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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Untold Scandal, 2003)
2003년 10월 2일 개봉
감독- 이재용
주연-배용준.이미숙.전도연
프롤로그
표지에는 『趙氏醜聞錄 조씨추문록』이라 쓰여진 천으로 된 낡은 화집이 한 권 놓여있다.책을 한 장 넘기면 한문과 언문이 섞여 쓰여진 서문이 보이고 그 위로 한 남자의 내레이션….
"이 화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다수 품행이 심히 방탕하고 난잡하여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의심치 않을 수 없다. 널리 알려졌듯 유교로써 나라의 근간을 세우고, 남자들은 군자의 예를,여자들은 현숙한 주인의 예를 따르도록 하는 이 조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여기 소개되는 내용이 설사 어떤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이는 저자가 단지 혼자 보고 즐길 목적으로 꾸며낸 것으로 모든 인물들은 실명이 아님이 분명한즉, 특정인이나 가문에서 문제삼지 않길 권고하며 흑 자제력이 약하거나 읽기에 두려움이 앞선다면 당장 책을 덮고 뇌리에서 지워버리기를 충고하노라. 선왕 갑인년 (정조 18년)에 쓰여진 글을 계해년 (순조 3년)에 엮다."
위의 내레이션이 진행되면서 크레딧 타이틀이 서문 사이사이 뜨다가 이어서 섬세하게 그려진그림들…― 젊은 여자 혹은 남녀가 운치 있게 그려진 신윤복 류의 풍속화-들이 한 장씩 넘겨지다가 한 젊은 여자의 벗은 몸이 그려진 어떤 그림에서 멈추더니 어느덧 그림은 실사로 변한다.
S# 1. 유대감 집·조원 별채 방 (낮)
S# 2. 유대감 집· 사당 유대감 집 길제 (낮)
{S# 1. 별채 방 안}
한 젊은 기녀가 알몸인 채 모로 누워 있다. 수려한 용모의 한 남자, 조원이 붓을 들고 그녀의 요염함을 화지에 옮기고 있다.
{S# 2. 사당}
정갈한 놋그릇에 담긴 맑은 물에 경건하게 손을 씻는 관복차림의 유대감. 하얀 면수건에 물기를 닦고 제상 앞에 나아가 무릎을 끊는다.
{S# 1. 별채 방안}
같은 자세로 누워 있기가 좀이 쑤시는지 꼼지락거리는 기녀. 조원, 말없이 물끄러미 응시하는것으로 나무라자 움직임을 멈추는 기녀. 다시 붓끝을 옮겨가는 조원.
{S# 2. 사당}
잘 지어진 사당 안에는 네 개의 신주가 보이고, 각각의 신주 앞에는 화려한 제상이 차려져 있다. 제관이 축문을 일기 시작하자 유대감, 술잔을 받아 들고 모사그릇에 술을 나누어 붓고, 집사에게 건넨 후 두 번 절을 한다. 사당 밖 넓은 마당엔 수십 명의 문중제관들이 줄지어 앉아 몸을 숙이고 예를 갖추고 있다. 모두들 흰 도포에 검은 갓을 쓴 채 엄숙한 표정.
{S# 1. 별채 방 안}
붓끝이 젖가슴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가다가 점 하나를 찍는다. 조원, 천천히 시선을 들어 기녀를 감상하듯 응시하더니 다가오라는 손짓. 다가온 기녀의 가슴을 붓으로 천천히 쓰다듬자젖가슴에 소름이 돋으면 가늘게 떠는 곡선. 붓이 목선을 지나 턱에 머물자 조원, 손가락을 뻗어천천히 입술에 들이민다. 손가락을 받아들여 입에 머금고 빠는 기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조원.
{S# 2. 사당}
축문이 끝나자, 문중 제관들이 일제히 소리 없이 일어선다. 온통 남자들뿐인 사당을 향해 두명의 집안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화려한 연꽃무늬를 수를 놓은 붉은 대례복에 화관 족두리를 쓰고 들어서는 대갓집 부인의 뒷모습.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겨 들어간다. 그 화려한 자태를 근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문중 제관들.
{S# 1. 별채 방 안}
손가락을 빨게 한 채로 음미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조원, 기녀의 몸을 돌려 등 뒤에서 껴안는다. 기녀의 목덜미에 입 맞추기 시작하는 조원.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S# 2. 사당}
신주 앞에 천천히 네 번 큰 절을 올리는 조씨 부인. 절을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비로소 드러나는 조씨 부인의 얼굴. 도도한 아름다움.
{S# 1. 별채 방 안}
기녀를 뒤에서 안은 채 상체를 세우게 하고는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는 조원. 기녀는 무아지경인 듯 버선발이 활처럼 휘어지며 연신 신음을 토한다. 깊숙이 밀착하는 순간, 바깥에서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
자근노미 나으리, 길제가 다 끝나 갑니다. 문중 어른들께서 곧 원등헌으로 듭신다 하십니다.
"하" 원망스러운 얼굴로 한숨을 내뱉는 기녀.
S# 3. 유대감 집·안사랑채 복도 (오후)
Ins.
유대감 집 바깥 사랑채인 원등헌에는 수십 명의 문중 남자들이 둘러앉아 소반을 각자 앞에 놓고 음복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양반스러운 호탕한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린다.조원, 심복인 자근노미와 선물 꾸러미를 잔뜩 진 하인들을 대동하고 안(內) 사랑채로 들어선다. 자근노미와 짐꾼들은 창고로 향하고 조원은 마당을 지나 원등헌으로 향한다. 그때 발이 쳐져 있는 안 사랑채 복도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있는 조씨 부인과 하녀들. 조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조씨 부인 역시 엄숙한 표정으로 눈길하나 주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다가온다. 마치 먼저 눈길을주는 사람이 지는 내기라도 한 듯, 팽팽한 긴장감. 이옥고 마주치고 엇갈려 서로 지나치는 두사람. 발을 사이에 두고 얽히는 은밀한 시선. 타이틀이 뜬다.
朝鮮男女相悅之事, 스캔들, the scandal
S# 4. 유대감 집·유대감 방 (아침)
유대감과 조원이 각 상을 받아 조반을 들고 있다. 조씨 부인이 안동댁과 옆에서 화로에 전골을끓이며 식사시중을 든다.
조원 화성축조공사는 어찌 되어 가십니까?
유대감 어려운 공정은 대강 끝났네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지 뭔가…. 조반 후 바로 돌아갈 참이네
조원 (조씨 부인을 슬쩍 보며) 그래도 몇 달 만에 재회이신데 하루 밤 만에 가시다니요.
조씨부인 (틈을 주지 않고 별 표정 없이) 혼인준비는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유대감 흐흠… (사무적으로) 동짓달이면 금년 공사는 다 끝날 떼니 섣달 초로 잡았으면 하오
조씨부인 (무표정하게)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조원 (눈을 반짝이며)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번에는 꼭 아들을 보셔야 할 터인데
유대감 소실을 또 들이는 게 나도 부답스럽네만… 문중 어르신들께서 오죽 성화셔야지. 종로 육의전 상인 이고탁의 무남독녀인데… 사실 중인 집안이긴 하나 대단한 부호인데다 이번 공사에 큰 기여를 했다네
조원 (미소를 띄우며) 그 아이 이제 막 열여섯이라면서요?
유대감 (싫지 않은 듯) 청초하고 때 묻지 않은 것이 막 피어난 꽃봉오리 같더군.
이때 시중들던 그릇 하나가 떨어지며 쨍그렁 소리가 난다. 유대감 일순 놀라 헛기침으로 순간의 정적을 깬다. 조씨 부인 큰 동요 없이 안동을 나무란다.
조씨부인 어허… 조심하지 않고…
유대감 힘… 어떻게든 가문의 대를 잇고자 하는 어르신들의 뜻을 부디 헤아려주기 바라오,부인.
조씨부인 어차피 치러야 할 일, 더 늦기 전에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올까 합니다. (의아한 유대감)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중인의 여식일진데…. 반가의 법도를 가르쳐놓아야 어르신들 어여쁨을 받지 않겠습니까?
유대감 (다시 냉정을 되찾고) 고맙소! 부인
조씨 부인, 말없이 다소곳하게 전골을 접시에 덜어 유대감 앞에 놓아준다. 조원은 두 사람의 표정을 감상 중이다.
유대감 유씨 집안 행상 이렇게 와주어 정말 고맙네 처남.
조원 별 말씀을요. 이참에 한양 구경도 하며 얼마간 지내다 갈까 합니다.
유대감 잘 되었구먼. 내 집을 비운 사이 누이가 적적할 터이니 길게 있으면 누이의 말동무나 되어 주게나
조원 (담담하게 웃으면 젓가락질만) ….
유대감 그나저나 자네, 혼자된 지가 꽤 오랜데, 계속 그리 지낼 참인가? 어서 새 사람을 들여후사를 봐야 않겠나….
조원 (웃는 얼굴에 쓸쓸함이 엿보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 마음 속에는 한 사람 자리밖에 없는 듯 합니다.
유대감 저런… 꽤 사랑이 깊었던 게로군.
조원에게 흘낏, 짧은 시선을 던지는 조씨 부인.
S# 5. 이고탁의 집·안채 방 (낮) @@
Ins.
바로크 풍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담한 크기의 괘종시계. 2시 35분을 가리키고 있다.
Ins.
맑은 물이 담긴 청화백자 대접에 노란 송화가루에 한 숟가락 떠 넣자 물 표면에 살얼음이 끼듯노란빛이 순식간에 퍼진다. 그 위에 실백 잣 몇 개를 띄운다.
소옥어미(off) 하이고, 이런 누추한 곳까지 다 찾아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호의 집답게 화려한 가구로 꾸며진 안방. 송화밀수를 조씨 부인 앞에 내어놓는 소옥어미. 조씨 부인, 안 보는 척하며 실내를 둘러보는데 앳� 아리따운 자태의 소옥이 들어선다. 들어서는소옥의 고운 모습에 말문이 막히는 조씨 부인.
소옥어미 냉큼 인사 올려라. 유대감 나으리댁 마님이시다.
사뿐히 들어와 날 듯이 올리는 소옥의 절을 받으며 조씨 부인의 얼굴이 기묘하게 굳어진다.
소옥 (이미 잘 훈련받은 듯한 목소리로) 소옥이라 하옵니다.
조씨부인 (감정을 누르며, 절을 올리는 일어서려는 소옥에게) 그냥 앉으시게… 흠, 듣던 대로구먼
자세를 고쳐 앉는 소옥, 다소곳하지만 어딘지 당돌한 구석이 있는 느낌이다. 이때 페르시아 고양이가 열린 틈으로 들어와 소옥의 손에 몸을 맡기고 골골거린다.
조씨부인 비록 신분 높은 집안으로 온다 해도 소실 자리란 게 좋지 만은 않을 듯 허이
소옥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평소에 아비로부터 대감마님의 높으신 인품과 가문의 고귀한…그러면서도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는 소옥의 손놀림을 보고 있던 조씨 부인. 이내
조씨부인 양반이라는게 머리에서 말끝까지 엄격한 법도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니 이제 고생길에 들어선 줄 아시게.
소옥 명심하겠사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소옥. 소옥의 투명한 피부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조씨 부인, 이때 괘종소리가 세 번 올린다.
조씨부인 안수를 무엇을 쓰기에 그리도 살결이 고운 게요?
소옥 (놀란 척 그러나 뻐기며) 네? 전 그저 맹물에 소세나 할 따름인데…
조씨부인 (끙) …이팔이니 무슨 안수가 필요하겠소만…(께름칙해 하며) 그나저나 그게 대체 무엔가… 무슨 구름덩이 같은 게…
소옥 소녀 워낙 희귀한 짐승을 좋아하여 아비가 청국 상인들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구한 고양이올시다. 회회국(回回國)에서 온 것이랍니다.
그러자 휙휙 눈치를 살피던 소옥어미, 소옥 품에서 고양이를 빼앗아 들며,
소옥어미 혹, 맘에 드시면 가마에 실어놓을까요?
조씨부인 난 괭이는 질색이오.
소옥어미 아이고, 그러시면… (소옥에게) 괭이는 가져갈 생각 말거라.
소옥 (말은 못하지만 하지만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S# 6. 유대감 집·부용정 안방 (오후)
Ins.
연못에 핀 연꽃 한 송이를 천천히 벌리는 정금의 손. 연꽃 안에서 모시고 만들어진 차 주머니를 꺼내 은으로 된 다기에 담는다.
조씨부인 (낮게 웃으며) 아우님 마음 속에 방이 하나 뿐이라?
조원 아녀자들은 어떠한지 모르나 사내들 마음 속 방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조씨부인 (조소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하나뿐이로되 그 안에 들어앉는 이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바뀌는 모양이지요?
조원 (피식하며 혼잣말처럼) 한 번에 한 명씩인 게지. (생각난 듯 옷소매에서 들꽃 몇 송이 묶음을 꺼내 다가가며) 산보 나갔다가 어찌나 곱게 피었던지… 누이 생각이 나서 좀 꺾어 왔지…
조씨부인 (꽃을 살피며 향기를 맡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자세를 바로 하는 두 사람. 조씨 부인, 관심 없는 듯 한 쪽으로 꽃을 던져 놓으며) 여전하시군.
