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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바위는 매물도 벽해(碧海)위에 그리움 더하고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이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낸다. 개천절의 의미도 생각하기 전에 벌써 일행을 실은 차는 통영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이번 나들이 길은 통영(統營)을 지나 거제도 ‘대포항’에서 배를 타고 매물도(每勿島)에서 1박하고 다시 통영을 경유하여 돌아오는 일정이다.
매물도 현지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장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통영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서 통영 중앙시장에 들렸는데 마침 유치환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청마깃발축제’가 중앙시장 앞마당 ‘강구안’ 등에서 열리고 있어 많은 깃발이 바닷바람에 의탁해 펄럭이고 있었다.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보기 위해 일부러 오지는 못하더라도 이왕 온 길에 둘러본다면 의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 들뜬 기분으로 중앙시장에서 횟감과 매운탕용 생선 등을 구입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거제 ‘대포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이제 가을이 익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벼들의 무거운 목이 숙여질 대로 숙여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풍요롭게 하였다.
거제대교를 넘어 입도(入道)하여 달리는 거제는 이제 섬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업의 호황으로 우리나라 고소득지 중 한곳이기 때문이다. 고현을 들어가기 전 남부 방향으로 달리니 한적한 길가의 코스모스가 가을 속 따가운 햇살에 낯이 간지러운 듯이 한들한들 춤추는 모습은 잠시 어린 시절로 시간을 돌려주었다.
잔잔한 바닷가 해변도로를 거침없이 달려 일행이 대포항에 도착한 시각이 약 11시였다. 일행은 개금 아저씨 댁, 한마음 아저씨 댁, 그리고 우리를 합하여 전부 여섯 명이었다. 이분들과 자주 여행해왔기 때문에 별다른 부담이 없어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본래 계획은 오후 1시에 배를 타기로 하였지만 빨리 들어가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일행들의 뜻이 모아져 전화를 해서 배를 불렀다. 30여분을 기다리니 배가 들어왔는데 배는 부정기 도선인 낚시 배로 보였다. 작은 배이기 때문에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낭만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일행 중 불만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배가 항구를 빠져나가면서 펼쳐지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주는 아름다움에 가라않았다. 이런 부정기도선은 정기여객선에 비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시간, 장소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금마을
대포항을 출항하여 약 30여분 흰 물살을 가르며 항해하니 매물도가 나왔다. 제일 먼저 보이는 마을이 매물도 북쪽에 있는 당금마을이었다. 주황색 지붕들이 먼 곳에서도 민가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는데 이 마을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 외에 민박을 하여 부수입을 얻는다고 선장이 일러주었다. 여름에는 제법 많은 피서객들이 들어오지만 다른 때는 낚시꾼들이 주된 손님이라고 하니 연중 낚시꾼들이 많이 들어오는 모양이다.
우리가 민박하는 마을은 당금마을보다 남서쪽에 위치한 대항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장군봉―매물도 주봉으로 해발 210m―에서 뻗은 산록(山麓)에 위치해 있었다. 섬이라 평지는 거의 없는데 대항마을도 마찬가지로 가파른 언덕위에 위치해 있었는데 밑에서 보면 집들이 거의 절벽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박한 대매물도
배가 부두에 접안하여 짐을 정리해 민박집으로 이동하는데 절벽을 오르듯이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이렇게 집을 물가에 짓지 않고 산 중턱에다 지은 것은 이곳의 바람이 거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파도와 척박한 땅을 토대로 살아왔던 이곳 주민들의 어려운 삶이 연상되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마을은 20가구 정도로 보였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每竹里)에 속하며, 대매물도, 소매물도, 등대도(燈臺島, 일명 글썽이섬) 3섬을 통틀어 매물도라고 한다. 소매물도라 하면 흔히 등대섬까지 포함해서 부르는데 소매물도와 등대도의 해안암벽이 장관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거제도에서 가까운데 행정구역이 통영시 소속이다.
