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3.16. 울산두레교회 수요예배
사람이 후각으로 알 수 있는 것을 냄새와 향기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냄새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사람의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향냄새를 향기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향냄새”와 같이 종교적으로 구별된 냄새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적인 삶의 특징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진 곡식이나, 짐승의 고기와 기름을 태우는 냄새를 “향기”로 표현했습니다. 성전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집에서 음식의 재료로 쓰이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교의 성전 주위에서는 항상 고기 태우는 냄새가 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1장 11절을 볼 때 선지자 이사야는 그 향기를 “역겨운 냄새”로 표현했습니다. 고기 굽는 냄새에 굶주려 있는 가난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냄새가 “제물의 향기”가 아니라 “굶주린 그들을 괴롭게 하는 냄새”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성전에서는 고기 태우는 냄새가 났었고, 절에 가면 향냄새가 나지만 교회에서는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는 특별한 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우리가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예수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인격이나,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그 인격이나, 살아가는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진실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향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승리의 향기를 나타냅시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기로 표현한 것은 로마의 군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 제사장들이 들고 들어왔던 향의 연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때 개선하는 로마군에게는 그것이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포로들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생명을 나타내는 향기 곧 승리의 향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향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였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승자의 여유와 관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가 쓴 책에서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정책을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로마인들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고, 차별 대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들로서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 관용과 여유로 대할 때 거기에서 생명의 향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인색하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더욱 절실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이미 승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승리한 사람의 여유와 관용, 추수한 농부의 풍성함, 생명을 얻은 사람의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삶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를 나타냅시다.
사람들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가 어떻게 주님이신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하던 바울에게 유대인들은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기적으로 증명해 보일 것을 요구했고, 헬라인들은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증명하려고 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몇 가지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도 했으며, 헬라 철학자들과 신의 존재와 나타남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지만 이렇게는 예수님을 전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예수님을 전하는데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택하게 하셨다고 고전 1:21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를 전하라”는 것도 추상적이긴 하지만 바울이 생각했던 전도의 한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지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집중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않는다.”고 고전 2:2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인격적인 경험으로 나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예수 천당” 하고 한마디만 외치면 단 번에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만, 개인과 개인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 미련한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거리에서 외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쾌감과 거부감을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향기는 숨길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우리들이 살다 보면 너무 좋아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숨기려고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우리의 인격 속에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예수님은 숨길 수 없는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우리들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이 향기로 퍼져가기를 원합니다.
3. 순전한 향기가 됩시다.
끝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향기는 내게로부터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향기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자기를 나타내심으로써 드러나는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를 알리는 향기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생겨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표준 새번역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꾼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모습을 말합니다. 첫째는, 장사꾼들이 좋은 것에 나쁜 것을 뒤 섞어 파는 것이며 둘째는, 그 이익만을 관심거리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아니라 기적과 그럴듯한 설명으로 예수를 알리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거짓 전도자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예수를 알리고 그것을 개인의 이익으로 취하려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동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인격과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님의 향기가 되고, 부족한 우리들을 통해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를 소망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향기가 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아름다운 믿음의 소문이 퍼져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소문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외적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의 모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들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