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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이씨 담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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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스크랩 신시 배달국
익명 추천 0 조회 80 14.06.03 06:2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단군 조선을 神化의 역사로 배운 우리 세대.

 

桓檀古記는 올해로 정확히 9200년에 하느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3301년의 역사를 가졌던 桓國의 시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은 "둥글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뜻도 모호한 桓이라는 한자가 어떻게 씌여 졌는지는 모르지만 환은 "둥글다"라는 뜻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둥근 하늘을 뭐라고 표현 했을까요?

 

탱그리를 하느님으로 부르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모두 우리 민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흉노와 선비 말갈 모두 말입니다.

 

다음 글에서 왜 그들이 모두 우리 민족의 방계민족인지 증명해 보이겠지만

우리 말에서 탱글 탱글하다는 뜻은

"둥글면서 탱탱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탱그리는 하늘은 둥글다는 우리 조상들의 사상에서 하느님을 "탱그리"라 부른 거죠.

 

桓이란 이 탱그리를 한자화 하여 표기한 후세들의 표기 방법일 뿐입니다.

 

환국이란 탱그리 나라이며 桓雄에서 수컷웅자도 곰을 뜻하는 熊이라 고쳐져야 하며 천산에서 이동한 천신족과

홍산지역에 살던 곰족의 결합의 시대를 環熊時代로 불러야 옳다고 생각 합니다.

 

일본말에서 "고미"는 神을 의미하는 것은 일본의 지배 계층은 북부여 계열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충남 공주의 옛 地名은 熊津이며 웅진을 우리 말로 풀어 쓰면 고미(곰)나루 입니다.

 

백제야 말로 탱그리의 진정한 적장자라고 말할 수 있지요.

 

즉 환과 단군은 시대적으로 구분되어 달리 표현 되었을 뿐이며 탱그리의 한자식 표기일 뿐입니다.

  

7대의 환(탱그리)국을 거쳐 거발한으로 시작되는 환웅의 시대가 도래 합니다.

 

그리고 1565년의 환웅시대를 마감하고 47대를 이어 내려온 초대 단군 왕검이 세운 단군 시대가 이어져 갑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단군 조선 마져 부득 부득 신화로 주장하던 대한민국 주류 사학 즉 대한민국 국사 편찬 위원회가

2007년 2월 23일자로 "단군조선은 그 실체가 분명함으로 신화가 아닌 정사로 가르쳐야 한다"

漢四郡은 그 실체가 불분명하고 20여년의 지배를 끝내고 모두 철수 하였으므로 인정하기 어렵다"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우리 아이들은 단군조선을 신화로 배우지 아니하며 한사군은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습니다

환웅 시대를 생략하고 환웅을 왕검의 아버지로 설정한 단군 신화

그리고 북부여의 초대 단군인 해모수를 18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의 아버지로 만들어 버린

역사 패륜을 저지르는 우리의 역사 인식은 고치기 어려운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금의 호칭인 환웅과 단군을 1인칭인 사람으로 변모 시켜 버린 단군 신화.

 

홍익인간의 사상은 단군이 만든 사상이 아니라 초대 환웅 거발한이 만드신 사상입니다.

 

모든 것이 뒤죽 박죽인 역사를 배운 우리 세대.

 

이제 부터라도 신시 배달국의 환웅시대를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3 신시배달국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94, B.C 3897, 120세, 일명 배달 환웅)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86, B.C.3803, 102세)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99, B.C.3717, 135세)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107, B.C.3618, 129세)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93, B.C.3511, 115세)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98, B.C.3419, 110세)
7대 거련 환웅(居連, 81, B.C.3320, 140세)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73, B.C.3239, 94세)
9대 양운 환웅(養雲, 96, B.C.3166, 139세)
10대 갈고 환웅(葛古 또는 독로한(瀆盧韓), 96, B.C.3070, 125세)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92, B.C.2970, 149세)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105, B.C.2878, 123세)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67, B.C.2773, 100세)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89, B.C.2597, 118세)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56, B.C.2453, 99세)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72, B.C.2452, 97세)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48, B.C.2380, 일명 단웅(檀雄), 82세)

 

규원사화》의 〈태시기(太始紀)〉에는 신격에 가까운 존재인 환웅 또는 신시씨가 인간세상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치세 기간은 궐천년(闕千年, 11000년) 또는 궐백년(10100년)이라 한다.

