 같소. 위도존사(衛道尊師)를 위해서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한다는 문구를 넣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종만은 인근 각처에서 여나뭇 장정을 모아 무술을 가르쳐 솔뫼 봉소도소를 지키게 했다. 20일에는 경호대를 인솔해 공주로 갔다. 21일 수백 명의 도인들이 운집한 가운데, 서장옥과 서병학이 충청 관찰사에게 의송단자를 제출했다. 이튿날 관찰사가 판결(題辭)을 내려 신교 여부는 정부(朝家)에서 하는 일이니 자신의 권한 밖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별도로 산하 관청에 공문(甘結)을 보내 동학도들에게 횡포와 침탈을 금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공주취회에서 비록 교조의 신원은 안 되었지만 동학도의 존재가 인정된 것이어서 동학교단은 크게 고무되었다. 24일 공주에서 철수해 다음 날 삼례에 도회소(都會所)를 차리고, 전라도 관찰사에게도 의송단자를 제출하기로 했다. 이종만도 경호대를 이끌고 공주에서 삼례로 이동했다. 교단은 27일 도내 각처 포접에 경통(敬通)을 보내 11월 1일에 삼례로 모여 의송단자 제출에 동참하도록 했다. 각중에 내린 경통인데도 각 포접에서 많이 호응했다. 공주취회 때보다 훨씬 많은 도인들이 삼례로 몰려들었다.
삼례취회가 갑작스레 결정된 탓에 전라 관찰사에 보낼 의송단자도 서장옥과 서병학이 공주 감영에 제출한 의송단자를 참고해서 작성하기로 했다. 전라도 교도대표를 선정해야 했다. 편의장 남계천(南啓天)이 있었지만, 천민 출신으로 학식이 부족했다.
“아무도 하지 않겠다면 소생이 하겠소.”
고부 전봉준(全琫準)이 불쑥 나섰다. 양반 출신으로 약을 걸고 서당을 하는 터라 자격에 별 문제가 없었다. 충청도에서도 두 사람이 제출했으니, 전라도에도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남원의 유태홍(柳泰洪)이 나섰다.
저녁에 의송단자 치성식을 거행한 후, 손천민이 좌중에 이종만을 소개했다.
“동학교단에서는 이종만 경호대장을 장군으로 부르고 있소. 무술이 워낙 뛰어나 과거 복시에서 무술에 만점을 받았다 하오.”
그때 누가 곶감과 호두를 많이 가져왔다. 더러 호두를 깨물기도 했고 주먹으로 쳐보기도 했지만 잘 까지지 않았다.
“장도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벼루로 내려치면 안 될까?”
그때 이종만이 나가서 두 손으로 호두를 서너 개씩 잡아 버썩 버썩 금세 다 깼다. 다들 놀래 혀를 내두르며 탄성만 지를 뿐 아무 말도 못했다. 손천민이 일어나 소리쳤다.
“과연 이종만 경호대장은 하늘이 낸 장사요. 우리 송산포 경호대에서 한번 시범을 보였는데, 몸을 날려 담을 훌훌 넘고 지붕에도 사뿐히 날아오르는 것도 보았소.”
“팔이고 다리고 뭐고 한번 잡히기만 하면 날러가는 거여···.”
“한방 얻어맞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즉사여 즉사···.”
전주 감영에 의송단자를 제출한 후 삼례로 돌아오는 길에 전봉준이 이종만에게 물었다.
“장군은 충청도 분인디 어치케 그리 전라도 아랫녘 말에 능하시오?”
“예, 충청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께서 토포사 일을 보시던 능주에서 자랐습니다.”
“허, 전라좌도 토포사! 대단한 자리지요···.”
“앞으로 보국안민을 위해 일을 좀 도모하려고 하는데, 장군의 협조를 받고 싶소.”
“예, 저는 청주 부근에 있으니 동학교단으로 연락주시면 되겠습니다.”
*
공주와 삼례취회 결과, 신교 건은 정부(朝家)의 일이라고 했으므로, 동학교단에서는 대궐에 상소를 할 작정으로 보은 장내리에 도소를 차렸다. 1893(계사)년 2월 8일 왕세자 탄신일에 과거 별시를 보는 유생에 섞여 상경하기로 했다. 11일 소두 박광호가 광화문 앞에 나가 소반에 붉은 보자기로 싼 상소문을 놓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했다. 13일 오후 사알(司謁,內侍)이 나와 다들 집에 돌아가 생업에 힘쓰면 사정이 나아질 거라는 어명을 전했다.
이종만은 경호대를 귀성케 하고 별시에서 낙방한 이상설을 찾아가 위로하기로 했다.
“힘들었지? 신학문에 구학문에 그 높은 실력이 어디 가겠나. 좀 기다리면 하늘이 다 복을 내릴 걸세.”
“서학처럼 동학도 신교가 허용되어야 할 텐데···. 요새 외국인 가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 괘서를 보았다는 소문이 있던데···, 만일 동학도가 그랬다면 민중은 좋아하겠지만 신원과 신교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그러게 말여, 우리 아버지도 상소문에 그런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신원 신교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 일이 더 커질 것 같네. 나는 과거 준비를 할 처지가 못 되어 교단을 도와야 할 텐데, 일단 진천 집에서 나와 본가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네. 그간 도와줘서 아주 고맙네.”
