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이리를 떠나 서울에 와서도 나는 만화방에서 독고탁(이상무), 각시탈(허영만), 야구만화(이현세), 이정문처럼 공상과학을 다룬 만화까지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렇게 만화를 많이 보면서 나는 차츰 문학에의 관심과 열정을 키워갔던 것 같다.
또 하나 내가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동요가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가르쳐주는 동요는 물론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절 내가 라디오를 통해 듣는 음악은 동요나 옛날가요가 대부분이었고, 그때만하여도 나는 우리 가곡도 오페라도 팝송도 전혀 몰랐다.
내가 좋아한 동요는 섬집아기, 엄마야 누나야, 과꽃, 나뭇잎배, 따오기, 반달, 고향생각, 꽃밭에서, 오빠생각, 고향땅, 봉숭아, 파란 마음 하얀 마음, 낮에 나온 반달 등 지금도 즐겨 듣는 노래들이다. 특히 나는 섬집아기, 과꽃, 따오기 이런 노래들을 들을 때면 가슴이 뭉클하고 영혼이 정화되는 듯 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래들이 좋았던 이유는 그 서정적인 가사 때문이었다. 동요는 얼마나 아름다운 노랫말을 가졌던가. 그 시절의 동요는 모두가 아름답고 순수한 동심을 그리고 있어서 아직 시(詩)를 몰랐던 시절에도 저절로 나에게 막연하게나마 시인을 동경하게 하였다.
특히 섬집아기 2절을 들으면 아기가 잠을 곤히 자고 있는데도, 갈매기 울음소리에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서 콧날이 찡하였고, 과꽃은 언제나 누나들을 생각나게 하였으며, 따오기는 따옥 따옥하는 첫 구절만 들어도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가슴 서늘한 그리움과 고통마저 느낀 노래는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로 시작되는 유관순노래였다. 우리가 어렸을 때 여자아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물론 나는 가슴 속에 깊이 담아두고 속으로 혼자 부르곤 했다. 그리고 “옥 속에 갇혀서도...” 하는 고음부를 부르다보면 나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곤 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유관순누나가 생각났다. 실제로 본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 누나처럼 정답고 불쌍했다.
그리고 유관순누나를 생각하면 무섭고 가슴 아팠다. 어릴 때 늘 보던 일제강점기를 다룬 독립투사들의 이야기 속에는 언제나 칼을 옆으로 찬 순사가 등장하고, 그 놈들이 우리 유관순누나를 옥(獄) 속에 가두고 손톱을 빼고 불로 지지면서 온갖 고문을 하였을 것이고, 그런 장면들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일제감정기시대의 소설들을 많이 읽고 좋아하다보니 내가 마치 그 시절의 시대에 살아본 듯 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내면까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깝게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럴 때 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울분과 비통함이었고, 슬픔과 분노였다. 그리고 그들이 한없이 가엾고 불쌍했다. 힘없고 가난하고 천대받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야만 했던 그들. 우리들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들, 누나들, 동생들, 친구들, 이웃들. 그렇게 힘도 없고 가난했던 그들이 오죽하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쳤을까.
이렇게 어린 시절 내가 즐겨 부르던 동요의 바탕은 나의 일생을 관통하는 음악적 정서였고, 그것은 나아가 우리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뮤지컬 등 평생 음악이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지탱해 준 감성의 보고였다.
물론 나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도 좋아했다. 그러나 영화는 고향에서는 별로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고작해야 밤에 국민학교 운동장에 임시스크린을 설치하고 보여주던 ‘빨간마후라’, ‘5인의 해병’, ‘들국화는 피었는데’ 등 전쟁영화나 반공영화가 대부분이었고, 이리시에 이사 갔을 때 형이 삼남극장에서 보여준 ‘막켄나의 황금’이라는 서부영화를 본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음악과 영화를 좋아한 것은 어머니를 닮아서였던 것 같다. 당시 우리는 조그만 라디오밖에 없었지만 어머니는 밤에 카바이드등 옆에 시보리틀을 놓고 앉아서 시보리를 뜨실 때면 라디오를 켜놓고 옛날 노래를 즐겨 들으셨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와 같이 노래를 듣다가 자연스럽게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게 되었고, 그때 유행하던 노래들은 대부분 멜로디가 쉽고 가사도 어렵지 않아서 불과 몇 번만 들으면 나는 노래를 전부 외워 부르곤 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스스로 노래를 부르시는 것을 들은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고, 내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 아이구 잘도 부른다 하면서 칭찬을 해주곤 하셨다. 그러면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온갖 노래를 다 불러댔는데, 그때 유행하던 옛날가요 중 유명한 곡은 지금도 거의 다 외울 정도이다.
어머니는 특히 남자가수 중에는 남인수의 청아하고 맑은 음성을 좋아하셨고, 그의 노래 중에는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청춘고백 등을, 여자가수 중에는 알뜰한 당신을 부른 황금심과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마음이 울적하거나 옛날 생각이 날 때면 옛날노래를 듣는다. 그 시절의 노래들은 쿵짝 쿵짝 하는 그 곡조 때문에 아이들은 질색을 하지만 나는 예스러운 그 노랫말과 곡조가 좋아서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 시절의 노래 속에는 우리 부모시대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추억에 잠겨 옛날을 회상하며 마음을 달래기에 최고인 것을 보면 나도 분명 나이가 든 탓이리라.
어머니는 또한 구경도 무척 좋아하셨다. 영화나 서커스처럼 돈이 드는 데는 가고 싶어도 못 가셨지만, 읍내 장터나 함열역 앞 공터에서 벌어지는 여성국극단의 공연이나 무료 판소리공연에는 그렇게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하루 종일 구경을 하고 오셨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여성국극단이란 “1948년 여성 소리꾼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여성국악동호회에 의해 여성만 출연한 일종의 창극으로 시작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가 1960년대 말에 사라진 민족 음악극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그 당시 이 여성국극단은 대단한 인기였다는 기록이 있었고, ‘춘향전’이나 ‘무영탑’, ‘왕자호동’ 이란 작품 등을 공연하였다고 되어 있다.
나는 어머니가 이러한 여성국극단의 공연이나 판소리공연 등을 무척 좋아하셨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지만 어머니를 따라 구경을 가본 기억은 희미하다. 그러나 라디오로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들으실 때면 말없이 눈물을 훔치시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얼마나 그 시절 유행하던 음악이나 악극, 판소리공연 등을 좋아 하셨는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고향,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래도 어머니가 몸은 고달프고 각다분하셨어도, 고된 농사일을 하시며 힘들게 사시긴 했어도, 고향에서의 삶이 행복하시지 않았었나 하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셨을 때는 비록 잘 먹고 잘 입지는 못했어도 안전을 위협받거나 생명을 담보로 일을 하시지는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