 

신시씨는 치우씨, 고시씨, 신지씨, 주인씨 등을 부렸다고 하며 《환단고기》와 일부분 중복되는

치세 기록이 존재한다.

 

전체적인 성격으로 본다면, 〈태시기〉는 창세를 다룬 〈조판기〉를 이어 처음 생겨난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여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세우기 직전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신시를 신시배달국이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신시배달국 또는 배달국은 고조선 이전의 고대 국가로 기원전 4000년 경에

환국의 뒤를 이어 성립되었으며 1565년간 존재하였고 그 군주가 바로 桓熊이시다.

 

환웅이란 특정인인 1인칭이 아니고 단군과 마찬가지로 군주를 뜻하는 보통 명사이다.

 

환웅은 모두 18대를 이어 신시배달국을 다스렸으며, 그 상세한 역년도 기록되어 있다.

 

군주를 뜻하는 환웅과 단군을 1인칭으로 만들어 환웅을 아버지로 단군을 아들로 만들어 버린

삼국사기와 이것을 교묘히 변조 시킨 일제와 일제에 의해 교육된 일제 잔당 사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근본부터 변조되었던 것이다.

 

또한 역대 환웅들 가운데 일부의 치세도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14대 환웅인 자오지환웅의 기록이

상세하며 중국은 그들의 직계 조상으로 떠 받드는 황제 헌원을 부하로 두었던 치우 천황을 괴물로 묘사하더니

최근들어 태도가 급변하여 자오지천황을 자기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치우천황은 2002 월드컵때 붉은 악마로 대변되는 앰블렘으로 우리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환단고기》의 내용은 신시배달국 또는 배달국이 만주 및 한반도, 화북 지방을 지배한 초강대국며 

치우 환웅은 중국의 역사서에 惡神이라고 기록된 치우천황이다.

 

중국 사서에 ‘구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근거로 삼는 야사들이 대부분 위서이며

그 내용 또한 신빙성이 없다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은 인정하는데 정작 그 후손이어야 할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 조선이 세워 지기전에 신시 배달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1565년의 18대 환웅 천황들이 다스렸다는 신시 배달국의 14대 환웅 천황은 "치우"이다.

 

하-상-주 시절은 단군이 이끈 고조선 시절과 비슷하고, 3황5제 시절은 환웅이 이끈 시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탐원공정으로 인해 3황5제는 전설이 아닌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일제 잔당 사학은 신시 배달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그들의 시조를 황제 헌원만을 모시더니 1990년대 들어 炎帝를 헌원과 추가하여 모시더니

최근들어서는 치우천황 마져 三帝라 하며 자기들 역사의 시조로 모시기 시작했다.

 

이 세 사람은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중국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의 상고 시대와 맞물려 있다.

 

중국은 자기들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는 그들도 충분히 설명 못한다.

 

아마도 그들이 북방 민족을 오랑캐로 지칭하여 폄하하기 시작하면서 오는

자기 모순적 역사관에서 오는 딜레마에 빠진 것은 우리 한반도의 우리 민족과 같은

역사 패러다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 민족의 바탕은 농경을 하던 남방계 였지만 그들의 상고 시대의 지배 계층은

우리와 마찬 가지로 북방계이기에 농경을 수렵민족의 특성을 버리고 농경을 지향한

염제 이 후 염제의 천하지대본은 농사라는 과업을 이어 받은 황제를 시조로 모시면서 부터

그들은 그들의 조상인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설정하고 그들의 뿌리를 부정하면서 부터

우리 북방민족과 다른 길을 갔던 것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3황 5제는 모두 동이 사람들이며 모두 북방 사람들이라고 전해 지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동이족으로 기록되어 있는 태호복희는 배달국 5대 태웅의한웅(太虞儀桓雄)의

12번째 막내아들로 중국의 삼황오제에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복희는 신용(神龍)의

변화를 보고 팔괘도를 그리고, 갑자(甲子)를 처음으로 하는 등 주역의 사상적 원조가 된다. 
 
