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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청소년과 함께하는 십대지기 만들기
2. 청소년 변화의 시작은 자기애(自己愛)
3. 교회학교 부흥은 교사의 전문성을 통해 이끌 수 있다
4. 교양과 훈계로 청소년을 양육함으로써 회복되는 가정과 교회
5. 교회학교 안, 작은 교회를 세우자
6. 교회학교 인터넷중독 어떻게 도울 것인가
7. 여름을 생각하는 교회학교 지도자들에게
8. 교회학교 세우기는 교사 세우기부터
9. 부모같은 교사, 친구같은 교사
10. 월드컵세대를 알면 교회학교 부흥의 해법이 보인다
11. G세대를 향한 부흥전략
12.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13. 변화가 있는 교육과 교사의 자세
14. 수련회 후 프로그램을 공략하라
15.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감동하는 교육
16. 청소년 자살 문제, 교회가 가르쳐야 한다
17. 청소년신앙교육, 가슴에서 머리로 전환할 때
18. 다음세대를 향한 교회의 변화, 잃어버린 탕자를 품자
19. 교회학교 2011년 준비하기 - 교사편
20. 준비된 교사가 아름답습니다
<2010.4.15. 청소년과 함께하는 십대지기 만들기>
한국교회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 청소년부 지도자들에게 전문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중?고등부 활동 프로그램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청소년사역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 보다 관심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심만큼 실행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네 한국교회 중·고등부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위기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청소년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들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고정관념에 따른 전통주의, 둘째는 낙후된 교육환경, 셋째는 교회학교 교사의 비전문성, 넷째는 교회의 청소년부 방치,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청소년 문화에 대한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역발상으로 이런 환경이라 할지라도 한국교회와 십대지기에 청소년들이 모여들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음을 던져보면서 아래와 같이 몇 가지를 2010년도 청소년사역의 대안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교회 지도자의 의식갱신입니다. 청소년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지도자가 의식적으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건강한 청소년은 건강한 지도자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고 최고의 지도자가 섬길 수 있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특별히 청소년부 지도자는 어렵고 힘든 부서라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사고가 팽배해져 기피하는 부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청소년은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는 긍정적인 대상임을 확인하며 사고적 전환을 할 수 있도록 기회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환경 바꾸기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청소년들이 우선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교회에 갔더니,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봤더니, 교회에서 무엇 무엇을 해봤더니 ‘청소년이 우대받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듣고 싶습니다. ‘청소년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고적 전환은 청소년들이 교회로 찾아오게 할 수 있는 촉매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지도자의 전문화를 위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청소년을 연구하고 각 분야별 훈련을 통해 팀 사역을 능숙하게 진행하는, 그래서 일당백이라는 말을 듣는 전문화된 지도자들이 섬기는 가장 멋진 부서가 청소년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직접적 사역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우선되어야 함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한국교회가 2010년에는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결심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통해 더욱 멋진 청소년사역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있는 한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 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좀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 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 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 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영혼을 위한 닭고기수프1’이란 책에 실려있습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내 주위 사람이 변하고, 점점 확장해서 세계가 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청소년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청소년을 위해 4가지 변화를 실천할 때, 전국 교회에 ‘십대지기 만들기’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십대지기’는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진정한 십대지기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청소년사역에 헌신한 헌신자입니다. 이 땅에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비전을 전하기 위하여 삶의 목적을 청소년들에게 맞추고 오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역 전문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더 많은 ‘십대지기 만들기’는 곧 한국교회 청소년사역의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지면을 통해 여러분을 십대지기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함께 동역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2010.4.30. 청소년 변화의 시작은 자기애(自己愛)>
가출 청소년들이 처음 청소년쉼터에 찾아왔을 때 무심코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해줘야 할 부모도 나를 버리고, 싫다고 하는데 그리고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도 날 배신하고 떠나는데 왜 선생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역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자기애’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가장 필요한 아이들인데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모순 속에 스스로를 묻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아니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겠죠.
나의 모든 것, 나를 결정하고 나를 표현하는 모든 것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사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소년들에게는 꼭 필요한 덕목이 될 것입니다.
위기에 빠져있는 청소년이 만일 지금부터 내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좌절하고 있는 모습과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 지금 현재 내게 상처를 주고 있는 모든 것에 긍정적인 반발심을 가지게 될 것이며 어떻게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모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자체로 누군가의 모든 면들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또한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존재에 어울리는 생각과 행위들이 뒤따르게 될 것이며 그를 무너뜨리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것에서는 과감하게 벗어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의 수고가 그리스도 밖에서의 사랑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만을 채우는 욕심과 욕망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자아만족이나 자아도취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알고 싶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자기사랑을 찾을 수 있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애가 필요합니다.
그럼 누가 이들에게 진정한 자기애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부모님도, 친구들도, 학교 선생님도, 사회도 모두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들에게 비행이란 말로 포장하고 등을 돌려 외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교회와 사랑 앞에서 너무 멀리가 버린 위기 청소년들에게 진정한 자기애의 회복을 위하여 손을 내밀 수 있는 대상은 기독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불감증에 걸려버린 청소년들에게 다시 사랑을 회복시켜 줄 수 방법은 현장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해 봅니다.
첫째는, 부모님과 같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랑에서 실패를 한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살인자나 성폭력범을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욕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를 깨물고 참고 견디며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사람의 부모님입니다. 소외 청소년들에게 부모 같은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친구 같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친구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면 친구의 사랑은 조건이 있습니다. 위기 및 소외 청소년들은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어 보는 작업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사랑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전문성으로 돌봐야 합니다. 상처받은 자아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사랑이 약입니다. 그러나 치유된 자아를 위해서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체계화된 제자훈련과 사회관계성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제는 성숙한 교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학교 지도자들이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2010.5.14. 교회학교 부흥은 교사의 전문성을 통해 이끌 수 있다>
어린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아이의 어머니가 건강하면, 자연스럽게 아이도 건강하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와 같이 교회학교가 병들고 큰 몸살을 앓고 있다면 그것은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 역할을 하는 교사가 병들고 앓고 있는 것은 아닐지 탐색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교회마다 주일학교가 위기에 놓여있다는 말과 함께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문제시되고 있다. 교회학교의 위기는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최근 교회학교 학생 수가 더욱 급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를 넘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교육 전문가들은 교회학교 침체의 문제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사수급과 교사교육 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교회학교 위기는 우선 교사선발에서부터 그 요인을 찾을 수 있다. 교사로 지원하는 교인이 부족해 교사수급에 급급하다 보니 사명감과 자질을 갖춘 사람보다 지원하는 모든 사람을 교사로 세워도 부족한 인력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사들이 교사의 자질을 검증 받는 시험이나 심층면접 없이 교회학교 교사로 임명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요즘에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교사들을 찾기 힘들다”면서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성도들이 교사로 지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 교회는 교사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자질검증이나 철저한 사전교육 없이 교사의 수를 채우기 위해 막무가내 식으로 교사를 선발하고 교사교육도 소홀히 하고 있어 교사의 자질이 점점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준비되지 못한 교사들로 인하여 열정을 쏟는 교사가 점차 줄어들고 학생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양육하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교회학교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준비된 교사, 전문가다운 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과 사명감을 갖게 하는 교사훈련 등 적절한 교육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 교회에서 교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실정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교사들을 모아 교육을 시행하는 것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사들 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공통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교회의 실정에 맞는 방법을 채택한다면 교사교육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모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 인터넷을 활용한 교육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부평에 있는 교회에서 교사교육을 위해 실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학교 교사가 되기 위한 전문 과정을 개설하면 어떻겠는가. 천안에 있는 어느 교회 부장집사는 “교회학교 교사를 위한 필수교육과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 역시 교사들이 직접 참여하는 현장수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각 분기마다 주제설정을 통해 노회나 지방회 별로 교사교육을 실시하고 교회학교 성공사례 간증을 통해 교사의 열정을 고취시키는 것도 개 교회에서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러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전문교사로 성장시키기 위해 교회학교 전문교사과정을 개설하여 전문가를 양성하고, 약간에 보수를 지급하는 전문교사제도나 교회학교 전문 간사제도를 도입해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2010년 5월은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교회가 교사교육 또는 헌신예배를 가장 많이 실시하는 시기이다. 청소년의 달이자 교육의 달이기 때문이다. 연간 행사 중 하나로 교육과정을 치르기 보다는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처럼 영혼지대계를 위한 교육으로 교사교육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과 최고의 교육과정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각 교단별로 총회 차원에서 교사교육을 위한 지원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육 자료를 개발·보급하고, 강습회와 같은 교육 기회를 다양한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제공하여 지속적으로 교육이 시행될 수 있도록 제도마련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각 교단에 다음세대를 위해 체계적인 교육을 이수한 양질의 교사들이 주일학교를 섬길 수 있도록 하며, 교사양성을 위한 교단의 노력이 하루 빨리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2010.5.14. 교양과 훈계로 청소년을 양육함으로써 회복되는 가정과 교회>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인 5월. 청소년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녀지도가 어렵다고 하소연합니다. 아이를 떠받들다시피 양육하다 보니 마치 중국의 ‘소황제’ 같은 풍경이 대한민국에도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인구감소로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고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미루거나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집안 어른들이 슬하에 있는 아이 한 명을 향해 극진한 사랑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선진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10여 년 전부터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한국형 압축 저 출산시대’로 나타나면서 자녀를 적게 낳거나 경제적으로 녹록치 않아 ‘딩크족’을 선언하며 부부 중심으로 즐기다가 서로 싫증나면 헤어지는 일이 다반다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는 귀찮은 소유물로 치부되기도 하고 이혼을 하게 되면, 서로 양육을 거부하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황제처럼 떠받들면서, 또 한 쪽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짐짝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양육할 수 있을까요?
