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옥타브 낮추는 지혜 (잠 15:1)
이 시간에 “한 옥타브 낮추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옥타브(octave)란 아시는 바와 같이 음악 용어인데 어떤 음에서 완전 8도의 거리에 있는 음을 한 옥타브라 합니다. 가령 낮은음 도에서 높은음 도까지를 한 옥타브라고 합니다. 물리학적으로 진동수가 두 배가 되는 음정입니다. 목소리가 그 음을 내지 못한다면 욕심 내지 말고 한 옥타브 낮추어 부르면 원음은 아니지만 전체 하모니를 해치지 않으면서 무리 없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도 이렇게 한 옥타브 낮추어 행동한다면 실수가 없을 뿐 아니라 지혜로운 생활이 됩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으셨다면 결코 세상에 오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추셨기에 우리 죄인들을 다 구원하시고 아버지께 큰 영광을 돌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 무엇을 그렇게 낮추어서 해야 할까요?
1. 흥분과 감정을 한 옥타브 낮추어야 합니다.
잠12:16에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분노할 일이 있고 흥분할 일이 있어도 조금만 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낮추어야 합니다.
옛날 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단장이 연대에 순시 차 왔다가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연대장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고 구타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연대장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돌아서 나가는 사단장을 뒤에서 쏘았습니다. 하극상의 죄를 범한 연대장은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두 고급 장교의 부인들은 과부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 사단장도 그 연대장도 그 흥분된 감정을 한 옥타브 낮추었더라면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1:19-20) 말했습니다. 성내면 손해가 많지 성내서 이로울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잠15:1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서는 지혜서입니다. 이대로 살면 우리의 삶이 참으로 지혜로워집니다.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고 했습니다.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추어 부드럽게 말할 때 싸움은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을 한 옥타브만 낮추는 습관을 들이면 우리의 삶은 더 부드럽고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2. 자기 위치를 한 옥타브 낮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셨나요? 빌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중에 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높고 높은 자기 본래의 영광을 비어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피조물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한 옥타브가 아니라 수 억만 옥타브 내려오신 것입니다.
진짜 부자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옥타브 낮추는 것이 자유롭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허름한 옷차림에 벙거지 같은 모자를 썼다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돈이 있어도 있는 체하지 말고, 공부 많이 하고 학위가 있어도 아는 체하면 안 됩니다. 높아도 낮게 처신하고 있어도 없는 자같이 처신하면 큰 실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 잔칫집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교훈하시기를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8-10절) 그러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 하셨습니다.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낮추라는 교훈입니다.
또 고전7:31에 자기를 감추고 낮추어야 할 이유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들인데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서 뭘 좀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좀 높으면 그게 얼마나 높고 낮으면 그게 얼마나 낮습니까? 그리고 가졌으면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고 좀 가난하다고 그것이 무슨 상심할 이유입니까?
그래서 딤전6:17-18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없으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어야 하며 있으면 있는 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면 작은 수치에도 모욕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낮추면 사탄의 공격을 확실히 피할 수 있습니다.
3. 욕심을 한 옥타브 낮추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다툼과 싸움이 욕심 때문에 생겨납니다. 욕심만 없다면 세상은 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4:1-2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했습니다.
눅 12장을 보면 두 형제가 재산 분배 문제로 다투다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해결해달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 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을 줄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이 명답입니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처럼 형님이 더 가지세요. 아우가 더 가져라. 아니요. 형님이 거느린 것이 많아 더 필요하시잖아요. 아니 네가 살림 시작했으니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동생은 형이 더 가지면 더 마음이 편하고 형은 동생이 더 가지면 더 가져서 좋고 이렇게 욕심만 줄이면 모든 일은 아름답게 끝날 일입니다.
재물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부자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큰소리칠 때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부르리니 그러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잠28:16에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했습니다. 모든 고통과 악은 탐심 때문에 옵니다.
사람의 욕심은 무저갱과 같아서 끝이 없습니다. 명예욕도, 권세욕도, 물욕도, 너무나 큽니다. 식욕도 얼마나 큽니까? 좀 덜먹으면 편할 텐데 욕심이 병을 불러옵니다. 욕심을 한 옥타브 낮추어야 몸도 마음이 편합니다. 눈이 높아서 마흔이 넘도록 시집 못간 노처녀도 있습니다. 눈 높은 노처녀여 그대의 거울을 보라는 말이 있더군요. 30대 미만의 청년 중에 완전히 갖춘 남자가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여성은 없습니다.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욕심 품는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욕심은 만사의 방해물입니다.
4. 비판을 한 옥타브 낮추어야 합니다.
비판이 무엇일까요? 헬라어로 '크리노'라고 발음하는데 '정죄, 비난, 판단, 간주' 이런 뜻입니다. 성경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비판에는 사랑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 가족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바꾸어놓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자를 가리켜 작은 티는 보면서 자기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 없음처럼 큰 흠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비판은 공개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도우면 좋을 것도 공개적으로 하면 상처가 됩니다. 또 비판은 감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악의적인 마음이 비판으로 나타납니다. 또 비판은 무지한 성질이 있습니다. 자기의 단점을 모르는 사람들이 남을 비판합니다. 또 비열성이 있습니다. 건실하고 훌륭한 사람이 비판하는 것 보셨어요? 훌륭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판은 성급한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고 비난부터합니다.
비판하면 더 혹독하게 비판을 받게 됩니다. 남에게 손가락 하나 가지고 비판하고 흉을 보면 손가락 세 개는 나를 가리킵니다. 자기도 완전하지 못하면서 남을 비판함은 자기를 정죄함과 같습니다. 똑 같은 일을 하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꼭 비판할 수밖에 없다면 내 눈의 들보부터 빼고 감정도 악의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를 위한 기도와 사랑으로 한 옥타브 낮추시기 바랍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비판하는 무리 속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무리와 가까이하면 비판의 논리가 생겨나서 항상 비판하는 사람이 됩니다. 마귀를 “참소자”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교만해서 자기 약점은 모르고 자꾸 비판하게 됩니다. 꼭 지적하고 싶다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비공개상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한 옥타브 낮출 때 그것은 귀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낮추시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님을 하늘 끝까지 높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는 것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려면 반대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저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온전히 십자가 아래 매장시키십시다. 어쩔 수 없다면 한 옥타브씩 낮추십시다. 우리 모두 흥분과 감정, 지위와 소유, 욕심과 비판을 한 옥타브씩 낮추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가장 지혜롭고 선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