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4일자 조선일보 만물상에 실린를 소개합니다. 아울러 기사에 실린 도봉공파의 계보와 대제학이 위상에 대해 묻는 분들이 더러 있어 이기회에 적어봅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내로라 하는 문중이 많았지만 집안마다 특징이 있었다.
전주 이씨와 동래 정씨, 청송 심씨, 청주 한씨는 정승을 10명 이상냈고, 안동 권씨, 남양 홍씨, 파평 윤씨는 문과 급제자를 가장 많이 낸 집안이다.
연안 이씨는 정승 8명, 문과급제자 250명, 청백리 6명으로 각 분야에서 인물을 두루 많이 배출해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으로 꼽힌다. 한창때 안동 김씨는 '금관자·옥관자가 서말'이라고 했다. 정3품 당상관 이상만 망건에 붙이는 금·옥관자가 서말이나 될 만큼 고위 관리를 많이 배출했다는 뜻이다.
▶이런 문벌 리스트 중에서도 광산(光山) 김씨는 독특한 위상을 자랑한다.
정승은 5명을 냈으니 10위 안에도 못 낀다. 문과급제는 265명으로 6위에 그친다. 왕비도 1명밖에 못 냈으니 다른 외척 집안에 비해 크게 내세울게 없다. 그래도 조선시대 최고 양반 가문을 꼽으라면 단연 앞 손가락에 오는 게 광산 김씨다. 문신(文臣)의 최고 영예 대제학이 7명으로 가장 많이 배출했기 때 문이다.
▶광산 김씨의 영광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이가 선조~인조 때의 사계(沙溪) 김장생이다. 그는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아 예학(禮學)을 집대성, 조선 후기 예(禮)와 풍속의 지침을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두고 "고금의 예설(禮說)을 찾아내 분명히 해석했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했다"고 했다.
사계 이후 '광김(光金)' 집안에서 3대 내리 대제학이 탄생했다.
▶경북 안동에 선산을 둔 광산 김씨 도봉공파 집안이 28일부터 모든 장례를 수목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산소를 만들지 않고 화장해 선산 주변 나무에 뿌리겠다는 것이다. 수목장이 확산되고는 있다지만 문중 차원에서 수목장을 결정한 것은 처음이다.
▶우리나라 묘지 넓이가 평균 19평이라고 한다. 한 사람 주거면적이 4.3평이라니 죽어서 차지하는 땅이 살아서의 4배를 넘는다. 과거엔 양반이라는 집안일수록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고 묏자리 를 크고 화려하게 썼다. 도봉공파는 사계의 직계 집안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예학의 종장(宗匠)을 배출한 집안의 일원이 새로운 시대 추세에 맞춰 간소하고 친환경적인 장례방식을 먼저 실천하겠다고 나서 뜻이 깊다. 사계도 "예의 본질은 변치 않지만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대상에 따라 변한다"고 했으니 이 시대의 수목장을 굳이 반대할 것 같지는 않다.“
(도봉공파의 계보)
도봉공파의 14세 양간공(휘 연)후 17세 판군기감사공(휘 영리)후 19세 관찰사공(휘 약채)후 20세 퇴촌공(휘 열)후 23세 담암공(용석)후 26세 도봉공(휘 득렴)입니다.
담암공이 성균관 진사시절에 연산군 폭정을 피해 처가가 있는 안동 구담으로 낙향하여 후손들이 안동을 중심으로 봉화, 영양, 의성, 예천 등으로 경북지방에 세거하게 되었습니다.
도봉공은 담암공의 장손이고, 그외 쌍벽당, 유일재 등등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경북 유림가문의 한축을 형성하는 가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부산종친회 전임 회장이신 규형상임고문이 도봉공파 문중인입니다.
(대제학의 위상)
여기서 대제학이란 양관대제학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우리 광김에 양관대제학이 아닌 일관 대제학은 더러 계셔서 양관대제학까지 합하면 열명이 넘는 것으로 압니다. 일관 대제학으로 유명하신 분이 양녕대군의 장인이 되시는 광성군(휘 한로)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셨습니다
양관대제학은 1명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는 것으로 문형(文衡)이라고도 합니다. 문신의 저울로 중심이라는 뜻이니 그 위상이 어느정도였겠습니까.
요즘같으면 서울대총장, 헌법재판소장, 종교수장(카톨릭 추기경, 불교 종정, 기독교 연합회장)을 한사람이 겸직하는 것입니다.
임기는 본인이 그만둘 때까지 종신제이며 왕은 추인만 하는 것이지 임면권(任免權)은 없습니다.
선정은 전임자의 추천에 의해 당상관 이상이 참여하는 심사위원회를 구성하는데 구족의 인척구성원내에 도덕적으로 손톱만큼의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 반면에 정승은 심사보다는 대간에서 삼족 인척의 도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설사 문제가 있어도 왕이 고집하여 임명을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동국 18현이라는 문묘배향의 다음 위치가 양관대제학입니다.
그래서 1명의 대제학이 3명의 정승보다 더 영예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로 모든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 명예는 크다할 것입니다.
우리 카폐를 늘 방문해서 좋은 말씀 많이 나누어 주시는 지곡님과 지암님이 3대 대제학과 형제대제학을 배출한 문충공(휘 만기)의 후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