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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 西 亭 懸 板(망 서 정 현 판) |
望 西 亭 記
豊山故縣也至今晩雲之坊宋氏居焉卽延安氏之望也日友人宋君洛九纍然待衰以門父老命袖其先祖承宣公諱守殷遺事泫然語余曰吾祖嘗以丱角遊泮陞庠睦正郞致慕盛名妻以女使之同居是縣 天非間公輿敎導都公夏進士李公壽男直長朴公楣生員鄭公孝終同登戊寅謁聖科外而知縣龍宮玄風而敎授晋州安東內踐資歷無由考據以承旨載本縣敬老案公平居左必西向門其義則曰君親在西烏得不爾耶睦公偉之扁其居曰望西今名亭志其實也噫吾先之杞宋雖如是寢郞公遺慶卽公之曾孫也委禽于尊伯祖訓導公甥舘與二子諱汝源汝沃嘗摳衣陶山親承音旨之蹟載在全書今日記亭之役非夫子孫而誰也余惟公之世已四百年于玆矣想仰當日乾文於赫治道丕新蔚然家國之晟固無可懷底事公之寤寐于君親根於天性有如是宜其賞音之樂有契乎氷淸玉潤之地也已如忠鎬生也晩未遂執鞭之願詮伏窮山行負家國忍見河山異昔旋念公望西之意已不勝其愧蹙而又何敢容喙也哉雖然其有所感於中者亦以望西而尤切焉余觀人之名門世族能遵守世業久而不替者鮮矣今延安氏傳承十數世備閱寰區積㤼猶能禋祀以時衣冠禮俗不失舊儀又能式廓先廬修築亭宇將以望西二字煥輝於簷楣非但克闡先徽亦豈非世道勸也歟遂不辭而爲之記
勢己卯季冬
從仕郞前章陵參奉 眞城 李忠鎬 謹記
망서정기(望西亭記)
풍산(豊山)은 옛 현(縣)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운지방(晩雲地坊)에 송씨(宋氏)가 살았으니 본관이 연안(延安)인 명망 있는 가문이다. 어느 날 우인(友人) 송낙구(宋洛九)가 유연(纍然)히 쇠복(衰服)을 입고 문부노명(門父老命)을 받아 그 선조(先祖) 승선(承宣) 송수은(宋守殷) 유사(遺事)를 소매에 넣어 와서 나에게, 우리 조상께서 관각(丱角)으로 반궁(泮宮)에서 공부하여 상상(上庠)에 오르니, 정랑(正郞) 목치(睦致)가 성명(盛名)을 모열(慕悅)해서 따님을 아내로 삼게 하고 동거시현(同居是縣)하였다. 천리도 갈라놓지 못하는 공(公)의 여러 친구인 교도(敎導) 도하(都夏)와 진사(進士) 이수남(李壽男)과 직장(直長) 박미(朴楣)와 생원(生員) 정효종(鄭孝終)과 함께 무인년(戊寅年)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하여 외직으로 용궁(龍宮)․현풍현감(玄風縣監), 진주(晋州)와 안동교수(安東敎授)를 지내셨고, 내직(內職) 이력을 살필만한 근거를 모르나 본현(本縣) 경로안(敬老案)에는 승지(承旨)라고 실려 있다. 공(公)은 평거(平居)에 좌필서향(座必西向)하거늘 그 뜻을 물으니 군친재서(君親在西)하니 어찌 그리 아니하리오 하였다. 목공(睦公)이 공(公)의 거처(居處)에 망서(望西)라고 편제(扁題)하니 지금 정자(亭子)의 뜻이 그 실상(實狀)이다. 아ㅡ 오선지기송(吾先之杞宋)이 비록 이와 같으나 침랑공유경(寢郞公遺慶)은 곧 공(公)의 증손이다. 장가를 들어 퇴계(退溪) 이황선생(李滉先生)의 백씨(伯氏)인 훈도공(訓導公) 사위가 되어 2자(二子)를 두니 여원(汝源)과 여옥(汝沃)으로, 더불어 도산(陶山)에 일찍이 구의(摳衣)해서 승지(承旨) 음지(音旨)의 자취를 친(親)히 받들어서 자취가 전서(全書)에 실려 있으니, 오늘날 정자(亭子)의 기(記)를 하는 역사(役事)가 비자(非子)의 자손(子孫)이 아니면 누가 하리오. 내가 오직 공(公)의 세대(世代)가 4백년이 되었으니 당일(當日)에 우러러 생각하면 건문(乾文)의 혁혁(赫赫)함과 치도(治道)의 비신(丕新)함이 가국(家國)의 성(晟)이 진실로 가(可)히 소회(所懷)의 일이 없을손가. 공(公)의 오매(寤寐)에 군친(君親)을 그렇게 위함은 천성(天性)에 바탕을 해서 이와 같음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그 상음(賞音)의 락(樂)이며 빙청옥윤(氷淸玉潤) 처지(處地)의 연분(緣分)이 있음이 아니던가. 충호(忠鎬) 같은 이는 생야만(生也晩)하여 집편(執鞭)의 원(願)을 수행(修行)하지 못하고 행실(行實)이 궁산(窮山)에 전복(詮伏)해서 가국(家國)에 짐만 되어 차마 하산이석(河山異昔)을 보니 공(公)의 망서(望西)의 뜻이 생각이 나며 이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또 감히 용훼(容喙)하리요. 비록 그러나 중심(中心)에 느낀 바로는 또한 망서(望西)이면서 더욱 간절함은 내가 본 명문세족(名門世族)이 능히 준수세업(遵守世業)해서 오래되어도 쇠체(衰替)하지 않는 자 드무나, 오늘의 연안씨(延安氏)는 십수세(十數世)를 전승(傳承)하면서 여러 차례의 난리와 화란을 겪어왔지만 오히려 제사를 때에 맞추어 올리며 의관과 예(禮)의 풍속이 옛 모습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또 능히 선려(先廬)를 진실로 넓히고 정자를 수리하고 개축하니, 장차 망서(望西) 두 글자가 처마와 문방이 환하게 빛나니 비단 능히 선세(先世)의 아름다움을 들어내서 밝힐 뿐 아니라 또한 어찌 세도(世道)를 권함이 아니리까. 드디어 사양하지 못하고 기(記) 하노라
