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 3. 13.
平北 龍川郡 府羅面 元城洞 출생
父母 함형택,김형도 (석혜, 석헌, 석란, 석창, 석보)
1906.
사립 기독교 德一小學校 입학
1910. 8.
10세때 한일합방
1914.
사립 기독교 德一小學校 졸업 양시 공립 보통학교 3학년 편입
1916.
양시 공립 보통학교 졸업
1916. 4.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1917.10.
황득순과 결혼
1919. 3.1.
3년 재학중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일가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운동 참가 후 2년간 학업 중단
1921.4.
다시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로 올라가다
1921.
함석규 목사 권유로 오산학교 3학년으로 편입. 조형균 장로 주선으로
유영모선생을 만남 (9월)
1923.
오산학교 졸업 (상급학교 지원할 자격이 없음)
동경유학 (상급학교 지원 자격 시험 준비) 19-p148
관동대지진을 경험
1924. 4.
東京高等師範學校 文科一部에 입학 (파우스트 읽음 -
요한복음을고쳐 읽음)
1925.
내촌감삼(內村鑑三) 문하생 6명 '조선성서연구회' 결성
1927. 7.
성서조선 창간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1928. 3.
東京高等師範學校 졸업
1928. 4.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歷史와 修身을 가르치신다
1928. 9.
오산학생들의 ML당 사건으로 정주경찰서에 1주일간 구금
1938. 3.
오산학교 사임후 2년간 오산에서 과수원 경영
1940. 3.
평양 松山農事學院 인수 (김 혁선생으로부터)
1940. 8.
계우회 사건으로 김 혁선생이 동경에서 체포, 이 일로인해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구치되다
1941. 7.
아버지 함형택 별세 (김교신, 송두용 두분이 대신 상주가 되다)
1942. 5.
聖書朝鮮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
1945. 8.15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해방을 맞이하다
1945. 9-11.
평북자치위원회 문교부장
1945. 11.23.
신의주 학생사건-소련군 사령부에 체포 50일간 구금
1946. 1.
소련군으로부터 석방
1946. 12.24.
다시 피검되어 1개월간 옥고 치르다
1947. 2. 26.
박승방씨와 주위의 강권으로 월남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
1947. 3.17.
서울에도착 오류동 노연태씨 댁에서 우거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 시작
1947. 4.
유영모 선생님과 함께 광주등지로 한달 여행하시다.
1947. 11.
유영모 선생님의 주일모임에서 북한산 등정(하루 일식하는 결단을 하시다)
1950. 1.
최태사의 부인 윤유정 장례식에서
1950. 6.25.
6.25 발발 28일 피난차 남하 대구에서 수영(부산)으로 성서집회는 부산에서 계속하심
1953.
서울로 귀환 최태사 선생과 친지들 도움으로 생계 유지
1954. 7.
대학생 하기 수양강좌
1955. 3.
중앙신학교에서 강연
1955.12
2만날 맞이하며 김용준선생외 10여명 모임(원효로 자택)
1956.
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 친지들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
1956.
씨알농장 시작( 천안시 봉명동 1만평 농장을 정만수장로가 기증) 홍명순 김종태;
씨알의 소리 114호
1957.
장기려 선생과 부산모임이 시작
1958. 8.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글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20일간 구금
1961.
안반덕과 관계(시작-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선유리. 김종태 윤형노 권술용
송용등 문대골 김복관 이금용 박세정 김종성 박상균 김영록 송상호)
1962. 2. 9.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여행. 10개월간 퀘이커학교에서 공부
세계일주여행- 영국 화란 독일
2.
동경( 2일) 호놀룰루( 7일)
2.23.
미국도착, 어네스트 학킹(87세)을 만나다
4. 5.
미국, 펜실베이니아
7.30.
미국, 뉴욕
8.30.
미국, 워싱턴
1962. 9.12. -
1963. 1. 5.
미국, 펜들힐
1963. 1. 6.
영국 런던에 도착
1.18.
영국, 우드브록 ( 1.18.-2.7.)
1963. 6.23.
서독에서 안병무 선생과 함께 계시다 여행 중단 귀국
(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
1964. 4.
권오기와의 대담 (신동아-권력도 문화도 분산되어야)
1964. 9. 6.
지명관과 대담 (조선일보-이 나라의 오늘을 말한다)
1967.
장준하선생 옥중 출마 지원
1967. 8.13.
미국 방문 L.A. 퀘이커 연회에 참석
1970. 1.28.
"종교경전의 재음미, 문명의 비평, 역사적 반성, 시사논평,수상 등을 통하여 건전한 상식을 길러 민주주의 발전과 씨알의 깨우침에 이바지하자"는 목적으로 문화공보부에 정기간행물(월간) 등록을 신청하여 교부받다.(등록번호 라-1257)
1970. 4.19
'씨알의 소리' 창간호 발간
1970. 5.29.