1. 노엽게 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자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고의적으로 혹은 부주의해서 불필요하게 자녀들의 화를 돋우는 일이 없도록 경계할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의 돌봄이 가장 컸던 시절을 지나 스스로 독립을 획득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족감을 얻으려는 청소년기에 돌입하면,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자극과는 상관없이 분노를 일으킵니다. 아이의 이기심, 미성숙 또는 잘못된 마음 자세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겠죠. 그러나 부모가 내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자녀들을 괴롭히거나 의도적으로 화를 돋우거나 부주의한 행동으로 자녀의 화를 북돋우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믿는 자들의 가정에 주시는 축복을 잃게 만듭니다. 혹시, 우리는 자녀를 양육한다고 하면서 과보호와 구속을 통해 자녀를 얽어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점검했으면 합니다. 자녀의 형편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녀들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밥 먹여주고, 옷 입혀주고, 잠재워주고, 학교 보내주면 부모의 노릇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자녀의 입장을 (현실) 보살펴 주어서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자식의 계획과 생각을 이해하고 선하게 인도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부모가 될 줄로 믿습니다.
2. 교양하라(교육으로 양육하라)
교양이란 말은 ‘어린아이를 양육함’, ‘교육’, ‘훈련’, ‘징계’의 뜻을 지닙니다. 자녀를 교양하는 데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체벌을 통한 훈련이고, 두 번째가 징계로 잘못된 점을 교정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므로 잘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선물로 받았으니 교육을 통해서 잘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육하라는 말씀은 어린아이가 잘못했을 때 사랑으로 덮으라는 것이 아니라 체벌하든지 징계하든지 잘못을 인식하고 고쳐서 바른 가운데 자라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자녀양육법을 참고했으면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에게 잡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돈을 바르게 버는 법과 관리하는 법, 그리고 사는 길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 향상을 자녀들에게 계승시켜줘야 합니다.
3. 훈계하라
언어로 훈계하고 설득시켜서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도 부모를 이해해야 합니다. 때때로 마음에는 있는데 표현력이 부족해서 훈계의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가 있고, 감정적으로 치우쳐 이성적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므로 훈계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설득할 수 있는 표현력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훈계할 때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자기 자녀의 교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부모 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능력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교양으로 양육하고, 훈계로 양육하면 훌륭한 자녀들로 양육될 줄로 믿습니다.
5월 청소년의달.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함으로써 주님께서 부모와 교사로 부른 여러분의 사역을 온전히 잘 감당했으면 합니다. 우리 십대지기는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가정에서, 교회에서 양육되고 성장되기를 기대합니다.
<2010.5.28. 교회학교 안, 작은 교회를 세우자>
“교회학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진단은 이미 어제오늘 내려진 것이 아니다. 멀리는 70년대 말부터 가까이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진단은 뼈아프게 공감하면서도 각 교단 및 교회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방치한 결과 오히려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고 있다. 특히 2007년부터 시작된 주 5일 근무제와 2008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초 중 고의 노는 토요일은 변화의 축이 되고 있다. 이제 자칫 잘못하면 교회학교가 더욱 침체되고 나아가서는 고사될 것이라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교회학교에 대한 위기에 대한 걱정보다는 변화를 위해 무엇인가 시작해야 할 때이며, 움직여야 한다. 더 이상 이대로 놔 둘 수만은 없다.
당장 올해부터 시작할 수 있는 교회학교 살리기 위한 변화를 몇 가지 대안으로 제시해 본다. 첫째는 의식 변화를 가져 보자. 특히 교회학교를 교육기관이 아닌 교회학교 안의 작은 교회로 바라보자. 우선 아이들은 피교육자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교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보자. 그래서 교육만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목회 전반적인 배려를 하자는 것이다. 예배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심방도 하고 목회상담도 하고 교회가 교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시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사를 교육자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세워가는 산파(産婆)로 바라보자. 즉, 청소년 교인을 섬기는 작은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하며, 아이들과 함께 예배와 모임, 다양한 활동들을 기획하고 실천해 보자.
둘째는 구조 변화를 시작해 보자. 예배와 분반공부라는 2중 구조를 3중 구조로 바꾸어보자. ‘예배-소공동체-사역팀’의 구조이다. 주일예배는 매주일 다함께 드리고, 소공동체는 산파인 교사와 함께 일방적인 교사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참여식 나눔의 공부와 교제와 함께하는 기도가 어우러진 모임으로 주일예배 후 또는 주중에 편리한 시간에 매주 갖는다. 그리고 사역팀은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역에 참여하는 팀 형태의 모임이다. 이것은 주일예배 후나 토요일, 매주 또는 격주 아니면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모일 수 있다.
셋째는 놀토(노는 토요일) 기획 프로그램을 준비해 보자. 이 프로그램은 크게 네 가지 형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놀토 디다케 모임이다. 주일에 다 할 수 없는 신앙훈련을 놀토에 특별반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형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어린이 제자훈련반, 청소년 리더훈련반과 같은 프로그램이다. 학기제로 한 학기당 10주 또는 12주 정도의 커리큘럼을 만들고 단계별로 구성하여 운영하는 모임을 말한다. 여기에 기존의 ‘어와나’ 또는 ‘어린이 알파’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 형태로 도입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2. 열린 강좌이다. 특기적성을 위한 문화강좌 프로그램이다. 영어회화반, 성악반, 악기반, 컴퓨터반, 논술반, 댄스반, 힙합반 등과 같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강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전문 인력을 강사로 초빙하고 실비의 금액을 수강료로 받아서 문화강좌 형태로 운영할 수 있다.
3. 동아리를 운영한다. 토요일이나 주일 오후에 전문성을 지닌 교사들의 지도 아래 다양한 신앙교육적 차원의 동아리를 결성하여 운영하는 형태의 프로그램이다. 예를 들어 영어성경읽기팀, 찬양팀, 멀티미디어팀, 연극팀, 축구선교팀, 지역봉사팀 등의 프로그램을 말한다. 아이들의 관심사를 조사해서 자원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4. M.T.(Membership Trainning) 모임이다. 연중 2회 진행되던 수련회와 성경학교를 평상시에도 형편껏 확장해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겨울성경학교와 겨울수련회는 집중적인 성경공부 커리큘럼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는 영성훈련이나 현장체험, 농촌봉사와 같은 활동적인 커리큘럼으로 구성하고, 평상시 2회 내지 4회 정도를 주말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커리큘럼을 구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회학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고민하지 말고 활동적인 프로그램을 놓고 더 이상 주저하지 말자. 그리고 시도해 보자. 지금 바로. Hear and now.