정금이 차와 함께 탐스럽게 잘 익은 커다란 복숭아가 담긴 소반을 들고 들어온다.
조원 (정금을 한 번 보더니) 이번엔 또 어떤 일로 올라오라 하셨는지요?
조씨부인 (또박또박) 소 옥 이
조원 소옥이?
조씨부인 (혼자 분을 삭이는 어조로) 뭐…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다고? (조원에게) 그 애가… 애를 배게 해 줘
조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정금이 눈치를 보면 정금은 아무 표정의 변화 없이 다과상을 올리고 차를 따라 줄뿐이다. 무슨… 말… 씀이신지….
조씨부인 매형이 소실을 들이시는데 선물을 준비해야 마땅한 도리 아닙니까?
조원 그래야 하긴 하겠지만….
조씨부인 어떻소. 내가 제안하는 선물. 그 소실자리가 애를 배게 해주면….
조원 (헛기침을 하며 말을 막으며) 흐흠… 말씀이 좀 과하신 게 아니신지…
조씨부인 (씨익 웃으며 찻잔 받침을 들어올려 쩽그렁 소리가 나게 깨버린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여전히 복숭아를 깎고 있는 정금이.
조씨부인 (정금이를 스윽 보곤 의미심장하게)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아인게지요.
조원 후후… 역시… (흥미를 보이는 듯) 그러니까 숫처녀를 얻었다고 감격해서 옷을 벗겨 보니 배가 불렀더라?
조씨부인 (서늘한 미소) 아들이어야만 하겠지.
조원 (웃는 얼굴 그대로 설레설레)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조씨부인 (고개를 저으며) 복수는 상대가 모르게 이뤄져야 더욱 재미있는 법.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감이 늙어 숨넘어가기 직전, 조용히 일러주면 어떤 표정을지을까. (조원을 슬쩍 흘기듯 보며) 아우님도 첫사랑을 빼앗아간 매형을 원망하지 않았겠소. 그대는 그대의 복수를… 나는 나의 복수를 위해
조원 유혹과 복수라. 우리가 언제나 즐기는 두 가지긴 하지, 근데… (톤을 바꾸며) 싫소.
조씨부인 왜?
조원 그 아이 이제 열여섯. 얼마나 호기심이 많겠소. 상냥한 말 한마디면 그냥 자리 펴고 누울 때 아니오? 쉬운 건 내 명성에 걸맞지 않소이다.
조씨부인 (심드렁한 표정으로) 흥….
조원 내가 사돈댁 길제나 보려구 한양에 온 줄 아시오?
조씨부인 그럼… (알만하다는 눈빛이 오고 간다)
조원 … 지암 윤길진 대감 며느리, 숙부인 정씨.
조씨부인 아흡 해나 수절하며 열녀문까지 하사 받아 유명한진 그 여자?
조원 그 여자가 이번 나의 목표입니다.
조씨부인 그 여자 시댁은 강화가 아니오.
조원 거긴 지금 역병이 돌아 당분간 옆집인 이모 댁에 와 있지요.
조씨부인 (비꼬듯) 과연 아우님 실력으로 그 청상인지 청승인지를?
조원 그 가엾은 여자에게 음양의 이치를 깨닫게 해줘야 않겠소.
조씨부인 27년간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을 열겠다…? 지금은 벽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소만….
조원 (잠시 생각을 하다) 내기라도 할까요?
조씨부인 (눈빛이 교차하는 두 사람) 후후… 갖고 싶은 게 있는 게로군….
조원 후후….
조씨부인 만약 그 여자를 무너뜨린다면 원하는 걸 상으로 주리다. (의미 있는 미소를 띄우며) 아우님이 늘 바랐던… 하지만 가질 수 없었던 그것! (살며시 다리를 사이를 벌린다)
조원 (미소를 흘리며 슬그머니 손을 뻗어 조씨 부인의 허벅지 위에 얹는다)
조씨부인 (손을 내치며) 대신! 지면….
조원 내 목숨이라도 드리리다.
조씨부인 중이 되는 겁니다. (눈길이 마주치며 잠시 묘한 웃음이 이는 두사람)
조원 좋은 거래군요. 조만간 기꺼운 맘으로 상을 받으러 오지요.
조씨부인 (말을 자르며) 단! 매형이 돌아오기 전까지… 그리고! 그 여자가 아직도 처녀라면 증거를 가져오세요. 스물 일곱 묵은 처녀의 피.
긴장감 있게 노려보며 싸늘하게 소리 없이 웃는 두 사람
S# 7. 유대감 집·조원 별채 방 (아침)
Ins.
하녀 하나가 정갈한 샘물을 유기 대야에 뜨자. 또 다른 하녀가 향유를 조금 붓고 창포 꽃을 띄운다.
조원(V.O) 알아보았느냐?
조원, 눈을 감을 채 정좌를 하고 앉아 있고, 시동들 조용히 드나들며 아침 단장을 해준다. 의관을 담당한 하인이 명주실 두 가닥으로 얼굴의 잔털을 털어낸 뒤, 물에 갠 백분을 누에고치집에 묻혀 펴 바른다. 수염을 조십스럽게 닦고 다듬는다. 한 옆에서는 시동들이 향로에 향나무 가루를 넣고 피우고 의복을 훈증한다. 일어서서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조원에게 차례차례 옷을 입혀주는 시동들. 이러한 동안 자근노미가 경과보고를 한다.
자근노미 매일 밤 해시만 넘으면 발정 난 암쾡이 모냥 조심조심 집을 나서십니다.
조원 (놀라며) 저런, 사내라도 만나러 다니는 눈치더냐?
자근노미 한 명도 아니고 우글우글했습니다.
조원 저런….
자근노미 히히… (사실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밤마다 천주학 집회에 나가더라구요. (놀라는 조원) 분위기가 으스스하던 걸요.
조원 귀신이라도 불러내더냐?
S# 8. 어느 약방 천주학집회 (밤)
사방에 약재가 보관되어 있는 꽤 큰 대청과 방을 터서 비밀집회 장소로 쓰고 있다. 조원과 자근노미의 대사가 진행되는 동안 천주교 미사 장면이 보여진다. 중국인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미사 보는 쓰지 않은 채 뒤켠에서 묵묵히 서 있는 숙부인 정씨. 단이한 얼굴선에 청명하고아름다운 모습. 기품도 느껴진다.
자근노미(V.O) 컴컴한 곳에 남녀가 반상 구분도 없이 모여 뭐라고 중얼 중얼 중얼….
조원(V.O) 집회에는 얼마나 머물다 오더냐?
자근노미(V.O) 한 세 식경쯤 되는 듯 하던데요
조원(V.O) 일단 내가 돈을 좀 줄 테니 숨은 후원자인 듯이 자금을 건네거라. 그 자들은 경계하며 의심이 많을 터이니 필시 누가 보낸 돈이지 궁금해 할 거다. 그러면 마지못해 하며 내 이름을 슬쩍 흘리기라. 그리고 그 아이는… 이름이 뭐였더라… 숙부인 하녀 말이다.
자근노미(V.O) 아, 은실이요? (씩 웃으며) 이미 작업 다 끝내 놨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쇼.
Ins.
단장을 끝내고 경대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는 조원. 일종의 자기 암시인 듯 뚫어지게 보다가 문득 빙그레 입가에 웃음을 긋는다.
S# 9. 좌의정 집·안채 대청 (낮)
망원경으로 본 붉은 맨드라미꽃.
성장(盛裝)한 부인들이 연신 감탄을 하며 망원경을 서로 돌려가며 보고 있다. 화려한 거울, 보석류, 호피 등 중국 물건들은 앞에 놓고 다과를 드는 부인들.
좌의정부인 실로 대단하지 않소?
부인1 히야… 전 방금 꽃을 빠는 벌까지 보았답니다.
조씨 부인도 꽃을 보는 척하며 한쪽에 앉아 있는 숙부인을 몰래 망원경을 통해 본다.
부인2 참으로 대국엔 없는 게 없다 하더니, 정경부인마님 은혜로 좋은 구경합니다.
좌의정부인 저희 대감께서 이번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시고 보니 천지가 개벽한 듯하답니다. 색목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질 않나, 별의별 신식 물건들이 넘쳐나질 않나…
수다스럽게 가벼운 다른 부인들에 비해 물처럼 고요하고 정숙한 숙부인 정씨의 모습. 부인들이물건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숙부인은 다소곳이 앉아 있다.
부인1 (슬그머니) 청에서 들여오신 물건 중에 혹여… 그런 건 없던가요?
좌의정부인 무엇 말씀이신지요?
부인1 거 있잖습니까, 요즘 사대부 부인 중에 안 본 이가 없다던데….
부인2 …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호호… 망측해라.
좌의정부인 (의아하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았다는 듯) 오호라… 그거요?
부인1 네! 그거요. (은근히) 보셨군요. 마님도?
좌의정부인 (부끄러운 듯) 내 딱 한번 본 적은 있소만… (중국 춘화가 섬광처럼 순간 보여진다) 어휴, 난 도무지가 민망한 것이어서들.
부인1 (은밀히) 요즘엔 조선 내에서 그린 것들도 돈다 합니다. 휠씬 비싼 값에
부인2 전 왜국(倭國)에서 건너온 것이 좋던데… (일촌 춘화가 순간 보여진다) 아주 실감나게 그린 것이…
좌의정부인 하하… 요즘 여인네들은 관심도 다양하군요.
조씨부인 근데… (알고 있으면서도, 숙부인을 턱으로 가리키며) 저기 계시는 부인은 오늘 초면인 것 같습니다.
좌의정부인 아, 그러신가? 내 친정 조카일세. 성은 정가이고.
숙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숙부인과 조씨 부인)
좌의정부인 (약간 측은하게 보고는) 원래 지체 높은 가문과 혼사를 치루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는데, 혼례를 며칠 앞두고 신랑자리가 그만 급사를 해버렸지 뭔가 그런데도 시댁으로 들어가 시부모 봉양 다하고….
조씨부인 (들은 척도 않고 짐짓 안 됐다는 듯이) 저런, 청상이신 줄 몰랐네
이때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로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담 너머로 산책하듯 책을 들고 걸어가며 읽는 꽃미남 도령이 언뜻 보인다.
조씨부인 손님이 또 계신가 봅니다.
좌의정부인 내 막내 아들일세. (하녀에게) 이보게, 인호 좀 들라 하게 (부인들에게) 지방 유림 에게서 수학하다 며칠 전에 올라왔다네, 이번 별시문과에 응제 하려는데 근심이 태산이네.
-시간경과-
인호 (깍듯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권인호라 하옵니다.
인호가 부인들 앞레 공손히 앉아 있고 좌의정 부인, 손님들을 소개하며
좌의정부인 여긴 지돈녕 부사댁 허씨부인, 이쪽은 이조참판댁 오씨부인, 그리고 저분은 옆집 유판서댁 조씨 부인이시다. 조씨 주인은 너도 어려서 뵌 적 있지?
조씨부인 아니, 벌써 이렇게 장성했군요. 아버님 못지 않은 호남이시네요.
인호 (호감을 보이며) 부인의 학식과 인품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시문에 능하시고 병서를 즐겨 읽으신다구요. 언제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조씨부인 (흐뭇해하게) 저야 영광이지요.
인호 그럼 소자는 이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조만간 저희 집에 조카분과 한 번 놀러 오시지요. 뜰에 수국이 한참이랍니다. (짐짓 생각난 듯) 아! 그리고 아드님도 언제 한번 보내세요. 이번 과거에 도움 될만한 서책이 몇 권 있는데, 꼭 드리고 싶군요.
좌의정부인 어쩜, 배려가 저리도 깊을 수가 없네, 그려
S#10. 좌의정 집·숙부인 별채 방 (밤)
언문으로 된 낡은 책 한 권을 펼쳐 놓고 책상을 앉아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다른 책에 옮겨 적고있는 숙부인. 다 옮겨 적고 책을 덮으면 표지에『천주실의』라고 언문으로 적혀 있다.필사를 끝낸 책은 옆으로 쌓아 두고 다시 필사할 새 책을 펼친다. 멀리 소쩍새 소리가 들려온다.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급하게 하던 것을 탁자 밑으로 내려 감춘다.
은실(V.O) 아씨, 작은 서방님 올라오셨습니다.
S#11. 좌의정 집·숙부인 별채 방 밖 (밤)
숙부인 정씨의 방을 바라보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한 남자. 날카로운 눈매에 곧은 자세로 무관차림에 칼을 차고 있다.
윤중원 형수님, 저 올라 왔습니다.
숙부인 (기척소리, 잠시 침묵) 밤중에… 한양엔 어인 일이십니까?
윤중원 대국 통신사 일행 호위 문제로 입궐하게 되어 금년 말까지 한양에 있게 될 듯 합니다. 밤도 늦어 말죽거리에서 머물까 하다가…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방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숙부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윤중원을 흘낏 보고는 약간 외면한다. 숙부인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더니 곧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뀌는 윤중원.
