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소주 예찬
수년 전 길을 가다가 이상한 간판을 보았다. [개소주 있습니다]. 갸우뚱. 그게 무슨 말인지 통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 조만간 그 말의 뜻이 '진국을 졸여 달인 보신탕'과 동의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동안 88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인은 식구와도 같은 귀엽고 영리한 개를 잡아먹는 미개인"이란 이야기들이 외국 어디쯤서 나온다는 신문기사가 돌더니, 어느새 [보신탕] 간판이 사라지고 [보양탕]이란 간판이 대신 걸렸다. 보양탕이란 간판은 처음에는 ‘양고기’를 삶아준다고 하더니 조금 지나니까 ‘양기’를 돋우는 고기는 무어든 삶아준다고 해설들을 달았다. 그러나 아마도 그거로는 모자랐던 모양이다. 보신탕 몇 그릇 배부르게 먹는 걸로는 '양기'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던지 바야흐로 그 진국을 졸이고 졸여서 엑기스만 먹는 길을 찾았다는 말이 “개소주 있습니다.”로 내걸리고 있었다. 한동안 시장통과 대로변 곳곳에 ‘개소주’란 간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온갖 소주들이 나타났다. 심지어 고양이 소주까지(쥐 소주는 왜 없을까?).
처음엔 왜 그걸 소주라고 표현했을까 의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문도 풀렸다. 소주란 설설 끓는 솥에서 똑똑 떨어지는 술의 진수만 모은 참 맑고도 맛있는 것이 아니랴. 그러니 설설 끓는 솥에서 똑똑 떨어지는 개고기의 진수만 모은 걸 두고 개소주라고 한다고 틀렸다 하겠는가? 그 쓰는 말이야 어떻든 나는 개소주집 앞을 지나면서 설설 끓는 솥으로 무수히 사라졌을 멍멍이들의 눈빛을 생각하곤 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좀 흘렀다. 세월 따라 개소주는 호박소주와 함께 진열이 되고 포도 풍년이 되자 포도소주도 등장했다. 달팽이소주도 가끔씩 보인다. 세상에 중국음식 종류를 따라갈 나라가 없다더니 세상에 한국 소주 종류를 따라갈 나라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판에 당뇨병 환자나 위장병 환자들이 애를 먹인다. 잘 조절되던 혈당이 올라가고 속앓이가 재발한다. 알고 보니 소주를 자신 탓이다. 딸이, 사위가, 아들이, 부모가 몸에 좋다고 사준 개소주, 호박소주, 포도소주를 "어찌 안 먹고 버릴소냐, 원장 당신은 잠자코 있거라, 좋은 건 누가 뭐래도 좋은 거다." 그런 얼굴이다. 할 말을 잃고 몇 번은 쳐다만 보다가 나도 꾀가 생긴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밥소주가 좋습니데이. 인제부터는 밥소주 잡수이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얼굴이 뜨아해진다. 좋다니 귀가 솔깃한데 밥소주라는 건 생전 처음 들어보는 거다.
"밥소주? 그기 뭐꼬? 어데서 파는데?" 상체가 앞으로 반쯤 기울어진다.
"밥소주라는 거 밥을 소주로 빼 만든 거라요. 반찬으로 먹던 음식을 소주 만들어 먹으면서 그렇게 좋다 캐싼는데 조선 사람은 밥 먹어야 안 삽니꺼. 그러이 밥소주가 제일로 좋은 거 아입니꺼?" “진짜로 카나 부로 카나" "진짜든 부로든 소주라믄 좋은 거 아입니꺼?” "원장 고 심뽀 고약테이." "지말 틀렸십니꺼? 밥을 찬으로 먹고 찬을 밥으로 먹는 기 옳심니꺼? 밥은 밥대로 찬은 찬대로 먹는 법이 다른 기라요." "다들 좋다는데?" “세상에 이거 좋다 저거 좋다 카는 사람들 어데 한 둘 입디꺼?” "오이야, 오늘은 내가 졌다. 인제 설교 고만하고 약 도고, 갈란다."
이리하야 나는 밥소주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밥도 기껏 100년 정도 먹으면 북망산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까? 그 진국만 빼 먹으면 어찌 되는지 상상이나 해볼까? 쓰는 만큼 죽고 먹는 만큼 죽는다는 건 사실일까 아닐까?
첫댓글 맞아요. 밥소주도 많이 먹어봐야 100년입니다. 선배님 앞에서 시건방진 소리지만, 저도 밥소주 먹을 날이 얼마 안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