'씨알의 소리' 인가취소로 법정투쟁(이병린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1970. 8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하시다.
1970. 11.13.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
1971. 5. 4.
고등법원 재판장 안병수, 윤영일, 김석수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씨알의소리" 폐간처분은 "재량권의 범위를 넘은 처사"이며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판시, 본지 승소판결를 내리다.
1971. 6.
최인훈과 대담 (월간중앙-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
1971. 7. 6.
대법원 재판장 김치걸, 사광욱, 홍남표, 김영제, 양병호 판사에 의하여 문공부의 상고를 기각, "씨알의소리 등록을 취소한 처분은 위법부당하다고 한 원판결의 결과에는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판시, 본지의 승소판결을 확정하다.
1971. 7
老子 莊子 강의 시작( 88. 5. 까지 계속)
1971. 8.
김재준선생과 같이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구성
1971. 10.1
마하트마 간디 탄생 102주년 기념강연회를 인도영사관과 공동주최하다(한국일보 12층 강당).
1971. 11.13
전태일 1주기 추도회(경동교회) 씨알의 소리사 주최로 75년까지 계속
1971. 12. 2.
고희 기념강연회 YWCA. 대성빌딩
1971. 12.
부산 모임(장기려 선생)에 매월 2째 일요일 참석 ( 88. 5.까지)
1972. 1. 28.~30
제 1차 씨알의소리 독자수련회를 안양농민교육원에서 개최하다.(주제 "세계평화의 길")
1972. 4. 19.
씨알의소리 창간 2주년 기념 강연회를 대성빌딩(당시 명동소재)에서 개최하다. (함선생님은 여기서 "같이 살기 운동을 제창하다"는 강연을 하심)
1972. 10. 17.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국회해산, 헌법일부 효력정지, 비상국무호의, 헌법개정, 1개월내로 국민투표 실시 공고)
1972. 11. 21.
오후 7시 기관원 2명에 의해 함선생님 연행되다.
1972. 11. 13.
오후 7시 함선생님 장준하선생님 귀가.
1973. 5.21.
YMCA 시민서당 김동길과 공개 대담
1973. 11. 13.
고 전태일 제 3주기 추도예배(젠센기념관) 개최하다. (함선생님 설교 "민족의 씨를 키우는 사람")
1973. 11.16.
삭발(시국선언?)
1973. 11.20.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의 Elizabeth Pond 와 대담
1973. 11.25.
일요성서강좌 시작
1974. 1. 8.
오후 5시 대통령 긴급조치 선포(유신헌법부정, 개정요구, 비판 및 반체제활동 엄단, 위반자 15년 이하 징역발표)
1974. 1. 21.
기관원에 의해 연행당하다
1974. 1. 22.
새벽 2시경 함선생님 귀가
1974. 4. 20
씨알의소리 창간 4주년 기념강연회 개최(연사 법 정스님 이태영, 김동길 박사 함석헌 선생) *김동길 박사는 이 강연후 기관원에 의해 연행, 민청학련사건 혐의로 1심에서 징역15년 자격정지 15년 받다.
1974. 9. 23.
중앙정보부에 연행, 3일만에 귀가.
1974. 11.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동참
1975. 1
동아일보 광고 탄압사태 발생.
1975.
그 동아일보를 후원하기 위해 본지 독자들이 본사후원을 얻어 "자유, 정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는 동아를 돕고자 여기 작은 씨알들의 뜻을 모으다" 또는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하는 함선생님 제자의 패난트 팔기 시작하다.
1975. 1. 16.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 됐다 귀가.
1975. 3. 1.
김동길, 김찬국 교수 석방기도회 참석차 출발한 함선생님 자택 노상에서 경찰에 의해 2시간 연금당하다.(이후에 수시로 자택 도청 또는 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가는 등 연금 계속.)
1975. 3. 15.
74회 탄신축하모임을 젠센기념관(당시 서대문소재)에서 갖다(안병무 박사 "함선생님의 역사관"발표)
1975. 4. 19.
창간 5주년 기념강연회(젠센 기념관, 연사 김대중, 백낙청, 함석헌 선생, 김대중 선생 납치 이후 최초 강연, 청중 3천여명 참석)
1975. 8. 17.
장준하 선생 의문의 실족사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에서)
1975. 10. 3.
장준하 선생 의문의 실족사 현장인 약사봉 답사
1975. 11. 15.
전태일 5주기 추모예배 주최하다. (향린교회, 함석헌 선생, 문익환목사 말씀
1976. 3. 1.
3. 1명동사건 발생(신구교 합동미사후 구국선언문 발표 함선생님 가담)
1976. 3. 2.