윤중원 (많은 뜻 담아) 형수님… 무고하시지요?
숙부인 예. (이내) 은실아, 청지기에 부탁하여 작은 서방님 자리 보아 드려라.
윤중원 (은실이 나가고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에) 좀 의논드릴 일이 있는데…
숙부인 (냉랭한 목소리로) 날이 밝으면 하시지요. 무슨 일인진 모르나…
윤중원 …네
열릴 때처럼 스르르 닫히는 숙부인의 방문.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는 윤중원
S#12. 유대감 집·조원 별채 쪽마루 (낮)
햇살 좋은 마루에 앉아 장검을 손질하고 있는 조원. 예리한 선이 살아 있는 칼날을 햇볕에 비춰 본다. 자근노미 다가와 소식을 전한다.
자근노미 좌의정 대감댁 마님과 숙부인께서 방금 부용정으로 드셨답니다.
조원 (반색하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S#13. 유대감 집·부용정 대청 (낮)
다과를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는 좌의정 부인, 숙부인과 조씨 부인
좌의정부인 (조씨 부인의 우아한 차림을 살피며) 참으로 곱소. 언제 보아도 행색이 유려하니… (숙부인을 보며) 근데 이 아이는 좀처럼 꾸밀 줄을 모르니…
조씨부인 남정네들에게야 조카님의 높은 절개가 더 값진 차림새 아니겠습니까
숙부인 (다소곳이) 차림새는 예의를 갖출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만…. 마님의 높으신 안목이 부러울 따름이지요.
이때 문소리가 나고 남자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한다. 깜짝 놀라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내외를 하는 좌의정 부인과 고개를 슬며시 돌리는 숙부인
좌의정부인 에그머니… 웬 남정네가 내 당에까지….
조원 (환한 웃음 머금고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다가오며) 손님이 와 계셨군요.
조씨부인 (분위기가 흥미로워짐을 느끼며) 제 사촌동생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조원 (댓돌에 올라서며) 강경 사는 조원이라 하옵니다.
조씨부인 이 분들은 옆집에 사시는 좌의정대감 마님과 그 질녀이시네.
좌의정부인 (부채를 거두고 관심을 보이며) 아! 그렇다면 부호군 아니시오. 호위청 별장 자리를 마다하고서, 화나 즐기며 세상풍파에 휘둘리지 않고 사신다구요.
조원 (대청에 올라앉으며) 그게 무슨 자랑이겠습니까
좌의정부인 들리는 바로는 조강지처를 여즉 못 잊어 혼자 지낸다면서요. (숙부인을 슬쩍 보며) 아니되지요… 아직 젊으신 분이 무후해서야 당치도 않지요.
조원 절개를 지키는 일이 어디 아녀자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마음속에 백년해로의 배필이 들어설 자리는 오직 하나 뿐인 게지요.
조씨부인 (따분한 듯 말을 자르며) 그래 무슨 일이신가?
조원 (보자기를 풀며) 선암사 주지스님께서 손수 아흡 번 덖은 차를 누이께 좀 드리려고 발 빠른 놈을 시켜 가져오게 했는데 이렇게 손님들께도 나눠 드리라는 하늘의 뜻이었나 봅니다. 초면에 실례가 안 된다면 두 분께서도 좀 드리고 싶군요. [정교하게 조각된 은제차합(銀製茶盒)을 내민다.]
좌의정부인 하이고, 뭘 우리한테까지…
조씨부인 (눈치채지 않게 들고는) 사내가 참으로 다정스럽기도 하지
좌의정부인 (벌써 손에 들고는) 받아도 될는지….
조씨부인 (차합을 쥐게끔 손을 잡아주며) 받아두셔요.
조원 부인께서도 차를 좋아하시는지요?
숙부인 (대답은 못하고 좌의정 부인을 보자)
좌의정부인 얘야, 유판서 부인 동생 되시는 분이 마음 써주시는 건데 받자꾸나
못이기는 척 물건을 받아 탁자 한쪽으로 밀어놓는 숙부인 정씨. 조원, 물 번지듯 슬그머니 미소가 퍼진다. 조씨 부인의 눈빛이 숙부인을 보는 조원의 얼굴을 날카롭게 스친다.
조원 성의를 받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좌의정부인 가만… (조원과 조씨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기왕지사 서로 일면식도 한 터, 다같이 우리 집 후원에나 가십시다.
순간, 조씨 부인과 조원이 서로를 바라본다.
좌의정부인 날씨도 청명한데 연못에 배 띄우고 창기들 불러다 요즘 유행하는 단가나 들어봄이 어떻겠소?
조원은 의기양양한, 조씨 부인은 피곤하고 따분한 상황이 되었다는 얼굴. 숙부인이 곤란한 내색을 하자
좌의정부인 (동의를 구하듯) 마침 바깥 분들은 다 출다 중이시고, 아랫것들이야 물러나 있게 하면 되잖소.
숙부인 (오히려 부탁하듯) 이모님, 저는 그냥 들어가겠습니다.
좌의정부인 에이, 그러면 파흥이 되질 않나. 나도 그럼 말겠네.
각자 다른 감정을 품고 서로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지된 그림 속의 풍경처럼 보인다. 그 위로 낭랑한 목소리의 시조가락(단가)이 길게 들려온다.
S#14. 좌의정 집·후원연못 (오후)
연못가엔 네 명의 악사의 장단에 맞춰 두 명의 기생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조원은 뱃머리에 앉아 있고 맞은편 조씨 부인의 양쪽으로 좌의정부인과 숙부인이 앉아 있다. 좌의정부인은 음악소리에 흠뻑 취해 있고, 숙부인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조원. 숙부인은 스치는 연꽃잎에 손을 대며외면을 하고 있다. 조원의 시선이 숙부인에게만 가 있자 웃으면서도 얼굴이 굳어 있는 조씨부인. 동상이몽의 풍경.
S#15. 좌의정 집·후원연못가 (오후)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 조씨 부인은 이미 연못가에 서 있고 조원, 배에서 내리다가 좌의정부인의 손을 잡아 도와준다. "아니, 이래도 되나, 몰라"하며 어색해 하지만 흐뭇해하는 좌의정부인. 좌의정부인을 땅으로 내려서게 하더니 이내 좌의정부인을 부축하고 오던 숙부인의 손을 잡아버린다. 당황하지만 내색은 못하는 숙부인. 간신히 땅으로 내려선다. 조원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숙부인.
숙부인 전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좌의정부인 (후원 정자 쪽으로 향하다가) 들어가게?
조원 (말리려는 듯) 벌써요? 저 때문에 불편하신 거라면
조씨부인 (조원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숙부인 즐거웠습니다. 그럼 노시다들 가시지요.
조원, 좀 도와 달라고 시선을 보내지만 조씨 부인, 약 올리듯 웃음을 머금은 채 연못만 바라본다. 이때 배를 끌던 시동이 "나으리, 이걸"하며 숙부인이 두고 간 차 합을 조원에게 내밀자 차함을 낚아 채 번개같이 뒤를 쫓아간다. 날카롭게 그 모습을 쏘아보는 조씨 부인. 그러나 우아함을잃지 않는 부채질.
S#16. 좌의정 집·후원입구 (오후)
조원(off) 부인!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산책로처럼 긴 담 장을 끼고 이어진 후원에서 내 당에 이르는 길. 은실이와 함께 뒤도 돌아보지않고 걸어오던 숙부인. 저 뒤로 조원이 소리치며 뛰어오고 있다. 가까스로 옆으로 달라붙어 은실이와 숙부인 사이로 끼어 드는 조원. 은실, 당황한다.
조원 부인! (숙부인이 외면하며 걸어가자 앞을 가로막고) 잠시만! 이걸 두고 가셨소이다. (차합을 내밀지만 받지 않은 채 망설이는 숙부인)
숙부인 은실아, 호의는 잘 알겠사오니 받은 바 진배없다고 여쭈어라.
은실 나으리, 호의는 잘 알겠사오니
조원 (은실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맞추려 애쓰며) 아니, 사람이 면전에 있는데 어찌 쳐다도 안보고 말씀을 전한다 말이시오.
숙부인 (여전히 흔들림 없이) 남녀가 유별한데 발도 치지 않고 어찌 대면할 수 있겠냐고 전하거라.
은실 나으리, 남녀가 유별하니
조원 (말을 끊으며) 부인, 밤마다 집회에서 숱한 남정네들 앞에서 그토록 온화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시면서, 어찌 백주 대낮에 호의로 대화하려는 제게는 몸종을 사이에 두고 멀리하려 하십니까?
숙부인 (깜짝 놀라 조원을 봤다가 다시 외면하고 자리를 뜨며) 점잖으신 분이 어찌 남의 처자 행적을 캐고 다니는지 심히 불편하다고 여쭈어라!
은실 나으리, 점잖으신 분이
조원 어허, 시끄럽구나. 넌 좀 저리 가 있거라! (은실, 깜짝 놀라 제 풀에 뒷걸음치고 숙부인도 다소 놀라 멈춰 선다) 평소 부인의 후덕함과 고귀한 성품을 존앙한 나머지, 예가 아닌 줄 아오나 이를 무릅쓰고 나섰소이다. 그러니 잠시만 대면할 기회를 주시지요.
숙부인 (난색을 표하며) 이 광경, 남들 보기에 좋은 모습이 아닐 듯 하옵니다.
조원 남들 이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부인은 관습과 평판에 얽매이지 않고 옳은 일에 앞장서는, 소위 깨이신 분이 아니던가요?
숙부인 (평상심을 유지하며) 저에 대해 잘 아실 리도 없겠지만 관습을 깨뜨리는 것은 제 바램이 아닙니다. 봉사를 실천하는 것과 이런 장소에서 외간 남자와 마주하는 것은 거리가 있는 일이지요. 혹여 제게 모욕을 주려 이러시는 건지요.
조원 (거의 경악한 얼굴로) 모욕이라니요! 당치도 않소이다.
숙부인 (한숨을 쉬고) 부호군 나으리, 지금의 이런 행동이 저 같은 아녀자들에겐 충분히 모욕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시옵니까?
그리고는 단호하게 고개 들어 조원을 응시한다. 잠시 주춤거리는 조원. 천천히 다시 눈을 내리깔고 지나가려는 숙부인. 저도 모르게 비켜서는 조원.
숙부인 (돌아보지 않고) 은실아, 어서 가자.
은실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따라가며) 네. 아씨!
은실의 손목을 낚아 채 차함을 쥐어주며 입 모양으로 "아씨께 전해라"며 인상 쓰는 조원. 은실,주눅들어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려간다. 그때 숙부인이 향하는 중문을 열고 윤중원이 막들어선다. 뜻밖의 마주침에 흠칫 물러서는 숙부인을 향해 반갑게 "형수님, 예 계신다길래" 하며 다가서는 윤중원. 숙부인,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문을 빠져나간다. 멀뚱하게 보다가 조원을 발견하는 윤중원 (넌 누구냐?) 조원은 숙부인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다가 윤중원과 눈이마주치자 지지 않고 쳐다본다.
윤중원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오?
조원 (되려 어이없다는 듯) 못 보셨소? 당신이 막 들어오고 부인께서 막 나가시지 않으셨소? 난 여기 서 있었고.
헛기침하며 뒷짐지고 조원이 스치듯 가 버리자 곱지 않은 시선으로 쏘아보는 윤중원.
S#17. 유대감 집·솟을대문 안 (오후)
소옥과 소옥어미가 마치 이사를 오는 듯 여러 짐꾼들과 함께 대문을 들어선다. 마당에는 유대감 댁 식솔들이 죽 나와 이를 구경하고 있다. 두 명의 젊은 소실이 딸아이들을 안고 앞세우고,곱지 못한 시선으로 소옥을 바라본다. 묘한 신경전. 조원도 그들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 새침한 얼굴로 낯선 집안을 두리번거리는 소옥에게 시선이 머무는 조원. 줄곧 눈을 떼지 못한다. 소옥어미, 습관처럼 소옥을 재촉해 내당으로 향하다가 마당 한쪽의 조원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더니 소옥 옆으로 붙어 얼굴을 감춘다. 조원의 시선은 여전히 소옥에게 있다.
S#18. 유대감 집·부용정 안방 (황혼녁)
황혼녁. 붉은 노을 빛이 문풍지를 뚫고 가득 들어오고 있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조원과 조씨 부인
조씨부인 농간이 참으로 유치하기 그지 없더군요.
조원 이제 시작인데 뭘 그러시오. 여자의 마음은 비록 닫혀 있더라도 그 품만은 언제나 사내를 향해 열려 있다 했거늘.
조씨부인 과연 그런 답답한 여자에게서 쾌락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옷 못 입는 것만큼 말도 어쩌나 지루하게 하던지…
조원 잔인한 말 따위는 할 줄 모를 테니까요.
조씨부인 (잘 해보라는 웃음에 이어) 아…! 소옥이를 보았다면서요? 보고도 동하지 않던가요?