<2010.6.10. 교회학교 인터넷중독 어떻게 도울 것인가>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매체들 속에서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소통하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인터넷과 네티즌이라는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가깝게는 집안에서 또는 PC방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인식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속도록 인터넷 확산과 사회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1994년 13만 명이던 우리나라 인터넷 사용자는 2010년 현재 3천만 명을 넘어 섰으며, 이는 국내 전체 인구의 65.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연령별로 보면 10대와 20대의 인터넷 이용률은 계속 증가하고 있어 10대와 20대 인구수의 95% 수준을 넘어 섰다. 청소년 10명 중 7명이 온라인 게임을 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응답(한국정보문화진흥원, 2010)한 것을 비춰볼 때 우리나라의 인터넷 사용률은 매우 높다.
그러나, 이러한 인터넷의 높은 사용률은 게임중독, 음란물중독, 채팅중독, 인터넷 도박중독 등 역기능적인 증상들을 야기하며,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증폭되고 있다. 이로 인해 청소년들에게서 나타나는 과도한 온라인게임 사용이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성적 저하, 시간관리 문제, 가정내 마찰 증가, 사회성 문제, 심한 경우 학교를 중단하거나 신체적인 무기력으로 인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교실까지 보급되어 학생들은 교실에서 마음대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으며, 새로운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고, 몰래 음란물을 감상하기도 한다. 즉 정규수업 시간이 아닌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학교에서 설치한 방화벽을 통과하여 어떤 사이트라도 그들 마음대로 접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상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만, 학생들의 인터넷 사용에 관한 체계적이고도 적절한 교육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은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위한 장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가 잘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무방비로 인터넷 사용에 노출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 생각하며 대안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학생들과 친해지는 것이 인터넷중독을 확인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하다. 인터넷중독이 의심되는 학생을 만날 경우 처음부터 인터넷중독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를 실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학생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에게‘인터넷중독’보다는‘과다사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더 나아가 학생이 교사를 친밀하게 여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학생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후 인터넷중독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교사가 인터넷 세상을 잘 모를 경우, 학생과 대화를 통해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좋다. 교사가 학생들이 즐기는 게임이나 문화에 대해 정보가 부족하다고 해서 지도나 상담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학생이 즐기는 게임 종류, 내용, 가입한 길드, 혈맹, 클랜 등을 컴퓨터를 켜놓고 직접 물어보면서 정보를 획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활동이나 채팅에 푹 빠진 학생의 경우에도 주로 어떤 사이트를 이용하며, 채팅 주제가 무엇인지 학생과의 대화를 통해 직접 정보를 얻으면 된다.
셋째, 부모와 합동작전을 하라. 청소년들은 인터넷을 주로 자기 집 또는 PC방에서 사용한다. 대부분 부모가 인터넷을 잘 알면 자녀의 인터넷 중독률이 낮아지고, 부모와 교사가 학생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교환하면 시기적절한 예방과 대처가 가능하다. 따라서 교사가 인터넷중독 학생을 학교 현장에서 지도할 경우 부모와 공동으로 대처하면 효과적이다.
넷째, 인터넷 사용 수칙을 정해서 지키도록 지도한다. 구체적인 인터넷 사용지침을 제시해 주고 실천을 격려해 주는 것이 효과적이므로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를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날로 정하여‘인터넷 休(휴)요일 프로그램’과 같은 자율적인 수칙을 정해서 실천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좋다. 학생이 인터넷을 잘 조절하여 사용할 경우에는 아낌없이 칭찬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인터넷 사용습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2010.6.18. 여름을 생각하는 교회학교 지도자들에게>
요즘 각 교단별 노회별로 그리고 선교단체에서도 성경학교 강습회와 수련회 및 캠프강습회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10여 년 전 한국교회 교육의 위기론을 말하며 교육개혁과 다음세대를 위한 변화된 교육환경을 말하던 때와 지금의 현황이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말할 때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에 대한 깊은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교육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며, 교육한다는 것에 무엇을 기대해야 될까? 저는 교육이란 자신의 감동과 변화된 삶을 간증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의 아들이 스카우트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적은 수의 학생들이 참여했지만 많은 지도자들과 함께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재미있게 배우고 즐기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캠프는 자연 속에서 창조주를 발견하고 사람이 친하게 되는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주제를 담아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삶을 반성하게 하며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변화되게 하는 소규모 캠프를 통해 집사님의 아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학교의 현장에서는 이런 감동이 넘치는 교육이 실행되고 있는지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프로그램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오랜 시간의 연구와 노력을 통해 이 부분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시급하면서도 간단한 해결책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도 내가 맡고 있는 교회학교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다짐해 보면 어떨까요? 교육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교육의 모든 문제는 교사에게서 발생하고, 교사를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2010년 여름사역을 준비했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사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저는 다음 3가지 자질을 갖춰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미션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시간은 사건의 연속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인생이란 목적이 있는 사건의 연속이구요. 그런데 우리는 바쁜 일에 쌓여 성과없이 살아간곤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공 앞에는 초점이 있다.” 그러기에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지면 방향이 생깁니다. 교회학교에 대한 초점과 비전이 교사의 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양식으로 삼으셨다고 하십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로서 전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8). 그럼 여름사역을 시작하기 앞서 우리의 미션을 한번 확인했으면 합니다.
둘째, 인격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인격이 없는 비전은 사명이 아니라 조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말은 참 잘 합니다. 아마 늘 아이디어를 내듯이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좋은 말을 할 기회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작 말이 많은 사람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엡 5:9에서처럼 우리는 의롭고 정직하고 선하여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갖게 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잠 11:3에서 지적하듯이 정직하고 곧은 사람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해도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를 하는가? 직장에서 성실한가? 물질이 나의 삶에 영향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건전한가?’ 등의 질문에 잔인할 정도로 정직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인격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집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누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면, 살아야할 가치가 있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중에 조지 휘트필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40시간, 60시간씩 설교와 전도를 하는 열심 있는 사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건강을 유의하셔야지요.” 그때 휘트필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고 싶습니다”. 더욱 멋진 여름사역을 위하여 교회학교 사역이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사역이 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2010.6.25. 교회학교 세우기는 교사 세우기부터>
교회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교사다. ‘준비된 교사가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교사가 준비되면 아이들은 신나고 즐겁게 교회학교 생활을 할 수 있다. 교회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오려고 한다. 교사와 함께하는 시간이 의미가 있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거울과 같다. 교사가 웃으면 아이들도 웃고, 교사가 울면 아이들이 운다. 다시 말하면 교사가 준비된 만큼 교회학교도 아이들이 행복한 곳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아이들이 행복하면 교회학교는 자연스럽게 부흥하게 된다. 그렇다면, 준비된 교사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만큼 우리를 사용한다. 그래서 교사는 잘 배워야 한다. 교사가 잘 배우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좋은 자세가 필요하다.
먼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눈높이 전략이다. 무엇보다도 잘 배우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같이 단순하고 겸손하며 개방된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하여는 부끄러움이 없이 열심히 묻고 또 묻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린아이는 배우는 일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연습을 거듭한다. 어린아이는 가르치는 것을 자기 고집 없이 그대로 배운다. 그러나 교사인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혹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둘째, 착하고 충성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또는 영적 지도자의 생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과 탁월한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인간의 어떤 지혜보다도 우월한 지혜를 주시며 그 사람을 사용한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충성은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학교 바로 그곳에 있는 것. 즉, 교사로 부름에 응답하고 교사의 자리를 지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셋째,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교만한 마음, 시기심, 여러 가지 유혹들, 게으름, 세상적 야심 등 이런 것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에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칼 로저스는 ‘성장하려는 계속적인 마음이 있는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날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명이다.
넷째, 전폭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전폭적인 헌신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의 하나가 열심이다. 헌신된 사람은 열심을 다해 움직인다. 교사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할 때 헌신된 사람으로 인해 교회도, 교회학교도, 교회학교 아이들도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람의 추한 모습은 코나 입이 비뚤어진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헌신되지 않는 데에 있다. 헌신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열심히라면, 내적으로는 멍에를 메는 태도로 형성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다.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살펴본다면 기본적으로 준비된 교사인 좋은 교사가 일상생활에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미음(美音)이다. 사람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당연히 좋은 소리가 되어야 한다. 억양이 무리가 없고 음색이 맑으며 생기가 있으면 좋다. 특별히 아이들이 듣기 편한 목소리는 더욱 좋다. 두 번째는 미소(微笑)다. 웃은 얼굴은 상대방에게 자유함과 기쁨을 선사한다. 이야기를 나눌 때만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웃는 얼굴로 가르쳐라. 아이들을 향해 교사가 기뻐하고 무엇인가를 나누고 싶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건방진 파안대소가 아니라 잔잔한 미소는 겸손과 사랑을 담는다. 세 번째는 집중하는 시선(視線)이다. 상대방에 눈을 보고 말하는 것은 진실함과 진지함을 전달한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생명에 관계되고 아이들에게 많은 유익이 된다면 시선과 시선은 많은 것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 집중은 어디에서 올까? 준비가 철저하고 잘 가르치려는 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늘 겸손히 배우고 잘 가르치기 위해서 최선으로 준비한 교사는 아이들의 눈을 통해 사상과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된다.