세기묘계동(歲己卯季冬)
종사랑전장능참봉 진성 이충호 근기(從仕郞前章陵參奉 眞城 李忠鎬 謹記)
望西亭詩帖(망서정시첩)
追憶當年胥宇東당년(當年)을 추억(追憶)하면서 동(東)으로 오셔서
望西一念暫非空망서(望西)의 일념(一念)은 잠시(暫時)도 잊을 수 없어
爲親喜得專城養위친(爲親)을 하서 전성(專城)의 봉양(奉養)도 기꺼워 하고
報國須成尙士風보국(報國)을 함에 고상(高尙)한 사풍(士風)도 이루어지나니
因是遺扁修揚日이로 인(因)하여 끼친 편액(扁額)을 새겨 거는 날에
僾然英魄降臨中어렴풋이 영령(英靈)께서 강림(降臨)하는 자리인 듯
故山雲物丁寧在고향(故鄕)의 운물(雲物)을 정령(丁靈)시리 있는 자리인 듯
俛仰芬芳依舊同면앙간(俛仰間)1)에 꽃다운 향기가 의구(依舊)하여라
주)1)면앙간(俛仰間) : 굽히고 보나 우러러 보나
十六世孫 洛祥(십육세손 낙상)
追惟先宇聿來東선정(先亭)에서 동(東)으로 오실 때를 추념(追念)하면서
誰謂如今文獻空누가 지금(至今)같이 문헌(文獻)이 비었다고나 할까
仁庇仍昆饒有澤인(仁)으로 감싸주니 후손(後孫)들 혜택(惠澤)이 넉넉하고
義伸館閣直生風관각(館閣)1)에 의(義)를 펴서 곧 유생(儒生)들의 기풍(氣風)인듯
心懸帝闕紅雲裡마음은 궁궐(宮闕) 홍운(紅雲)2)속에 매여있으나
裡斷梓鄕夕照中단장(斷腸)의 고향(故鄕)에는 저녁 노을의 가운데일세
遺志新成增百感끼친 뜻을 새로 이룩하니 백(百)가지 감회(感懷)가 더 하는 듯
倚欄西望隔晨同난간(欄干)에 의지(依持)해서 서(西)를 바라보니 지난 새벽 같구나
주)1)관각(館閣):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관. 한림(翰林)의 별명(別名). 송대(宋代) 이후(以後)의 이름으로 한림원(翰林院)이나 비서각(秘書閣) 같은 문신(文臣)들이 있는 곳.
2)홍운(紅雲) : 붉은 구름처럼 단청(丹靑)을 한 전각(殿閣)임
十六世孫 洛九(십육세손 낙구)
望西遺志起亭東망서(望西)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동(東)에다 정자(亭子)를 이루니
肯搆深誠徹太空긍구(肯搆)1)의 깊은 성심(誠心) 태공(太空)께서 알리
戀闕思親心炳日연궐(戀闕)2)하고 사친(思親)하는 마음 햇빛과도 같고
承流宣化世欽風후승(後承)이 덕화(德化)를 입어 대대로 흠앙(欽仰)하는 보람일세
聚歌衆族藏修裏여러 족인(族人) 함께 모여 장수(藏修)3)하는 속에
陟降女靈指顧中영령(英靈)이 오르내리시며 알맞게 지적(指摘)하시리
慕寓羹墻從此始 잊지 않고 우모(寓慕)함이 이로부터 비롯하여
令名留與壤穹同좋은 이름 궁양(穹壤)4)과 함께 남으로
주)1)긍구(肯搆) : 선대(先代)가 하시든 일을 후손(後孫)이 그 일을 계승(繼承)함
2)연궐(戀闕) : 임금님 계시는 궁궐(宮闕)을 잊을수 없어 그리워함
3)장수(藏修) : 학문을 정당한 과정으로 습득하는 일. 군자가 학문을 배우는 마음이 항상 학문을 떠날 수 없음.
4)양궁(壤穹) : 천지(天地)와 같음
時山 柳東濬(시산 유동준)
西亭新作晩雲東망서정(望西亭)을 새로 만운(晩雲)의 동(東)에 지으니
剩馥遺芬尙不空끼친 꽃다움 남은 향기 오히려 헛되지 않아
賢躅平泉來宇日어진 자취 평천(平泉)에 오시는 날에
重修禮廳述家風예청(禮廳)1)을 중수(重修)해서 가풍(家風)을 이었도다
虛臺鶴址浮烟下빈 대(臺)에 학(鶴)의 자취 연기 낀 아래
墓道龜趺夕照中묘도(墓道)의 거북판이 석양(夕陽)중에 비치네
貽我嘉猷楣扁柱우리에게 주어진 가유(嘉猷)2)편액(扁額)3)이 있어
慈孫譽德軆先同효손(孝孫)들의 덕성(德性)을 길이 선대(先代)와 같이 본받고자
주)1)예청(禮廳) : 예의(禮義)를 가르치는 청사(廳舍)
2)가유(嘉猷) : 나라와 집을 잘 다스리는 계획
3)편액(扁額) : 현판(懸板)을 걸어 놓음
悔村 金炳斗(회촌 김병두)
有美人西亭在東미인(美人)은 서(西)에 있고 정자(亭子)는 동(東)에 있는데
百年遺躅未全空백년(百年)의 끼친 자취 아직 전공(全空)은 아니구나
多君得遂經營志그대의 경영(經營)하는 뜻 드디어 얻어짐이 많고
起我尢深感慕風나의 깊은 감모(感慕)의 기풍(氣風)을 일으키네
可愛溪山明麗裡가히 사랑하는 계산(溪山) 명려(明麗)한 속에
懸知星宿定當中성숙(星宿)이 정당(定當)한 가운데 있음을 알리
慇懃奇語諸孫勖은근시리 제손(諸孫)들의 힘씀을 말하노니
創立守成迴不同창립(創立)과 수성(守成)함이 멀리 같지 않을까
自笑 柳純榮(자소 유순영)
望西亭子古山東망서정자(望西亭子)가 고산(古山)의 동(東)에 있고
戀闕丹忱迴碧空연궐(戀闕)하는 단침(丹忱) 멀리 벽공(碧空)일세
晩峀繚縈開勝景만운(晩雲)의 산(山)은 빙둘러 좋은 경치(景致) 열려 있고
園林深邃遡遺風원림(園林)은 깊고 유수(幽邃)한데 유풍(遺風)을 거스를까
堪憐歲晏經營裡세안(歲晏)1)에 경영(經營)하는 속마음 애달음을 견딜까
爲賀誠深感慕中성심(誠心)이 깊은 감모(感慕)의 쇠심(衰心)으로 하례(賀禮)하리
始識藏修從此大장수(藏修)함이 이로부터 큼을 비로소 알고