조원 범을 쫓고 있는데 한낮 새끼 여우가 눈에 들어올 턱이 있소?
조씨부인 흉…(설레설레) 관두시게나, 그러지 않아도 더 흥미로운 방법이 생겼으니까
조원 (웃음 띤 채 손을 뻗어 조씨 부인의 버선발로 주무르며) 누이는 질투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워 보인단 말야
조씨부인 흐음 (손길을 즐기다 이내 발끈하며) 질투라구? 가당치 않지.
조원의 수작에 은근히 동조하며 조원의 한껏 부풀어 오른 바지 앞자락을 부채로 톡톡 건드리는조씨 부인. 달아오르는 조원. 잔뜩 흥분해 더욱 노골적으로 다가오자 웃으며 물러나 앉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부채를 소리나게 펄치며) 아! 지리한 하루였어. 이제 좀 쉬고 싶군요.
S#19. 유대감 집·부용정 입구 (초저녁)
부용정 중문을 나서던 조원. 부용정의 측면 쪽문으로 정금이가 누군가를 조심스레 안내하는 걸 보게 된다. 의아해진 조원, 중문 틈으로 슬쩍 들여다보면, 관료차림의 얾은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청으로 올라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원,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선다.
S#20. 좌의정 집·좌의정 부인 방 (밤)
좌의정 부인이 트레머리를 풀어 내리는 걸 도와주는 숙부인. 숙부인은 낮 동안의 경직됨은 사라지고 정감 있고 편안한 느낌이다.
좌의정부인 말복, 처서 다 지났는데 아직도 이러 더우니… (하며 치마를 손을 넣어 속옷을 벗기 시작한다) 내 듣자 하니 아직도 약방 집회에 나간다며?
숙부인 …
좌의정부인 가난한 백성들은 돕고자 하는 네 맘은 안다만 나라에서 엄히 금하고 잇는 일인지라….
숙부인 조심하겠습니다. 전 천주교도도 아니고 기실 작으나마 보람된 일을 하고자 가 보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제가 큰 위로 받는 걸요.
좌의정부인 모름지기 여자란 지아비….
숙부인 (말로 바로 받으며) 지아비의 사랑 받고 자식을 커 가는 거 보면서… 또 말씀이시죠?
좌의정부인 (피식 웃으며) 알긴 아네, 너희 시댁에서야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울 테지…허나 생과부로 늙어버릴 너는 이제 뭐냐 (은근히) 혹시 부호군이란 사람은 어떻더냐?
숙부인 (의아해 하면) …?
좌의정부인 아, 그 왜… 낮에 보았던 조씨 부인 사촌이란 사람 말이다. (떠올리며 기분 좋은 듯) 꽤 번듯하게 생겼지 않든? 훤칠한 게
숙부인 (정색을 하며) 무슨 말씀이세요. 싫어요. 그런 무례한 사람… 게다가다 믿을 건 아니지만 들리는 말도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이에요.
좌의정부인 별 걸 다 아는구나, 그래도 내게 사심이 있나 보던데 (떠보듯) 괜히 서툴게 그러는 거 봐라. 혹 너한테 쫓아와서 무슨 말한던?
숙부인 이모!
좌의정부인 (손을 저으며) 아유, 괜찮다. 요즘 세상에 그런 건 흉도 아니야
숙부인 (맑게 웃어 보이며) 저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요. (자리를 정리하며) 그만 주무셔야죠.
좌의정부인 그래, 그만 자야지. (문밖에 향해) 은실아 게 있느냐? 아씨 모시거라!
숙부인 (손 저으며) 아프다고 해서 먼저 쉬라고 했어요.
좌의정부인 그럼 오늘은 예서 자고 갈래? 밤새 여자들끼리 수다나 풀어보자꾸나….
맑게 웃으며 끄덕이는 숙부인.
S#21. 유대감 집·행랑채 자근노미 방 (밤)
Ins.
사방이 적막한 어둠에 싸인 행랑채. 조원이 발소리를 죽여 다가온다. 가만히 서서 문안의 기척에 귀기울이는 조원. 숨 죽여 키득대는 소리. 몸을 일으켜 크게 헛기침을 하는 동시에 "자근노미 게 있느냐"며 바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조원. 자근노미와 은실, 화들짝 놀라며 무언가 가릴 것을 미처 찾기도 전에 조원이 방 안으로 들이닥친다.
조원 아니, 내 모르는 사이에 살림이라도 차린 게냐?
자근노미 (당황하는 척) 나… 나으리
조원 (자근노미에게) 넌 좀 나가 있거라. 흠… 이거 좀 늦게 올 걸 그랬군. (자근노미 나가고 간신히 몸을 가리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은실이게) 예서 이러고 있는 걸 네 주인도 알고 계시느냐!
은실 (사색이 되어) …
조원 (끌끌, 혀 차는 만면에 미소) 너무 떨 것 없다. (어리둥절하게 보는 은실을 향해 타이르듯) 이런 일을 계기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친근한 관계가 성립되기도 하는 것이니라.
은실, 잠시 보다 겨우 말뜻을 알아들은 듯 한숨을 쉬더니 웅크렸던 몸을 피고 눕자.
조원 (피식 웃으며) 꽤 쓸만 하다만… 내가 자근노미와 동서지간이 되는 걸 비밀이라고 말할 순 없지 않으냐. (구석에 놓여 있던 옷으로 손수 덮어주며) 시야가 심히 어지럽구만…
은실 (그러니까 더 겁먹어) 그, 그럼…?
씨익-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이는 조원
S#22. 유대감 집·부용정 안방
S# 24. 와 합쳐짐
S#23. 어느 약방 천주교 집회 (밤)
Ins.
달빛 아래 검은 기와지붕들. 멀리 개 짖는 소리와 순라꾼의 요령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골목 안 담벼락 모퉁이에 젊은 선비와 장옷을 쓴 여인이 은밀히 밀어를 나누고 있다. 방 중앙에는 중국인 신부가 새로운 신도 서너 명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모두들 기도를 하고 있는데 숙부인은맨 뒤쪽에 서서 다소곳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을 뿐이다. 발 너머 숙부인을 바라보는 조원.
-시간경과-
미사가 끝나고 마당에 나온 사람들. 김흥연은 중국인 신부와 함께 사람들과 담소를 나고 있고,한켠에선 숙부인이 참석한 사람들에게 『천주실의』필사본을 나누어주고 있다. 은실이 옆에서돕고 있다. 조원도 책을 받으려고 줄을 선 사람들 뒤로 슬며시 선다. 책을 나누어주다 조원과 맞닥뜨리는 숙부인. 조원이 씨익 웃자 일순 놀란다.
숙부인 (이내 여유 있게 책을 건네며) 또 뵙게 되는군요.
뿌듯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들고 돌아서는 조원. 그때 지나던 김흥연, 조원을 훑어보다가 다가오며
김흥연 (정말로 반갑게) 흑시 부호군 나리…?
조원 그렇소만….
김흥연 (덥석 두 손을 잡으며) 이제야 나타나셨군요. 저는 김흥연이라 합니다. 보내주신 돈은 정말 요긴하게 썼습니다.
조원 (짐짓 난처한 듯) 민망합니다. 소리를 낮추시지요.
대화를 듣게 되는 숙부인 정씨. 의아해 한다.
김흥연 어쩌나 적절할 때 도와주셨는지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조원 알리자고 한 일이 아니니 부디 제 이름은 밝히지 말아주십시오. (최대한 겸손하게) 제가 워낙 신문물에 관심을 자져보았지요. 『천주실의』와『칠극』은 아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죄악의 일곱 가지 근원을 이겨내는 일곱 가지 덕행은 삼강오륜이상으로 새겨야 할 덕목이지요. (숙부인 쪽을 의식하면서도 쳐다보지 않는다)
김흥연 (감동에 거의 쓸려갈 듯) 탄복했습니다! 천주학과 서학에 이토록 조예 깊은 분이 숨어 계시다니, 다 주님의 역사 하심입니다.
조원 (짐짓 부끄러운 표정) 사실은… 부끄럽게도… 제가 천주학 집회에 참서가게 된 것은 신앙에 이끌려서 만은 아닙니다.
김흥연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그럼?
조원 (부끄러움을 애써 이기려는 듯한 표정) 한 여인 때문이지요. 그 분이 긍휼한 백성들을 도우며 보이던 그 진실된 시선… 어찌나 순수한 기쁨과 따뜻한 동정으로 빛이 나던지. 그 분을 향한 사랑과 존경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조원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며 듣고 있던 숙부인. 제풀에 놀라 서둘러 자리를 뜬다. 지나쳐가는 숙부인을 바라보는 조원. 멀어지는 숙부인을 향해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짓는 조원
조원 (시선은 숙부인에게 향한 채 성의 없이) 고백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S#24. 유대감 집· 부용정 안방 (오전)
조란, 율란을 집어먹으며 책을 보는 조씨 부인. 소옥은 안동댁 앞에서 가훈서를 일고 있다.
소옥 (지루한 목소리로) 무릇 지아비는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여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는 것 같이 할 것이다.
소옥의 목소리가 점점 늘어지자 안동댁 근엄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소옥 (목소리를 가다듬고) 몸을 낮추며 뜻을 겸손하게 하여 망령되어 존귀하고 큰 것인 체 말며, 오직 순종함을 알고 감히 어긋지거나 배반치 말라.
이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하녀의 목소리
하녀(off) 마님, 좌의정 대감댁 막내도령 오셨습니다.
조씨부인 (반갑게) 그래? 들라 하게… (번뜩 소옥을 보더니) 아니, 잠시 기다리시라 하게…
S#25. 유대감 집·부용정 입구 (오전)
부용정 중문 앞에 서성이며 기다리는 인호, 꽤 오래 기다린 눈치다. 슬그머니 입을 가리는 하품을 하다가 문이 열리는 기척에 얼른 흔적을 지우고 돌아선다. 돌아서다가 자기 앞에 나타난 소옥의 고운 자태에 순간 얼이 빠지는 인호. 소옥이 눈을 내리깐 채 책을 몇 권 내민다.
소옥 마님께서 도련님이 오시면 이 책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인호 (목소리까지 고우니 얼이 빠져) … 저 … 그 ….
소옥 (여전히 보지 않은 채) 어서 받으시지요.
책을 건네며 살짝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소옥, 당황하여 그만 책을 떨어뜨리고 만다.
소옥 에그머니 이를 어째….
인호 어이쿠….
둘 다 황급히 몸을 숙여 책을 줍다가 손이 닿자, 놀라 다시 책을 떨어뜨린다. 그러다 정면으로시선을 마주하는 둘. 얼어붙은 듯 굳어지고, 제 심장소리가 입밖으로 나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 수줍음에 고개를 돌린채, 소옥이 책을 주워 건넨다. 일단 책을 받아 든 인호. 한숨, 떨림… 문을 천천히 닫으며 어색하고 아쉽게 헤어지는 소옥과 인호. 지나던 길에 인호와 맞닥뜨리는 조원. 얼굴이 붉어진 채 황망히 자리를 뜨는 인호.
Ins.
필시 한눈에 반한 눈치임을 안채에서 발 너머로 지쳐보며 눈을 빛내는 조씨 부인.
S#26. 운종가 서사(書肆) (낮)
한가한 대낮의 운종가 서사에서 책을 둘러보는 숙부인. 은실이 옆으로 누군가 다가선다. 기척이 난 쪽을 돌아보다 흠칫 놀라는 은실. 숙부인,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뽑아 들고 반갑게 "내가 찾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하고 은실이 쪽을 돌아보면 은실이 없다. 대신 한 켠에서 책을 살피고 있는 조원을 발견하곤 몸을 감추며 바라본다. 조원이 발걸음을 옮기자 책으로눈을 돌리는 숙부인, 슬쩍 조원을 의식한다.
조원 (수심 찬 얼굴로 책을 펴 중얼중얼 읽는다) 부해난위수이며 유림난위관이라. 큰 바다를 본 사람은 어지간한 물을 보아도 물같이 느껴지지 않고 숲의 아름다운 경치를 본 사람은 웬만한 경치를 보아도 시들하다 했으니 (고개를 들고 한숨을 쉬며) 한 여인을 안 연후엔 그 어떤 여인도 내 마음에 들어오질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 순간 숙부인이 들고 있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떨어뜨리자 그 소리에 짐짓 놀란 듯 조원이 돌아본다. 숙부인 당황하여 서둘러 나가려 하나, 통로의 입구를 조원이 막고 서 있다. 구석으로 몰린 숙부인에게 다가서며 조원,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며
조원 (놀랍다는 듯) 세상에 이런 기연이 이건 필시 내 긴 한숨이 부인을 예까지 끌어들인 게요.
숙부인 (애써 온화한 표정으로 다소곳이) 비켜 서지지요.
조원 (북받치듯) 부인!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숙부인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내외하며)
조원 (아랑곳없이 계속 들뜬 얼굴로) 내 평생 자비를 베풀었을 때 느끼는 희열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소. 부인의 족적을 좇아 이르는 곳마다 기쁨과 축복이 기다리고 있으니, 천국을 보여준 그대에게 내 무엇으로 보답을 하리오?
