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1]
지상강좌
하와이 한인사회를 통해 본
천도교와 천도교인의 활동(2)
성강현_ 동천교구, 동의대학교교수
하와이종리원의 설립에 이어 1929년 11월 10일에는
천도교청년당 하와이당부가 결성되었다.
이날 하와이의 청년신자 20여명이 모여
천도교청년당 하와이당부를 창립하고
이어서 청년당부의 집행부를 조직하였다.
집행부는 다음과 같다.
포와당부대표 승용환
기무과상무위원 김량식
재무과상무위원 정봉관
선전위원 탁기홍
사교위원 백승현
집행위원
탁기홍 백승현 주원여 김량식 정봉관 방흥효 승용환
청년당부 임원의 구성은
당시 종리원의 간부들이 겸직하는 경우가 있었다.
승용환, 정봉관, 김량식의 경우
종리원의 간부와 청년당의 간부를 겸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년당의 간부가
하와이종리원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는데
이는 1931년의 임원의 구성에서 알 수 있다.
종리원 원장 承龍煥 성도집 金亮植
경도집 李思敬 신도집 卓基弘 법도집 崔京洙
지도집 鄭鳳觀 감사원 白承鉉
체계가 갖추어진 하와이종리원의
임원을 확인할 수 있는 1931년의 교구 임원에
청년당 간부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먼저 종리원장이 정봉관에서
청년당 대표였던 승용환으로 바뀌었다.
청년당부의 임원이었던 탁기홍과 백승현이
교구의 간부로 임명되었다.
1928년의 경리와 서무를 담당하던
김진호와 이성삼은 임원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하와이종리원의 임원의 변경을 크지 않았다.
하와이종리원의 임원 변화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에 따르면 종리원의 책임자인 종리원장은
1928년부터 1932년까지 5년간은 정봉관이 맡았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 4년간은
승용환이 담당하였다.
1937년부터는 이제현이 종리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새로 영입된 간부로
전종순, 변응환, 이제현, 조성천, 박성민 등이 있었다.
특히 전종순은
이사경이 사망한 후 경도집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5년의 임원에
하와이종리원을 세운 정봉관이 제외되었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이 되면 하와이종리원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하와이종리원의 활동이
천도교단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와이종리원의 활동은 1941년 하와이에서 열린
교민단체의 임시 연합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각 단체 연합 임시 대표회 참석자
동지회 손승운, 리원순, 국민회 안원규,
독립단 박태균, 부인구제회 손노디, 심영신, 박정숙,
영남부인회 박금우, 차정임, 독립당 김원용,
미 감리교회 박종수, 기독교 김창순, 성공회 조병요,
천주교 리경호, 불교 도진호, 천도교 승용환, 리제현,
대학생회 강영각, 기독학생회 김이제, 리태성,
부인호상회 우도경, 오살름, 동맹저금회 김리호
당시 하와이에서는
한인사회의 통합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1940년 4월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시국연설에서
일본과의 전쟁의 대비를 역설하였고,
10월 들어 하와이에 대한 징병도 실시하였다.
하와이 한인 사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 사회의 연합을 시도했다.
1940년 10월 13일 6개의 단체 대표들이 모여
연합한인위원회를 결성하고
한인사회의 통합을 시행하였는데 위의 모임도
이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하와이종리원장을 역임했던 이제현과 승용환이
천도교 대표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해방 때까지
천도교가 하와이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하와이에서 천도교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해방 이후
이민 1세대로 이루어진 하와이종리원은
이들의 사망과 함께 문은 닫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 건너가 수운대신사를 만나자”
다음으로 하와이종리원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와이종리원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종교 활동 즉, 천도교 활동이다.
종교 활동은 통상적인 내용이라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일본의 첩보기록에
하와이 천도교 활동의 일단이 나타난다.
신인간 대금 10엔 중 6엔은
금년(1932-필자주) 4월까지 작년 3월부터 보낸
매월 6부의 대금이고
4엔은 금년 9월부터 내년 8월까지
매월 4부의 대금입니다.
신인간 9월호와 10월호는
증정호 1책을 제외하고 전부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와이종리원에서는
서울에서 발간하는 천도교기관지인
『신인간』을 구입해 교회활동에 활용하였다.
위의 첩보내용에 따르면
1931년 3월부터 1932년 4월까지는
『신인간』 6부, 1932년 9월부터 1933년 8월까지는
『신인간』 4부를 구입하였다.
당시 서울과 하와이와의 우편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여
결본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서울에서 강사가 파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교회에 관한 지식은 천도교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해서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신인간』 구입 부수는 간부들의 수자 정도로
일반 교인들까지 구입하지는 않았다.
하와이종리원에서는 『신인간』을 구입해
교회 활동에 활용하였다.
하와이종리원은 천도교의 확산을 위해
서울에 강사를 파견해 줄 것을 재차 요구하였다.
승용환은 하와이에 천도교를 포덕할 수 있는 대상자가
약 1천명 이상이라고 하면서 강사 파견을 요구하였다.