민박집은 포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 민박집들은 대부분 이런 곳에 위치해 있는데 특히 우리가 묶은 집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식사 후 오후 3시에 매물도가 자랑하는 절경인 등대섬과 소매물도를 관광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등대섬과 소매물도는 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널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맞추어 이곳을 찾아야 했다. 상세한 관광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관람계획을 수립할 수 없었는데 현지에서 민박집 아저씨와 선장과 의논해서 시간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움직이기로 한 것은 배로 소매물도, 등대섬을 한 바퀴 돌고, 이어 등대섬에 상륙하여 등대섬을 관광한 다음 소매물도로 건너와 소매물도를 도보로 관광하고 선착장에서 숙소인 대매물도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코스가 제일 좋은 것 같았다.
대매물도를 출발하여 소매물도 절경의 해안선을 따라 서서히 등대섬으로 향했다. 상큼한 바다공기가 일상 중에 덕지덕지 쌓인 찌꺼기를 한 겹, 한 겹 벗겨내었다. 여기에다 망망대해에 우뚝 우뚝 선 바위섬들이 손짓하며 우리를 반기고 있어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바다의 하얀 속살을 밀어내고 또 밀어낸 배는 드디어 등대섬 입구에 도착하면서 우뚝 선 바위들에게 압도당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깎아낸 천길 만길 바위들이 수직으로 심해(深海)에다 뿌리를 박고 의연하게 서 있었다. 그런 바위들과 벗하는 멀리 바라보이는 인공구조물인 하얀 등대가 오후 햇살을 받아 순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배는 서서히 해안을 돌아 더욱 심원한 곳으로 일행들을 안내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끼여 떨어질 것 같은 바위, 거친 풍랑을 이기지 못해 구멍이 뚫린 바위, 세월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가슴에다 나무를 안고 더불어 살아가는 바위, 그 바위도 처음부터 풀을 안고 나무를 안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변하고, 가슴은 넉넉해져 씨앗을 품고 생명을 잉태시키고 키웠는지 모른다.
또 다른 바위는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겨 깎이고 폐여 구멍이 생겨 파란 하늘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굴 천장에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서불과차’(徐市過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국 진시황제가 서불―일명 서복(徐福)이라 하며 3000여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이끌고 바다 건너 동쪽으로 떠난 인물―이라는 사람을 보내 불로초를 구해오게 했는데 이 서불이 약초를 구하기 위해 지나는 지역마다 ‘서불과차’를 표시했다. 이 서불 전설은 제주도 서귀포, 거제 해금강, 이곳 통영 소매물도, 그리고 전남 여러 곳에도 널려있다고 한다.
촛대처럼 생겨서 촛대바위, 그 촛대바위 앞에 작은 이름 없는 돌섬, 이 돌섬이 바로 낚시꾼들이 좋아하는 최고 포인트 같아 보였다. 그 옆을 지나가니 팔뚝만한 고기를 들어 보이며 자랑하는 태공들의 표정이 마냥 행복해보였다. 이곳을 돌아 나오면 남근바위가 있고 그 위로 뱃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다. 그 외도 많은 바위들이 등대섬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니 억겁(億劫)의 세월을 관통하면서 자연이 조각한 걸작품(傑作品)들이다.
몇 해 전 홍도를 갔을 때 해상 경치가 제일 좋은 곳에 배를 띄우고 잠시 쉬어가는 ‘해상휴게소’와 같은 것이 있어서 회 한 점과 소주 한 잔 했을 때 느꼈던 행복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튼 기암괴석과 벽해(碧海)가 어우러진 멋진 곳이었다. 이런 바위를 보고 통영에서 열리고 있는 ‘청마깃발축제’의 주인공 청마선생의 ‘바위’라는 시가 생각났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에서 생각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각나는 대로 중얼 거렸다. 노래는 마음이 동(動)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감동(感動)이다. 이렇게 대 자연은 사람들을 그 속으로 끌고 들어가 감동시켜 흔들어 버리기 때문에 마음이 동(動)한다. 이런 것을 맛보기 위해 일상을 탈출한다.