<태백일사>의 기록에 따르면,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에 옮겼다. (중략)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했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犧族)의 옛 거처가 있다.

 

임(任) 숙(宿) 구(句) 수유(須臾)의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수 = 패수 = 추수로 황하와 황하북쪽 하남성 심수 사이에 있는 강이고, 태호복희의 후예들이 산다는

풍산(風山)은 산서성 임분시 서쪽 황하변 길현에 있는 산이고, 낙랑은 황하북부 하남성 서쪽으로

산서성과의 경계이다.

 

즉 태호복희의 활동무대는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일대로 볼 수 있다.


특히 삼국지에 등장하는 북방계 명문가인 공손씨는 황제 헌원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헌원이 선비 계열의 북방계였던 것만은 부정 할 수 없는 것 같다.

 

또한 황제 헌원은 중국 초사에 보면 "황제는 백민에서 태어 났고..... 그는 東夷(동이)사람이다"라고

적어 놓고 잇다.

 

즉 순임금은 헌원의 7대 후손이라는 말이다.

 

 염제 역시 사기(史記)에 의하면 신농(神農)의 이름은 석년(石年)이고, 천수(天水)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을 강(姜)이라고 정하였다고 한다.

 

천수(天水)땅은 현재 감숙성(甘肅省) 위천현(渭川縣)인데 한나라 때에는 천수(天水)라고 했고,

강수(姜水)는 현재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産縣)을 말한다.

 

감숙성과 섬서성은 전형적 북방계 흉노의 땅이다.


중국의 강씨(姜氏)는 원래 관향(貫鄕)을 천수강씨(天水姜氏)로 썼던 것을 수천년을 내려오는 동안

중조(中祖)를 실계(失系)한 연고(然故)로 각기 그 본(本)이 나누어져서 운남강씨(雲南姜氏),

광동강씨(廣東姜氏), 산서강씨(山西姜氏), 니련강씨(尼連姜氏), 유이강씨(維夷姜氏)등의 관(貫)을

쓰고 있으나 그 근본의 관향(貫鄕)을 물으면 전부가 천수강씨(天水姜氏)라고 대답한다.

 

염제는 수렵으로 살아가는 북방민족이 수렵으로는 궁핍한 생활을 모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북방민족이 농경으로의 진입을 위해 힘쓴 결과로 그를 神農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한족의 민족 형성도 우리와 마찬 가지로 농경민족인 남방계가 다수를 차지하지만 중국의 상고 시대나

고대사는 북방민족에 의해 이루어지는 역사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와

중국의 상고사는 서로 맞물려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 세력이 우리 북방계라 하여 우리와 그들이 같은 역사를 공유 한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뿌리 민족 계통을 부정 하는 한 우리와 그들의 뿌리 역사가 같다라고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뿌리가 백제계라 하여 일본의 역사가 우리 역사일 수는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뿌리 역사를

부정하는 한 우리와 일본의 역사를 공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홍산 문명은 동이라는 북방민족의 역사가 분명하지만 지금에 와서 중국이 홍산 문명을 자기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모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 중국은 치우 천황을 황제 헌원과 싸운 악마나 괴물로 표현 하더니 최근 들어 태도가 바뀌어

그들의 시조였다는 황제 헌원과 동열에 올려 놓고 치우를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동이문명의 발상지인 홍산문명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치우천황은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 관계로 우리 일제 잔당 사학은 치우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의 사서에는 40여 곳에서 발견되고 우리 강단 사학에 의해서 위서로 평가 받는 환단 고기나

규원 사화에느 치우 천황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

(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 올랐다.

 

▲ 군(軍)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라고 쓰고 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 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성(陝西城)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 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백이. 숙제, 강태공 등이 모두 동이족이다.

 

일설에는 공자도 동이족이러고 전해진다.

 

공자는 노나라 사람이며 노나라는 황하 유역에 있던 나라이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며 지금도 묘족들은 치우를 그들의 수호와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고려와 조선의 각종 투구와 도깨비상등에 치우의 형상으로 액을 막는 방법으로

새겨 넣는 것으로 치우의 면면이 우리 겨례에 숨쉬고 잇는 것이며 대한민국 축구 응원단인

붉은 악마의 엠블렘이 치우천황의 형상이다.