“대부의 정성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거여.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길···.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청주 남면 관터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손천민이 서장옥과 서병학을 데리고 찾아왔다. 종만 부친 이규성에게 상소문을 감수해준 것에 답례하러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종만에게 3월 10일 대신사 순도일에 즈음하여 보은에서 대규모 취회를 열려고 하니, 경호대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삼남에서 수많은 교도들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양식 조달책을 강구하자는 것이었다. 종만이 부친 앞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자, 손천민이 안을 낸다.
“일해(一海,仁周) 스님께서 전라도에 제자가 많으시니, 무슨 혜량이 좀 없으시겠습니까?”
“부탁을 하면 좀 얻을 수야 있겠지만, 보은까지 가져다 달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삼례에서 보니까, 전봉준 선생이 이종만 장군을 무척 좋아합디다. 두 분이 협의하시면 무슨 좋은 안이라도 나오지 않을까요?”
“전봉준 선생께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교단을 통해 저에게 연락하신다고 했습니다. 우선 의향을 문의해보시지요.”
여러 날 후, 전봉준이 이종만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이종만 장군, 본인은 보은취회를 위해 전라도에서 양곡을 모아 교단에 바치려고 하오. 공양미니 3백 석은 되어야 할 터인데 운반이 문제요. 한 가지 방안은 가까운 금강에 나루를 정해주시면 주운(舟運)으로 보내고자 하온대, 장군께서 하역 후 보은 장내리로 운송하실 수 있겠는지요?”
이종만은 즉시 답신을 썼다.
“전봉준 선생님, 성하(城下) 만인에게 공양미 3백 석을 기증해주신다니 얼마나 은혜로운 보시입니까? 공양미를 배로 회인나루로 보내신다면 제가 경호대를 동원해 보은 장내리까지 운반하겠습니다.”
이종만은 문의 접주 오일상(吳日相)에게 기별하여 운량사(運糧事)를 말하고 연기에서 문의 회인에 이르는 금강 우안 경비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또 회덕 접주 강건회(姜建會)에게 연락하여 연기에서 회덕을 거쳐 주안에 이르는 금강 좌안 경비책을 마련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회인과 보은과 괴산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장사를 10여 명씩 모아 각기 경내에서 경비대를 구성하도록 하고 순회 방문하여 지도하기로 했다.
이윽고 전봉준으로부터 쌀을 100가마씩 3번, 5일 단위로 보내온다는 기별이 왔다. 10대의 우마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쌀 10가마씩을 싣고 보은으로 이동했다. 수리티를 넘는 게 어려웠으나, 경호대가 우마차를 뒤에서 밀어 올렸다. 전봉준은 공양미 300석을 기증한 운량장으로 일약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전라도 도인들이 기를 펴고 소리를 냈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취회에서는 정작 교조신원문제는 쑥 들어가 버리고 보국안민과 척양척왜 기치가 높이 올라갔다.
3월 말 조정에서 보낸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 어윤중(魚允中)이 청주 진남영 군 3백 명을 대동하고 보은에 왔다. 어윤중은 보은 출신으로 동학도의 주장을 경청하겠다며 차좌(次座) 서병학을 비롯하여 많은 도인들을 연거푸 면담했다. 다들 현실에 급급해 교조신원 문제는 잊어버리고 폐정개혁 문제를 제기했다. 어윤중은 국왕의 윤음을 읽고 교도 뜻을 상주할 터라며 해산을 종용했다. 해월신사가 자리를 뜨기 전에 이종만을 불렀다.
“원평에서 전봉준이 보은으로 온다는 기별이 왔네. 서병학과 나는 지목 기미가 보여 어디로 각기 갈 터이니, 장군이 명일 윤이와 원암에 가서 전라도 도인들을 전송하고 전봉준이 오거든 내 뜻을 전해주면 고맙겠네.”
이튿날 아침 이종만은 최윤과 함께 말을 타고 원암으로 가다가 마침 남원으로 돌아가는 김개남을 만났다,
“장군, 나하고 전라도로 가장께···. 능주가 고향이라매···.”
“저도 능주가 그립습니다.”
그때 먼 남쪽에서 수백 명이 풍악을 울리며 오고 있었다. 이종만이 최윤과 말을 달렸다.
“전봉준 선생님, 먼길을 오시느라고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이종만이 말에서 뛰어내려 절을 했다.
“우리는 보은으로 가는디, 어치케 이리 오시오?”
“윤음(綸音)이 내려 어제 저녁 부득이 산회했습니다. 신사께서 지목을 피해 어디로 가시면서 선생님을 대신 영접하라고 하셔서 따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최윤입니다. 아버지께서 선생님을 정중히 모시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허···, 영광이오.”
“보내주신 공양미 3백 석으로 만여 도인이 근 한 달을 잘 지냈습니다. 다들 선생님 은혜에 감읍했습니다.”
“허---, 그저 도리를 좀 한 것뿐인데, 과찬이오. 그러면 나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소.”
“저희들이 진산 탄현(炭峴)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게꺼정 갈라문 아예 원평까지 함께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