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14 : 4차 침략으로 전쟁 재개
04.10.12
강화도가 위장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던 1247년,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번 4차 침략의 사령관은 아무칸이라는 새로운 인물이었다.
1246년 몽골 제국에서는 2대 대칸 오고타이가 죽은 지 5년 만에 그의 장남 구유크가 대칸에 즉위하였다. 4차 침략은 구유크가 제위에 오른 지 이듬해에 있었으니, 몽골에서 고려에 대한 정복전쟁을 재개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그해 7월 염주(황해도 연안)에 주둔했다. 이때 아무칸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로 도망친 홍복원을 길잡이로 대동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청천강 상류의 위주(평북 회천)와 대동강 상류의 평로성(평남 영원)을 공략하고 남진을 계속하여 7월경에 염주에 주둔한 것이다.
이번 침략의 특징은 그 침입 경로가 이전과 다르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침입로는 평안남북로 서해안 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이번 4차 침략은 보다 깊은 내륙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경도 거치지 않고 남진했다. 이렇게 침입로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침입로는 그 인근 지역에 살던 대부분의 백성들이 연안의 가까운 섬으로 피신하여 피해를 줄 수 없었다. 반면 연안의 섬과 거리가 먼 내륙에 사는 백성들은 깊은 산속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의 이번 침략은 섬으로 피신한 사람들보다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그것을 짐작케 하는 것이, 4차 침략이 있기 1년 전인 1246년 겨울, 벌써 몽골군의 선발대가 황해도 수안까지 들어와 산천의 지세와 백성들이 숨을 만한 은신처를 정탐하였다는 사실이다. 4차 침략은 내륙 사람들을 목표로 이 선발대의 길을 따라 남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몽골군의 4차 침략은 이미 몇 년 전에 확실하게 예견된 것이었다. 몽골에서는 1244년 7월에 보낸 사신을 마지막으로 사신 파견을 이미 중단했었다. 고려에서 이듬해 두 차례나 사신을 파견했으나 몽골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게다가 1245년 10월, 그해 두 번째 사신이었던 신안공 전은 몽골에 억류당하고 말았다. 신안공 전은 4년 뒤에야 환국하게 된다. 이러한 사신 교환을 감안할 때 몽골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이미 중단하고 재침을 준비한 듯 보인다.
그런데도 최이는 몽골의 재침에 대한 재비는 전혀 하지 않고, 성대한 잔치나 연회만 계속하고 있었다.
몽골군 본대가 주둔한 염주는 황해도의 남단으로 강화도의 북쪽과 마주보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몽골군이 주둔했으니 강도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최이는 이 사태에 얼마나 다급했던지 몽골군이 염주에 주둔한지 한 달 후인 8월에 많은 음식을 몽골군영에 보내 바로 회유에 들어갔다.
이어서 1248년 2월에는 추밀원사(종2품) 손변을 몽골에 파견했다. 본명이 손습경인 손변은강직한 인물로서 전란 후 민심 수습에 공이 많아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이례적으로 재상급 관료를 사신으로 파견한 것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손변의 파견은 사신 왕래가 중단된 지 3년 만에 다시 재개된 것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전면전을 피하면서 몽골군을 하루 속히 물러가게 하려는 최이의 술책이 분명했다.
고려의 사신이 몽골에 파견된 이후, 몽골군은 철수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신 파견의 성과때문만이 아니었다. 그해 1248년 3월, 대칸 구유크가 제 2차 유럽 원정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서 갑자기 급사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사서에서는 그의 사인에 대해 정확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으나, 일설에는 그의 경쟁자인 킵차크 칸국의 수장 바투가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고 한다) 아마 고려의 사신 파견이 없었더라도 몽골군은 대칸의 죽음으로 인해 철수했을 것이다.
몽골군의 이번 4차 침략에 대한 사서의 기록이 너무나 적어 전황이나 피해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어 안타깝다. 다만 당시 승려들의 행적이나 불교 관련 문서에서 1247년 무렵,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까지 몽골군이 남진한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아마 이들 군대는 염주에 주둔한 몽골군 본대가 아니라 미리 들어와 있던 선발대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면 몽골의 4차 침략은 다행히 별다른 큰 피해 없이 끝난 셈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네 차례의 침략 중에서 가장 피해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고려 측의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 때문이 아니라 대칸의 죽음이라는 몽골 측 내부 사정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