鏘鏘羣佩一樽同뭇사람 찾는 구슬 장장(鏘鏘)하며 술자리를 같이하리
주)1)세안(歲晏) : 때가 늦어서
中汕 柳根榮(중산 유근영)
望西亭在小溪東망서정(望西亭)이 소계(小溪)의 동(東)에 있으니
當日誠心施不空 당일(當日)의 성심(誠心) 자랑이 헛되지 않구나
顯晦有時曾樹德현(顯)과 회(晦)가 때가 있어 일찍이 덕성(德性)을 심어
羹墻深慕仰遺風갱장(羹墻)의 깊은 감모(感慕) 유풍(遺風)을 우러를세
飛甍突兀穹林外댓마루 기와가 우뚝하게 궁림(穹林)밖에 날고
圓礎羅張晩峀中둥근 주추 만운(晩雲)의 산(山)중에 펼쳐졌네
事己成來功己迄일은 이미 이루어지고 공(功은) 이미 다하였으니
雲孫爲賀一規同자손(子孫)들에게 하례(賀禮)가 한결 규례(規例)대로 일세
城浦 柳瀚榮(성포 유한영)
指點靈區我自東영구(靈區)를 지점(指點)한게 나의 동(東)쪽인데
巋然亭閣接蒼空우뚝한 정각(亭閣)이 창공(蒼空)에 접하였네
天時如待藏修地천시(天時)는 장수지(藏修地)를 기다린 듯 하고
年代雖遙緬仰風년대(年代)는 비록 멀지만 고상(高尙)한 풍치(風致) 면앙(緬仰)하네
幸有儒冠今世裡다행히 유관(儒冠)이 지금 세상(世上)속에 있어
猶聞絃訟小樓中오히려 현송(絃訟)의 소리 소루(小樓)중에서 들리네
扁楣最是望西字가장 이 망서자(望西字)의 편미(扁楣)가
耿耿丹忱誰更同경경(耿耿)한 단침(丹忱)이 누구와 다시 함께하리
巴江 柳道弦(파강 유도현)
新亭肯搆舊山東신정(新亭)을 구산동(舊山東)에 긍구(肯搆)를 하니
寓慕誠心實未空우모(寓慕)하는 성심(誠心) 실상 헛되지 않아
十世垂模修往跡십세(十世)에 드리운 계획(計劃) 왕적(往跡-지나간 자취)를 닦아
百年遺韻仰高風백년(百年)에 끼친 운치(韻致) 고상(高尙)한 풍범(風範)을 우러를세
如今桑梓依依裡지금(至今)과 같이 상자(桑梓)1)의의한 속에
感古簪纓歷歷中 옛날 잠영(簪纓)2)의 감회(感懷) 역력(歷歷)한 중에
盃酒登臨眞勝事술과 안주를 가지고 등임(登臨)하니 참으로 즐거운 일
前人遊償後人同전인(前人)들 유상(遊償)하는 곳 후인(後人)도 함께 하리
주)1)상자(桑梓) : 옛날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담밖에 심어. 옛집 즉 고향
2)잠영(簪纓) : 대대(代代)로 고관(高官)을 지냄
龍皐 李用赫(용고 이용혁)
望西亭搆鶴山東망서정(望西亭)을 학가산(鶴駕山) 동(東)에 지으니
當日葵忱久不空당일(當日)의 규침(葵忱)1)이 오래도록 헛되지 않아
十里靑嵐開別界십리(十里)에 푸른 아지랑이 별계(別界)가 열렸는데
一區遺址仰高風일구(一區)의 유지(遺址)에 고상(高尙)한 풍치(風致) 우러를세
重重講樹環墻外강(講)하는 나무 담밖에 겹겹이 둘러있고
濟濟儒冠滿榻中유관(儒冠)이 모두다 상탑(床榻)에 가득하네
夙載殫誠今告迄일찍이 성력(誠力)을 다하여 지금(至今)의 고유(告由)를 마치니
規模綽綽後來同규모(規模)가 작작(綽綽)2)해서 후래(後來)에도 같으리
주)1)규침(葵忱) : 정성스러움이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듯한 마음
2)작작(綽綽) : 언행이나 행동이 여유가 있는 모습
松後 李大淵(송후 이대연)
望西亭在晩雲東망서정(望西亭)이 만운(晩雲)의 동(東)에 있어 쇄
俯視晴溪仰碧空청계(晴溪)를 굳어보며 우러르니 벽공(碧空)일세
夜氣虛明窓得月야기(夜氣)는 허명(虛明)하여 창에 달빛이 비치고
晨光淸灑榻生風신광(晨光)이 맑고 깨끗해서 탑상(榻上)에 바람이 이는 듯
曾年開拓基玆始증년(曾年)에 이 터를 비로소 개척(開拓)해서
不日經營定正中경영(經營)이 기일전(期日前) 정중(正中)하게 정(定)해졌네
遙憶君親無恙否멀리 계신 군친(君親)께서 무양(無恙)하신가
于忠于孝一般同충성(忠誠)이나 효도(孝道)가 일반(一般)인 것 같구나
晩居 李會龍(만거 이회룡)
亭以名西人在東정자(亭子)의 이름을 망서(望西)로 하면서 사람은 동(東)에 있으니
天涯遙望眼穿空창공(蒼空)을 두를 듯이 하늘가를 요망(遙望)하네
棟宇經營成不日집을 지우려 경영(經營)하니 기일(期日)안에 이루어지고
溪山光彩得高風계산(溪山)의 광채(光彩)는 고상(高尙)한 풍치(風致)를 얻는 듯 하구나
團樂子孫平地上단란히 즐기는 자손(子孫)들 평지(平地)위에
兼全忠孝是家中충효(忠孝)를 다 갖추어 완전(完全)함이 이 집의 일일세
靈區開拓今何晩영(靈)의 구역(區域)을 개척(開拓)하기를 지금 어찌 늦은지
籬菊庭松一樣同뜰에 울타리한 국화가 솔의 모양 같구나
月下 權永均(월하 권영균)
望西亭屹海之東망서정(望西亭)을 우뚝하게 해동(海東)에 세우니
聲不虛傳價不空소문도 헛되지 아니하고 가치(價値)도 헛되지 아니하구나
卜地丁寧鄒魯地추노(鄒魯:추나라, 노나라)의 땅에 정녕(丁寧) 복지(卜地)를 해서
遺風知是漢唐風이에 한당(漢唐:한나라, 당나라)의 유풍(遺風)을 알게 하도다
繼事己成追慕際선조(先祖)가 하신 일 이루고 추모(追慕)할 즈음에
忠心自在命名中충심(忠心)은 자연(自然) 명명(命名)중에 있나니
手植當年應有志당년(當年) 수식(手植)한게 응당 뜻이 있어서
庭松院竹四時同뜰에 솔 원(院)의 대나무 사시(四時)가 푸르구나
達城 徐世奎(달성 서세규)
