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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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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철학의 어머니
이관李瓘
출전 : 『천도교회월보』 제3호, 1910년 10월 15일, 5~8쪽
현대역 : 개벽라키비움 천도교회월보 강독회(책임번역: 박길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학문을 지칭하는 것인가. ‘철(哲: 밝을 철)’이 라는 글자의 이면에 지극히 아름다운[盡美] 뜻과 생각[意想]이 이미 포함된 것입니다. 대저 (철학은) 그 학이 사상의 법칙을 밝혀 주며, 사물의 원리 를 풀이해 주니, 사상을 미치는 바와 사물이 존재하는 바가 어느 것이 철 학(의 대상-역자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정치와 법률의 원리를 논하 는 정법철학政法哲學이 있으며, 사회 원리를 논하는 사회철학이 있으며, 도 덕 원리를 논하는 윤리철학이 있으며, 종교 원리를 논하는 종교철학이 있 으며, 논리의 법칙을 정하는 논리철학이 있으며, 심리의 법칙을 정하는 심 리철학이 있어서, 역사와 문학과 교육에 이르러서도 철학이 있지 아니한 곳이 없습니다. 다시 미루어 보면, 수많은 분과 학문[百科의 學]이 철학의 법칙에 기초하지 아니한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그 철학에 두 계파가 있으니, 하나는 유물파(惟(唯)物派)요 하나는 유심 파(惟(唯)心派)입니다. 유물파는 말하기를 “세계는 물질로서 이루어진 것이 라.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원리와 원칙을 정밀하고 세세하게 연구하여 원 리 중의 원리와 원칙 중의 원칙을 짚어내는지라. 이로써 유물론이 일어나 니 그것이 학문을 이루는 실적과 민지民智를 개발하는 능력이 세계의 문명을 꾸미어 내며, 개인의 생활을 보유保維하게 하나니, 이는 유물파의 철학 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심파는 말하기를 “심성心性 이외에 세계가 없는지라. 세상의 어떠한 사업과 어떠한 도리라도 심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양심良心 은 즉 리理라. 양심으로 어버이를 섬기면 자연히 효도할 것이요, 양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자연히 애정이 생길 것이요, 기타 일에 응하는 것과 사물에 접하는 것이 비양심[非心]에 이끌리지 않고 순연히 양심으로 하면 천리에 합하고, 인의에 적당한지라. 이로써 유심론이 생겨나니, 그것이 사람과 만 물을 만드는 방침과 본원을 꿰뚫어 보는[直看] 혜안慧眼이 인도人道의 정의 를 세우며, 지행합일을 제창하니, 이는 유심파의 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물-유심 두 계파의 학문적 입장이 바른 지견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물파는) 물질이 제각각 다른 점을 주로 하여 각각 깊 이 연구하여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며, (유심파는) 심지心地를 하나로 모으 는[主一] 것을 향하여 홀로 마음을 다잡아 가는 것이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유물자惟物者의 논리는 봄 들녘에 가득한 새싹이 불 긋불긋하고 푸릇푸릇한 것이 각각의 태극이 아님이 없으나, 일홍一紅과 일 록一綠의 태극은 본다고 말하겠지만, 홍록紅綠의 통체태극統體太極은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유심자惟心者의 주견은 (본질을) 한 번 본 것[一鑑] 을 기준으로 만상萬相을 비추어봄에 만상의 아름답고 추함이 보는 바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내가 한번 보는 것으로 스스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사람 과 중생의 상相 가운데 각각의 일감一鑑이 또한 존재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 니, 두 계파의 학문적 입장이 모두 한쪽에 치우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信仰하는 것을 종宗이라 말하고, 전도傳道하는 것을 교敎라고 말합니다. 그 기능을 논하면, 사람의 마음 세계[心界]를 주 관主觀으로 삼으며 물질세계[物界]를 객관으로 삼아서, 주관자의 뜻과 생 각[意想]으로 한 대상[一物=절대자(神): 역자주]을 지정하여 신앙을 의탁합니다. 그리하여 이 대상[神: 역자주]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을 실현하리라 생각 하여 내가 오래 사는 것도 이에 달려 있으며, 나의 복록도 이에 달려 있으 며, 이 대상이 능히 나에게 예언을 알려 주어 나의 앞길과 세상의 장래를 밝게 미리 알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간구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발원하여 일분일초도 (정성을) 쉬지 아니하면, 주체 의 정성의 힘이 객체의 감응선感應線을 서로 맞이하는지라. 