2010년, 본격적인 계절학교를 통해 쓰러져가는 교회학교를 세우는 주역으로 교사로 삼고, 그 교사를 바로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길 소망해 본다.
<2010.7.2. 부모같은 교사, 친구같은 교사>
소외 청소년들의 가장 큰 특징은‘욱’하는 것이다. 어느 한순간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친구든 선생님이든 상관없이 모든 대상자들을 자신의 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흥분한 상태가 진정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변한다. 아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그 현장을 촬영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다시 평화(?)가 찾아온다. 과연 이들의 모습 속에는 아니 이 땅의 청소년들 마음속에는 어떤 모습이 있기에 이다지도 광풍이 쓰쳐 지나갈 정도로 변화가 찾아오고 힘들어할까?
정확한 답은 아닐 수 있지만, 20여년 동안 청소년전문사역을 통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면 청소년들이 제때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일어나는 아픔으로 결론짓고 싶다. 그렇다면 이들을 가르치는 청소년사역자들의 자세 또한 현장에서 접근하는 방법대로 다음과 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를 해본다.
‘사랑결핍현상’에 대하여 알고 있나요? 사람은 어느 때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만약 현재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사랑고픔증’에 걸린다. 사랑고픔증의 증상은, 현실을 현실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오해와 왜곡으로 억측과 비판 그리고 심한 열등감을 방어기제로 사용한다. 그럼, 태어나서 아동기 때에는 반드시 누구의 사랑을 받아야 할까? 맞다. 바로, 부모님의 사랑이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의 관심보다 부모님 말 한마디과 관심이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만약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이는 세상을 잃어버린 것처럼 울고불고 난리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부모님이 나타나면 언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울음을 뚝 그치고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아동기 때의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의미적인 존재가 부모님이다. 부모 이상 더 의미적인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적인 존재는 누가 될까? 아동기 때의 부모님에서 그 다음 단계는 친구다. 부모님의 사랑을 잘 받은 아이는 친구를 사귈 힘이 있다. 친구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전 시기인 아동기 때 부모로부터 사랑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아이들은 친구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집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집착은 사실을 왜곡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현실을 현실로 분석하지 못하고 잘못된 사고와 행동의 원천이 된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잘 만난 아이들은 친구들을 잘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는 좋은 친구를 만남으로써 깨어진 자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래서 친구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 두 번재로 중요한 의미적 존재가 된다.
세 번째로 중요한 의미적 존재는 변하지 않는 이성 즉, 배우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미적 존재는 자녀다. 생애주기 속에서 누구나 받는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결핌증’ 증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우리 아이들이 많이 아파하는 것 같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포기 아닌 포기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그럼 우리 교회학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이들을 상대하여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첫째, 부모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같은 사랑으로 가르치기는 아이와 라포를 형성하는 공감과 신뢰 및 수용이라는 상담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심을 의미한다.
둘째, 친구같은 마음으로 접근하라. 친구는 부모와는 조금 다르다. 부모는 수직적이고 무조건적이라면 친구는 수평적이고 서로 간에 협상(?)이 가능한 존재이다. 삐딱선을 타고 있는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건강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줄 수 있다면 건강한 친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친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배우자같이 접근하라. 이 말을 듣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에게 적용하는 언어로 바꿔 말하면 ‘전문성’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부모같은, 친구같은 관계가 형성되면 이제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2010.7.14. 월드컵세대를 알면 교회학교 부흥의 해법이 보인다>
남아공 월드컵의 23명 태극전사들을 통해서 5천만 국민은 혼연일체가 됐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흥에 못이겨 밤새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이 기쁨과 환희는 23명의 축구선수만의 기쁨도, 그라운드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던 11명 주전 선수만의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온 국민의 축제였고, 함께 대한민국을 환호할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가 우리를 외치게 했다. 그 함성 속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자. 한국교회의 교회학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월드컵 기간 중 거리로 쏟아져 나온 400만 명의 거리응원단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젊은 층이 만들어 낸 ‘붉은악마(대중적 호칭이므로 그대로 사용하도록 함)’들 속에는 넥타이부대도 아줌마부대도 있지만 대부분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소위 한국교회가 말하고 있는 ‘다음 세대’들이다. 교회 안에서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다음 세대들. 교회학교 공간을 텅비게 만든 반면 거리를 가득 매우고 목청높여 소리치고 응원을 주도하는 모습은 과히 놀라울 정도의 변화다.
그리스전에서 펼쳐진 기성용의 멋진 프리킥과 차두리의 로봇과 같은 투지력, 이청용의 섬세한 기술축구는 과히 대단한 열정 그 자체였다. 반면 나이지리아전에서는 차두리의 실수로 점수를 주고도 기죽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들을 ‘G세대’라고 말하고 있다. G세대란? 푸른색을 의미하는 그린(Green)과 세계화를 의미하는 글로벌(Global)을 의미한다. 그리고 G세대는 외동자녀 비율이 처음으로 50%를 넘어선 1988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 사교육, 영어열풍, 조기유학 등 부모의 집중 투자를 받으며 자랐고,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인터넷을 접해 산업화와 정보화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G세대 스타들을 보고 기성세대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궁금해 하고 있다. 철없어 보이던 G세대의 심장에는 어떤 저력이 숨어 있길래? 국민들을 하나로 응집할 수 있을까?
1988년 전후로 태어난 G세대의 대다수는 아직 학생이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스트·중앙대·포스텍 등 주요대학 교수 100명에게 G세대와 앞선 세대의 차이를 묻는 설문조사를 통해 만든 5가지 키워드로 G세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긍정의 마인드다. G세대의 특징으로 ‘자신감 있고 당당하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꼽았다. 서울대 교수는 “탁월한 스펙(자격조건)으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세대”라고 했다. 카이스트 교수는 “열등감과 부족함 없이 자라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둘째, 소속감에 대한 자부심이다. 중앙대 교수는 “우리는 외국에 나가면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설명해야 했지만 G세대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카이스트 교수는 “세계 어느 국가 학생들과 비교해서도 위축되지 않는 자신감이 G세대의 강점”이라고 했다. 본인이 인정하는 소속의 틀을 자연스럽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세대다.
셋째, 세계 도전의 욕구다. 서울대 교수는 “우리는 한국 중심적인 시야로 세상을 봤다면, G세대는 글로벌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G세대는 ‘지구를 조그맣게 보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앞선 세대에는 외국인과 어울리는 일 자체가 ‘결심’을 필요로 하는 행위였다. 반면 G세대는 해외 경험과 어학 능력에 있어 그 어떤 세대보다 뛰어난 세대다.
넷째, 개인주의다. G세대가 가장 차이 나는 부분으로 교수들은 사회인식(43명·복수응답 허용)을 꼽았다. 카이스트 사회학과 교수는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과거에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제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요즘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발제하는 학생이 많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현실주의다. G세대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과 물질적 만족에 큰 가치를 두는 현실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이화여대 교수는 “먼 꿈보다는 눈앞의 목표를 좇는 성향이 더 강하다””고 했다. 교수들은 이 같은 현실주의야말로 G세대의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했다. 바로 한국교회의 다음세대인 G세대는 “활짝 피어 잘 자라고 있는 느낌이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좌절할 수도 있어 불안하기도 한 세대임에는 분명하다.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들을 대표하는 G세대의 특징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 접근한다면 다음세대의 부흥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부흥이 아닌 인류구원의 부흥을 경험할 것이라고 외치고 싶다. (다음호에서 G세대 부흥전략에 대해 이어집니다.)
