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이롱환자였으면 좋겠다
서정순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고 얼떨결에 폴더를 여니 대뜸 “너 어디냐?” 한다. 그 말을 받아 “침대 위!”라고 했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자주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였다.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결근이라고 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접촉사고로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병원 침대 위라는 말에 친구는 놀라는 듯하다가 사고 경위와 치료 과정을 전해 듣곤, 그럼 나이롱환자 된 기회에 푹 쉬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생각 없이 같이 웃었다. 그 후 소문을 들은 친구들의 방문이 이어지면서 같은 말을 하는 이가 많았다. 마치 합의금을 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나이롱환자는 ‘아프지도 않은데 아픈 척하는 환자를 익살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뜻은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잠시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 심지어는 똑바로 누워 있어도 허리에 통증이 왔다. 옆으로 누워 자면서 매일 링거와 약으로 통증을 다스렸지만 효과는 없었다. 눈에 보이는 상처도 아니고, 시간 맞춰 세끼 밥 먹고, 약 먹고, 잠만 자니 온몸은 붓고 그 붓기는 살이 되었다. 그러니 얼굴 주름은 숨어 버렸고, 피부는 다림질을 한 것같이 팽팽해졌다.
통증을 호소하며 MRI를 찍어 보고 싶다는 나에게 원장은 시간이 약이니 기다리라고만 했다. 나를 나이롱환자로 취급하는지 상대 보험사의 OK를 받아서 찍으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였다. 보험사 담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원장의 핑계를 댔다. 서로에게 떠넘기면서 누구도 책임 있는 답변을 해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자비로라도 MRI를 찍어서 원인을 알고 싶다고 강하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지난해 12월 초,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느닷없이 내 차를 들이받았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내 몸은 순식간에 앞으로 튕겨 나갔다가 반동으로 뒤에 부딪치는 충격을 받았다. 화이트 현상 상태로 얼마를 있다가 당황한 가해자의 차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100퍼센트 잘못을 인정한 그와 함께 병원 응급실로 갔다. 꼭 집어 아픈 곳이 없어 안정을 취한 후, 한달음에 달려온 딸과 사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청심환을 먹고 잤다.
다음날 눈을 뜨자 목과 허리에 통증이 왔다. 정비소에서 와서 차는 가져가고 누구에게 부탁할 형편도 아니라 콜택시를 불렀다. 어느 병원이 좋은지 몰라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가 데려다 준 곳은 환자에게 좋은 병원은 아니었다. 나도 예전에 병원 앞에서 환자복을 입고 삼삼오오 술을 마시던 이들을 보면서 환자와 병원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바로 내가 간 병원이 나이롱환자가 있기 좋은 곳이었다. 거의 방치상태로 형식적인 물리치료만 해 주었다. 아프다고 울어야 약과 주사를 주는 원장은 소위 바지원장이었다.
병원을 주관하는 원무과 부장은 자비로 찍겠다는 나의 말에 “아줌마, 돈이 그렇게 많아요?” 하고 토를 달면서 다른 병원 앰뷸런스를 불러주었다. 촬영 후 영상의학과 보고서에는 영어와 약간의 한글이 쓰여 있었다. 원무과에서 대충 설명해 준 결과는 ‘퇴행성이며 교통사고와는 무관하다’였다. 평소에 멀쩡하던 허리가 이렇게 아픈데 갑작스러운 퇴행성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험사와 병원을 믿을 수 없어 영어사전을 구해 더듬거리며 찾아보았다.
“척추는 비교적 양호하며 L3-4, L4-5와 L5-Sl 지렛대 부분 중앙에 미묘하며 소상한, 불가사의한 돌출이 보이며 퇴행성이 보이나 이외의 또렷한 소견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있다는 퇴행성 디스크에 충격으로 돌출 부위에 염증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그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 치료는 한계가 있었다. 나이롱환자로 취급하며 매일같이 찾아와 합의를 보자는 상대 보험사 담당에게 소견서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는 MRI 비용을 보험사에서 부담하겠다며 합의를 보자고 하였다. 하지만 치료를 더 한 후에 하겠다고 한 후 16일 만에 퇴원했다.
그 후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구부리면 전기가 오는 듯한 찌릿찌릿한 허리와 다리에 침과 전자파, 찜질팩, 테이핑, 롤러와 추나요법으로 치료한 지 닷새가 지나자 차츰 차도가 생겼다. 아프던 허리가 간지러워 왔다. 종기가 나을 때처럼 통증을 동반한 지독한 간지러움이었다. 겉이 아니니 긁을 수도 없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롱환자로 누명 아닌 오명을 쓴 채 시간은 지나갔다.
내가 있던 병실에 나이롱환자가 왜 없었겠는가. 병원에 들어온 그날로 합의로 보고 나간 사람, 삼일 만에 웃으며 손 흔들고 나간 사람, 보통 일주일 전에 합의를 보고 나갔다. 그렇지만 오개월이 지나도 완쾌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가사도우미를 하던 그녀는 삼십 대 가장이었다. 장애인 남편과 아이 둘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아온 그녀는, 지독히 운이 없던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위반한 마을버스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했다. 계속되는 통증으로 이마를 늘 찡그리고 있는 그녀에게 영구장애가 남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수입원이 없어진 그들 가정의 생계도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돌려막기 카드로 겨우 버틴다는 그녀는 생활비가 없어서 합의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넓은 오지랖은 치료가 우선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한 달 만에 출근을 시작하면서 날마다 받던 물리치료를 화요일과 목요일은 야간에, 토요일은 오전에 받기 시작했다. 조율 안 된 악기처럼 속에서 요란하게 부딪치는 통증과 간지럼이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종일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무리가 와서 한 시간에 십 분 정도는 서서 할 일 없이 걷는다.
요즘 안부를 물어오는 전화에 아직도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말하면, “순 나이롱환자는 아니었나 보네” 하는 소리를 듣는다. 악의 없이 가볍게 던지는 그들의 말이 또 다른 상처가 된다. 퇴원한 지 여덟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물리치료 중인 나는 고질병이 되어 평생 따라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나도 합의금만 받으면 금방 낫는 나이롱환자였으면 좋겠다.
첫댓글 그때 일로 아직도 병원 다니시는 건 아니죠? 고질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