 

치우 시기에 이르러 동이 부족 연맹의 우두머리 염제(군왕의 호칭)) 유망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같은 동이 부족 군장의 아들이던 황제 등이 제위를 탐하므로

구려족 임금인 치우가 평정에 나선다.(부족 군장간의 권력 싸움)

 

그러나 염제 유망이 치우가 제위를 찬탈하려는 줄 알고 황제와 손을 잡고 치우와 대적하게 되며

황제와 염제 동맹은 치우에게 대패하고 치우는 공상에서 동이 부족 연맹의 임금인 염제가 되니

마지막 염제가 된다.

 

같은 동이 부족 연맹의 일원이던 치우와 황제 헌원은 10년간 73회나 싸웠으나 황제는 늘 패했고,

그러면 女性들을 ?아가 도움을 청하여 그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도전하기를 73회나 했다고 전한다.

 

이 시기의 사회는 수렵민족의 전형적인 모계 사회로서 여성이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제 헌원은 여성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이 전쟁을 치르기 시작한 이 후 그들의 마지막 전투는 동양 역사기록상 첫 대전인

‘탁록대전’이 현재의 베이징 서북쪽에 있는 탁록(?鹿)에서 벌어 지는데 이 대전은 기마민족간의

권력 쟁탈을 넘어 농경 사회로 편입하려는 염제와 황제의 세력과 수렵과 유목의 전통을 고수 하려는

치우와의 전쟁으로 발전하고 이 싸움의 결과로 북방민족의 농경으로 진입한 세력과

그와 반대되는 세력으로 재편되는 과정의 출발점이 된 것이 탁로 대전인 것이다.

 

이 탁록의 전쟁으로 중국에서는 치우가 죽었다 하고,

우리쪽 기록에 따르면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탁록전투 후 치우는 묘족의 시조가 됐고, 환단 고기와 규원 사화에서는 신시 배달국의

14대 임금으로 기록 되는데 치우 천황은 수많은 부족 가운데 신시 배달의 14대 군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최근 중국의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는 탁록지역에서 4개의 치우 무덤을 찾아내고,

그 중 1개가 진짜 치우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산동성에서는 ‘한서’의 기록을 인정하여 지역 내에 있는 3개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의 무덤을

진짜 무덤으로 보고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쨌든 탁록전투로 인해 동북아시아에서 하남(황하 이남)문명과 하북(황하 이북)문명의 특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전혀 이질적인 다른 문화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순 임금이 부권사회를 지향하다가

자기 딸들에게 독살당한다는 금문학자들의 주장을 보더라도 이 시기에 모권과 부권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뚜렸하게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치우 천황을 전설상의 인물로 우리 역사에서

취급조차 하지 않는 치우 천황을 중국은 三帝라 하여 중국의 시조로 받들기 시작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신시 배달국은 중국 역사가 될날도 멀지 않았으며

이제 중국인들이 배달민족이라고 떠드는 날도 멀지 않았음이다.

 

부도지》에는 신적 존재인 환웅씨가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타나며

‘신시’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에 함께 모여 서로 돕고 화합하고 이치를 배우는 자리로서 세워졌다.

 

신시는 10년마다 열렸으며, 마음을 정화하고 하늘을 살피며,

희생물로 제를 지내고 모여 노래하는 곳이다.

 

김교헌의 《신단민사》에는 천신(神市氏)이 개천 갑자 상달(10월) 초사흗날(3일)에

‘신시’의 시대를 열고 120년간 백성을 가르치고, 무진년 10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지하는 신시를 여러 부족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을 연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재야 사학은 단군 시대 위에 배달 시대를 기정 사실화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성세대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분이 많지 않다.

 

이러한 현실 역사 인식속에서 단군 조선 윗대에 신시 배달국이 있었다고 하면 미친놈이라 할 것이다.

 

신시 배달국의 존재를 믿고 믿지 않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마음에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세계 4대 문명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황하 문명에 대한 역사적 자부심이 강하다.