<2010.7.23. G세대를 향한 부흥전략>
대한민국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들 G세대.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원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그것을 할 때 즐기는 특징을 들 수 있다.
지난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딴 모태범 선수의 나이키 스우시 모양의 피어싱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귓불에 피어싱을 하고 다닐 정도로 자유분방하지만 훈련 일정만큼은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과거 국가대표 선수들은 금메달로 가난의 설움을 날려 버리겠다는 헝그리 정신과 국가를 위해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무장했다. 덩치 큰 외국 선수들에게 주눅 들기도 했다. 금메달을 따도 한(恨)에 맺혀 울었고 금메달을 놓쳐도 통곡했다. 그러나, 밴쿠버 대표팀을 보면서 이전과 변화된 모습을 알 수 있었다. 헝그리정신은 즐기자로, 애국심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하자로, 주눅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종목을 바꾸는 도전 의식도 있었다. 금메달을 따면 막춤으로 기쁨을 표시했고 기대주가 메달권에 들지 못해도 웃음으로 다음을 약속했다. 좋아서 하는 운동과 충만한 자신감으로 올림픽을 즐기는 멘탈 유전자에 도전 정신이 합쳐져 금메달 잔치를 펼친 것이다. 이들 세대가 주축이 된 소녀시대, 카라, 빅뱅, 2PM 등 인기그룹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연예계 진출을 꿈꿨기에 혹한 연습에도 견뎌낼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세대가 한국교회의 교회학교에도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기업에서는 이들을 ‘미래 주역’으로 간주하고 고객과 신입사원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반면, 한국교회의 대응은 더디기만 하다. 아니, 이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 빠르게 변화-성장하고 있는 기업과 달리 교회는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사회변화에 대한 교회의 늦은 대응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번, G세대란 무엇인가? 정리해보자. 지난호에 G세대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첫째는 긍정의 마인드가 강하다. 둘째는 자신이 속한 것에 대한 소속감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셋째는 세계 도전의 욕구가 있다. 넷째는 개인주의가 강하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현실주의가 있다. 이런 세대를 가르켜 우리는 G세대라고 명명했으며, 앞으로 G세대들이 대세가 될 것이다. 그럼 한국 교회의 교회학교 전략 또한 G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맞는 전도전략을 수립함으로써 교회학교 부흥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기성세대와 한국교회는 이제 달라진 G세대, 그들만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한끼 식사만으로 관계형성이 가능했던 것과 달리 G세대는 개별적인 접근이 어려워 일대일 양육이 쉽지 않다. G세대는 그들만의 공동체 속으로 깊이 참여하여 그들이 속한 현상에서 기독교문화를 형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화를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더 이상 말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며, 삶으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복음만이 G세대를 주님 앞으로 이끌 수 있다.
‘88만원 세대’와도 통하는 이들 세대가 취업과 진로 등의 문제로 스스로 신앙공동체에 나오더라도‘삶’속에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전도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G세대를 담당하고 있는 현장 사역자들은 “교회가 이들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먼저‘진실한 마음’과 신앙공동체 형성이 필수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징검다리선교회에서 청소년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임우현 목사는 X세대(1962년생~1982년생)다. 임목사는 “전략은 누구나 세울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누가’사용하느냐의 문제”라며“이들을 위해‘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렇게 살도록 돕는 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사역의 이유”라고 강조하고 있다.
변화무쌍한 이유로 G세대에 대한 교회의 선교전략 역시 달라야 한다. G세대의 특성상 신앙공동체 구성 역시 온·오프라인 모두 적용 가능하다. 시스템은 비교적 쉽게 변화시킬 수 있지만 삶의 변화는 단시간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역자와 한국교회 모두 G세대 청소년과 청년들을 향한 인내가 필요하다. 쉽게 열매가 나오지 않는 청소년, 청년 사역의 특성상 교회가 지속적인 인내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G세대의 부흥은 어렵다.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G세대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열정을 담을 수 있는 사역공동체 형성을 지원해 주고 스스로 사역에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어야 할 것이다.
<2010.08.01.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청소년 강력범죄를 살펴보면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까지 가해자로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홍은동에서 일어난 친구를 4일간 감금하고 집단폭행해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한강에 시체를 유기하는 사건을 보더라도 가정과 사회에서 방임된 청소년이 강력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이 정서적 방임을 당한 기억이 있고, 학업중단 상태였다.
이집트 파피루스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청소년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갈수록 청소년문제가 저연령화 되고 있고 범죄의 정도도 흉포화된다는 사실이다. 죄책감과 책임의식이 결여된 이들은 어쩌면 법의 통제 밖에 서있는지 모른다. ‘G세대’로 불리는 이들 이면에는 ‘B세대’가 자리잡고 있다. B는 Bomb로 ‘폭탄’을 의미하며, 1315의 청소년을 지칭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세대라는 거다.
그렇다고, 이들 문제를 수습방관해서는 안 된다. 아프리카 속담에 보면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B세대를 한 마을에서 품어야 한다. 한 마을을 ‘삶의 공동체’라고 한다면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이웃의 중요성은 그 아이에게는 그 마을이 전부요, 아니 삶 전체라는 경험적 사실을 가지고 설명해야 옳을 것이다. 아이는 그의 삶의 전부를 이루고 있는 마을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힌다. 그가 배울 것은 기술이나 지식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법, 차별없이 사람을 대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사는 법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건강하고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작가이며 교육학박사인 베티 B.영이 쓴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에서 미국 아이오와주의 시골 마을에서 성장하면서 보낸 자신의 유년의 기록처럼, 아프리카 속담처럼 이제는 대한민국 교회학교에서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교회 전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한 아이의 신앙을 성장시키는데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교회 전 기관이 함께 해야한다는 교훈처럼. 이제는 더 이상 예산과 성인교육 우선주의에 밀려서는 안된다.
학교도 국가도 아동과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정책적으로 말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과 재정적 투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교회학교와 다음세대를 위하여 전문 교회학교 교사제도를 실시하여야 한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과 무관하지 않다. 더 이상 전문신앙교육을 아마추어 교사들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교육의 양면성인 유익함과 재미있는 학습은 교사의 전문성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전문분야다. 교회학교 교사의 30% 정도를 전문교사로 확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문교사란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교사와 일정기간 소정의 전문교육을 이수한 교사자원을 의미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교회학교와 다음세대를 위하여 교회 재정의 20% 이상을 교육비로 배정하여야 한다. 사회에서도 ‘사회적 비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 교육을 실시할 때 사용되는 경비보다 아동이나 청소년시기에 투자되었을 때 소요되는 경비가 그 절반 이하의 경비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교회교육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써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은 어릴수록 그 효과는 증대될 수밖에 없다. 교회학교 시설과 위치 그리고 교재와 기자재 다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교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투자할 부분으로 선정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교회학교와 다음세대를 위하여 교육전담 교역자제도를 신설하여야 한다. 교회학교 담당교역자가 성인목회에 전초기지요 연습(?) 목회지로 생각하는 지도자는 없다. 하지만 교회 현실은 아직도 부교역자에 성인목회중심의 사역에 한 과정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1년에서 2년간 단기간 사역으로 교육을 말할 수 없고 교회를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앞으로 20년 후에도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에 수많은 아이들이 뛰어놀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모습을 상상하며 수련회 현장으로 떠나는 사역자의 메아리 같은 울림에 소리를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2010.08.15. 변화가 있는 교육과 교사의 자세>
무더운 여름,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시원함이 밀려온다. 이유는 다음 세대 안에는 이 민족을 향한 비전과 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들이 오늘도 무더위와 싸우며 성경학교와 수련회로 귀중한 땀방울을 흘리며 신앙훈련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는 아직도 소망과 비전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비전을 세우기 위해 다음 세대의 주체인 아동과 청소년들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청소년은 변화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성장한다. 이러한 성장은 세 가지 방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어제와 오늘이 동일하다. 우리는 이것을 ‘정체’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권태’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빠진다. 이것은 ‘퇴보’ 또는 ‘퇴행’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사람은 좌절을 경험한다. 그런데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진 상황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가르켜 ‘발전’ 또는 ‘성장’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 교회학교의 교사들은 어떠한가? 나로부터 변화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지 않는가! 교육은 바로 대상자의 변화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어느 사회학과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내주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로 가서 그곳에 사는 청소년 2백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그 청소년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써냈다. 평가서의 내용은 모두 동일했다. ‘이 아이에겐 전혀 미래가 없다.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한결같은 내용의 보고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또 다른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2백명의 청소년들이 25년이 지난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추적 조사하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학생들의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사망을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 20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80명 중에서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직업도 변호사와 의사, 사업가 등 상류층이 많았다. 교수는 매우 놀라서 그 조사를 더 진행시켰다. 다행히 그들 모두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교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있었다. "당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다. "여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요." 그 여교사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교수는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가서 물었다. 도대체 어떤 기적적인 교육 방법으로 빈민가의 청소년들을 이처럼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었는가? 늙었지만 아직도 빛나는 눈을 간직한 그 여교사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지요. 난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이 예화를 통해 우리는 ‘여교사’가 빈민가 학생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일까?