望西亭子晩雲東망서정자(望西亭子)를 만운(晩雲)의 동(東)에 지어
積歲荒凉一洗空적세(積歲)동안 황량(荒凉)함을 한번에 씻은 듯 하구나
北闕縣葵傾白日북궐(北闕)에 백일(白日)이 기우러진 듯(해바라기 같은 마음)
南州岐麥頌仁風남주(南州)의 기맥(岐麥)은 인풍(仁風)을 칭송(稱頌)하는 듯
開顔泉石藏修後장수(藏修)한 뒤에 천석(泉石)은 낯이 익고
擧目河山慷慨中강개(慷慨)한 중(中)에 눈을 들여 하산(河山)을 살필건가
最是夜來楣上月가장 이 밤에 미상(楣上)에 달이 뜨니
宛然精魄古今同완연(宛然)한 정백(精魄)은 고금(古今)이 한 가지일세
參奉 開城 高永贊(참봉 개성 고영찬)
望西當日肇基東망서정(望西亭)을 당일(當日)에 안동(安東)에 터를 잡아
文獻遙遙世不空문헌(文獻)은 요요(遙遙)하나 대대(代代)로 헛되지 않아
野史連章知友德야사(野史)에 연(連)한 문장(文章) 우덕(友德)을 알게 하고
篋珍遺墨徵儒風상자에 감춘 유묵(遺墨) 유풍(儒風)을 징빙(徵憑)하리
草樹滋根春雨後초수(草樹)의 뿌리가 불어남은 봄비가 온 후(後)이고
溪山增彩晩雲中계산(溪山)에 채색(彩色) 더하여 만운(晩雲) 풍경(風景)일세
戀闕思親何等懿연궐(戀闕)1)하고 사친(思親)2)함이 하등(何等)의 의행(懿行)인가
州人相頌秉彛同고을사람 서로 칭송(稱頌)하니 병이(秉彛)3)의 마음 한 가지일세
주)1)연궐(戀闕) : 임금님을 그리어 함
사친(思親) : 어버이를 생각함
병이(秉彛) : 시왈(詩曰) 천생증민(天生烝民)하시니 유물유칙(有物有則)이로다. 민지병이(民之秉彛)라 호시의덕(好是懿德)이라 하시니 여기에서 나온 말임.
永嘉 權述朝(영가 권술조)
機鴻高擧嶺雲東큰 뜻의 기미(機微)를 보고 높이 날아 영운(嶺雲)의 동(東)쪽에
遙望君親眼碧空군친(君親)을 멀리 바라보느라 눈은 벽공(碧空)을 뚫을 듯
一局溪山增有彩한 판국(局)의 계산(溪山)에 채색(彩色)을 더함이 있고
百年薖尙遺風백년(百年)의 과축(簻軸)1)에 오히려 유풍(遺風)이 있나니
瓦甍特出紛囂外기와 집 댓마루가 분효(紛囂)2)한 밖에서 특출(特出)하고
棟宇翬飛莽蒼中집은 꿩이 날아 갈 듯 창망(蒼莽)3)한 중(中)일세
若使精靈臨此地만약 정령(精靈)으로 하여금 이곳을 와서 보게 하면
六仙樓閣異而同여섯 신선(神仙)이 놀던 누각(樓閣)이 다르면서도 같구려
주)1)과축(簻軸) : 너그럽게 산야(山野)에 숨어 살아가는 자연미(自然味)를 즐기는 것
2)분효(紛囂) : 분분(紛紛)하고 시끄러운 세속(世俗)
3)창망(蒼莽) : 푸르고 먼 모양 즉 푸릇푸릇한 들판
東州 金永國(동주 김영국)
望西亭子澗之東망서정자(望西亭子)가 도랑의 동(東)에 세우니
戶牖憑高迴太空출입문(出入門)이 드높아 멀리 텅빈 하늘과도 같구나
肯搆深誠營歲月긍구(肯搆)하는 깊은 성심(誠心) 세월(歲月)을 두고 경영(經營)해서
不忘遺志振家風끼친 뜻 잊지 않고 가풍(家風)을 떨쳤네
思親暗淚迷雲裡 어버이 생각에 미운(迷雲) 중(中)에 몰래 눈물짓고
戀闕丹忱炳日中임금을 그리워하는 단성(丹誠) 햇볕과 같이 밝구나
闡此幽光何尙晩그윽한 빛 들어내는 것이 어찌 이같이 늦은고
士林追慕一心同사림(士林)의 추모(追慕)함이 한마음 같구나
豊山 柳道瓚(풍산 유도찬)
望西扁額揭于東망서(望西)의 편액(扁額)을 동(東)쪽에 걸어 놓으니
迴出欄于半碧空난간(欄干)에 뛰어나 반벽공(半碧空)에 들어나네
華搆十分成匠料화려(華麗)하게 지은 집 십분(十分) 장인(匠人) 요량(料量)이요
貽謨百世振儒風백세(百世)에 끼친 계획(計劃) 유풍(儒風)을 떨쳤네
報春寸草晝宵裡촌초(寸草)는 봄을 알리려 밤낮으로 자라고
向日丹葵寤寐中해를 향(向)한 붉은 해바라기 오매(寤寐)에도 잊지 않네
能繼肖孫非一二능(能)이 계승(繼承)할 자손(子孫) 하나 둘 뿐 아니라
兄難死弟弟難同형난(兄難)이 죽으면 제난(弟難)이 함께 하리
商岩 張仁植(상암 장인식)
一區粧点鶴山東일구(一區)의학가산(鶴駕山) 동(東)에 터를잡아
千里西城望眼空천리(千里)의 서성(西城)은 허공(虛空)만 바라보네
歸夢天長鵑訴月천장(天長)의 귀몽(歸夢)에 달밤에 두견(杜鵑)새만 울고
濶懷海濶鴈翔風나그네 회포(懷抱) 바다 멀리 기러기 상풍(翔風)에 날으네
承歡何日趨庭下어느 날 뫼시고 추정(趨庭)아래에서 즐길고
侍御當年過闕中임금님 모시는 당년(當年)에 궁궐중(宮闕中)을 지낼고
物換星移時肯搆사물(事物)은 바뀌고 세월(歲月)은 흘러 긍구(肯搆)할 때에
賢孫追慕古今同현손(賢孫)들의 추모(追慕)는 고금(古今)이 한가지일세
眞城 李源祖(진성 이원조)
望西亭起碧山東망서정(望西亭)을 벽산동(碧山東)에 세우니
遺躅悠悠德不空유적(遺躅)은 수수(悠悠)하나 덕성(德性)은 헛되지 않아
承先事業稀今世선세(先世)를 계승(繼承)하는 봉업(峯業)이 금세(今世)에는 드물고
貽後規模有古風후손(後孫)에게 끼쳐진 규모(規模) 옛 풍습(風習)이 있어라
烟霞幽僻新軒外연기와 노을이 유벽(幽僻)한 새로운 헌외(軒外)에
松菊移來古砌中송국(松菊)을 옮겨와서 옛 계절 중에 했네
一幅菟裘藏点久한폭의 토구(菟裘)1)를 장점(藏点)2)한지 오래되며
四時佳景與人同사시의 가경(佳景)이 남과도 같이하리
주)1)토구(菟裘) : 은거지(隱居地)