오후 2시 정보부에 함선생님 연행, 3일만에 일단 귀가
1976. 3. 3
오전 10:30 - 12시 씨알의소리 사무실 및 가택 수색당하다.
1976. 3. 26
3. 1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다.
1976. 8. 21.
장준하 선생 1주기 추모 예배를 드리고자 기독교회관 강당을 계약했으나 당국의 저지로 못드리다
1976. 8. 28.
1심에서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 선생과 같이 8년징역, 자격정지 8년을 받다
1976. 11. 2.
전태일 6주기 추모예배 금지통보 받다.(정보부담당관)
1977 3.22.
3.1 민주구국 선언 사건 -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과 함께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받다.
(80년 복권)
1977. 8.17.
장준하 선생 추도사-명동성당에서
1978. 1.29.
선우휘와 대담 (조선일보-남 따라가면 뒤진다 )
1978. 1. 30
간디 서거 30주기 추모강연 개최(기독교회관, 연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김동길 박사)
1978. 2. 24.
3. 1절 구국선언문 발표(기독교회관 기도회에서)
1978. 3. 18.
77회 생신축하모임을 위해 흥사단강당(동숭동소재)을 계약했으나 이유없이 해약통고로, 흥사단 뒤뜰에서 축하모임을 갖다.
1978. 5. 8
부인 황득순(77세) 별세
1978. 7. 5.
함선생님 자택연금 3일만에 해제되다
1978. 8. 17.
장준하 선생 3주기추도예배(YWCA강당)
1978. 11. 16.
대구강연 약속으로 출발했으나 새벽6시 경찰. 기관원 7,8명 폭력으로 저지당하다.
1979. 2. 26.
미국궤이커봉사회에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사실이
중앙일보에 1단기사로 보도되다
1979. 3. 1.
새벽 5시로부터 자택연금, 10여일간 계속 하다.
1979. 3. 4.
윤보선선생 댁에서 김대중 씨와 함께 기자회견, 3. 1절 성명 발표.
1979. 3. 5.
검찰에 소환되어 윤보선씨 대 기자회견 내용 및 성명사건, 또는 작년도 3. 1절 성명 등 조사 받다
1979 . 3. 5.
미국 퀘이커봉사회 바바라 바우만여사가 내한, 함선생님 노벨평화상 추천서 전달하다
1979. 3. 22.
목요기도회 참석을 저지하고자 형사 및 기관원 12명 자택 앞길을 막다. 오후 4:30부터 함선생님 기관원들과 대치, 박선균 편집장, 박영자, 최응일 군등 합세하여 150m까지 밀고 나갔으나 좌절, 7시까지 2시간반동안 비맞으며 싸우다.
1979. 3. 26.
대구 통일당대회 강연차 새벽 4:30분 형사들의 눈을 피해 출발하다.
1979. 3. 27.
귀가 즉시 자택연금 무기한, 4월 22일까지 계속하다. (함선생님 모임 장자, 노자 부산모임 등은 형사 동행하여 허락하다)
1979. 6. 1.
금요기도회 참석저지로 자택 앞 500m까지 기관원들과 싸우며 나가시다 손에 가벼운 부상을 입다.
1979. 6. 2.
김대중씨댁 방문 차 가시다가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두루마기 모두 찢어지다.
1979. 6. 18
윤형중 신부 장례식 참석 저지당하다.
1979. 7. 19
목요기도회 참석 저지당하다(형사 4명)
1979. 8. 11.
퀘이커 세계대회 참석차 출국(스위스행
1979. 8. 20.
스위스에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1신 씨알의 소리로
보내오다.
1979. 9.
카나다에서 국제전화하시다.
1979.
우찌무라 선생의 일화(대니-He isa great man!)가 있었던 정신박약아 학교(펜실베니아주 래딩)를 찾아가다
1979. 10. 19.
미국 피츠버그에서 전화
1979. 10.26.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부스에서 박정희 저격사건을 듣다.
1979. 11. 7.
모든 일정취소하고 귀국하신다는 편지받다
1979. 11.15
여행 일정을 중지하고 귀국
1979. 11.24.
YMCA강당에서 통대대통령선출저지 국민대회에 참석 후 중부서에 연행, 익일 새벽 2시 귀가하셨으나 계엄사에 다시 연행되다.
1979. 11. 26
박종태, 김병걸 씨 등 YMCA 불법집회사건으로 90여명 연행조사 발표(계엄사)
1979. 12. 10.
연행 15일만에 귀가
1979. 12. 27.
계엄사 검찰부 소환 심문받다.
1979. 12.
Margaret Bacon 과 대담
1980. 2. 25.
보통군법회의에서 1년선고받고 형 확인 과정에서 형면제 처분받다. 문공부와 계엄사 검열과정에서 15일 걸리다..
1980. 2. 28.
함선생님 등 687명 복권조치 발표
1980. 3.14.