출렁이는 파도와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등대섬에 상륙하였다. 가을을 상징하는 쑥부쟁이, 억새들이 일제히 고개를 흔드는 것이 꼭 손님을 맞아 ‘안녕 하세요’라며 인사하는 것 같았다. 잘 조성된 길을 따라 움직이니 ‘소매물도항로표지관리소’가 나오는데 입구 등대를 소개하는 안내판에 이곳 등대에 관하여 상세하게 적어 두었다. 최초 점등일이 1917년 8월 5일 이라고 하니 나이가 꽤 되었다. 면적은 74,009평방미터(22,388평)로 큰 편은 아니다. 등대관리소를 지나 섬의 남쪽 끝 등대에 오르는 길은 억새와 가을꽃만이 정적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등대섬은 남쪽이 절리로 바람과 파도에 깎이어 바위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의 절경을 이루고, 북쪽은 소매물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섬의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이다.
땀이 촉촉하게 얼굴을 적실 즈음 등대에 도착하였다. 멀리 이름 모를 섬들이 줄줄이 서있고 북쪽으로 소매물도, 대매물도가 이어져 있는 올망졸망한 모습들이 정겨움과 아름다움을 주었다. 남쪽으로는 한 발을 잘못 놓으면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는데 그 끝이 조금 전 배로 지나온 바다위이다.
어둠을 밝혀 길을 열어주는 등대, 그 등대 앞에 섰다. 뭔가 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등대에다 비유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등대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 속을 파고드는 것은 멀리 남쪽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땀을 식히고 소매물도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등대섬 끝자락에 세월이 깎아버린 둥글, 둥글해진 몽돌들이 섬과 섬을 이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물이 들어오면 그 모습이 물속에 잠기고 말 것이다. 얼굴을 드러내고 숨기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그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변했으며 또 변해갈 것이다. 곡선은 그리움이고 아름다움이다. 선이라는 것은 조형적 의미이고, 이것을 음악에서는 멜로디라 한다. 조형적인 선은 매력적으로 작가의 영혼을 담고 흐른다. 이 동글동글한 돌들에는 자연의 혼이 담겨있다. 그래서 지겹지 않다. 여기서 물에 발을 담그고 잠시 시름을 잊기도 했다. 그런데 통영에서 출항하는 관광유람선은 이곳 등대섬에 상륙하지 못하고 선상 광광으로 그친다고 한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았는데 이곳 주민들과 관광유람선 사이의 이권 관계라고 하였다. 밤길을 열어주는 등대나 이곳의 쑥부쟁이, 억새, 동백(冬柏)들은 전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이다. 이런 인간들의 이기심이 불러온 반쪽 관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광유람선을 타고 있는 관광객들은 알고 있을까? 꼭 등대섬을 밟아봐야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소매물도에 바라본 등대섬
몽돌밭을 뒤로 하고 서서히 소매물도 오솔길을 올랐다. 윤기 나는 동백들이 숲을 이루고 해송이 줄지어선 오솔길을 따라 길을 재촉하는데 가을이라 해도 따가운 햇살을 등지고 걸었기 때문에 땀이 범벅이 되었다. 거칠어진 호흡을 조절하며 뒤를 돌아보니 저 멀 등대의 모습이 선명하게 살아 빛나고 있는 모습이 성스럽고 거룩해 보였다. 잠시 후면 불을 밝혀 길을 열어줄 것이다. 소매물도 중턱인 이곳에서 등대섬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이 각종 홍보용으로 나오는 등대섬 이미지라는 것을 알면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1996년 폐교된 “매물초등하교 소매물도분교”를 개조한 ‘힐 하우스’가 앞을 가로막는다. 이곳은 민박과 음료수 등을 파는 곳이다. 여기서 정상인 망태봉을 다녀와 내려가면 소매물도 마을과 선착장이 나온다.