2)장점(藏点) : 장수(藏修)하려고 터를 잡아둔 자리
光山 金斗鉉(광산 김두현)
起亭西望隱於東동쪽에 숨어서 망서정(望西亭)을 세우니
進退優遊義不空진퇴(進退)가 우유(優遊)해서 의(義)가 헛되지 아니해
洛水源深眞鑑裏 낙수(洛水)는 근원(根源)이 깊어 참으로 거울속 같고
國師峯揖暮雲中국사봉(國師峯)도 모운중(暮雲中)1)에 읍(揖)을 하는 듯
遺芬勝地多增色 끼친 향기 좋은 곳 증색(增色)2)이 많고
追慕吾林尙有風추모(追慕)하는 우리 유림들 옛 풍습(風習) 숭상(崇尙)하네
肯搆令孫看護重긍구(肯搆)하는 효손(孝孫)들 소중(所重)히 간호(看護)하네
葱葱佳氣古今同가기(佳氣)가 총총(葱葱)3)해서 고금(古今)이 한가지일세
주)1)모운중(暮雲中) : 해질녘에 구름이 낀 형상
2)증색(增色) : 색깔이 더함
3)총총(葱葱) : 기를 통달(通達)하는 모양
安東 張景木咠 (안동 장경집)
望西亭子澗之東망서정자(望西亭子)를 도랑의 동(洞)에 세워
陟降精靈在碧空 정령(精靈)이 오르내리시며 벽공(碧空)에 있는 듯
十世雲孫修往蹟십세(十世)의 자손(子孫)들 왕적(往蹟)을 닦아
一方士友仰高風일방(一方)의 사우(士友)들이 고상(高尙)한 풍치(風致) 우러르네
先塋松栢森森裏선대(先代)의 묘역(墓域)에 송백(松栢)은 삼삼(森森)한 속에
古里梓桑歷歷中고향(故鄕)의 뽕나무 가래나무 역역(歷歷)히 생각나네
文酒登臨眞盛事등임(登臨)해서 문주(文酒)의 자리 참으로 성대(盛大)한 일
互相勉勵此筵同면려(勉勵)를 서로 권장(勸獎)하며 이 자리를 함께 하리
全義 李漢基(전의 이한기)
君親恩重各西東 군친(君親)의 은혜(恩惠) 소중(所重)하나 각각(各各) 서(西)와 동(東)이라
望祝丹誠貫碧空단성(丹誠)으로 바라보고 축원(祝願)하니 벽공(碧空)을 뚜를 듯
高士百年繩祖武고사(高士)를 백년(百年)토록 선조(先祖)의 발자취 이어서
肖孫十世述家風십세(十世)의 초손(肖孫)들이 가풍(家風)을 선술(善述)하네
要須肯搆嘉謨內중요(重要)함은 모름지기 긍구(肯搆)하는 가모(嘉謨)1)내(內)에 있고
好是追伸懿德中이를 추신(追伸)2)함을 좋아하니 아름다운 덕성(德性)일세
賴有鄕邦公議在향방(鄕邦)의 공의(公議)가 있음을 힘입어
衿紳寓慕合辭同진신(縉神)3)들이 합사(合辭)해서 우모(寓慕)하기를 함께하네
주)1)가모(嘉謨) : 나라나 집을 잘 다스리는 계획(計劃)
2)추신(追伸) : 추후(追後)에라도 그 일을 할양으로 함
3)진신(縉神): 벼슬하는 사람의 의장(衣裝)에 꾸밈새
經齊 李羲遠(경제 이희원)
西亭眉目背山東망서정(望西亭)의 미목(眉目)은 산을 등진 동(東)쪽
昕夕雲林眺望空아침저녁 운림(雲林)에서 공중(空中)만 바라보네
五夜影來高士月오경(五更)의 그림자는 고상(高尙)한 선비의 달 그림이요
一方天濶美人風일방(一方)의 넓은 하늘 미인(美人)의 기풍(氣風)일세
全門詩禮相傳後전문(全門)이 시서(詩書)로 서로 전(傳)해서
奕世斧堂主護中 누대(累代)의 부당(斧堂)을 주로 보호(保護)하는 중(中)일세
倚北深誠由孝友북(北)을 의지(依志)하는 깊은 성심(誠心) 효우(孝友)로 말미암아
此時齊頌古峕同이때에 제송(齊頌)1)함을 고석(古昔)이 한가지일세
주)1)제송(齊頌) : 가지런하게 송축(頌祝)함
安東 金耆東(안동 김기동)
望西亭子起於東망서정자(望西亭子)를 동(東)쪽에 세워
遺志扁名徧不空편액(扁額)의 끼친 뜻 두루 헛되지 않아
戀闕孤忠葵向日 궁궐(宮闕)을 연모(戀慕)하는 고충(孤忠) 해바라기 해를 향하듯
思親順孝樹多風사친(思親)하는 순효(順孝)의 나무 바람이 많은가
彈誠賢裔經營際성심(誠心)을 다하는 현예(賢裔)을 경영(經營)할 즈음에
不昧英靈陟降中영령(英靈)이며 혼매(昏昧)하지 아니하고 오르내렸으리
高榭層軒今突兀높은 정자(亭子) 증간(層軒)이 지금 우뚝한데
幽光追慕孰無同유광(幽光)을 추모(追慕)함 누가 같이 아니할고
豊山 柳琮佑(풍산 유종우)
公昔來捿左嶠東공(公)이 예전에 동(東)으로 와서 교남(嶠南)의 좌편(左便)
一生西望渺蒼空일평생(一平生) 서(西)를 바라보며 아득한 창공(蒼空)을
家邦別恨心縣月집과 지방(地方)이 낫선 곳 마음은 저 달처럼 허공에서
蓮桂交輝德尙風문과급제(文科及第)함에 빛나 고상(高尙)한 덕성(德性)의 기풍(氣風)일세
雲洞溪山精彩裡만운동(晩雲洞) 계산(溪山)의 정채(精彩)1)속에
蕨原霜露苾芬中궐원(蕨原)2)의 상로(霜露) 꽃다운 향기(香氣) 가운데일세
肖孫善述亭新煥초손(肖孫)을 선술(善述)하여 새로운 정자(亭子) 환하니
多士登臨曠感同여러 선비들 올라와 보고 광세(曠世)의 감회(感懷) 같으리
주)1)정채(精彩) : 정묘(精妙)한 채색(彩色)
2)궐원(蕨原) : 고사리등. 지명(여막들 고사리밭 등)
牧山 金炳玹(목산 김병현)
瀛仙義旆洛城東삼신당(三神堂)을 찾는 뜻으로 낙성(洛城)의 동(東)쪽
晩卜天山接太空늦게 천태산(天台山)에 터 잡으니 태공(太空)과도 접한듯
鶴峀千層高往躅학가산(鶴駕山) 천층(千層)인데 고상(高尙)한 왕년(往年)의 자취
龜涯百世仰遺風구애(龜涯)1)의 백세(百世)에 끼친 풍치(風致) 우러르리
五雲丹闕縣心上오색(五色)의 채운(彩雲) 단청(丹靑)한 궁궐(宮闕) 마음속에 걸려있고
三角靑山屹眼中삼각(三角)의 청산(靑山)도 안중(眼中)에 우뚝하네