안병무와 대담 (씨알의 소리 4월호-'씨알의 소리'는
왜 내고 있는가)
1980. 4.16.
작가 최일남과 대담 (동아일보- 민주화 물결 누구도
거스르지 못해)
1980. 4.18
씨알의소리 10주년 기념강연회 서울 대구 전주 부산 광주
1980. 5. 16.
창간 10주년기념 제주강연(연사: 함선생님, 서남동 교수, 장소:제주학생회관)을 마치고 제주 숙소에서 5. 17 확대 계엄령을 맞다. 여기서 서남동 교수 5. 17자정,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다.
1980. 5.17
제주 강연후 중단
1980. 7.30
'씨알의 소리' 계엄 당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폐간 당하다
1981.
오산학교 동창회장으로 추대 (81-89)
1981.3.
80회생신 기념 강연회 서울 YWCA 강당에서
1981. 8. 3.
퀘이커 모임 (여름수양회 - 원주에서- 요한복음풀이 )
1982. 1. 8.
김광협과 대담 (동아일보-言路 열려야 시민정신 깬다)
1982. 7.25-
28
부산 성공회 수녀원 수양회
1982.
미국 방문, 카나다 방문
1982.
우찌무라 선생의 일화(대니-He isa great man!)가 있었던 정신박약아 학교(펜실베니아주 래딩)를 다시 찾아가다
1983. 5.
한용상과 대담 ('마당'-퀘이커와 평화사상)
1983. 10.
최일남과 대담 (신동아 -백성의 기개를 길러줘야 해)
1983. 8.20.
작가 최일남과 대담(신동아 83.10월호, 백성의 기개를
길러줘야 해)
1983. 8.25.
일본 관동 대지진 60주년 -한국 기독교단체 강연회
1984. 6.15
"대담의 모임" 함석헌,김재준,이병린,강기철
1984. 11.
남강문화재단 설립 (오산학교)
1985.
미국 방문 퀘이커 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 참석.
카나다 방문(10월)
1985. 10.27
미국LA에서 강연
1985.
쌍문동 자택 화재
1987. 6.29
서울대학병원 입원
1987. 7.13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췌장, 담낭, 십이지장 종양부위 절제수술 4시간 받으시다.)
1987. 8. 29
퇴원
1987. 9. 4.
백병원에 재입원하시면서 월간 씨알의 소리 복간할 것을 마음에 결심하시다.
1987.10.12.
제 1회 인촌상 수상 (동아일보사)
1987. 12.22
5공정권 말기 민주화의 열기 속에 언기법(言其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이루어질 희망가운데 씨알의 소리 복간신청을 문공부에 내다.씨알의 소리 문화공보부에 복간 신청
1988. 7. 18.
강제폐간 8년만에 씨알의 소리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다.(신문 3528-4-102651/등록번호 라-3676)법적처리 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무려 7개월만에 등록증을 받게 된 것이다.
1988. 8.3
서울대학병원에 1년만에 다시 입원하시다
1988. 9.12
24회 서울 올림픽.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 제창
1988.12. 22
씨알의 소리 보간 신청 7개월만에 정기 간행물 등록증 교부 받아, 폐간 조치 당한지
8년만에 다시 복간되다.
1989. 2. 4.
1989. 2. 4.05시 25분 88세 32105일 서울대학병원 12층 108호실에서 서거하시다
1989. 2. 4.
함선생님의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 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를 추대하다.
1989. 2. 8.
함선생님,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장례식 거행하다(2천여 조문객 참석)
씨알이란 무엇인가?
첫째, 씨알은 민 또는 민중에 대한 순수 우리말로서 '맨 사람'을 뜻한다.
씨알은 '씨'와 '알'을 한데 붙인 말이다.
민은 봉건시대의 흔족을 나타내는데, 씨알을 풀뿌리 민주시대를 나타낸다.
씨알은 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알짬을 지니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이렇게 말씀했다.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
지난 긴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
둘째, 씨알은 생명체의 웅근 알짬이고 미래 가능성의 원점이다.
함석헌 선생은 '씨알'이라는 말에 생명력과 혼을 불어녛어
함석헌 사상의 핵심주제로 삼았다.
함석헌은 시적 표현으로
"맘는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모든 형상의 어머니"라고 노래했다.
셋째, 씨알은 하늘과 땅과 생명이 하나되어 나온 결정체이다.
함석헌 선생은 씨알이란 볼 수 있게 나타난 하늘이요 정신이라고 말씀했다.
씨알은 나라와 공동체의 어머니요 마지막 책임지는 주인이다.
그러므로 씨알은 진리운동, 생명운동, 평화운동의 주체이다.
카페 게시글
이달의 인물!!
6月의 인물- 故 咸錫憲 先生
遊心(99)
추천 0
조회 139
02.04.03 17:00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