 

문명을 발생 시켰다는 것은

그 민족이 그만큼 다른 민족과 비교 했을 때 우월한 민족의 척도가 됨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8대 역사 공정을 통하여 중화민족권 이외의 역사에 눈을 돌려 역사공정에 무려 우리돈 3조원을 쏟아 부으며

역사 up grade에 힘을 기울 였다.

 

세계 4대 문명중에 연대가 가장 늦은 황하 문명의 자존심을 만회하려는 속뜻도 포함되었다.

 

가시적인 성과가 있어서 요녕성 조양시 근교에 있는 우하량 유적지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유적을 출토시키는 성과를 올린다.

 

 

출토된 유적지의 자료는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기원전 3500년 된 것으로 측정 되었다.

 

더욱 놀라운것은

女神墓(여신묘)의 연대기는 기원전 5500년 된 것으로 측정 되었다.

 

이것은 황하 문명보다 2~3천년을 앞서는 것이어서

중국의 사학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 했다.

 

세계의 다른 문명보다 연대가 많이 떨어지는

황하 문명의 중국인들은 눈이 번쩍쩍 뜨일만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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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여신묘에서 출토된 유물중에는 청동기를 주조하던 주물 도구가 발견 되었던 것이다.

 

청동기는 고대 국가 성립의 열쇠 였기 때문이었다.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그림으로도 요하 유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량하 지역의 유적은 그들이 의도 했던 것 과는 달리

빗살무늬토기, 비파형동검, 적석총(돌로 쌓아 만든 무덤으로 우리북방계민족에서만 출토됨),

옥기유물, 원형제단등이 출토 되면서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려던 의도와 달리 이곳은 東夷民族(동이민족)의 본거지 였고

유목민족의 모계사회임을 알리는 여신상은

농경 사외의 부계사회를 이루고 살던 중국인들의 문화와는 전혀 판이한 것이 었던 것이다.

 

파일:C-shaped jade dragon.jpg

홍산 유적에서 발견된 용무늬의 옥기

 

 

 

홍산 문화 유적

 

홍산 문화의 주된 유적은 서 랴오허(요하) 상류의 지류인 황수(潢水) 및 투허(土河) 유역에 퍼져 있다.

 

발견된 석기는 타제석기, 마제석기, 세석기 등으로 그 대부분은 농기구이며, 돌보습(石?),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종류가 많다.

 

홍산 문화의 도기는 진흙 홍도 및 협사회도(夾沙灰陶)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진흙으로 만들어 붓으로 그림 그린 채도(채문 토기)는 취사나 식사 등에 사용되고,

문양이 새겨진 협사회도는 음식을 담는 곳에 사용되었다.

 

다른 도기에서는 임산부를 본뜬 흉상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홍산 문화에서는 양사오 문화와 같은 채도 문화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룽산 문화흑도와 같은

세련된 조형미를 가진다.

 

또 후기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환도도 발견되고 있다.

 

홍산 문화의 분묘에서는 비취 등의 석재로 동물 등의 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돼지, 호랑이, 외에도 용을 새긴 것도 발견되고 있다.

 

높은 공예의 수준이 홍산 문화의 큰 특징이 되고 있다. 《

 

저룡(猪龍)》또는 《옥저룡(玉猪龍)》으로 불리는 홍산 문화의 옥용(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많지만, 후기로 가면서 반용(盤龍), 문용(紋龍) 등의 구별이 분명해진다.

 

고고학자 중에는 홍산 문화가 이후 중원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홍산문화의 옥기나 유적 등에 대한 다른 견해 또한 존재한다.

 

중국인들이 주로 저룡(猪龍)이나 옥저룡(玉猪龍)이라고 명명하는 형태의 옥기가 실은 용이 아닌

 

생물의 태아를 본 떠 만든 것이라는 견해와 홍산문화에서 적석총(돌무지무덤)이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한민족(韓民族)문화의 연원이라는 견해 가 바로 그것이다.

 

                                                     요하 지도

우량하 유적

1983년에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뉘우허량 유적》(牛河梁遺跡, Niuheliang)에서는 홍산 문화와 차이가 큰 제사 시설이 발견되고 있다.

5㎢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

《여신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석총) 등이 발견되었다.

 

여신묘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없는 것이다.

 

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선사시대의 桓國과 신시 배달국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여신묘에서는 채도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근처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용이나 거북이의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홍산 문화에서는 제물을 바쳤다는 지적도 있다.