肯搆誠如愀復見긍구(肯搆)의 성심(誠心) 추연(愀然)하게 다시 보는 것 같고
先休追慕後昆同선세(先世)의 아름다움 추모(追慕)함이 후손(後孫)과 함께 하리
주)1)구애(龜涯) : 지명(地名). 여막들. 고사리밭
鶴坡 張奎德(학파 장규덕)
斯亭始起蕨崖東이 정자(亭子) 비로소 궐애(蕨崖)1)의 동(東)에 세워
後裔焦誠貫碧空후손(後孫)들 초조(焦燥)한 성심(誠心) 벽공(碧空)을 뚫는 듯
丕泰有時修往跡비태(丕泰)의 운(運)이라 왕적(往跡)을 닦을 때가 있어
溪山呈彩尙高風계산(溪山)에 채색(彩色)을 들이니 고고(高高)한 기풍(氣風)일세
望闕丹忠深日下궁궐(宮闕)을 바라보는 단충(丹忠)은 저녁노을과도 같고
思親極孝指雲中사친(思親)하는 극효(極孝)가 운중(雲中)을 가르키는 듯
齊聲肯搆今何晩한 목소리로 긍구(肯搆)하고자 하나 지금까지 늦었는고
多士登臨寓慕同여러 선비가 올라와서 보고 우모(寓慕)함이 같구나
주)1)궐애(蕨崖) : 지명. 고사리밭
英陽 南漢鎭(영양 남한진)
陶山全書(도산전서)에서 謄出(등출)한 先祖(선조)님들과 退溪(퇴계)李滉(이황)1)선생의 往還(왕환)手簡(수간:편지)
答宋遺慶 壬戌○姪壻門人
人來知好在爲喜惠鳩二首亦感亦感但未見來書恨恨紙則時未書故未送爾惟照謹奉謝
답(答) 송유경(宋遺慶)2) 임술(壬戌 : 서기1562년) 질서(姪婿) 문인(門人)
사람이 와서 좋게 있다는 소실 들으니 기쁩니다. 비둘기에 대한 글 이수(二首)는 또한 감사(感謝)하고 또한 감사(感謝)하나, 다만 서신(書信)을 보지 못하여 한한(恨恨)이라, 종이는 그때 아직 쓰지 아니한 고(故)로 보내지 못합니다. 오직 살펴 삼가 사례(謝禮)를 받듭니다.
주) 1) 퇴계(退溪) 이황(李滉) : 초명은 서홍(瑞鴻).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성(眞城)이고,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潛), 하(河),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漪), 해(瀣), 징(澄), 황(滉) 등 5형제를 낳았는데 그 막내이다.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 단양군수, 풍기군수, 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 지경연(知經筵)·춘추관(春秋館)·성균관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며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근무를 하였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신 후에 영의정으로 증직을 명하여졌다.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영수이고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김성일(金誠一) 등의 걸출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한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제향이 되어 있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2) 송유경(宋遺慶) : 십세손(十世孫)으로 자(字)는 자유(子遺)이고 진사(進士) 국주(國柱)의 장자(長子)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손자(孫子)이고 벼슬은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이다. 공(公)은 퇴계(退溪)선생의 질서(姪壻)이고 문인(門人)이다. 공(公)은 퇴계(退溪)의 가르침을 받아 문행(文行)이 훌륭했다. 그 논저(論著)와 행적(行蹟)이 후학에게 혜택(惠澤)을 줌이 있었을 터인데 가난(家難)으로 문헌이 소실되었다. 가정년간(嘉靖年間)에 퇴도이선생(退陶李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였으며 배(配)는 진성이씨(眞城李氏)는 훈도(訓導) 하(河)의 따님이며 곧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백씨(伯氏)이다. 참봉공(參奉公)이 배위(配位)와 더불어 묘소(墓所)의 소재(所在)를 잃어버려서 지금 십사오세(十四五世)동안 공(公)의 자손(子孫)이 한(恨)을 가진 일이다. 두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長子)은 여원(汝源-初諱 汝能)이고 차자(次子)는 여옥(汝沃)인데 형제(兄弟)가 모두 퇴계문(退溪門)에서 수학했다. 제단(祭壇)을 마련하였는데 만운동(晩雲洞) 세현(細峴) 승지공배위 묘소(承旨公配位 墓所) 남향 임좌(南向 壬坐)에 설단(設壇)을 하였다.