숙부인 (주위를 의식하며) 제발 그런 말씀 마십시오. 도무지 제게서 무엇을 얻었고, 또 무엇을 보답하신다는 것인지 전 종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조원 (강력하게) 아니오. 부인! 난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소이다.
숙부인 (잠시 알아듣지 못해 아연해 하다가 이해하고는 차분하게) 선행을 베풀어 희열을 느끼셨다면 그것은 부호군 나리의 덕행에 대한 보답인 게지요.
조원 (덥썩 손을 잡고 열정어린 눈으로) 내가 부인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숙부인 (소스라치지만 주위 시선을 끌까봐 차마 소리지르지 못한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손을 빼려 안간힘을 쓰지만 조원, 놔주지 않자 당황한 숙부인, 온 힘을 다해 손을 뿌리친다.너무 강경하게 나오자 조원, 슬쩍 놔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숙부인 (싸늘한 얼굴로) 도무지 상대할 만한 분이 아니시군요. 늘 이런 식으로 숱한 아녀자들을 희롱하신 겁니까?
조원 (억울하다는 얼굴로) 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나 부인이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세상 모두가 내게 등을 돌려도 저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에 눈뜨게 한 부인만은 내게 그러시면 아니 되오.
숙부인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가차없이 자리를 뜨며) 다시는 제 앞에서 그런 궤변 늘어놓지 마세요! 부디 또 뵙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숙부인, 단호하게 걸어나가자 그 기세에 조원, 길을 비켜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원의 표정은 안타까움에 '흐음, 쉽지 않은걸' 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뀐다.
S#27. 운종가 거리 (낮)
책방을 나와 장옷을 둘러 입고 은실이를 찾아 부르며 걷는 숙부인. 주위를 둘러보다 뒤를 걸어오는 조원이 보이자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숙부인. 이때 소옥 어미,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게 된다. 순간, 몸을 숨기며 놀라는 소옥 어미. 더욱 빠르게 걸으며 필사적으로 은실이의 자취를 찾는 숙부인. 그러다가 어느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눈에 낯선지 멈춰서 돌아본다. 당황하는 숙부인.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지만 여전히 낯설다. 점점 걱정이 되는 숙부인. 아무도 없는 골목 안. 돌담만이 길게 늘어서 있고 길을 잃은 숙부인. 이때 한쪽에서 불량스러워 보이는 사내 하나가 느믈거리며 나타난다.
사내1 (히죽대며) 거 귀하신 몸 같은데 어찌 몸종 하난 없이 혼자 돌아다니시나?
숙부인, 장옷을 더욱 여미고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 돌아선 순간 또 다른 사내와 부딪친다. 더
욱 느끼한 표정을 짓는 사내2. 그 뒤로 망을 보듯 두리번거리며 나타나는 사내3. 소스라치며 한 걸음 물러나는 숙부인. 포위 당한 형국.
사내2 아주 우아하신 부인일세, 그려.
숙부인 (단호하게) 물러서시오. 뭐 하는 분들이관데 (험상궂은 기세에 눌려 점점 잦아들며) 이리하는게요.
사내1 우리? 우린 일종의 한량들 입죠.
사내2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우리도 즐기며 산다우.
숙부인 (위엄을 잃지 않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비키시오.
사내1 비키면? 비키면 그냥 갈 거 아니오?
사내2 그러면 같이 즐길 수가 없지.
숙부인 (협박하듯) 소리를 지를 테요.
사내1 (품에서 단도를 꺼내 슬쩍 칼끝이 느껴지게 숙부인의 허벅지에 대며) 아이, 무서워라. 그러시면 안되지.
숙부인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원하는 게 무어냐
사내2 히히히 우리가 한동안 즐기질 못했거든요?
사내1 그러게 가끔 즐겨줘야 하는데.
눈치를 채고 창백하게 질리는 숙부인.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서는 사내들. 차마 소리 지를 기력이 없을 정도로 두려움에 떠는 숙부인. 가슴속의 은장도를 꺼내려 하지만 잽싸게 손을 움켜쥐고 입을 막으며 껴안아 버리는 사내들. '읍. 읍.' 입이 막힌 채 소리 지르는 숙부인. 이때 갑자기 퍽, 퍽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지는 사내들.
조원 도대체 무슨 짓거리냐!
조원을 보자 순간 안도하는 듯.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숙부인. 어슬렁거리며일어서는 사내들. 험한 인상을 쓰며 조원을 에워싼다.
조원 이 놈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부채를 무기 삼아 간단하게 사내들을 제합 하는 조원. 사내들, 분해하며달아난다.
숙부인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조원 마침 내가 이리로 지나갔길 망정이지. 큰일날 뻔 하셨소. 귀하신 몸 조심 하셔야지요. (뭔가 할 말을 참듯 물끄러미 보다가) 그럼 전 이만 (하고 돌아서려는데)
숙부인 (다급히)나리!
조원 (흠칫 돌아보고) 네?
숙부인 (어렵사리) 저. 저 좀. 제가 잠시 길을 잃어 그러는데
조원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아! 그러시지요! (앞장서며) 허락하신다면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앞장 서 걷는 조원, 흐뭇하게 웃는 얼굴 뒤에서 여전히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는 숙부인. 조원은돌아보거나 부축하지도 않고 걸을 뿐이다. 숙부인,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앞서는 조원을 뒤따른다. 골목 저 끝에서 굽신대며 자근노미에게 엽전을 받는 사내들이 언뜻 보인다.
S#28. 산책길 (오후)
조원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느라 이젠 떨리는 것보다 숨이 턱에 찬 숙부인. 그러다 보니 주위 풍경에 눈이 갈 새도 없다. 조원의 뒷모습만 시야에 가득하다. 갑자기 조원이 우뚝 멈추면 문득 주위를 둘러보는데, 신비감이 들만큼 아름다운 연못이 펼쳐져 있다.
조원 (넋을 빼앗긴 듯) 참으로 아름답소이다.!
숙부인 (저도 모르게 감탄) 아!
-시간경과-
나무가 터널처럼 우거진 연못 주위로 난 산책로를 걷는 두 사람.
조원 (문득 돌아보며) 이제 놀란 마음이 좀 진정이 되셨소?
숙부인 (둘러보며) 아, 네. 덕분에
조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처럼) 세상은 험한 곳이고 또 인간은 얼마나 금수같은 존재인지. (숙부인, 뒤에서 또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 스스로 돌아보건데, 내 인생은 칭찬 받을 것도, 그렇다고 비난받을 것도 없는 나약한 것일 뿐이었소. (풍경을 돌아보는 척 쓸쓸한 표정을 언뜻 숙부인에게 노출하면서)나는 내 자신이 불행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왔소이다.
숙부인 (긴장이 누그러지며) 인간의 본성이란 원래 완전치 못한 것이 아닐런지요. 선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듯이, 악한 자에게도 미덕은 있는 법이지요.
조원 (듣던 말던 최대한 분위기를 잡고) 나라는 인간은 욕정에만 이끌려 살아왔기에 아직 사랑의 고통은 모르고 있는 듯 하오.
조원, 잠시 말을 끊고 걷는다. 사위를 채우는 것은 오직 바람 곁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뿐. 그것을 숙부인에게 들려주려는 의도인 듯. 숙부인, 어깨가 쳐져 보이는 조원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보며 걷는다.
조원 서사에서는 본의 아니게 당황케 하여 죄송하오. 허나 (쓸쓸함의 극치) 부디 모욕이라는 말은 거둬 주실 수 없겠소. 나는 다만 (긴 한숨과 함께) 부인에 견줄 수 있는 인간이 되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숙부인 (겸손하게)제가 행하는 작은 베풂이란 존경심을 얻기 위함이 아닌 저 자신의 평온을 이루기 위함이니 감히 누가 온전히 타인을 위해 산다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이기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분위기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듯 그지없이 아름다운 두 사람. 숙부인, 계속 두어 발짝 뒤를 유지하며 걷는다. 산책로를 따라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나란히 걷는 것 같이 보인다.
S#29. 기생집 뒤 뜰 (낮)
기생집 후원. 노란 국화꽃잎이 띄워져 있는 술잔과 국화전이 있는 주안상이 놓여 있고 작은 연못이 아담하게 꾸며진 후원에서 조원이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앞에는 속옷 차림의 기생 추월이 속고름을 살짝 입에 물고 한쪽 발은 엉거주춤 앞으로 내밀고 교태 어린 표정으로 꼼짝 않고 서 있다. 조원,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추월 (꼼짝 않고선 채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조원 요즘 내가 하는 작업이 술술 풀리지 뭐냐
추월 치… 이번엔 어느 여인일꼬…
조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싶구나
살짝 들고 있는 추월의 한쪽 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다 그런 초상화를 추월이 앞으로 던져주는조원. 추월, 풀썩 주저앉아 반색을 하고 그림을 주워든다.
S#30. 좌의정 집·숙부인 별채 안 (낮)
편지를 펼쳐 읽는 숙부인. 옆에는『열하일기』한 권과 빨간 목도리가 놓여 있다.
조원의 목소리"윤종가 뒷골목의 일로 놀라신 가슴에 병이라도 남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길거리에서 아씨를 잃었다고 우왕좌왕하던 은실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서사에서의 제 무례함을 씻기에는 미미 하지만 그때 보시던 책을 함께 보내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내 비록 노론계의 자식이오나, 서학과 천주학에 관심이 많은데다 부인을 깊이 본받고 싶은 마음인지라 서신으로나마 책 얘기도 하고 인생에 대해서도 논하고 싶습니다.부디 나약한 이 사람을 내치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용서해주실 양이면 제가 머무는 집 쪽을 향해 앉아 부인의 머리를 두 번만 쓰다들어 주십시오"
청아하게 미소 지으며 유대감 집 방향으로 자세를 고쳐 앉더니 머리를 두 번 쓰다듬는 숙부인. 그리곤 목도리를 가만히 만져 보다 계속 편지를 읽어나간다.
S#31. 기생집 방 (낮)
술을 한 모금 마시며 편지를 읽고 있는 조원. 숙부인의 목소리로,"책은 잘 받았습니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저를 구해 주신 은혜는 두고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천주학 모임을 통해 심신이 빈곤한 백성을 돕는 일은 분명히 제사 추구하는 행복의 일부이니, 관습과 전통이 금하는 외간 남자와의 서신교환은 그것에 포함시킬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관습 때문이 아니라 제 신념이라고 밝혀두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서신교환이나 직접 만나는 일은 피하고 싶습니다. 부디 제 입장을 널리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추월이가 그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박고 있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조원의 미간이 점점 좁혀든다.
조원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 흠… 역시 녹녹치 않아서 재미있다니까. (아래에서 열심인 기녀에게 돌연 짜증스럽게) 아야… 살살 좀 해라…!
S#32. 조원과 숙부인의 편지 몽타쥬
(약방에서 김홍연을 거들며 병든 노인네를 정성껏 돌보는 숙부인 / 편지를 쓰는 숙부인 / 키득거리며 숙부인의 편지를 읽는 추월과 그 옆에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조원 / 천주학집회에서 발을 사이에 두고 숙부인을 지켜보는 조원) 등의 그림이 흐르는 동안 그 위로 편지들이 익혀진다.
조원(V.O)
"부인에 대한 나의 존경과 사랑을 아직도 모욕이라 생각하고 계시는 듯 하군요. 허나 그게 죄라고 한다면 그 죄의 원인은 그대에게 있으며 또 그것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것도 부인이란 것을 잊고 계신 듯 합니다. 지나친 행복과 지나친 불행 사이에 놓여있는 불안함이란 제겐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부디 나를 이 고통에서 꺼내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숙부인(V.O)
"부호군 나리께서 말씀하신 행복이란 저같이 평범한 여인네에게는 위험한 쾌락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더 이상의 서신은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원(V.O)
"그대를 알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 그대를 사랑하면서도 마음을 돌리는 것, 이 두 가지는 모두불가능합니다."
숙부인(V.O)
"저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않겠노라고 정중하게 청하였습니다. 만일 계속해서 제 청을 무시하신다면 앞으로 천주학집회나 그 어느 곳에서도 절 보실 수 없을 겁니다. 진정코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S#33. 유대감 집·후원 정자 (오후)
편지 내용이 S#32에서 계속 이어지며 장검을 어깨에 세운 채 앉아 굳은 얼굴로 편지를 읽는 조원. 하지만 이내 얼굴에 습관처럼 미소가 피어오른다.
-시간경과-
거칠게 바람을 가르는 칼날. 후원을 걸어오던 조씨 부인,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 조원을 발견하곤 큰 돌 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본다. 건강해 보이는 조원의 모습이 아름답다. 지긋이 보고 있다가 조원과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바꾸며 먼 산을 보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비웃듯) 허공에 대고 화풀이하는 꼴이 뭐가 잘 안 풀리는가 보오.