세 가지 유형의 교사가 있다. 먼저 자신의 역할만 잘하는 교사이다. 그는 학생에게 공과를 가르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역할에는 도통 관심없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일방적으로 전달만 할 뿐 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도,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우편배달부가 자신이 전하는 우편물의 내용에는 관심없고 정확하게 우편물이 전달되었는지에만 관심을 갖는 것처럼. 우편물의 내용을 보고 수취인이 울던지 웃던지 관심없다. 심지어 그것을 보고 죽데 되어도 그의 책임은 아니다.
두 번째는 설득하여 이해를 시키는 교사이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잘 정리하여 학생에게 전달하는데 그 학생의 머리에 호소한다. 실제로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은 큰 기쁨이다. 따라서 학생은 가르치는 교사를 좋아하며 배우는 일을 즐거워한다.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을 만나는 교사는 행복하다. 이따금 여러 교회를 돌면서 교사교육을 할 때면 열심히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 주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 때의 묘한 감동을 잊지 못해 나는 이 사역을 지금까지 계속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감동과 영감을 주는 교사이다. 지적인 이해와 함께 마음에 충격을 주는 교육이다. 이러한 감동은 지식을 더욱 풍요롭게 하며 실천의 동기를 충동시킨다.
<2010.08.19. 수련회 후 프로그램을 공략하라>
대한민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나라이다.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이 너무 늦기 전에 일어나고 있으며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맞서서 산과 강 그리고 바다에서 성령의 뜨거운 열기로 여름수련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또한 마무리하고 있다. 이미 시작한 교회도 있으며 벌써 마무리까지 정리한 교회도 있을 것이다. 매 해마다 여러 번의 수련회를 통해 한국교회들은 은혜를 경험해 왔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부둥켜안고 기도하는 모습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이런 수련회의 은혜와 열기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수련회 이후에도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수련회에서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갈구하며 기도의 입술을 열었던 아이들이 교회로 돌아와서는 입술을 꽁꽁 봉해버리고 침묵을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들은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수련회에서 경험한 은혜를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삶의 자리로 돌아온 아이들이 수련회의 결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어떻게 그들을 도와줄 수 없을까?
이러한 고민과 질문을 가진 교회를 위해 몇 가지 후속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수련회 후 4주 정도의 주일예배의 형식을 변화시키자. 수련회에서 맞보았던 은혜의 체험은 자유롭게 드려지는 찬양과 임펙트한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수련회 후 4주 정도는 교사 중심으로 또는 준비된 찬양단을 중심으로 수련회에서 은혜받았던 찬양곡을 중심으로 다시 은혜를 갈구하며 주님께 찬양을 드려보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그리고 초대된 찬양팀(청년부찬양단, 교사찬양단, CCM가수 등)을 통해 실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도록 적용점을 찾아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보면 좋다.
둘째, 수련회 때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셨던 강사를 다시 초대해 보는 것이다. 수련회에서 말씀으로 결단하고 기도했던 그 순간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음으로써 생활 속에 실천할 수 있도록 행동을 변화시켜보는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셋째, 학부모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기획하라. 신앙은 교회와 가정 그리고 학교가 서로 협력할 때 더욱 효과적인 신앙교육이 가능하다. 특별히 가정은 신앙의 모태와도 같다. 그래서 학부모님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협조는 중?고등부의 활성화와 개인적인 신앙 성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넷째, 학생들이 속해 있는 학교별 모임을 만들어 본다. 교회로 학생들이 찾아오는 예배와 만남에서 교역자와 지도교사들이 학교와 학원으로 찾아가 기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을 통해 새로운 만남이 이뤄지며 신앙과 삶의 전환점이 된다. 교육은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수련회 후속 프로그램이 갖는 기대효과는 매우 높다. 첫째, 학생들에게 수련회의 받은 은혜를 반복적으로 되새김질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믿음이 자라는데 큰 도움이 된다. 스스로 삶을 교정해 나가는데 탁월한 효과를 갖고 있다. 둘째, 교사들에게 예배를 통한 만남 외에도 반목회 아이들과 다양한 형태의 만남을 가질 수 있으며 구체적인 아이들의 변화를 현장을 통해 읽을 수 있고, 교사 자신도 받은 은혜와 기대가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셋째, 학부모들에게 수련회 후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와 함께 자녀들의 변화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자녀의 신앙교육에 있어 수련회가 매우 중요한 계기임을 인식시킬 수 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부모가 자녀를 위한 기도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함을 깨닫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고등부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관심이다. 수련회를 통해 보여줬던 교회와 학부모의 무한한 관심과 애정을 수련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고등부와 다음 세대를 위한 정책으로 정립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는 교역자와 부장 그리고 교사와 학생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작은 이벤트를 통해서라도 교회와 학부모가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기회 마련에 힘써라. 그리고 서로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라.
<2010.08.26.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감동하는 교육>
교육은 만남을 통해 이뤄지는 삶의 변화의 축제이다. 변화가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보편적인 교육에 대한 정의에서 ‘교육에 의해서 개인이 보다 완전해지고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달시키고 갖추지 못한다면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문화적인 발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사회 환경으로부터 인간 완성에 필요한 문화 내용을 받을 수도 없으며, 인간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자극이나 암시도 받을 수 없게 된다. 보다 나은 개인 없이는 보다 나은 사회는 있을 수 없으며, 보다 나은 사회 없이는 보다 나은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 이렇듯 교육 작용에는 개인형성과 사회형성의 두 측면이 있으며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 속에는 변화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교육은 변화를 전제하여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회학교 교육이야 말로 진정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럼, 무엇이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을까?
1984년 미국 LA에서 올림픽이 있었는데 중국 여자선수가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땄다. 동양선수로는 드문 일이어서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하였다. “당신은 동양 여자로 몸집도 아주 왜소한데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운 동작과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고공에서 아름답게 다이빙을 연출할 수 있었습니까? 금메달을 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선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하였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 선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저는 어렸을 때 100미터 경주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경주에 나가면 자주 엎어지고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등외 선수가 되면 어머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1등 하는 것보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네가 일어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견딜 수가 없단다. 너는 아름다운 내 딸이야. 너는 1등을 하려고 하지 말아라. 그냥 최선을 다 하는 거야. 나는 그냥 네가 뛰는 모습이, 운동하는 모습 그 자체가 아름답구나. 너를 보는 것 자체가 내게는 기쁨이란다.’ 저는 다이빙 스탠드에 서면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위의 예화처럼 금번 가을학기부터는 교회학교 교사들을 향해 아이들이 ‘선생님 때문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는 말을 듣게 되길 소망한다. 교육은 점진적이다. 학생의 조그만 변화도 발견하며 조그만 발전도 감지할 수 있는 교사자 있을 때 학생들은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부모나 교사들을 살펴볼 때 너무나도 조급하다. “우리 아이는 어쩔 수 없어!”,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하고 실망하는 순간, 아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
17세기경 로체스터의 백작이었던 존 월모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어린이교육에 관해 여섯 가지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섯 아이를 둔 아버지가 된 지금은 하나의 원리도 있지 않다.”. 자녀를 책임있는 사회인으로 만드는 것이나 한 사람을 온전한 인격자로 교육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일만 스승의 자리에서 공과를 가르치고 적당히 시간을 함께 하는 일을 해왔지만, 부모와 같이 학생을 책임있게 양육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동안 사회의 여러 가지 상황이나 개인들의 성향이 연합하여 선을 이루는 교육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멘토링’이란 개념으로 한 사람이 영적 부모가 되어서 적어도 일 년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동안 길게 학생의 영적 성장을 도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 자립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군사로 키우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교육에 대한 이론과 인간발달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학생과 함께 공감하고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 즉, 준비된 교사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이 교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교사가 참다운 교사이며, 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맛보고 이러한 성품을 가득히 담고 학생을 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7전 8기를 기대하신다. 교사도 중국 선수의 어머니처럼 학생이 넘어져도 다음에 일어서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격려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생에게 힘을 북돋워줘야 한다.
