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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The Anglican Church, 聖公會)
장신 예배아카데미
조원 : 권세진, 김민경, 김유진, 김은혜, 김주라, 김지혜, 김현빈, 남세라, 문상아, 박병주, 송은혜, 송재민,양은혜,
양정현, 이영아, 임기덕, 장아름, 전 현, 정지선, 조안나, 조한나, 채유은, 최아람, 편봉주, 한미혜
대한 성공회 역사
① 선교초창기의 대한성공회
한국에 선교를 처음 계획하고 주장했던 사람은 일본 성공회의 개척자였던 쇼(Alexander Croft Shaw)였다. 1880년 일본인 전도사 한 명을 한국으로 파송하여, 한국어 공부를 시켰다. SPG에 한국 선교를 담당할 주교와 성직자 파송을 요청했다.
하지만, 수락되지 않았다.
이 후에, 중국 복주에서 CMS 선교 책임자로 있던 울프(J.R.Wolfe)가 2명의 중국인 전도사를 대동, 1885년 11월 부산으로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87년 북중국의 Scott주교와 일본의 비커스테드(Bikersteth)주교가 함께 부산 근방을 돌며,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들은 방문을 마친 후, 즉각 한국 선교부를 설치할 것을 벤슨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청원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영국성공회에 의하여 한국선교가 결정되고 1889년 11월 1일 영국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 교구의 첫 교구장으로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주교 서품을 받고 동역자들과 함께 1889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면서 한국 선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벤슨 캔터베리 대주교가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초대 한국 교구장 주교로 코프(한국명: 고요한)신부를 1889년 11월 1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서품함으로써 대한성공회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치 나룻배 한 척으로 전쟁에 나가는 기분이었다”라는 코프 주교의 회고는 그 당시 한국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코프 주교는 1890년 7월 1일 부터 잡지 ‘모닝캄’을 발행하여 한국선교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호소하였다. 이 잡지는 부정기 간행물로 지금도 발간되고 있다.
② 선교의 시작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1890년 9월 29일 성 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에 코프 주교는 랜디스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써 선교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제물포와 서울에 토지를 매입하고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12월10일 인천 약대인(서양 의사란 뜻)병원을 시작하게 된다.
1891년 3월에 서울 낙동(현 한국은행 근처)에 성 마태 병원을 설립하였고 인천에 건물을 새로 지어 1891년 9월에 성 미카엘교회(현 내동교회)를 축성하고 10월 성 루가 첨례일에 성 루가 병원을 새로이 개원하였다. 랜디스는 후에 이 성 루가라는 병원 이름이 한국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하여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주는 병원(낙선시병원)”으로 바꿔 불렀다.
랜디스는 진료활동 이외에 영어학교와 영어성서반을 설립하여 가르치기도 하였고 한국 문화 및 문화유물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서를 수집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자료들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랜디스문고’로 기증되어 오늘날 한국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초창기 성공회는 영국 해군에서 기증받은 인쇄기로 1891년 인쇄소를 설립하고 각종 문서와 성공회 관계 책자를 발간하였고 또한 대영성서공회와 협력 아래 조선성서공회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성서를 민중의 글인 한글로 번역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기할 것은 이 당시 성공회는 조만민광(照萬民光)을 발행했다는 것이다.
조만민광은 교회력에 맞추어 교회의 미사 중에 낭독되는 성서 구절들을 발췌하여 편집한 전례용 발췌성서로 발행되었지만 이와 함께 전도용 문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이 조만민광에는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이 잘 나타나 있어 그 당시 한글 사용에 대한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다.
또한 1903년 첫 성회송가에 이어1908년에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첫 공도문이, 1910년에는 성가집이 증보 발행되었는데 이 성가집은 총266곡을 담은 그 당시로는 매우 놀랄만한 것이었다.
③ 정착기의 대한성공회
대체적으로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초창기 대한성공회는 선교활동에 여러 가지 제약이 뒤따랐으나 선교사들은 성무일도를 엄수함으로써 어려움을 신앙으로 이겨내었다.
