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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론 06
디모데전서 3:1-7
감독의 직무
본문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이 감독을 목사 혹은 장로로 보고 기준이나 조건, 자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준이나 조건, 자격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본다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조건이나 기준,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기준에 합당하지 않는 죄인이라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런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고백일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는 본 서신을 쓰면서 가장 먼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 죄인 중의 괴수로 자격 없는 자에게 긍휼을 입히신 까닭은 믿음과 사랑 안에서 넘치도록 풍성하게 하여 영생을 향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은혜를 증명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1:12-17). 그래서 “우리 주의 은혜”(1:14)라고 하여 단순히 바울 개인에게만 주어진 은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진리가 된 아들이 된 우리로서 교회가 누리는 은혜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직분에 대한 조건과 자격을 말하면서 율법적인 지침을 준다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는 해석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1절).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은 ‘만일 말씀이 신실하다면’이라는 말이다. “감독의 직분”이라고 하였는데 “직분”이라는 말은 없다. “감독”이란 ‘에피스코페’는 ‘에피스켑토마이’(돌보다, 택하다, 방문하다)에서 유래하였는데 ‘방문, 감독, 조사, 직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파카드’의 역어로 쓰인 단어이다.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을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에피스켑토마이)”(눅 7:16)라고 하였다.
구약에서 ‘파카드’는 기본적으로 아랫사람을 감독한다는 뜻인데 ‘(전쟁을 위한 군대의) 숫자를 세는 것(출 30:12), 하나님의 돌보심(창 50:24), 찾아오심(룻 1:6), (찾아오심 자체가 심판이 되기에) 벌하신다(렘 6:15), 하나님께 부탁하여 맡겨진다(시 31:5)’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헬라어의 ‘에피스켑토마이’는 ‘에피’(~위에)와 ‘스코페오’(주시하다, 관찰하다)의 합성어로 ‘위에서 즉 하늘에서 주시하고 관찰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강론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에피스코포스)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의 ‘포이마이노’는 ‘양을 치다, 목자가 되다, 가축을 먹이다, 돌보다, 지키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고 돌보는 것을 양을 치는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참고, 요 21:16, 벧전 5:2, 계 7:17). 그렇다면 “감독”이란 제도적으로 어떤 직분을 말한다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을 주님의 일로 드러내기 위한 직무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기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와 감독이 되신다고 하였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25)
“얻으려 함은”이라는 말의 ‘오레고마이’는 ‘~을 얻으려고 내밀다, 얻으려고 애쓰다’라는 뜻이고, “사모하는 것”이란 말의 ‘에피뒤메오’는 ‘마음을 두다, 욕구하다, 갈망하다, 원하다’라는 뜻인데 배고픔과 같은 자연적 욕구(눅 15:16, 16:21), 간절히 바람(눅 22:15, 행 20:33, 약 4:2, 히 6:11, 계 9:6),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갈망(마 13:17, 눅 17:22, 벧전 1:12)에 대해 사용되었다. 감독을 원한다는 것은 선한 일에 마음을 둔 자이다. “선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언약을 성취하신 구원의 일이라면, 감독을 원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일에만 마음을 둔 자이다.
따라서 감독의 자격이나 조건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감독을 원한다는 것은 선한 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는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감독을 원하면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가 감독의 자격이 있다는 말도 아니다. 감독을 원한다는 것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망하는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말씀의 신실함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2절). “그러므로”라고 한 것은 신실한 말씀에 의해 선한 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을 가졌다면 이후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라는 말의 ‘아네필레프토스’는 ‘비난할 것이 없는, 흠 없는’이라는 뜻이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보면 한 아내의 남편이니까 당연히 남자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여자는 감독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연결하여 이해한다. 그러나 이 표현을 바꾸어 보면 ‘한 여자의 남자’가 된다. 2:8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는 남자로서 한 여자인 교회만 아내로 삼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교회인 아내를 사랑함으로 또 다른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해산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자가 감독이라는 말씀이다.