조원 (날렵하게 장검을 휘두르며)너무 빠른 승부는 싱거운 법. 그 여자를 떠올리며 편지를 한자 한자 써 내려가다 보면 내 진정으로 그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오. (휘리릭, 검술 동작으로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이듯) 그렇다고 누이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열중하고 있진 않소.
조씨부인 (특유의 미소) 나 역시 상 줄 날만 고대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게나.
조원 (다시 넓은 공간을 휘젓듯 검술 동작으로 돌아간다) 누님 일은 잘 되가십니까.
조씨부인 물론이죠.
조원 아직 앞길이 창창한 열여섯 그 아이, 순진한 사랑을 꿈꾸고 있겠군요.
조씨부인 중늙은이 소실로 들어오는 주제에 사랑은 무에 말라비틀어진 사랑?
조원 우리야 물론 사랑에 빠지는 걸 수치로 알지만 또 모르지. 자형과 서로 사랑하며 지낼 일이 설레는 지도 누이도 그 나이 땐 꿈이 많았잖소. 사랑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있던 누이 얼굴이 아직도 선한 걸?
조씨부인 (잠시 멈칫하다 실소를 금치 못하며)사랑에 대한 기대? 듣다 듣다 별 천치 같은 소릴 다 듣게 되는군.
조씨부인, 찬바람을 일으키며 가 버린다. 그런 조씨부인을 씁쓸하게 보다가 다시 격렬하게 검술 수련에 몰두하는 조원.
S#34. 유대감 집·소옥 별채 앞 (밤)
마루에 나와 좌의정 댁 쪽을 살피며 멀리서 들려오는 권인호의 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연모하는 소옥
S#35. (삭제)
인호 육로상사는 무락기편이고 위염지이라, 일염지하면 변심일만인다. 이로상사는 무탄기난이초위퇴보라, 일퇴보하면 변원격천산이다.
낭랑하게 큰 소리를 내어 글을 읽다 문득 멈추고 상념에 잠기는 인호. 한숨을 내뱉는다. 그러다갑자기 책장의 책을 뒤지기 시작한다.
S#36. 유대감 집·부용정 안방 (오전)
발을 사이에 두고 앉아, 책 한 권을 들고 눈치를 봐가며 주변을 힐끔거리는 권인호.
조씨부인 무엇인지요?
인호 좋은 서책이 새로 나왔길래 좀 보시라 가져왔습니다.
안동댁이 인호에게 책을 받아 조씨 부인에게 건넨다.
조씨부인 어쩜, 자상도 하셔라…(짐짓 문득 발견한 듯) 그런데 무얼 그리 찾고 계시오?
인호 (망설이다가) 저… 실은 일전에 이 댁에서 어떤 처자를 보았는데….
조씨부인 왜요. 도련님께서 무슨 결례라도…?
인호 아, 아닙니다. (얼굴이 붉어져) 다만… 그 자태가 너무도 고와 대체 누군지 궁금증이 끓어올라서요….
조씨부인 누굴꼬… 워낙 저희 집에 집안 처녀들의 출입이 찾아서… (고민하는 듯) …질녀 말인가? 그나저나 도련님도 참 답답하시오.
인호 무슨 말씀이신지…
조씨부인 혹여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으면 말이라도 붙여볼 일이지. 이렇듯 제게 와서 묻다니요.
인호 (민망한 듯) 남녀가 유별하거늘….
조씨부인 벌, 나비가 꽃을 찾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거늘… 혈기왕성한 청춘남녀가 무슨 남녀유별을 논하고 그러시오.
S#37. 유대감 집·소옥 별채 뜰 (낮)
담장 옆에서 소옥이 괜히 들을 거닐며 낙엽을 줍네 어찌네 하고 있자니·
조씨부인(V.O) 하다못해 담 밑에 있는 걸 노려서 서신이라도 전해볼 요량도 없으세요?
그 순간 작은 돌멩이에 묶은 편지가 소옥의 등에 맞고 땅에 떨어진다. 잠시 놀랬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얼른 편지를 감추는 소옥.
S#38. 운종가·필방 앞 (오후) @@
Ins.
꽃과 나비 문양의 도장이 편지지에 찍힌다.
조원(off) 이 문양이 마음에 드는군. 이걸로 주시오.
만족스런 모습으로 필방(筆房)에서 나오는 조원. 맞은편 도자전(刀子廛)에서 나오던 윤중원과 마주친다.
윤중원 (내심 못마땅해 하며) 인사나 나눕시다. 구면인 것 같은데…
조원 (뜨끔하지만) 아, 그때는 황망 중이라 인사가 부실했소이다. 나는 강경 사는 조원이라 하오
윤종원 알고 있소, 나는 윤중원이라 하오. 본향은 강화이나 지금은 금위영 종사관으로 있소이다.
서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두 사람.
조원 알고 보니 가까운 사이더군요.
윤중원 가까운 사이라니… 무슨?
조원 저희 누님께서 좌의정 댁 마님을 친 동기간처럼 생각하시는데, 형수 되시는 분이 그 댁 조카 되시니 이 어찌 가까운 인연이 아닙니까?
윤중원 (바로 패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그게 그렇게 됩니까?
조원 그나저나 형수님께서 아직 좌의정 댁에 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윤중원 (싸늘하게 굳으며) 어찌 우리 형수님 행방을 궁금해하시오.
조원 차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여, 국화 차를 좀 드릴까 해서요….
윤중원 (딱 잘라) 지금 한양에 안 계시오.
조원 (놀라서) 안 계시다니요?
윤중원 돌아가신 형님의 기일이 다가오는 터라 불공드리러 가셨소.
조원 아… 곧 돌아오시겠군요.
윤중원 그리고! (조원 바라보던) 계신다 한들 댁 같은 사람을 만날 리 만무하지 않소
윤중원의 위협적인 말투에 잠시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 가는 조원. 뒷모습을 노려보는윤중원
S#39. (삭제) @@
엄숙하게 진행되는 예불. 숙부인과 시부모가 뒤에 서서 치성을 드리고 있다. 막 도착한 윤중원,그 뒤로 서서 예불에 참석한다.
S#40. 유대감 집·뒤뜰 담장 (새벽) @@
이른 새벽, 소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타나더니 담 위에 얹은 기왓장 하나를 들추어 편지를 꺼내고는 황급히 뛰어간다.
S#41. 유대감 집·소옥 별채 방 (새벽) @@
등잔불빛이 새어나기지 않게 치마로 방문을 가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편지를 일고 있는 소옥. 몇 번이고 편지를 내려놓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다시 읽는 소옥. 편지를 쥔 손이 덜덜 떨리는지 침착하려 애쓴다. 지필묵을 꺼내놓고 엎드린 채 답장을 쓰기 시작하는 소옥.
S#42. 유대감 집·뒤틀 담장 (아침)
닭이 길게 울어 제친다. 편지를 꺼낸 기왓장에 자신의 편지를 끼워 놓고 사라지는 소옥. 잠시 후 조씨 부인 나타나더니 편지를 읽는다. 소옥의 목소리"도련님의 세 번째 서찰을 읽다보니 정신이 아득하고 심신이 혼미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게다가 귀한 집 자제 분이 저를 보기 위해 월장의 위험마저 피치 않으신다 하니, 한편 기쁘면서도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하지만 소녀 역시 도련님 모습을 가까이서 뵐 수만 있다면 생명을 내어놓은들 무에가 아깝겠습니까? 내일 새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내일 해가 돋을 런지요"
편지를 도로 넣어 놓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조씨 부인.
S#43. 유대감 집·뒤뜰 담장 (새벽)
멀리서 사대문을 여는 파루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며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시간.바스락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담 장으로 접근하는 검은 그림자, 주위를 살피다 니 담 위로 뛰어오른다. 그때 담 장 너머에서 동시에 담 위로 올라오는 또 다른 그림자, 흠칫 마주보는 두 그림자, 조원과 인호다. 이내 입가에 웃음이 떠오르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는
조원 좌의정 댁 막내도령이시군요. 난 조원이라 합니다.
인호 아… 그럼 부호군나리…?
조원 (고개를 끄덕 하곤) 먼저 내려가시지요.
라며 손짓을 하는 조원. 인호는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른다. 먼저 사뿐하게 좌의정 집 뒤뜰로 내려서는 조원. 조원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 구렁이 담 넘듯 슬그머니 유대감 집 쪽으로 내려가는 인호.
S#44. 유대감 집· 소옥 별채 뜰 (새벽)
담 장의 그늘을 틈타 소옥 별채 근처에 당도하는 인호. 긴장으로 가빠진 숨을 죽이며 주위를 돌러보자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자신을 드러내는 소옥. 마침내 마주서자 벅찬 감정이 넘쳐흐르는 두 사람. 둘 다 어쩔 줄 몰라 반쯤 외면하며 굳은 채 서 있다. 초조해 하다가 갑자기 덥석, 소옥의 손목을 잡는 인호, 화들짝 놀라지만 손을 빼지 못하는 소옥. 하지만 그 뿐 손목을 잡고 잡힌 채 돌이 된 것처럼 어색한 포즈로 푸르스름한 미명 속에 가만히 서 있는 두 사람
S#45. 좌의정 집·숙부인 별채 방 (새벽)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는 조원. 인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라 일어나 앉는 숙부인.검은 물체가 방구석 쪽에 서 있는 걸보곤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베개 속에서 은장도를 빼 들며 떨리지만 단호하게
숙부인 게 누구냐. 귀신이면 사라지고 사람이면 썩 물러가거라.
조원 놀라지 마시오, 부인. 나 조원이오. (하며 어둠 속에서 나온다)
숙부인 (놀람과 안도가 겹치며)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옵니까. 해도 너무 하십니다.
조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서신이라도 허락하시면 위안을 삼아 보려 했으나 그조차도 안 된다 하시니 대체 이 몸은 어찌 해야 좋겠소?
숙부인 그건 저로서도 어쩔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조원 부인이 쉬고 있는 이 하룻밤이 내겐 천추의 고통이란 사실을 아시오? 감히 말하자면, 격정에 빠뜨린 이 사랑을 최고의 행복이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요.
숙부인이 외면한 채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연다.
숙부인 저 때문에 괴로우시다면 이 몸이 떠나지요.
조원 (목소리가 푹 잠겨있다) 왜 내게만 이러시는 게요.
숙부인 (달라진 조원의 목소리 톤에 움찔한다)
조원 부인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구원하려 하시면서 어찌 내 마음의 병은 보살피려 하시지 않는 것이오?
숙부인 이러지 마십시오. 나으리. 이승에서는 저와 인연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 남자의 지어미가 되었던 사람으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일부종사에 변함이 없사옵니다.
조원 귀신까지 내 앞을 가로 막고 있구려. 생면부지의 사람과 혼인도 올리기 전에 별하고 말았는데 대체 누굴 섬긴단 말이오?
숙부인 (힘없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조원 어찌하여 하늘은 당신을 이 세상에 내보내고 나를 먼저 만나게 해주지 않는 건지 또, 먼저 만나게 해주지 않았으면 왜 이제야 보게 하여 이런 고통에 빠뜨리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러워 이겨낼 수가 없소.
숙부인 (절절한 조원의 말에 뭉클하나) 어찌하여 절 이리도 우사 시키는 겁니까. 제 비록 향리에 역병이 돌아 피해 왔습니다만, 이러다 추문에 휩싸이느니 차라리 시가로 돌아가 역병에 걸려 죽겠소.
조원 내가 그리도 싫소? (멈칫하고) 역병보다 역병으로 죽는 것 보다 더 내가 싫단말이오?
숙부인을 바라보는 조원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간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숙부인.
조원 (슬픈 표정으로 일어서서 문 쪽을 향하며) 내 사내로 태어나 당년 스물 아홉에 처음으로사랑하는 이를 만났는데 그이로부터 역병보다 더하다는 말을 들으니 (긴 한숨) 삶에 아무 의미가 없구료
숙부인, 조원을 향해 뭔가 말을 건네려다 아무 말도 입밖에 내지 못한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도 그 모습을 짐작한다는 듯 한껏 득의에 찬 미소가 피어오르는 조원.
S#46. 유대감 집·소옥 별채 뜰 (새벽)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어색하게 서 있는 인호와 소옥.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로 파르르 떨고 있는 소옥. 소옥의 어깨에 다른 한 손을 얹고는 천천히 끌어당겨 안으려는 인호. 그때 인기척 소리가 나고 소스라치는 두 사람. 안채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이 새벽에 어딜 가신다는 게지?" "일출을 보신다지 않아" 어쩔 줄을 모르다가 소옥이 인호를 끌고 담장을 따라 뛰기 시작한다.
S#47. 유대감 집·부용정 쭉문 근처 (새벽)
뛰다 또 다른 인기척에 경악하며 쭉문 뒤로 몸을 숨기는 두 사람. 초롱을 든 정금이를 앞세우고 부용정을 나서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쭉문 쪽을 향해) 안동댁인가? 가마꾼들은 당도했는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얼어붙은 채 미동도 못하는 인호와 소옥. 점점 다가오는 조씨 부인, 소옥 쭉문 옆에 놓인 가마를 발견하고 인호를 끌고 간다. 가마 뒤에 웅크려 몸을 숨기는 두 사람. 정금이에게 받아 든 초롱을 휘 돌리며 주위를 살피는 조씨 부인 "헛것을 들었나" 중얼거리며 조씨 부인이 돌아가는 기척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소옥과 인호. 그 순간, 두 사람에게로 확 끼쳐오는 불빛. 조씨 부인이 가마 옆으로 와 등을 들어대고 있다.