1897년 한국인으로서 김희준(마가)과 김군명(요한)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새신자 전도의 길을 열게 되었다
.
1900년 초에 강화읍 성당을 건축, 축성함으로써 대한성공회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화읍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한국화하고 동시에 불교 가람배치 구조에 따라 건축함과 아울러 한국의 전통적 문양과 유교식 현판을 이용한 건물로서 그리스도교와 한국 문화가 한데 어울려 빚어낸 모습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당 건축 양식은 지금도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라는 의미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시기에 2대 교구장 아더 터너(A. B. Turner, 한국명: 단아덕)이 승좌하여 의료사업, 고아들을 위한 사회사업, 출판사업, 교육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성공회 신자는 수천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으며 영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여 재임 5년간 9명의 성직자와 2명의 약사, 4명의 간호원, 2명의 수녀, 5명의 교역자, 1명의 의사를 선교단에 참여시키고 1910년에 일본인 시오자키 앤드류 사제를 영입하여 부산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1903년 대한성공회는 한국 선교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으로 YMCA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청년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터너 주교는 초대 이사로 선임되고 체육위원회 회장직을 맡게 된다.
또한 1907년 터너 주교가 회장에 선출되어 YMCA회관(현 종로2가 소재)건립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되며YMCA가 자주적, 민주적인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하기도 하였다.
터너 주교는 재임시에 종고성교회월보를 1908년 6월에 창간하여 1940년까지 총276호를 발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월간지 사상 가장 오랜 발행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910년 10월 28일 제3대 교구장으로 승좌한 트롤로프 주교는 1914년 강화도에 신학원을 설립하여 한국인 사제 양성에 주력한 결과 1915년 한국인 첫 영세자인 김희준 에게 한국인 첫 사제 서품을 주었다.
한편 1925년 9월 성가영광 첨례일에 트롤로프 주교의 축성으로 현 성가수녀원 자리에 수녀원을 축성하고 이비비를 첫 지원자로 하여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트롤로프 주교는 1922년에 대성당 건립에 착공하여 1926년 5월에 완공하게 된다.
서울대성당은 동양에서는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갖춘 교회로서 그 우아함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 서울시 지방 유형 문화재 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트롤로프 주교는 1920년대부터 북한선교에 주력하여 1930년대 말에는 9개 전도구, 53개 교회에 이르게 되어 평양교구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다.
④ 수난기의 대한성공회
1939년 세계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제는 대한성공회의 제4대 교구장 쿠퍼(한국명: 구세실)주교를 비롯하여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성공회는 공백상태가 되었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해 교구장이 없는 상태에서 재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국전쟁이 일어나 교회는 다시금 시련을 겪게 되며 많은 순교자들이 생기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순교한 성직자들의 유해는 오늘날까지 찾지 못했으나 교구장 주교의 명령 없이 전도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사제직을 수행하다 순교한 성직자와 수도자의 정신은 오늘날 대한성공회의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⑤ 도약기의 대한성공회
교회재건을 위한 노력은 1955년 제5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존 데일리( John. C. S. Daly, 한국명: 김요한) 주교의 선교정책과 결합되었다.
데일리 주교는 서아프리카와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 한국에 부임하였는데, 미국과 캐나다 교구들은 그를 후원했으며 미국에서는 토리(R. A. Torrey, 대천덕)사제를 보내 성 미가엘 신학원 재건에 협력했다.
또, 재임동안 성직자 유학의 길을 열어 이천환 사제는 영국 성 어거스틴 대학으로, 배두환 사제는 미국 나쇼다하우스 대학으로, 최철희 사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성 프란시스 신학대학으로 유학하였다.
특히 영등포 지역의 산업선교와 인권의 사각지대인 강원도 황지 광산촌에 노동자들을 위한 봉사, 상담, 복지, 교육 사업에 많은 것을 투자했다.