答宋遺慶 甲子
因書知前證復發深慮深慮但來書中滯近始得見故示藥未卽送去深恨深恨蘇合元七丸姑送照領適在書堂如此略略未得優送亦恨幷恕謹復
답(答) 송유경(宋遺慶) 갑자(甲子 : 서기1564년)
서신(書信)으로 인(因)하여 알았으니 전(前)에 아프던 증세(症勢)가 재발(再發)했다고 하니 깊이깊이 염려됩니다. 온 편지(便紙)가 중간(中間)에 늦어져서 근간(近間)에 비로소 얻어 보았는 고(故)로 시약(示藥)을 즉시(卽時) 보내지 못한 것이 깊이깊이 한스럽습니다. 소합원(蘇合元) 칠환(七丸)을 우선 보내오니 살펴 영수(領收)하십시오. 마침 서당(書堂)에 있어서 넉넉히 보내지 못함 또한 한스러우니 아울러 용서(容恕)하십시오. 삼가 답(答)을 보냅니다.
答宋遺慶 丁卯
書來知好在爲喜某載病歸來僅保無他今方務緊何得入來不須爲恨惠要感感胡椒略呈謹復
답(答) 송유경(宋遺慶) 정묘(丁卯 : 서기1567년)
서신(書信)이 와서 좋게 있음을 알고 기쁩니다. 아무개는 병(病)을 얻고 돌아와서 겨우 보존(保存)하며 다른 탈은 없으나 지금(至今) 썩 긴요(緊要)한 볼일에 매여 있으니 어찌 들어 오리요, 모름지기 한(恨)되지 아니합니다. 고맙게 밤을 보내주어서 감사(感謝)하고 호초(胡椒:고추)를 약간(若干) 보내며 삼가 답(答)을 합니다.
答宋遺慶 己巳
見書知好在爲喜某依舊困於旱熱氣甚憊苦如坐深甑之中古語眞不虛也以此汝能等所製未得料次以送恨恨送紙受置但如此甚多積之如丘難必書就耳黃毛筆一柄墨二笏以付汝能等其書未及別答亦以語之
답(答) 송유경(宋遺慶) 기사(己巳 : 서기1569년)
서신(書信)을 보고 잘 있음을 알고 기쁩니다. 아무개는 옛날과 변함이 없이 가뭄이 심하고 더위로 인(因)하여 기(氣)가 매우 고달픕니다. 깊은 시루 가운데 앉은 것 같으니 옛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군요. 이로서 여능(汝能) 등(等)의 지은 것을 미처 요량(料量)못하고 보내니 한(恨)스럽군요. 보낸 종이는 받아두어 이같이 많아 쌓아 놓은 것이 구릉(丘陵)과 같으니 반드시 쓰기가 어려울듯 합니다. 황모필(黃毛筆) 한 자루와 묵(墨:먹) 이홀(二笏)을 부치니 여능(汝能) 등(等)이 쓰도록 별다른 답(答)을 아직 미치지 못하니 또한 말로써 합니다.
答宋遺慶
再奉書來知好在爲喜此處依舊但憲病未差悶悶
曆書京無來人武寄曆之人昨始得一件若送于君則此處無曆柰何後日疊得則送之惟照謹復
답(答) 송유경(宋遺慶)
두 번이나 온 편지를 받들어서 잘 있음에 기쁩니다. 이곳은 변함이 없으나 다만 헌(憲)의 병(病)이 아직 차효(差効)가 없으니 민망하고 민망합니다. 역서(曆書)는 서울서 오는 사람도 없고 역서(曆書)를 보내는 사람도 없으며 어제 비로소 일건(一件)을 얻었으나 만약(萬若) 군(君)에게 보낸즉 이곳은 역서(曆書)가 없으리니 어찌 할까. 후일(後日)에 거듭해서 얻으면 보내줄 터이니 오직 생각하십시오. 삼가 답(答)합니다.
批宋汝能汝沃疑製 恐甲寅○從彌甥孫門人
余實不知疑之爲軆故疑三編皆不科次而送然以余所見言之起頭或泛或疎其條對大略而由玆以下乃反多於條對處大抵文字粗率義理淺漏殊無發越之辭精深之見比於二賦如出別人手非常時所習故然耶各宜知勉
비(批) 여능(汝能)1)여옥(汝沃)2)의제(疑製)
공(恐) 갑인(甲寅 : 서기1555년) 종미생손(從彌甥孫) 문인(門人)
저희도 실상(實狀) 의심(疑心)나는 체(體)가 됨을 알지 못하는 고(故)로 의심(疑心)나는 삼편(三篇)이 모두 과목(科目)의 차례(次例)를 못하고서 보내나 그러나 저의 소견(所見)으로 말을 하면은 글의 첫머리는 혹(或)은 너무 지나치고 혹(或)은 간략(簡略)하며 적고 그 조목(條目)과 대(對)가 대략(大畧)으로 말미암았고 이하(以下)는 이에 도리어 조목(條目)과 대처(對處)가 많으나 무릇 문자(文字)가 거칠고 경솔(輕率)해서 의리(義理)가 얕고 흐려지게 되어 발월(發越)3)함이 없으며 말이 정밀(精密)하고 심오(深奧)하면서 이부(李賦)4)에 비교(比較)해보면 별다른 사람의 솜씨 같은 데에서 나왔으니 비상시(非常時)에 익힌 고(故)로 그런 것인가 각각(各各) 마땅하게 알고 힘쓰겠습니다.
주)1)여능(汝能) : 십일세손(十一世孫)으로 여원(汝源)의초휘(初諱)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증손(曾孫)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 유경(遺慶)의 아들이다. 동생 여옥(汝沃)과 함께 퇴계이황선생문하(退溪李滉先生門下)에서 유학(遊學)했다. 졸일(卒日)은 10월 20일이며 묘는 만운 궐전령(晩雲 蕨田嶺) 승지공묘소 동남향(承旨公墓所 東南向) 신좌(辛坐)이다.
2)여옥(汝沃) : 십일세손(十一世孫)으로 자(字)는 계숙(啓叔)이고 호(號)는 만오제(晩悟齌)이며 교리공(校理公)의 증손(曾孫)이고 장사랑참봉(將仕郞參奉) 유경(遺慶)의 아들이다. 퇴계이황선생(退溪李滉先生)문하와 송암권호문(松巖權好文)문하에서 수학(受學)하여 문장 학행(文章 學行)이 당시에는 칭찬이 자자했다. 향해(鄕解)에는 13차나 합격했으나 남성(南省)에는 불리(不利)해서 과거를 볼 뜻을 폐하고 드디어 살던 두수전리(斗水田里)를 만오리(晩悟里)라고 이름을 고치고 이로 인하여 기당(其堂)을 만오제(晩悟齌)라 이름을 하였다. 견영가지(見永嘉誌) 권선생(權先生)께서 일찍이 야경시를 보냈는데 시에 안파한운점점비만계상월야생휘붕승수영암도로보극여반화장귀(鴈破寒雲點點飛滿溪霜月夜生輝鬅鬙樹影巖頭路步屐如攀畵障歸:기러기가 한가로운 구름을 뚫고 점점이 날고 시내에 가득한 차가운 달 달밤에 빛이 나도다 더부룩한 나무그늘 바위머리 길에 그림이 화첩에 잡힐 듯이 나막신 걸음으로 돌아오네)라 하였다.