그는 강사 파견의 이유를 4가지로 말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미각국 종교기관에서 전도사를 파견하듯이
천도교중앙기관에서도
전도사 파견은 포덕을 위해 당연하다.
2.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는 이곳에서
국제 선전에 용이하다.
하와이는 동서왕래기선의 집결지로
우리의 활동을 촉진할 수 있다.
3. 종리원의 간부나 도인들이 수운주의에 무식해
천도교 도리를 몰라 지도와 포덕이 불가능하다.
4. 하와이의 교인들은
호구지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천도교를 전담할 인물이 필요하다.
승용환은 이 편지에서
강사의 경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서울에서 하와이까지 오는 경비만 제공하면
하와이에서의 활동 경비는
하와이천도교인들이 부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서울에 강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하와이 천도교인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하와이에 끝내 강사를 파견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와이종리원의 활성화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 조선어학교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 활동이었다.
하와이종리원은
1931년 7월 12일 종리원회의를 개최하여
포덕에 대한 방책과 외국인으로 동화되는
조선동포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하와이종리원에 조선어학교를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하와이종리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예수를 만나러” 하지 말고
“태평양 건너가 수운대신사를 만나자”는
슬로건을 걸고 자녀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조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데
천도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2주간의 준비를 거쳐 8월 2일
하와이종리원 내에 조선어학교를 개교하였다.
生徒가 32인이며
同校 開校式에 布哇僑民會總團長 孫德仁氏와
國民報主筆 金玄九氏 백여 인의 出席으로
大盛況을 呈하였다.
校名은 “朝鮮어린이學校”라 稱하고
敎師로 現任 知道執 鄭鳳觀氏 韓承女士 2인이며
經費는 學父母덜이 負擔하기로 하였다.
米國 領地內에 朝鮮語學校 設立條例에 依하야
特許를 得하였다.
하와이종리원의 조선어린이학교는
성대하게 개교식을 가졌다.
천도교인들과 교민 100여명이 참석한
이날의 개교식에는 하와이의 대표적인 교민단체였던
교민회의 회장 손덕인과 국민보의 주필 김현구가
참석할 정도해 교민 사회에서
천도교의 역할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와이종리원의 조선어린이학교는
당시 하와이 본청 정부에 청원하여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하와이 관청의 허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조선어린이학교는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천도교가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어
인지력을 높였다.
하와이종리원의 조선어학교는
일시적으로 운영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운영해 천도교하와이종리원을
교육기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와이의 한글학교는 1907년 4월의
할론지방 한글소학교의 개교를 시작으로
25개로 확대되었다.
하와이섬에 7개, 마우이섬에 1개, 오하우섬에 12개,
카우아이섬에 5개 가 만들어질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이 학교들은 대부분
한인교회에서 만들어 운영하였다.
11개가 감리교로 가장 많았고
침례교와 기독교회가 1개씩 설립하였다.
그러나 하와이 한글학교는
하와이정부가 1921년 언어학교법을 제정해
소수민족언어학교에 제제를 가하면서 축소되었다.
학교 설립을 위한 면허비와 한글교사의 영어시험 등
까다로운 조건으로 인해
한글학교는 9개로 축소되었다.
이렇게 하와이정부의
한글학교 개교 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천도교회는
조선어학교를 개교하여 한글교육을 실시하였다.
하와이종리원의 조선어린이학교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먼저 하와이 교민들에게 한글교육을 시키는 학교로
조선어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
입학생이 32명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규모가 작지는 않아 천도교인뿐만 아니라
하와이 교민들도 대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교포 2세,
즉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천도교가 주도한 어린이운동을
하와이에 확산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1921년 방정환과 김기전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일어난 어린이운동을
하와이까지 확산시키려는 측면에서
교명을 어린이학교라고 지었다.
“서울천도교 지도부 일부가
하와이로 옮겨와 민족운동을 할 수 있기를”
셋째, 구미 포덕의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하와이종리원은
하와이 민족운동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먼저 천도교에 입교한 자들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하와이에서 천도교를 가장 먼저 입교한 정봉관은
천도교를 신봉하고자 하는 이유 가운데
민족주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정봉관을 포함한 하와이의 천도교인들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인물들이었고
이러한 천도교의 민족주의 성향이
천도교를 신앙하는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하와이천도교인들은
국내의 일제 식민지배하라는 제한된 상황을 벗어나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열렬히 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고 하와이종리원이
그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국내의 유명인사가 파견되어
활동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만일 북미대륙에 포의 조직을 만들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이 물론 그에 부합하지만
하와이 교회는 국내의 어떤 부분에도
부속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선생이 조선 문제를 해결할 시점에 하와이 교회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느니 고려해보십시오.
하와이 천도교인들은
하와이종리원이 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는
국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민족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서울의 천도교 지도부 중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와
민족운동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하와이 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에
천도교당를 세워 하와이와 함께
교민들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하와이 천도교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하와이천도교는
1920년대 후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정봉관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기독교 사회에서 천도교 활동은 쉽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 신인간을 구입하여
신앙을 지켰고 조선어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사회에서 2세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하와이 천도교인들은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하와이를
천도교독립운동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세웠으나 서울의 무관심으로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