데일리 주교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황지중학교는 이 지역 청소년 교육의 요람이 되고 있다.
부산에서는 빈민구제를 하였고, 경기도 마석에는 음성 한센병 환자들의 정착을 후원하였다.
김요한 주교는 교구장 재임 기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하여 교회일치운동과 지역사회 개발운동 및 기아해방운동을 전개하여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교 방향은 자립, 자전, 자정 의 바탕이 되고 대한성공회 75주년이 되는 1965년 5월 27일 이천환 사제가 한국인 최초로 주교로 서품된 뒤, 서울 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승좌하고 데일리 주교는 대전 교구장에 승좌함으로서 2개 교구(서울, 대전)로 분할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였다.
이후 대한성공회는 1974년 6월 1일에 대전교구를 대전교구와 부산교구로 분할하여 대전교구장에 배두환(마가)주교가, 부산교구장에 최철희(윌리암)주교가 서품되고 교구장으로 승좌함으로서 3개 교구로 성장하였으며, 모두 한국인 주교를 맞음으로서 새 전기를 마련했다.
서울교구장 이천환 주교는 12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후임으로 제 2대 서울 교구장으로 김성수 주교가 1984년 5월 31일 서품 받고 승좌하였다.
그는11년간 8개 교회를 설립하고 4개의 나눔의 집(사회선교기관)을 개설했으며 관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90년 9월 29일, 선교 100주년 기념 대회를 로버트 런시 캔터베리 대주교의 참석 하에 대한성공회 3개 교구장 주교, 세계성공회 주교, 성직자, 평신도와 수사, 수녀들 등 8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잠실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기념미사를 거행하였다.
1996년 5월 2일 에는 숙원사업이었던 서울대성당 증축이 70년 만에 완공되었다.
1992년 독립관구(Province: 자율적인 교회공동체로서 해당 대주교, 수좌주교의 관할)로 승격하고 1993년 4월 16일 초대 관구장으로 김성수(시몬)주교가 승좌하였다.
대한성공회는 영국 캔터베리 관구로부터 103년 만에 독립관구로 새 출발 하였다.
♦ 참고로 2005년 11월 15일 자 기준으로 서울교구의 조직과 현황을 살펴보면 주교1명, 사제100명, 부제15명, 전도사13명이 있고 64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나눔의 집 8곳(노원, 성북, 관악, 송림, 수원, 포천, 용산, 춘천)과 8개의 자활후견기관 그리고 복지관 3곳(구리 장애인 복지관, 마들 사회 복지관, 미카엘 종합사회복지관)과 우리마을, 희망학교, 종로노인인력지원기관, 용현동 지역 나눔 센터, 비전트레이닝센터,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 성공회 푸드 뱅크가 있고 샬롬의 집 4곳(남양주, 고양, 포천, 용산)과 남양주외국인근로자복지센터, 연수리 청소년 수련관과 강촌 성 요한 피정의 집이 있다.
*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투어
대한성공회 3대 교구장 조마가(Mark N. Trollope)주교가 재임 시 한인교우들의 정성어린 봉헌에 기반하여 1922년 아덕 딕슨(영국,A.Dixon)의 설계대로 착공해서 1926년 5월 2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성당 건축 시기는 일제강점기여서 원설계도인 ‘장십자가’형으로 짓지 못하고, 양쪽 수랑과 회중석 일부가 축소되어 미완의 건물이 되고 말았다.
1993년 원설계도를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찾은 것을 계기로 1996년 현재의 완결된 십자가형 성당으로 완공하였다.
외형은 십자가 형태로 율동감을 보여 주며, 성당 내부에는 좌우로 열 두 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서 있으며, 반원형 제단의 벽면에는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상이 있다.
또한 지하성당에는 조마가 주교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그 위에 그를 기념하는 동판이 있다.
출처: 장신예배아카데미 2010.5.30.
주) 원 글 제목의 성공회 영문표기가 The Anglican Domain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어 The Anglican Church로 바로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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