짐승과 물고기 도 능히 참되고 믿음성이 있으며, 목석도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이적이 나 타나니 그 효과는 자기만 얻을 뿐 아니라 그 감화력이 능히 중생을 이끌 어서 “신앙을 자기와 같이 하면 자기의 복록과 같은 결과를 얻는다”고 말 합니다(포교와 전도-역자주). 이에 한 사람이 따르고 두 사람이 믿어서 명척 (冥隲: 죽은 이후의 음덕-역자 주)을 바라며 복전福田을 개척하되, 그 가르침 을 주관하는[교주 또는 지도자-역자주] 사람의 기능하에 귀명歸命하여 우 러르는 대상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 고결한 계율을 지키고 천복을 닦음 에, 이를 보조하는 법칙이 있으니, 항상 생각 속에 한 존재[一位眞司: 신앙 대상-역자주]가 의연히 임재臨在하여 나의 행동을 모두 단속하듯이 하며, 나의 사상을 비추어 주는 듯이 하여 눈에 바르지 못한 것이 보이면 즉 이 대상(신앙대상/절대자)을 두려워하여 감히 바라보지 못하며, 귀에 바르지 못 한 소리가 들려오면 이 대상을 두려워하여 감히 듣지 못하며, 입으로 이치 에 어기는 말을 내뱉지 아니하며, 마음으로 법도에 어긋나는 생각을 일으 키지 아니하며, 부모를 섬김에 혹시라도 효도를 어길까, 임금과 스승을 섬 김에 혹시 바른 길을 벗어날까, 동포同胞를 대함에 혹 애정이 부족할까 (삼 가며-역자주), 모두 이 대상의 단속과 제재를 받으니, 한 마음[一心]이 법도 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온몸이 규칙을 따라 행동하여, 세상의 수많은 학술 기예學術技藝가 다 이 문호로 들어와서 나가니, 종교는 문명의 어머니란 말 이 과연 거짓이 아닙니다.
종교가宗敎家는 분명하지 아니한[迷昧] 이치를 믿으며, 철학가哲學家는 현 실적인 실상[相]을 주로 (연구)합니다. 리理란 형이상形而上의 대상이어서 혜안慧眼으로는 명료하게 알 수 있을지언정 육안肉眼으로는 보지 못할 것이 요, 도심道心으로는 알 수 있을지언정 인심人心으로는 엿보지 못하는 것으 로서, 헤아려서 알 수 없는 가운데 희망할 수 없는 대상을 구하는 것입니 다. 반면에 (철학의 대상이 되는) 상相이란 형이하形而下의 대상입니다. 모습 과 형상을 통해서 원소를 탐구하며 성질을 분별하여 그 변화하는 정도에 마땅하게 하는 것입니다. 연구 중에 예측(가설)을 하고, 실제로 해 보는 데 (실험)서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상적인 것을 근거로, 어떤 사 람이 분명하지 못한 것을 믿는 사람(즉 宗敎家-역자주)을 보면 미신이라 하 고 어리석다고 하여 헐뜯는 논의를 볼 때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哲學 家는) 또렷하지 않은 가운데 지극한 정성이 생겨나고, 지극한 정성 가운 데 조화가 나타나서, 세속의 얄팍한 생각으로는 헤아려서 알기 어려운 학 술과 바라기 어려운 신령한 이적[靈異]도 또한 생겨나는 것을 알지 못하나 니, 미신迷信이 즉 정신正信이라 한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철학은 마침내 과학(科學: 분과학문-역자주)에 떨어져서, 말류末流의 분쟁을 자초하나니, 문 명의 정도가 극도에 달할수록 진실한 믿음[誠信]의 힘은 박약해지는지라. 그러므로 세상의 흐름을 새롭게 하고, 인문人文을 혁신코자 할 때 종교의 자궁에서 탄생하지 아니하면 결코 좋은 결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해설>
이 글은 이관의 당시 서양에서 들어오는 신新학문의 총아인 철학과 천도 교를 비롯한 종교의 특성을 비교하여, 종교가 ‘철학(과학, 문명)의 어머니’, 즉 철학의 근거가 되는 더 근본적인 학문이며 신앙이라고 말하는 ‘종교 변 증론’이다. 당시는 ‘문명개화/근대화’의 근본이 된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서 양의 철학이 급속도로 소개되면서 종교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과학과 철학 만이 유의미한 것으로서 진보적, 개화적, 문명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이관은 먼저 철학은 ‘분과 학문의 원리를 제공하는 근본 학문’으로서 그 것을 크게 보면 유물론과 유심론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고 정의한다. 이것 은 철학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철학+과학에 대하여 종교 를 대비시키기 위한 전제로서의 도식화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은 현상계 (물질세계)만을 실체로 인정하여 접근하는 점에서 현실세계의 실재를 정확 하게 관찰하는 장점이 있지만 개개 사물을 관통하는 그 이면의 근본 진리 를 깨닫지 못하는 점이 한계라고 진단한다. 반면 유심론은 자기 마음과 주 관을 기준으로 삼아 만물을 예단함으로써, 구체적인 사물의 독자성과 개 별성을 무시하는 한계를 보인다고 말한다.
