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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산30-2 ❏문화재지정: 박제상유적-울산광역시기념물 제1호(1997.10.09지정) ❏배향인물: 박제상(朴堤上) ❏창건연도: 1745년(영조 21) ❏향 사 일: 3월 초정일(初丁日) |
이곳은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이다.
박제상은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다. 1745년(영조 21)에 영해박씨 주도로 두동면에 신모사(神母祠)로 건립되었으며 박제상(朴堤上)공을 배향하였고 1868년 훼철되었다. 1991년 복원되었다.
1)박제상(朴堤上, 362~)
신라 상대의 충신. 김제상(金堤上)이라고도 한다.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하였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이사금의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으로 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할 필요에 의해 402년(실성왕 1) 내물왕의 셋째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아들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하였다. 그 결과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矩),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등 세 사람이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역할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梁山) 지방의 토호 세력으로서 삽량주간(歃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눌지왕 2)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였다. 이에 왜가 병을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 :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 왕 앞에 끌려갔다.
왜 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 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1868년 훼철된 치산서원은 1992년 복원공사를 하였다. 홍살문을 지나 들어서면 서원에는 박제상의 호를 딴 관설당이 중심에 있고, 그 뒤에는 충렬사, 신모사, 쌍정려가 있다.
충렬사는 충렬공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며, 신모사(神母祠)는 관설당의 부인인 국대부인 김교 김씨(金校 金氏)의 위패와 영정이 있는 사당이다. 사효각(思孝門)안에는 쌍정려가 있으며 쌍절녀의 위패와 사당이 있다. 쌍절녀는 관설당 박제상 할아버지의 장녀 아기(阿奇), 삼녀 아경(阿慶)이며 국대부인 치술신모 할머니와 함께 치술령의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외에는 치산서원 박물관이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