조씨부인 아니! 이게 누구야!
소옥 혀, 형님! 아니 마님!
인호 (놀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혀, 형님?
조씨부인 대체 이게 무슨
소옥 그게 아니고, 저 (인호를 밀려내며 횡설수설) 잠이 안 와 뜰 안을 서성이는데 이 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안동댁이 가마꾼들을 이끌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조씨부인 썩 네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소옥 (얼이 빠져 후다닥 간다) 네, 네!
인호 (엉거주춤 일어서며) 부인, 저는
조씨부인 (어이없다는 얼굴로) 도령이 말씀한 처자가 바로
인호 (난처하다) 그, 그렇습니다만 저는
안동댁 (멀리서) 마님 기침하셨는지요?
조씨부인 (짐짓 허둥대며) 아랫것들이 보면 아니 될 더인데 (발견했다는 듯이 가마 문을 들추며)우선 이리로 숨으시오. 어서!
인호, 가마 안으로 몸을 구겨 넣는다. 조씨 부인, 가마를 등지고 서자 안동댁과 가마꾼들이 도착한다.
안동댁 (황송한 듯 인사하며) 아니, 벌써 예까지 나와 계시고
조씨부인 됐네
가마꾼1 (가마를 들 채비를 하며) 어서 오르시지요. 마님
조씨부인 (주머니에서 엽전 꾸러미를 건내며) 오늘은 짐이 좀 있어 무거울 것이네
가마꾼1 으미 웬 걸 이리도 많이 어서 오르십시오.
조씨 부인이 가마에 올라타자, 안동댁이 가마 문을 조금 들쳐 가마용 요강을 밀어 넣는다.
S#48. 가마 안 (새벽)
당황하는 인호에게 손가락을 입에 대, '쉿'하하는 시늉을 하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 인호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고 올라앉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가마꾼들을 향해) 숙정문으로 가세나!
가마, 들어 올려지고 출발한다.
-시간경과-
흔들리는 가마 안. 조씨 부인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조씨 부인의 체취에 달아오르는 인호의 얼굴, 돌아보지 않고도 알만하다는 듯 재밌어 하는 표정을 짓는 조씨 부인, 조용히 속삭인다.
조씨부인 숨소리라도 새나가면 우린 둘 다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겝니다.
인호, 고개를 끄덕인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인호.
S#49. 삼청동 숙정문 (동터올 쯤)
한양이 내려다보이는 삼청동 숙정문, 안개가 어스름한 산등성이에 도착한 가마꾼들이 가마를 내려놓는다.
가마꾼1 마님, 다 왔습니다. (기척이 없자) 마님? (하는데 가마 안에서 손이 나와 엽전 꾸러미를 던진다) 으미, 뭘 또 주십니까요?
조씨부인 (가마 속에서) 무거운데 수고했네. 밑에 주막에 가서 목이나 축이고 한 식경쯤 있다가 올라오게나
-가마 안-
가마꾼들이 산등성이를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진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꼼짝 못하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소리가 멀어지자, 이제 됐다는 듯이 몸을 틀어 인호를 보는 조씨 부인.
인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저, 전 정말 몰랐습니다.
조씨부인 (짐짓 날카롭게 보며) 혹시
인호 네?
조씨부인 그 아이를 건드리셨습니까?
인호 (펄쩍 뛰듯) 아, 아닙니다!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따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사실입니다.
조씨부인 (근심어린 얼굴로) 그나저나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령이 그토록 사모한다는 처자가 하필이면 저희 바깥주인의 소실이 될 몸이니
인호 (애원하듯)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알았다면 어찌
조씨부인 (다정하게 바라보며) 내 말은 인호 도령이 안 돼 보인다는 뜻이지요. (인호,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 보는데) 이팔청춘 혈기왕성한 한창 때에 깃든 첫사랑이 이룰 수 없는 처자와의 사랑이라니 (한숨처럼) 소옥이도 그렇지요. 한창 꿈 많을 나이에 연정 한 번 품고 어디 소실로 들어앉고 싶겠소. 내가 그 나이였을 때를 생각하니 심히 측은해서
인호 (감동한 얼굴로 부인…부인께서는 참으로… (조씨 부인이 무슨?하는 얼굴로 보자) 어찌도 그리 마음이 넓으신지요. 한낱 소실 따위에게 그토록 연민을 베푸시다니요.
조씨부인 여자라면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는 맘, 여자가 아니면 누가 알겠소? (고민하듯 한숨 내쉬고) 그러지 않아도 남달리 고운 소옥이를 평생 소실로 살게 내버려두고 것이 과연 옳은 걸까 생각하던 차였으니, (다정하게 인호 눈을 들여다보며) 젊은 사람들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상처받지 않게끔 한번 방책을 모색해 보십시다. 그려
인호 (감격에 겨워) 부인…!
조씨 부인, 짐짓 몸을 슬쩍 뒤척인다. 인호, 이미 붉어진 얼굴이 터질 듯하다.
인호 그, 그런데… 부인… 이제 그만 가마에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심히 고통스러워서
조씨부인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통스럽다니요?
인호 그게…그러니까…
조씨부인 (문득 느꼈다는 듯이 놀라) 아니, 이것이 언제 이렇게 켜졌답니까?
인호 (어쩔 줄 몰라) 소, 송구스럽니다. 그러니
조씨부인 밑에 깔려서도 이렇게나
인호 (미칠 것 같은 얼굴로 거의 울상이 되어) 부인… 저…
조씨부인 (가마 창을 들추어 밖을 내다보고) 가마꾼들이 돌아오려면 꽤나 기다려야하는데… 어쩌나…
인호, 당혹감에 신음을 토하며 정신이 흔미해지는 듯하다.
S#50. 유대감 집·뒷동산 숲 (낮)
바람에 유연하게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나무들. 그 가운데에 놓은 바위 탁자에 마주 앉아 있는조씨 부인과 소옥. 흐느끼고 있는 소옥을 먹이를 앞에 놓은 사자의 표정으로 느긋이 바라보는조씨 부인.
소옥 절 죽이신다고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조씨부인 (짐짓 한숨을 쉬며) 그런 일로 어찌 사람을 죽이겠나
소옥 (뜻밖의 반응에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든다)
조씨부인 (대숲을 둘러보며) 내가 하는 얘기를 자네만 알고 있게나
소옥 그 와중에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조씨부인 (상념에 젖듯) 나 또한 혼례를 치루기 전에 연모하던 사람이 있었다네. 풋사랑이었자만 첫사랑이었고 차마 내색도 못했지. 아니 절대 해서는 아니 될 사람이었지. 결국 원치 않는 혼례를 하게 되었고 그냥 연분이 아닌가보다 치부해 버렸지만, 지금 와서 후회스럽기 그지없다네.
소옥 아….
조씨부인 (미소를 지으며) 이러니 어찌 내가 자네를 이해 못하겠는가?
소옥 (진정으로 감동하며) 마님…
조씨부인 어린 나이에 시집와 규방에만 갇혀 있을 자네가 못내 애처로웠다네, 그러니 귄도령과 가끔씩 서신 정도 주고받는 건 눈감아주겠네.
소옥 (믿지 못하겠는지) 그, 그게… 진정이십니까?
조씨부인 (은밀히) 우리 여자끼리만 알고 있잔 말일세
소옥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씨부인 그리고 내일부터는 부용정 건넌방에 유하도록 하게, 괜히 남들 눈에 띄게 하지 말고
소옥 (함박 웃으며) 그래도 되겠습니까!
조씨부인 그나저나 자네가 현장에서 도령에게 다 뒤집어 씌워 버렸으니… 권도령도 자넬 어지간히 원망하고 있을 텐데…
금새 어두워지는 소옥의 표정을 즐기듯 보는 조씨 부인.
S#51. 유대감 집·조원 별채 방 (아침)
시동이 들고 온 양치물을 받아 한 모음 입에 물고 점잖게 가글거리며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조원. 갑자기 바깥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리더니 자근노미가 방문을 열고 구르듯 들어온다.
자근노미 서방님! 크, 큰일났소!
조원 (양칫물을 입에 문 채 눈짓으로 나무라고) 쓰…!
자근노미 숙부인 마님께서 새벽같이 짐을 싸서 어디론가 떠났답니다!
조원 (양칫물을 타구에 퉤 뱉고) 저런…! 어쩐다! (좌의정 집 쪽을 노려보듯 잠시 생각하다가 휙 돌아본다) 내 서신을 써줄 터이니 당장 쫓아가서 부인에게 전하거라!
S#52. 도성 앞 (아침)
급히 나귀를 타고 도심을 빠져나가는 자근노미. 화면 위로 흐르는 조원의 목소리
"너무도 잔인하십니다. 내 마음을 그리 내비쳤는데도 정녕 가셔야만 했소이까? 부인. 이렇게 말씀하셔도 부인을 사모하는 내 맘은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S#53. 유대감 집· 부용정 침실 (아침)
Ins
연꽃잎에 고인 이슬을 조심스레 작은 화장수용 유리 종지에 털어 넣은 손
웬지 기분이 좋은 조씨 부인. 정금이가 주칠을 한 향합(香盒)을 열고 내밀자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조씨부인 오늘은 날씨가 쾌청하니… 장미향으로 해볼까?
장금이가 작은 종지에 동백기름을 따라 내더니 향유를 뒤섞은 후 솜에 묻혀 조씨 부인의 머리 아해에서 위로 정성껏 문지른다. 그리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올린다. 그 사이에 안동댁이 조씨 부인에게 일일이 물어 의상을 꺼내놓는다.
바깔소리 소옥 모친 들었습니다.
-시간경과-
소옥이며, 색동 꾸러미를 옆에 놓고 조씨 부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다.
소옥어미 저희 아이가 요즘 행색이 점점 귀티가 나는 듯 합니다. 모두 다 마님의 지엄하신 가르침 덕분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조씨부인 내 한 게 무어 있다고… 다 소옥이 제 본성이 좋아서겠지.
소옥어미 (뿌듯) 네… 저도 가르친다고는 가르쳤는데… 그리고…(꾸러미를 앞으로 밀며)이것은 묘향산 담비 스무 마리 겨드랑이 털로만 만든 겨울용 토시옵구요. (다른 보자기 속 상자를 열면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 몇 타래가 수묵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것은 어렵게 구한 것이옵니다. 산골 처녀들 머리카락만 모은 것이온데, 자주 감질 않아 기름이 잘잘 흐르는 것이 최상질이옵죠.
조씨부인 (싫지만 않은 표정으로) 나라에서 곧 가체를 금할 걸로 알고 있는데 사대부 부인이 이런 걸 탐해서 되겠나….
소옥어미 어차피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옵니까, 지나고 계시다 금지령이 풀리면 해올려 보시지요. 제 성의 표시 오니 받아주시면 흉감하겠사옵니다.
S#54. 유대감 집·후원 정자 (낮)
조원, 눈을 감고 상태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기마 자세를 취하고 한 손으로 고환을 받쳐 들고한 손으로는 하복부에 원을 그리며 수차례 문지른다. 옆에서 자근노미가 조원을 따라하며 그간의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대화 중간부터 다음의 화면들이 흐른다.
자근노미에게 편지를 돌려주는 은실, 모략하는 소옥 어미의 흥분된 표정. 어두운 표정의 숙부인. 뜰을 산책하고 책을 읽으며 평온을 되찾는 숙부인…
자근노미 부인께선 서신을 읽긴커녕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누구도 만나지 않으시고 가끔 산보만 하시며 수를 놓거나 사임당 전기 등을 읽고 계시답니다. 그런데 새로이 알아낸 사실은요. 일전에 좌의정 댁에 숙부인을 급히 만나러 와서는 서방님에 대해 악담을 퍼 부으며 절대 믿지 못할 난봉꾼이니 조심하라 이르고 간 자가 있었다는데….
조원 (들이쉰 숨을 풋, 내뱉으며) 무어야? 대체 그게 누구란 말이냐
자근노미 소옥 아씨 어미 되는 사람이랍니다.
조원 대체… 그 여자가 왜?
자근노미 그건 저도 모르죠. 그리고 은실이 말로는 숙부인께선 사람들 아이에 추문이 도는 것을 심히 두려워하시는 눈치였답니다.
S#55. 유대감 집·부용정 입구 (낮)
조원, 화가 치밀어 내당으로 들어가는데 때 마침 나오던 소옥어미와 맞닥뜨린다. 일순 당황하는 소옥어미, 이내 장옷을 쓰며 놀란 기색을 감추며 지나치려 하는데.
조원 (소옥어미인 줄은 모르고 혹시나 하며) 여보시오… 초면이 아닌 듯한데…
소옥어미 (얼굴을 더욱 감추며) 글쎄요….