소매물도
소매물도에는 새로 만든 최신 펜션 시설이 있는가하면 손으로 밀며 넘어져 버릴 것 같은 낡은 가옥, 또 주인 잃은 빈 집 등 신구(新舊)가 어우러지고, 여기에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울긋불긋한 의상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횟집과 생활용품, 목을 축이는 음료수와 주류 등을 파는 곳도 있었다. 일행도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면서 원탁에 앉아 망망대해에 떠 있는 ‘가옹도―오륙도와 비슷한 5~6개의 바위로 만들어진 섬―를 보면서 도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이곳에 거주하시는 할머니 한 분이 옆으로 오셔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전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해산물로 생활했는데 지금은 관광수입이 꽤 된다고 하시면서 “이곳에 무슨 볼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오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삶의 무게가 느껴짐은 이곳 생활이 쉽지만은 않다는 뜻이며,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 특정한 어머니만 그러할까?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삶으로 일관하신 이 땅의 거룩한 모든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기다리던 도선이 들어와 배에 올랐다. 뱃전에서 바라보는 수평선, 그 수평선 위로 떨어지는 태양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저렇게 떨어지고 나면 내일도 다시 떠올라 또 다시 물속으로 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지원의 친구 서상수가 집을 짓고 이름을 관재(觀齋)라 하고, 그 기문을 박지원에게 부탁하니 금강산의 치준대사(緇俊大師)와 사미승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관재를 풀어가는 가운데 나온 이야기이다.
까불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아라. 얻었다 좋아 말고, 잃었다 슬퍼 말아라.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이지. 오늘 해는 내일도 뜬다. 오늘은 내일과 다르지만 그 해는 어제 떴던 바로 그 해니라. 같지만 다르고, 다른데도 같다.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이치를 네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을 너는 알겠느냐? 있지도 않는 마음을 잡았다고 하지 말아라. 허공 속의 연기를 보았다고 하지 말아라. 종을 떠난 종소리를 어이 쫓아 잡으리.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아야지(정민 저 <미쳐야 미친다> p260. )
어디 하나 틀린 곳이 없다. 지금 물속으로 떨어지려는 해는 어제의 그것이고 내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느끼는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선인들은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하라고 한 것 같다. 오늘의 의미는 어제 죽은 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다. 이 이야기는 정호승 시인도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서 인용하고 있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입니다.
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다운 것이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배웁니다.
부족한 사람에게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호승 저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p65)
그러니 매일 뜨고 지는 해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낙조(落照)의 의미를 새기는 가운데 배는 서서히 대항 포구에 접안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움직인 코스는 대매물도에서 소매물도, 등대섬 해상관광을 마치고, 등대섬에 상륙하여 등대에 올라 한려수도를 관광하고 이어 몽돌밭을 지나 소매물도를 횡단하여 소매물도 선착장에서 다시 대매물도로 돌아온 것이다. 이 코스가 제일 좋은 것 같았다. 통영에서 유람선을 타면 등대섬에 입도(入島)가 안 되고, 소매물도에서 민박하면 산을 넘어 등대섬까지 걸어 같다 걸어와야 하기 때문에 해안 비경을 관광할 수 없다. 그래서 따로 배를 빌려 등대섬과 소매물도 기암절벽을 관광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낚시체험에 나섰다. 일행 중 한 분이 낚시에 상당히 조회가 깊은 분이 있어 다행히 낚시를 즐길 수 있었다. ‘메가리’와 ‘고등어’를 주로 낚았는데 우리는 조과(釣果)가 좋지 않았다. 이웃 낚시 팀들은 ‘볼락’, ‘갑오징어’를 많이 낚아 올렸다. 이들 팀들은 완벽한 채비를 준비했기 때문에 우리와 차이가 많았다.