송암권선생(松巖權先生)의 문하(門下)의 동문(同門) 하연(河淵) 권송간임(權松澗任) 권용만기(權龍巒紀), 신경립(辛敬立)등과 시주(試酒)로 자오(自娛)했다. 제문견송암집(祭文見松巖集)상란(喪亂)으로 유문(遺文)은 거의 산일(散逸)되었으며, 다만 소백산행시(小白山行詩) 50여수만이 집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훗날 종가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자(二子)를 두셨는데 장자(長子)는 만운(晩雲) 상빈(尙賓)이고 차자(次子)는 주빈(周賓)이다. 만력갑오(萬曆甲午 선조<宣祖>:서기1594년) 3월 23일에 세상을 뜨셨으며 배위(配位) 공주이씨(公州李氏)의 졸일(卒日)은 4월 24일이며 묘역(墓域)은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홍현 진장동(醴泉郡 甘泉面 官峴里 紅縣 珎藏洞) 해좌(亥坐)에 합폄(合窆)이다.
3) 발월(發越): 소리 같은 것이 높이 올라감
4) 이부(李賦): 아방궁부(阿房宮賦)와 왕발이가 지은 등왕각부(藤王閣賦)를 말함
答宋汝能 庚午
書來知好在爲喜此處依舊但憲姪患疝證深慮標石輸到安東境而安東軍不出云明當伻書于府使前請速出軍須督護輸來傳付于宰姪等爲可
답(答) 송여능(宋汝能) 경오(庚午 : 서기1570년)
서신(書信)이 와서 잘 있는 것을 알고 기쁩니다. 이곳은 옛 모양과 변함이 없고 다만 헌(憲)이 조카가 불알이 붓고 아픈 병(病)을 앓고 있으니 깊이 염려(念慮)됩니다. 표석(表石)은 싣고 안동지경(安東地境)에 도착(到着)되었으나 안동군(安東軍)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내일(來日) 사람을 시켜 부사(府使)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서 속(速)히 군(軍)을 내주도록 청(請)할 것이니 모름지기 독려(督勵)하고 보호(保護)해서 싣고 오도록 재(宰)조카에서 전(傳)해 부치는데 옳을 것 같습니다.
答宋汝能
書來知無事爲慰吾以曾孫兒夭死悲念無聊墨一笏送去知領
답(答) 송여능(宋汝能)
서신(書信)이 오매 무사(無事)함을 알고서 위안(慰安)이 됩니다. 나는 증손(曾孫)아이가 일찍이 죽어서 슬픔을 생각해서 무료(無聊)히 지냅니다. 묵(墨:먹) 일홀(一笏)을 보내니 영수(領收)하기 바랍니다.
答宋汝能兄弟
各安否向者輸石琢磨幾畢有泐不用不得已改求於醴泉今當輸過其境汝等須交受于醴境監至于兜率院付于金允明等如向日所爲至可至可安道等以其母瘇證深重不得遠離往監汝等在路傍遞監輸送便且易事母憚母忽
답(答) 송여능(宋汝能) 형제(兄弟)
각각(各各) 편안하십니까? 지난날에 실어온 돌이 쫓고 갈아내는 일은 거의 마친 듯 하나 부서짐이 있어서 쓰지 못하고 부득이(不得已) 다시 예천(醴泉)에서 다시 구(求)하여 지금(至今) 마땅히 그 경계(境界)를 실어서 넘기는 듯 하오니 여러 어른들께서 모름지기 예천경계(醴泉境界)에서 서로 받아서 감독(監督)을 해서 두솔원(兜率院)에 이르러 김윤명(金允明) 등(等)에게 부탁(付託)을 하면 지난날과 같이 하는 것이 가(可)할 듯 합니다. 안도(安道) 등(等)은 그 어머니의 종기(腫氣) 증세(症勢)가 매우 깊어서 멀리 집을 떠날 수 없으니 여러 어른들께서 가서 감시(監視)를 하십시오. 길 곁에 번갈아 서서 감독(監督)하고 수송(輸送)함이 편리(便利)하고 또 쉬운 일이니 꺼리지 말고 소홀(疎忽)하게 하지 마십시오.
與宋汝能兄弟
近各安否前年來石磨礱垂畢釁露不用不得已再求醴泉今當輸過其處自醴泉地境至兜率院如前監督交付于權好文爲可標石二事所以備破折而在煩所過人力至爲未安也
聞辛弘祚及宏姪皆被訟出他官故監輸事閱道及宋福基處書送須卽專人送傳于二人使母相違爲可使關則禮安縣人到付于安東禮泉耳
송여능(宋汝能) 형제(兄弟)에게
근래(近來)에 각각(各各) 편하냐. 전년(前年)에 온 돌을 마석(磨石)이 거의 마쳤으나 틈이 노출(露出)되여 쓸 수 없게 되었다. 부득이(不得已)해서 다시 예천(醴泉)에서 구(求)해 오니 지금(至今)에 실어서 그곳을 지내는데 예천지경(醴泉地境)으로부터 두솔원(兜率院)까지는 전(前)과 다름없이 감독(監督)하고 권호문(權好文)에게 부탁(付託)하는 것이 가(可)할듯하다. 표석(標石)을 두 번 하는 일은 깨지고 꺽여짐을 대비(對備)함이면서 두 번이나 번거롭게 지내는 곳마다 인력(人力)을 번(煩)거롭게 해서 미안(未安)하구나.
들으니 신홍조(辛弘祚) 및 굉(宏)조카 모두가 송사(訟事)에 피소(被訴)되여 관(官)에 출타(出他)했는 고(故)로 감독(監督)하고 수송(輸送)하는 일은 열도(閱道)와 및 송복기(宋福基)의 곳에 서신(書信)을 보냈으니 모름지기 즉시(卽時) 전인(專人)해서 이인(二人)에게 보내서 전(傳)하게 되어 서로 어긋남이 없게 하도록 하는 것이 가(可)할 듯 관계(關係)를 하여금 하도록 예안현(禮安縣) 사람에게 안동(安東) 예천(醴泉)에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