“절제하며”의 ‘네팔레오스’는 ‘술 취하지 않는, 절제하는, 정신 차리고 있는’이란 뜻이다.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 정신 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신중하며”의 ‘소프론’은 ‘건전한 마음, 사려깊은,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는 신중함’이라는 뜻이다. 진리를 아는 것이 건전한 마음이다. “단정하며”라는 말의 ‘코스미오스’ 2:9에서 본 것처럼 ‘존경스러운, 영예로운, 고결한’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상태가 영예로운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며”의 ‘필로세노스’는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환대하는, 접대하는’이라는 뜻인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나그네”란 진리를 갈급해하며 찾지만 발견하지 못하여 떠돌아다니는 자를 지칭한다. 그런데 이런 나그네를 전도라는 명목으로 끌어들여 진리를 넘겨주지 못하고 율법을 행하게 한다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라는 말은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잘 증거한다는 뜻이다. 디모데후서에는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
종은 주인의 뜻을 잘 전하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감독의 일이나 종의 일이나 같은 것으로 결국 이 일은 감독이시며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란 성령 받은 상태를 말씀한다(고후 1:21-22). 결국 감독이나 종, 선생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하신 십자가에 근거하여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마 23:8-10)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3절).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는 말의 ‘파로이노스’는 ‘파라’(~곁에)와 ‘오이노스’(포도주)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포도주 곁에 있는 자, 포도주에 빠진 자’라는 뜻이다. 누룩으로 발효시킨 것이 술이다. 성경에서 누룩은 사람의 교훈이나 비진리를 상징한다(마 16:11-12, 고전 5:6-8). 이런 점에서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은 비진리나 사람의 교훈, 율법적 행위로 의를 쌓는 교훈, 종교 이론이나 교리, 종교적 자기 체험 이런 것들로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구타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의 ‘플렉테스’는 ‘싸움을 좋아하는 자, 치는 자, 폭력을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비진리를 강요하여 율법의 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이 구타이며 폭력이다. “관용하며”라는 말의 ‘에피에이케스’는 ‘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이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잘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투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아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에서 “돈”이란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만들어 낸 공로로 곧 ‘자기 의’를 상징한다(참고 막 6:8, 눅 16:14). 따라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이다.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4-5절). “집”이란 구약에서는 성전이고, 신약에서는 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감독은 교회를 자기 집으로 다스리는 자이다. 여기서 “잘 다스려”라는 말의 “잘”은 1절에서 “선한”으로 번역된 ‘칼로스’이고, ‘프로이스테미’는 ‘프로’(~앞에서)와 ‘히스테미’(서다, 세우다)의 합성어로 ‘앞에 서다, 인도하다, 보호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앞에서 말씀으로 인도하여 선한 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똑바로 세우는 일을 한다는 의미이다. “복종하게”라는 말의 ‘휘포타게’는 2:11에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라고 하였을 때 “순종함”(헬, ‘휘포탓소’)과 같은 단어로 진리의 말씀으로 하늘에 잘 정돈하고 배열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율법에 복종하게 만들어 건물 교회 내에 잘 배치하고 진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6절). “새로 입교한”이라는 말의 ‘네오퓌토스’는 ‘새로 심은’이라는 뜻으로 유대교 지도자였다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자로 구약을 잘 안다는 것으로 인해 감독의 역할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귀를 사용하셔서 죄를 허락하신 언약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마귀를 정죄하는 것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7절). “외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말하지 않으니까 대적자들의 비난과 유혹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 정부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받았기에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조직을 갖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개인의 집에 모여 조용히 말씀을 나누었기에 감독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뜻이며, 유사시에는 자기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에베소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감독의 역할을 하려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교회 상황을 잘 아는 바울 사도가 까다로운 조건과 자격을 내세워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결국 “감독”에 대한 말씀은 그 누구도 감독이 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교회란 적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도록 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2024102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