이와 대비해서 종교는 ‘신앙’[宗]과 ‘전도’[敎]라고 정의한다. 즉 이 세상 만물을 주재하는 지고[宗]의 일물[神]을 신앙하는 것을 종이라 하고, 그에 대한 가르침[敎]을 펴는 것[傳]을 교라고 한다는 것으로 종교의 정의를 제 시한다. 『천도교회월보』에는 이런 식으로 ‘종/교’의 개념을 정의하는 경우 가 빈번하다. 이는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이후에 천도‘교’의 의미 를 단순히 서양의 ‘religion’의 번역어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아니라, 후 천개벽의 ‘신新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정체성, 위상을 자주적, 주체적, 자생 적으로 정립해 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종교는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기도로써 신앙의 대상을 믿고 의지하며, 청정한 계 행戒行과 도덕적인 언행言行과 윤리적인 덕행德行을 다함으로써 신앙대상, 즉 신의 위력을 대신하므로, 세상의 모든 학술과 기예가 이 종교의 문호로 귀의한다고/할 수밖에 없다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 란 문명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모호한 것, 즉 형이 상의 불연에 근거하는 반면, 철학(과학)은 구체적인 상相, 즉 형이하의 현 상現像에 근거하므로, 철학(과학)은 종교를 미신이라고 비판/비난한다. 그 러나 이관은 불연한 가운데서 온갖 기연한 것은 물론 신령한 이적도 생겨 나는 것이므로, 철학이 지엽적인 학문[분과 학문=과학]으로 떨어져 가는 대 신에 종교는 인문人文을 혁신하는, 즉 개벽하는 자궁子宮이 된다고 말함으로써, 철학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한다.
이 글에서 ‘철학’이라고 하는 개념은 오늘날의 철학과는 그 범주가 다르 다. 정치학, 법학, 사회학, 윤리학, 종교학, 논리학, 심리학, 역사학, 교육 학 등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하 면서 그 원리를 제공하는 부문을 모두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 나 중요한 것은 당시로서는 ‘최신의 학문’이던 철학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 고, 그에 대하여 ‘종교’의 차이와 우위점(優位點)을 논증함으로써 스스로 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천도교 지성인들의 노력이다. 이는 천도 교단 내에서뿐 아니라 당시의 지식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선진적인 것으로 한국의 철학사, 한국학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
이관(李瓘, 1860-1928)은 도호가 경암敬菴이며, 녹려綠旅, 천민자天民子, 천 유자天遊子, 경천자敬天子 등의 필명으로 『천도교회월보』에 다수의 글을 남 겼다. 이종일, 양한묵, 권병덕 등과 함께 천도교의 1세대 철학자 그룹을 이루는 인물이라 할 수 있으나, 글이 난해하기로 손꼽혀서 그의 사상에 온 전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1860년(庚申) 12월 17일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출신으로 경성부 가회동 144번지 거주, 소속은 한성교구, 『천도교회월 보』가 창간되자 월보 과장(1910.9.22)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도사실 편집원 (1913.1.4), 도사실 편집원(1916.12) 등을 역임하였고, 1919년 이종일과 함 께 삼일운동에 뜻을 같이 하고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 격문 기초자로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군축문제를 다룰 태평양회의에 한국의 독립 승인을 요청하는 독립청원서 에 대한민국회의 대표 자격으로 서명 제출하고 2년 7개월간 활동하였다. 그 후 편집실 편집원(1921)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회월보』에 교리와 교사 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1928년 8월 17일 환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