고기는 낚지 못하더라도 별빛을 바라보며 철썩이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조맹덕이 노래한 대주당가 중 ‘월명성희(月明星稀)’가 떠올랐다. 물론 의미는 다르겠지만 여하튼 달이 밝으면 별이 적을 것인데 오늘은 음력으로 초순이라 초승달이 일찍 지고 나니 별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둠을 있어야 빛나는 존재가 별이다. 누구를 빛나게 하는 어둠이라는 존재도 위대해 보인다. 메가리 몇 마리를 낚아 숙소로 돌아와 회를 해서 소주와 더불어 맛을 보았는데 부드럽고 담백하여 처음 대하는 맛인데도 괜찮은 편이었다. 가을벌레 울음소리,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를 반주(伴奏) 삼아 일행들과 정담을 나누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민박집 다른 팀들이 일출 사진 촬영을 위해 새벽부터 채비를 한다고 집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다들 일찍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 식사 후 어제 들어왔던 코스로 다시 돌아간다. 매물도는 내가 다녀본 다른 섬들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 아니고 또한 관광코스도 단조로웠다. 이런 점을 보완해야 즐겁게 관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거제도 비포장도로에서 바라본 섬
하루 밤을 묶었던 매물도를 뒤로 하고 드디어 육지 같은 섬, 거제 대포항에 다시 돌아왔다. 잔잔한 호수 같은 항구를 나와 홍포를 거쳐 비포장도로에 진입하였다. 아직도 비포장도로가 있었는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이 고장 출신이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곳은 거제도 망산(望山) 남쪽 산록에 있는 길인데 거제도 환경단체에서 환경 및 야생동물 보호를 위해 강력하게 건의하여 비포장으로 남아있다고 하였다. 이 길의 이름이 ‘여차한개길’인데 이 길이야 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아닌가 할 정도로 좋았다. 망망대해도 있고, 올망졸망한 섬들도 조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길만길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기암절벽을 볼 수도 있다. 엉금엉금 기어 비포장도로를 빠져나오면 ‘여차항’이 나오고 이어 작은 고개를 넘으니 ‘다포항’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거제도 속의 산골 구천계곡과 포로수용소 옆을 지나 12시경 통영 서호시장에 도착하여 약간의 횟감을 구입하여 복국과 함께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예술가들이 탄생하였다. 청마 유치환을 필두로 하여 시인 유치진, 재독 음악가 윤이상, 시조 시인 김상옥, 꽃의 시인 김춘수, 토지의 박경리 등이 이 고장 출신이고, 화가 전혁림은 현재 통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청마깃발축제’ 일환으로 전시중인 ‘제25회 통영미술협회전(10.2~10.6, 통영문화회관)’에 통영시장이 출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예향(藝鄕) 답게 청마 탄신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청마깃발축제(10.2~10.6, 시내 각 행사장)’가 도심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일행이 찾은 곳은 도남동 ‘강구안’에 설치된 행사장이었다. 바다색과 흰색을 오버랩한 수많은 깃발을 걸어두고 잔치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사진전, 시화전, 거북선 체험, 청마선생이 작곡한 교가 경연대회 등 많은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장승을 직접 만들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잡기도 했는데, 젊은 조각가―청담 김기주씨―가 열심히 작업하는 광경에 매료되어 한참을 지켜보다가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업광경을 촬영했다. 아쉽게도 주소를 물어보지 못해 사진을 보낼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이어지는 행사장은 서예가가 직접 휘호하여 가훈을 증정하는 곳이었다. 노련한 서예가의 현장 휘호는 서예를 하는 나로서는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여러 곳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청마 선생과 관련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는 곳이 있었다. 청마를 그림으로 형상화한 자연 염색 손수건과 컵 등이 진열되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청마 선생이 자작시를 직접 해설한 책 ‘구름에 그린다’가 재출간되어 판매하고 있어 한 권을 구입했다.