<2010.09.09. 청소년 자살 문제, 교회가 가르쳐야 한다>
최근 경제적 어려움이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OECD 32개국 가운데 '자살률 1위', ‘자살공화국’이라는 불명예를 계속 안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1년 동안 자살로 숨진 사람이 1만2천8백여 명. 하루 평균 35명 꼴로 자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10대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어 여기에 대한 마련이 절실하다. 지난 달 한 청소년상담기관에서 중고생을 대상 설문조사 결과, 청소년 10명 중 4명이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말해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사회와 학교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심각성을 자각하기보다는 청소년시기에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충동적인 심리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청소년들의 자살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심각하다. 2001년에 비해 약 40% 이상 증가했으며, 지난 2000년부터 10년간 전국 초·중·고생 자살자가 한해 평균 109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의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764명의 초?중?고생이 자살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이 중 고등학생이 68%인 522명, 중학생이 29%인 218명으로 집계됐다. 그럼, 청소년들은 어떤 이유로 자살충동을 경험하거나 실제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부모의 실직같이 가정의 경제적 문제가 20.8%로 가장 많은 자살 사유로 나타났으며, 부모의 이혼이나 가출 등 가족문제가 19.2%, 이성관계가 7.1%, 성적불량이 6.7% 등으로 조사됐다.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가족관계가 무너질 때 많은 청소년들이 자살 충동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심각한 가정 위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들 대상으로 상담과 실질적인 도움이 확대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과 학교폭력 등에 시달리고, 가정에서는 아이의 상황도 이해하지 못한 채 공부만 강요하거나 무관심 등으로 대화가 단절되어 청소년이 누구하나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대부분의 청소년이 자살충동까지 생각하게 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를 위해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청소년들 대상으로 체계적인 자살예방교육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해마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지만,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적절한 예방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다. 그래서 청소년, 상담심리, 교육 등 각계각색의 전문가들이 자살 충동을 쉽게 느끼게 되는 청소년시기에 자살예방교육과 죽음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우고 있는 것이다.
자살예방교육은 막연하게 자살하면 고통도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살이 해결책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는 교육이다. 죽음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고통을 가져다주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서 자살을 예방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죽음 준비교육과 자살예방교육을 위해 각 시기의 성장과정에 따라 다양한 교과목 속에 포함시켜 지도하고 있다. 미국의 공립 초·중·고교에서는 '죽음에 관한 책·시·음악공부', '장례식장과 묘지방문', '죽음에 관한 영화·사진 감상과 토론' 등 다양한 커리큘럼을 도입해 학원폭력, 자살, 청소년탈선, 왕따 등의 문제를 해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청소년자살 문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예방이다. 예방은 크게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고 정책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바른 생명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기독교세계관’ 교육을 근거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존귀함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요1:12)라고 고백할 수 있고,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고’(사43:1)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상담사역을 통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집회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에서 청소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돌아볼 수 있는 돌봄의 관계가 교회학교에서 이뤄질 때 가능하다.
<2010.09.17. 청소년 신앙교육, 가슴에서 머리로 전환할 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청소년들과 학부모들에게는 ‘대학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까지 이 대세에 동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 매일매일 학교, 학원, 집을 오가면서 공부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청소년기는 자아정체성이 성립되는 시기입니다. 여기에 따른 성장통으로 인해 내적인 불안정성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데 청소년 스스로가 이러한 어려움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방황하게 되고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공부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 주는 것이 ‘미디어’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대중문화를 즐기지만 그 배후에는 유혹의 손길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는 쉽게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공립학교에 다닙니다. 공립학교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에는 하나님은 없고 이 세상의 생성과 발달을 진화론에 기초해 설명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간 사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과학기술주의에 기초한 것 뿐 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했던 모더니즘을 넘어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입니다. 서로 다른 관점만 있을 뿐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라고 믿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기독교를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것은 개인의 판단일 뿐. 따라서 다른 종교들 역시 기독교만큼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서구의 세속주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와 영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사상이 서구 문화의 옷을 입고 ‘뉴에이지’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미 서구의 교회들이 노령화되어 가고 있고, 점점 많은 교회들이 성도가 없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다른 종교의 성전이나 술집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서구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 여러 통계 자료를 보면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는 늘어나는 반면 유독 기독교인 숫자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교회학교의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신실했던 아이들조차 대학에 진학하자 믿음을 저버리는 이야기들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청소년사역자들과 교육자들이 큰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성경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모든 삶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기독교와는 다른 생각을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삼고, 다른 곳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점점 개인적인 한 영역이며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겨질 뿐 절대적인 진리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들은 점차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낸시 피어시는 “그리스도인 부모, 목회자, 교사, 청소년부 지도자로서 우리는 청소년들이 강력한 문화적 역류에 휩쓸려 가는 모습을 줄곧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다만 ‘가슴의’ 신앙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사상의 유혹에 대처할 만큼 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청소년들에게는 ‘머리의’ 신앙(세계관과 변증의 훈련) 또한 필요한데, 이는 그들이 교회와 가정을 떠날 때 접하게 될 다양한 세계관들을 분석하고 비판하도록 준비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일찍 경고를 받아 미리 무장을 할 경우, 나중에 동료 학생들이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소수파에 속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적어도 싸울 기회라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청소년에게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도록 훈련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며, 그것은 기독교인으로 생존에 필요한 필수 장비가 된 것입니다.”
<2010.10.01. 다음세대를 향한 교회의 변화, 잃어버린 탕자를 품자>
한국교회의 위기론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신자는 줄고, 교회를 떠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일학교는 저출산과 함께 점점 아이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이러다 향후 10년 뒤, 20년 뒤에 한국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과연, 침체기를 넘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한국교회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일까?
한편에서는 한국교회를 ‘말기암 환자’라고 말하며 양적 질적으로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사면초가 상태라고 한다. 또, 한편에서는 다음세대의 부흥을 갈망하며 선교사보다 성경을 통해 복음이 증거됐던 축복받은 그때를 생각하며 위기를 희망으로 바라보자고 한다.
지난 40년간 한국교회 수는 5,000개에서 6만개로, 교인수는 60만명에서 860만명으로 수직상승했지만 2000년 무렵을 정점으로 하향세로 접어들었으며, 한국갤럽,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의 각종 통계자료를 보면 비기독교인이 보는 기독교는 처참할 정도로 부정적이거든요. 교회 안에서는 모르지만, 밖에서 교회를 보는 시각은 굉장히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한국 대표적인 종교사회학자인 이원규 교수가 저서를 통해 말한 바 있다.
어쩌면 사회 속에서 교회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고결한 것을 기대하다가 치부가 드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정적인 모습을 각인시키는 것이 우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본래의 모습, 성스럽고 영적인 속성을 사람들은 기대했지만 세속화되고 교회지도자와 성도들의 믿음과 실천이 양분화되고 거짓된 모습처럼 보여 도덕적, 윤리적으로 사회의 본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제 역할을 감당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 목회자로, 청소년사역자로 현장 속에서 아이들을 만나면 ‘위기’가 ‘희망’일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품어 왔다. 아무리 영성과 도덕성, 공동체성을 상실한 한국교회라 해도 이미 밑바닥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다음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장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걸 증명한다. 처음 쉼터사역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에게 신앙훈련을 시키기 위해 지역교회에 보냈다. 감사하게도 이들을 이해하는 교사가 있었기에 시도 때도 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욕설을 내뱉고 함부로 침을 뱉는 아이들이 교회 문턱을 밟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감당했던 교사가 다른 교회로 옮기면서 우리 아이들은 교회에 갈 수 없었다. 지역 교회에서 이들을 받아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잃어버린 탕자’처럼 교회 밖에 머무러야 했고 결국 필자는 아이들을 위해 신앙공동체를 내부에서 운영하게 됐다. 지금도 예배드리는 것을 못견뎌하는 아이도 있지만, 스스로 신앙의 결단을 통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대상이 있음에 감사하는 모습을 본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는,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가 눈에 밟힌다. 소장품이 230만점 이상이나 되는데 관람객들로 하여금 탄성을 지를만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누가복음 15장을 바로크 시대 그림의 특징인 명암 대비를 극대화시켜 표현했다. 특히 주인공들에게 마치 연극에서 조명을 비추는 것처럼 환하게 초점을 맞춘다. 돌아온 둘째아들은 해진 옷과 신발을 신고 있다. 아버지에게 온 몸을 맡기고 있다. 새로운 결단과 마음의 확정이 보인다. 그러나 동생을 맞는 형의 모습은 차가움과 냉담이다. 화난 눈빛을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마치 탕자는 가출 및 소외 청소년이고, 동생을 맞는 형의 모습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든지 탕자가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떠날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는 탕자인 아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버선발로 달려가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바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놓치지 말자.