조원 낯이 익는데… 나를 모르겠는가….
소옥어미 그럴 리가요… 사, 사람을 잘못 보신 듯…
조원 맞는데 뭘 (앞을 막으며) 어허, 참으로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모른척하다니…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며) 이거 섭섭하구만, 그땐 정말 미안하게 됐소이다.
소옥어미 (못 알아듣는 척)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 전 이만…
뒤를 흘끔거리며 서둘러 총총히 사라지는 소옥 어미. 의아해 하는 조원
S#56. 유대감 집·부용정 안방 (낮)
조씨 부인, 소옥어미에게 받은 머리카락을 이리 저리 살펴보다 조원이 들어오자, 한쪽으로 밀어 놓는다.
조원 (들어서며) 조금 전에 다녀간 여자가 누구이옵니까?
조씨부인 왜요? (비웃듯) 이젠 저런 여자를 보고도 동하는 게요? 소옥이 어미 되는 자리 아니요…
조원 아! (그러다 금색 서슬이 퍼래지며) 아니 그럼 저것이?
조씨부인 그 여자가 뭘…
조원 아니외다. (간신히 분을 삭이며) 누이가 벌여놓은 판은 잘 돌아가는 중이오?
조씨부인 (따분하다는 얼굴로) 어린 탓인지, 멍청한 건지… 멍석을 깔아줘도 수수방관들만 하고 있으니, 아예 신방을 차려주어야 일을 벌어려나 보오.
조원 (속셈을 감추며) 내게 맡겨주시죠. 비록 내 취향은 아니나, 새참 들 때가 된 듯하니…
조씨부인 (약 올리듯) 그 청승이 강화로 달아나서가 아니고요? (고소해 하며) 떠나간 여자는 잡지 않는 법인데… 아니되셨군.
조원 천만에 마음의 동요가 없다면 떠났겠소? 아마 가눌 수 없는 갈등에 못 견디어 갔을 테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게지요… (일어서며) 상 줄 준비나 단단히 해 두시구려
S#57. 유대감 집·뒷동산 숲 (오후)
숲의 너럭바위에 엎드려 수심에 감겨있는 소옥. 어깨에 닿는 손길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조원이 서 있다.
조원 (흠칫 놀라는 소옥에게 부드럽게) 지나다 보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듯 하여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소옥 (경계의 빛을 풀지 않고) 형님의…
조원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은 혼인 전이니 그냥 편히 부르겠네, 누이가 자네 칭찬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그런데 어찌하여 예서 이러고 있는가?
소옥 아무 일도 아닙니다.
조원 내가 한번 맞춰볼까?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손 좀 줘 보게
소옥이 의아해 바라보던 조원,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줘 보라니까" 하며 소옥의 손바닥에 언문으로 권인호의 권(權)을 쓴다. 일순 간지러워하는 소옥.
소옥 (깜짝 놀라며) 아니, 그걸 어떻게?
조원 누이에게 들었네, 나보고 도움을 주라 하더군
소옥 (안심하는 듯) 형님께서 아
조원 나도 자네의 편일세. 부모의 뜻대로 맘에도 없는 곳에 소실로 보내지는 악습은 사라져야지. 권도령이 다소 오해가 있을 듯하니 내가 서찰 쓰는 것을 도와주겠네
소옥 (눈빛을 반짝이며) 그게 정말이십니까?
조원 물론이지. 그러니 오늘밤에 살짝 내 방으로 오게나 (작은 소리로)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신발은 들고 들어와야 하네 꼬옥
S#58. 유대감 집·조원 별채 방 (밤)
스르르 문이 열리더니 손에 신발을 든 소옥이 살금살금 들어온다. 보료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던 조원이 일어나 앉으면 미소를 짓는다.
조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겠지?
소옥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요.
조원 (지필묵을 늘어놓으며) 그럼 어디 써볼까?
소옥 제 나름대로 써 본 것이 있는데 보시겠어요?
조원, 편지를 건네 받아 대충 한번 훑어보더니,
조원 흠. 이건 안 되겠구만. 뭐랄까 너무 저자세야.
소옥 어쨌든 제 잘못인걸요?
조원 여자는 설사 잘못했어도 저자세를 취하면 안 되는 거지. 남자들도 원치 않아.
소옥 그럼 어떻게
조원 내가 불러줄 터이니 받아 적게. 필체는 자네 필체여야 않겠나.
소옥 근데 그게 저.
조원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소옥 (부끄러워하며) 제가 어릴 때부터 버릇이 잘못 들어 (망설이며) 엎드려야 글이 써져서.
조원 (이렇게 잘 풀릴 수가) 그거야, 뭐. 난 아무 상관없으니 자네 좋은 자세를 취하게.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별 경계심 없이 엎드려 붓을 집는 소옥.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조원을 올려다본다.
조원 (해맑은 소옥의 모습에 약간 갈등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하고) 자! 우선 자네 사정을 조금은 과장하되, 담담히 써 보자구. 자네는 정말 싫었는데 부모가 강권한 것으로 그 또래 사내들은 부모에 대한 반감이 심한 법이니까 자연스레 자네 편이 되는 거지.
슬그머니 나란히 앉는 조원의 손이 자연스럽게 소옥의 댕기머리를 매만진다. 소옥은 약간 이상하지만 '뭐 머리카락인데'하며 만다. 조원이 편지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조원 자, 이 다음부터 써 보자구. (시를 읊듯) 그러던 차에 소녀는 처음으로 도련님의 모습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아니 되는 줄 알면서도 비가 내려서 호수에 담기듯이 그렇게 차버린 것입니다.
소옥 와. (감탄 눈을 반짝이며) 이 부분이 참 좋아요. 비가 내려서 호수에 담기다.
조원 (흐믓) 그래?
그러면서 조원의 손이 소옥의 치마를 살짝 걷어올린다. 하얀 비단으로 만든 속바지가 나온다.약간 기분이 이상해지고 어색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소옥.
조원 어서 써.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톤을 다시 바꿔) 물론 담겼더라도 버려야만 했지만 소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소옥 (조원의 손이 점점 대담해지자) 어후 저기.
조원 (아랑곳 않고) 물론 자네가 그 친구에게 다 덮어 씌웠지만 되려 뻔뻔하게 나가는 거지.
그 순간 조원이 소옥의 속바지를 확 끌어내린다. 놀라 일어나려는 소옥을 손으로 누르는 조원.소옥, 경악하며 강력하게 저항하나, 조원의 기세에 눌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편지.
조원 얼른 쓰게. (다시 말투를 바꿔) 그 일로 하여 다시는 도련님을 못 뵙게 되어도 전 원망치 아니하겠습니다. 제 마음 속 도련님은 언제나 처음 모습 그대로 일 테니까요.
소옥 (버둥거리며) 왜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소릴 지르겠습니다.
조원 (소옥의 고개를 돌려 윗목에 놓인 신발을 보여주며) 저것 봐라. 저걸 보고 누가 날 나무라겠느냐. 소리치든 말든 네 맘대로 하거라.
그러면서 조원이 발로 소옥의 발을 매만진다. 소옥이 어쩔 수 없는 듯 눈을 감으며 신음을 토한다..
-시간경과-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 눈을 뜬 조원. 문득 옆을 보면 소옥이 쌔근쌔근 이쁘게도 자고 있다.
S#59. 유대감 집·부용정 안방 (오전)
병법서를 읽고 있는 조씨 부인과 그 앞에 앉아 열녀전을 펴놓고 반쯤 넋이 나간 채 허공을 보고 있는 소옥. 간밤의 일을 다 안다는 듯 묘한 미소를 띄며 소옥의 표정을 살피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자네…
소옥 (화들짝 놀라며) 네?
조씨부인 (모르는 척) 아침부터 표정이 왜 그런가?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겐가?
소옥 아, 아닙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조씨 부인의 시선을 슬슬 피하는 소옥
조씨부인 (섭섭한 듯 표정을 꾸미며) 이보게, 자네와 나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에 있는가?
소옥 (어쩔 줄 몰라 한다) 그게 아니라…
조씨부인 분명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얼굴인데… 권도령 때문인가?
소옥 아닙니다. (뻔히 거짓말하는 게 보이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잖습니까
조씨부인 그럼 그런가 보지 (새삼스레) 근데, 자네 낮은 자세가 영 불편해 보이는군.(소옥 깜짝 놀란다) 아, 내 동생이 어제 자넬 좀 봤으면 하던데… 만났나?
소옥 (결정타를 먹은 듯 소스라치며) 네에? 아, 아니요…(횡설수설) 아니, 만나긴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조씨 부인, 막다른 골목에 쥐를 몰아넣고 고양이의 표정으로 싸늘하게 소옥을 응시한다.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얼어붙어 그대로 혼절해 버릴 것만 같은 얼굴이 되는 소옥
조씨부인 (싸늘하게) 조원이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마침내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소옥. 조씨 부인의 얼굴엔 얼핏 미소가 스친다.
소옥 (울음 반 말 반) 편지 쓰는 걸 도와주시겠다며, 별채로 오라시더니…
조씨부인 오라더니…
소옥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이다) 그러시더니… 그러시더니… 막…
조씨부인 저런, 편지 쓰는 것만 도와준 게 아니로구먼
소옥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전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조씨부인 맙소사… (무너지는 듯한 표정과 함께 털썩 등을 기대더니 짐짓 안타까운 듯)…힘껏 저항하지 그랬는가?
소옥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와중에… 게다가 제 발로 그 방에 간 터라…
조씨부인 호오 이런 변이 있나… 마음은 권인호에게 있고, 몸은 조원에게 가 있으면서… 시집은 유대감에게 온다….
소옥 (울상을 지며) 마님… 으아앙…!
소옥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조씨 부인. 흐뭇한 표정을 감추며
조씨부인 (소릴 낮추며) 어허, 밖에서 다 듣겠구먼, 그러다…
소옥 (울음을 억누르며) 전… 이제 쫓겨나는 거겠지요?
조씨부인 (멀쩡한 표정으로) 쫓겨나다니? 왜?
소옥 (어리둥절 보는 얼굴이 천진하기까지 하다)
조씨부인 누가 뭘 알아야 자넬 쫓아낼 것 아닌가. 나밖에 모르는데
소옥 (의아하게 보다가 말뜻을 알아차리고 감동한 듯) 아… 마님…!
조씨부인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었냐는 듯) 어차피 소실 신세가 피할 수 없는 일, 마음 통할 사람도 단 데 하나 두었는데, 정을 통할 사람 하나 더 둔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소옥 정말 괜찮은 건가요?
조씨부인 (진짜 답답해서 화낼 뻔) 하, 답답한 사람이군,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뭐라 탓하겠나?
소옥, 새로운 이치를 깨닫게 해준 것에 정말로 감동한 듯 조씨 부인의 품에 안긴다. 등을 토다여 주는 조씨 부인.
소옥 (감사의 표시로 조씨 부인의 손을 자기 뺨에 갖다 대며) 마님을 못 만났다면 전 정말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까 싶습니다.
조씨부인 ('이것 봐라'하는 표정에 이어 작은 소리로) 속인들은 모르지만 사대부가 부인네들 가운데 정인 하나 안 둔 사람이 있는 줄 아냐? (말하다 보니 '너무 간 건가'하는 표정)
소옥 네? (놀라 제 자리로 돌아가 멍하니 보며) 정말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럼, 책에서 배우는 여자의 도리는 다 뭐죠?
조씨부인 책은 책일 뿐, 현실과는 다른 거라네, 마음에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모두들 하고 있고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는 것이 있지
소옥 (오늘 많이 배운다) 어쩜!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혹시 그럼 마님도 있으세요?
조씨부인 (돌연 엄한 표정으로) 어히 무슨 소리를!
금방 얼어붙는 소옥. 그러니 이내 다시 온화해지는 조씨 부인.
조씨부인 그리고 형님이라 부르래두
소옥 (울먹이며) 형님의 이 크신 사랑 어떻게 갚을는지요?
S#60. 유대감 집·조원 별채 방 (오전)
뿌듯한 표정으로 소옥과 치루었던 일을 화폭에 옮기는 조원. 벌써 몇 장 째 다양한 자세의 그림이그려진다. 옆에서 구경하면서 연신 감탄하는 자근노미
자근노미 참 대단하십니다. 그려
조원 쉬운 것이나 어려운 것이나 사내가 한번 목포를 세웠으면 똑같이 신중하게 다루어야 성공을 얻는 법이니라. 흐음 (숙부인 생각에) 열녀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구나 (힐끗 자근노미를 원망스럽게 보고) 거 은실이를 꾀어 얻어낸 소식은 없더냐
자근노미 (시큰둥하게) 잘 아시잖소. 여자와 잠자리를 한다는 건 여자가 좋아하는 걸 하게끔 하는 것이지, 남자가 바라는 걸 여자에게 시키는 게 아니라는 걸
조원 (놀란 듯 보며) 오호 (설레설레) 하인들의 상식은 때때로 상전을 놀라게 하는지고
자근노미가 씨익- 웃고 나가자 벌렁 누워 천장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