‘구름에 그린다’는 청마 선생의 초기 시작(詩作)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중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청마 선생이 시인이 된 동기에 대해서 질문을 받고 그 생각을 기술한 내용이다. 이런 질문에 그는 서슴지 않고 연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연애는 연애로, 이것은 다시 그리움으로 남아 그를 감성에 젖어 살게 했다. 젊은 소년이 품었던 연정이 시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자.
다정다감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 시절 일찍부터 한 이성에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어린 감수성을 더욱 윤나게 하고 폭을 넓힐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유치환 저 <구름에 그린다> p99) 그래서 청마 선생은 ‘소년의 날’이라는 시를 지었다.
내 소년의 날은
일 삼아 하모니카 불며 불며
풋보리 기름진 밭이랑
배추꽃 피어 널리 두던을 노닐어
햇발처럼 행복하고
달콤한 연정에 일찍 눈떠
민들레 따서 가슴에 꽂고
꽃같이 우울할 줄 배웠네라
<소년의 날>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예쁜 꽃봉투에 사랑하는 소녀의 편지를 받았을 때 소년의 가슴은 얼마나 떨리고 또한 놀랐겠는가? 그래서 서투른 글씨로 답을 주고 얻기에 정성을 다하곤 하였더니 그것이 문학의 첫 걸음이 되었다(유치환 저 <구름에 그린다> pp100-101).” 이때 편지를 주고받았던 여인이 후일 그의 부인인 ‘권재순’이었다고 한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보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 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그리움>
이것이 청마의 20대 그리움이란다. 이 시에 깃발이라는 청마를 대표하는 상징적 시어가 등장한다. 이후 청마에게는 또 다른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가 ‘이영도’이다. 청마가 시조시인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를 만난 것은 통영여자중학교의 교유(敎諭, 교사)로 근무할 때이다. 청마보다 1년 늦은 1946년 10월 15일 이영도가 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다음이 청마가 이영도에게 전한 최초의 시이다.
12월에 접어드는 추운 하늘 아래
먼 소백산맥이 소리 없이 돌아앉은 거리
하룻날 표연히
내 여기에 내린 뜻을 뉘가 알리오
벗과 만나 받는 술잔도 입에 쓰고
오직 한 마리 땅에 내린 새 모양
마음자리 찾지 못하노니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 하던?
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에
아아 병인양 오슬오슬 드는지고
청마 사후에 나온 서간문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 중앙출판공사. 이영도 최계락 편저)에는 제목이 「정향(丁香)에게 주는 시 1」로 되어 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고 한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유치환 시 ‘행복’에서 따와〈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청마가 이영도를 만나면서 연정의 대상이 이영도 쪽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 냉담해지는 연인에 대해 그리움은 더욱 격정적으로 변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서 애달픈 사모(思慕)가 정결한 기도(祈禱)의 자세로 옮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위’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꺾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라는 ‘바위’ 시에는 작가의 가슴에 남아 있는 연정이 체념이 아니라 더 깊고, 더 크게 승화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움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도록 기도하는 심오한 뜻이 들어있다. 즉 억겁의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깨뜨려져도 떠나보내지 않는 그리움이 바위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위’는 그리움을 한 단계 승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위와 같은 그리움이 있기에 그 그리움은 행복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했는지 모른다.
자작 해설집이 있기에 시에 전문지식이 없는 문외한(門外漢)이라도 이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 책이 보배고, 읽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구름에 그린다’는 나의 시 나의 인생에서 생장기, 차단의 시간에서, 광야의 생리, 행방 잃은 감격, 배수(背水)의 시간에서, 애증의 나무, 허무의 방향, 구원에의 모색, 나와 문학 등이 있고, 인간의 우울과 희망, 신의 자세, 회오의 신, 신의 존재와 인간의 위치, 신의 영역과 인간의 부분, 신과 천지와 인간과, 계절의 단상, 신의 실재와 인간의 인식, 산중통신, 산중일기라는 제목으로 많은 시작과 더불어 창작과 해설들이 실려 있다.