‘사랑’이라는 제일 좋은 옷을 통해 잃어버린 탕자의 수치를 가려주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써 아름답게 회복시켜주자. 그리고 잃어버린 탕자가 아니라 다시 돌아온 아들로써 기뻐하며 이들을 격려해 주자. 그것이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위한 첫 번째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2010.10.07. 교회학교 2011년 준비하기-교사편>
누군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이런 사람 어때요?>라고 보내온 글이다. “시계와 같이 규칙적이며 근면한 사람, 대나무처럼 절도가 있는 사람, 주판알처럼 오르내리는 융통성이 있는 사람, 용수철처럼 때에 따라 신축자재한 사람, 부채와 같이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사람, 액자와 같이 장차 올려다 볼 수 있는 사람, 우산과 같이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일단 유사시에는 도움이 되는 사람, 이런 사람 어때요?”
이런 사람이 당신 곁에 있다면 어떤가요?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서로 기대하고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삶 속에서 ‘이런 사람’이 내가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새로운 마음으로 2011년을 준비하면서 교회학교를 어떤 눈으로 한국교회는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현장실무가로써 <교회학교 2011년 준비하기>라는 테마로 청소년교육에 대한 방향성을 설정해 보고 싶은 욕심에 앞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주제로는 교회교육의 핵심인 ‘교사’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매년 새로운 교역자와 교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생각하면 교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무관할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현재 한국교회의 교회학교 교사는 일반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자원봉사’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주일에 시간 일부를 할애해서 아이들을 맡아서 돌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 않는가. 오랫동안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알아 관심 갖고 지켜보시던 어느 장로님께서 교회학교 부흥을 위해 준비된 교원 확보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던 필자에게 ‘교사도 중요하지만, 교사를 양육하고 지도해야할 교역자의 잦은 이직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하면서 교회교육의 앞날을 걱정하셨다. 또한, ‘교육전담 교역자의 전문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전담 교역자의 사례를 일반학교 교원의 수준까지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을 건네셨다. 맞는 말이다. 교역자도 평신도처럼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생활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직분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교역자에 대한 문제는 둘째로 놓더라도 학생들과 직접 만남을 갖고 교사의 역량을 통해 제자양육을 하며,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최일선의 교사의 수준은 어느 수준까지 생각해야 할까? 다음세대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다. 다시 말해 교사의 수준이 곧 주일학교의 수준이 된다는 말이다. 2030년의 주일학교 없는 한국교회를 걱정한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보자. 주일학교의 경쟁력을 위해 우수교원을 확보해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사람은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다음세대를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2030년에 대한 걱정보다는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집중하며 매진해야하지 않을까.
첫째, 교회학교에 교육사 제도를 활성화시키자. 각 신학대에서 성경과 기독교세계관을 기초한 교육을 탐구하여 공동체에서 교육에 헌신할 교육전문가로 양성시키는 기독교교육학과 졸업생들을 활용하자. 교육은 교육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교회학교 교육은 말씀선포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성경을 근거로 평생교육과 체계적인 발달단계적 교육을 고려한 교육과정을 구성하여 운영할 수 있게 하자. 더나가서는 기독교교육학과 졸업생들이 취득하는 교직 외에 ‘교회학교 교육사’ 자격제도를 신설하여 교육전도사, 교육목사로 전문화를 꾀하는 것이 어떨까? 둘째, 전임교사제도를 도입하자. 자원봉사로 생각하는 일반교사만으로 교육의 지속성과 안전성, 전문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는 교육을 담당했던 담당자들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냥 문제로만 제기하지 말고 해결해 보자. 교회학교를 위해 묵묵히 수고해주신 분들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다변화되고 다문화된 사회 속에서 극단적 이기주의와 입시문제 그리고 청소년인권존중이라는 수많은 교육적 환경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교육의 패러다임을 확립시켜 지속적으로 교육을 이끌어나갈 준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학교 전임교사제도의 정착을 강력히 주장한다. 전임교사제도란 토요일과 주일을 주일학교를 위해 전임사역하는 준전문인력을 말한다.
<2010.10.15. 준비된 교사가 아름답습니다>
2011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긍정적인 시각이 중요하다. 위기론에 휩싸인 한국교회를 똑같이 위기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비전을 소망하며 세우는 것에서 출발하자. 희망과 꿈은 ‘다음세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믿자. 그리고 꿈꿔보자. ‘다음세대가 살아야 한다’는 말이 표어처럼 나돌고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한국교회 총회와 노회 그리고 당회는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은 갖고 있지만 실천의지는 매우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고, 실족할 수 없는 사역이 바로 다음세대 사역이다. 그렇다면, 다음세대 사역을 위해서 우리가 희망과 비전을 갖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준비된 교사를 통해서 우리의 희망과 비전이 실천될 수 있다. 청소년 현장전문가로 활동하는 필자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그렇다면 준비된 교사를 통해 다음 세대를 교육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세대가 신앙을 통해 얻게 된 감동과 변화된 삶을 간증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스데반집사가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런 신앙을 공유하기를 간절히 염원한 것처럼. 가끔 중?고등부 학생들이 PC방, 학원, 거리 등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돌아온 과정을 이야기하거나 친구들 사이에서 신앙적인 결단을 하고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듣게 되면 가슴이 찡하다. 자신의 삶의 목표가 바뀌었다고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소망과 기대를 품고 우리 교사들은 어떤 자세를 갖고 다음 세대를 품어야 할 것인가? 준비된 교사가 되기 위해서 다음 3가지의 자질을 갖춰야 한다.
첫째, 미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시간은 사건의 연속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인생이란 목적이 있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쁜 일에 쌓여 있고, 성과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성공 앞에는 초점이 온다”는 말처럼 삶에 대한 비전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성과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에 따른 성과를 얻게 된다. 한국교회와 교사들이 말하는 미션(Mission)은 ‘복음전파’를 의미하고 때로는 ‘성전’을 가리켰지만, 이제는 조직의 근본적 존재목적에 대한 선언·임무를 정의하는 명령문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맡겨진 존재와 삶의 목적을 중?고등부 학생들을 향해 제시하며 올바른 미션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개개인에 대한 교육목표가 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교회학교의 미션임을 잊지 말자.
둘째, 인격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격이 없는 비전은 사명이 아니라 조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말은 참 잘 한다. 아마도 늘 아이디어를 내듯이 좋은 글을 읽고 생각하며 좋은 말을 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말이 많은 사람은 신뢰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에베소서 5:7처럼 우리는 의롭고 정직하고 선하여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갖게 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잠언 11:3에서 지적하듯이 정직하고 곧은 사람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해도 삶의 방향이 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를 하는가? 직장에서 성실한가? 돈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 생각이 건전한가?’ 등의 질문에 잔인할 정도로 정직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인격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중에 조지 휫필드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일주일에도 40시간, 60시간씩 설교와 전도를 하는 열심 있는 사역자였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이렇게 권면했다. “건강을 유의하셔야지요.” 그때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학생을 가르침에 있어서 목숨을 주기를 즐거워하였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 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자 됨이니라”(살전 2:8).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 삶의 어떠한 것이 우리를 깊이 그리고 근본적으로 헌신하게 하며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상황에 따라서는 희생도 마다하게 했는가? 마틴 루터는 95개조항을 발표하면서 “나는 여기 섭니다. 나는 결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