 

양사오 문화 초기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홍산 문화의 유적에서도 초기의 풍수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뉘우허량 유적 등, 홍산 문화의 제사 유적에 볼 수 있는 원형이나 방형(사각형)은 천단의 우주관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우량하의 문명을 동이문화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곳을  "홍산 문화" 또는 "요하 문화"라고 명명 하였다.

 

그들의 문화를 자랑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자충수를 둔 딜레마에 빠진 중국의 사학자들은

또 다른 얕은 수작을  부린다.

 

이른바 "다민족 사관"

즉 "중국 땅에 있었던 역사는 모두 중화의 역사"라는 것이다.

 

연이어 발굴된 유물에서 "하가점" 유물이 나왔다.

 

이곳은 신시 배달국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곳이며 고조선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단군조선이 신화가 아니라 그 역사적 실체가 있는 북방민족에 의해 건설된

세계 최초의 고대 국가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의해 불살라 지고

460명의 쥬신족의 실체를 알고 있던 학자를 모두 죽이므로서

배달민족의 역사는 송두리채 지워 지고 소중화를 표방한 조선의 역대 왕조가

후대에 붉은 서적이라 하여 소지하고 있거나 소지한 것을 보고도 발고 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를 적용하여 처벌하는 초법적인 국가 보안법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가하면서

우리의 남은 상고사를 모조리 압수하여 불지르더니

그나마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진 22만여권의 배달 민족의 상고사를 일제가 태워 없애므로서

이 땅에는 배달 민족의 상고사는거의 없어지게 되며 일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교묘히 변조하여 3301년의 환인 시대와 1565년의 18대 환웅 시신 배달의 나라와

47대를 이은 단군 조선의 보통 명사인 단군 왕조를

1인칭의 대명사 단군으로 변모시켜 2333년의 47대 단군 왕조를 신화속의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단군 시대 마져 신화로 알고 있는 역사를 배웠지만 단군 이전에

1565년의 18대 환웅 왕조가 존재 했다고 하면 미친놈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신화로 날조한 신화속의 단군 조선의 실체가 기원전 5500년대의 역사적 유물이 나타남으로 해서

단군 시대 이후의 4300여년의 역사를 더해도 7500여년 이상된 하가점의 유물 연대를

계산 할 수 없음은 단군 시대 이전에 신시 배달이라는 나라가 존재 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사관에 의한 교육을 받아온 우리 나라 주류 사학자들이  "역사는 과학"이라며

그동안 일제사관적 입장에 서있던 국내 반민족적 일제 잔당 사학자들의 단군조선 부정 이유가

고대 국가의 성립은 청동기 유물이 많지 않다는데 있었는데 옛조선의 실체가 남의 나라 사학자인

중국 사학자들에 의해 밝혀 지기는 했지만 이제 단군 조선을 부정하는 소모적 논쟁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요지 부동이다.

 

이 두지역에서 곰 형태의 유적들이 발굴되자 중국 사학자들은 당황하기 시작 했으며

또 다른 꼼수로 사마천의 중국 사기 오제본기에 나오는 황제 유웅을 들고 나와

중국의 시조가 동이족이라는 괴상한 논리를 편다.

  

일제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들은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일본은 단군조선이 조상의 나라라는 것으로는

식민지 정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愚民政策(우민정책-국가가 민중을 스스로 자기 비하적 인식을 갖게하여

국가의 정책을 무조건 받아 들이게 하는 고도의 통치술)을 획책 하기에 이른다.

 

일제에 해방된 이 땅에서도 더러운 국내 일제 잔당 사학자들에 의해 거부당한

찬란한 신시 배달국의 실체가 아이러니 하게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참가한 중국 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지는

황당함 속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 기성세대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적어도 우량하의 유적대로 해석하더라도 우리 역사는 최소 7500년을 거슬러 올라 가야 하며

환기 4300여년을 더 거슬러 올라 가야 하는 우리 역사는 단군 조선의 역사만으로는 하가점의 유물의 역사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단군 시대 위에 환웅의 신시 배달국이 존재 했음이 분명해 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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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익명
    14.10.04 17:55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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