돌아 나오는 입구에서 고개를 드니 통영의 달동네 ‘동피랑’이 보였다. 시간관계상 들리지 못했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동피랑은 ‘동쪽의 벼랑’이라는 통영의 사투리이며 통영의 내항인 ‘강구안’ 항이 내려다보이는 달동네이기 때문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통영시는 2006년 초 판잣집을 밀어 버리고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2007년 10월 ‘푸른통영21 추진위’라는 시민단체가 마을 철거를 막기 위해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골목문화를 보존하자”며 상금 3000만원을 내걸고 1차 벽화 공모전을 벌인 이후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들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고 있다.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재개발이 결정되어 보상금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 보상금으로는 다른 곳에다 집을 장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가운데 주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미술가들이 이곳을 찾아와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희망하는 가구에 한했지만… 이러한 것들이 알려지는 가운데 KBS-1TV ‘3일―72시간―’에서 이곳을 방영하면서 더욱 유명해진 곳이 ‘동피랑’이다. 이 방송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런 곳은 어려운 시절의 애환이 담긴 골목문화의 본보기로 지방자치단체가 이 지역을 현실적 가격으로 구입하여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송이후 관광객이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완강하여 통영시는 올 7월 철거를 철회하고 이주를 희망하는 가구는 시에서 구입하고, 그대로 살기를 희망하는 가구는 그대로 살 수 있도록 하면서 공원을 조성해 나가기로 했다니 전통적인 예향 통영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의 반대개념은 원시이고, 문화의 반대는 야만이다. 야만은 정신적으로 미개한 사람이나 혹은 정신적 전통 없이 살아가는 나라를 의미한다. 문화는 인간의 삶의 학습에 의해 형성된 삶의 궤적에 의해서 축적되는 것으로 미래를 살아갈 정신적 물질적 바탕이 되는 것이다. 통영이 이렇게 문화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문화적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더욱 풍요로울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골목길을 거닐어보고 싶었지만 나만의 욕심일 뿐이었다. 행사장을 돌아 나와 펄럭이는 깃발의 환송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우리나라 가을은 참 아름답다. 가을이 되면 수직 방향으로 대기가 이동하는 대류(對流) 현상이 줄어들면서 하늘로 말려 올라가는 먼지의 양이 줄어든다. 대류가 줄어드는 대신 대기는 수평으로 흘러 두께가 큰 적운(積雲)이 적어지면서 새털구름 등이 발달해 하늘이 높아 보인다. 이것이 우리나라 가을 하늘의 풍경이다. 가을은 완성의 계절이다. 그래서 밖으로 벌이기보다는 안으로 거둬들인다. 일을 끝맺음하고 안으로의 수렴을 재촉하는 가을은 따라서 내면적으로 성숙을 꾀할 수 있는 성찰과 사색의 계절이다. 이런 아름다운 계절을 맞이하여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축제들이 열려 영육(靈肉)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가랑비에도 옷이 젖듯이 이런 문화행사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 아름다운 마음이 형성될 것이다.
매물도 바닷바람 마시려 갔다 오는 길에 운 좋게 ‘청마깃발축제’를 둘러보게 되어 청마 선생과 만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인 셈이다. 내 마음속에 자리한 청마의 바위는 매물도 등대섬의 바위가 되었다. 그리고 벽해(碧海)에 그리움을 더했다.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억겁(億劫)의 세월에도 함묵(緘?)으로 일관하며 깨져도 울지 않고 소리하지 않는 그리움으로 자리했다. 그래서 바위는 그리움이며 기다림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다림이며,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르는 기다림이다.
2008년 10월 4일
매물도 통영을 다녀와서
※ 본문에 인용된 유치환 선생 시는 유치환 저 <구름에 그린다>에서 인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