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리(新里)
◎동명의 유래(由來) 신리마을은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서 어은동(漁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마암면으로 개칭되면서 새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신리(新里)로 명칭하였으며, 현재 양촌과 음촌의 2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의 형성년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거주하는 문중의 입촌년대를 살펴보면 함안이씨(李氏), 여주이씨(李氏), 광산김씨(金氏)가 1500년 대에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위 성씨외에 성산이씨(李氏), 밀양박씨(朴氏)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신리 마을은 배둔∼문산 지방도를 따라 회화면 배둔에서 8km 떨어진 마암면의 마지막 마을로 개천면 좌연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동북쪽의 매봉산 밑에 자리 하여 산이 많아 밤나무 단지가 많고 마을 앞에 조성되 농경지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28가구에 96명(남자:52명, 여자:4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의 성씨는 함안이씨(李氏), 광산김씨(金氏), 밀양박씨(朴氏), 성산이씨(李氏), 진양정씨(鄭氏)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전통적인 농업으로 축산(한우 호당 2∼3두 사육)과 산이 많아 밤나무 과수단지를 조성하여 농외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 원예작물을 재배하는 농가도 있다.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 초가지붕은 1970년대에 새마을 사업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주민도 있고 주거환경을 입식부엌과 수세식 화장실 등으로 개량을 하고 있으며, 각종 문화시설인 전기, 전화, TV등 가전제품은 전 가구에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敎育) 초등학교는 마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고등학교는 회화중학교와 회화, 고성, 마산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신리 은행나무 신리 은행나무는 함안이씨(李氏) 향헌(杏軒) 이의형(李義亨)공이 심었다고 하며, 수령이 약 500년 정도인 나무로 높이 약 30m, 둘레가 5m 이상이나 된다. 당시 이 나무가 무척이나 무성하여 신리마을의 뒷산에 닿을 듯 했으나 임진왜란때 수군 통제부에서 세병관을 짓기 우해 베어 간후 그 뿌리에서 다시 움이 돋아나 지금에 이른 것인데, 지상 약 1.8m 높이에서 2개의 똑같은 가지로 자라 수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은행나무에 얽힌 은행골 전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어 주민들은 이 나무를 잘 보호하고 있다.
◎ 신리 배탄에 얽힌 전설 아주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하여 해일이 일어나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적에 이곳 산 골짜기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뒷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물이 계속 불어나서 재를 넘어 흘러가게 되었는데 해일과 함께 어디서 밀려온 나룻배 한척이 재를 유유히 건너지르고 있었다. 이때 산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배를 타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그만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몇사람만 타고 건너 갔는데 그때 그배가 지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전해 오는 것이 지금까지도 "배타재"로 그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신지(新池) ◎동명의 유래(由來) 신지마을은 신리(新里)의 법정리에 속하여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서, 어은동(漁隱洞)이라 하다가 그뒤에 죽현동(竹顯洞)으로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다가 1967년에 신리에서 분동되면서 마을 뒤에 못(池)이 있다 하여 신리의 신(新)자와 못(池)자를 따서 신리(新里)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의 형성년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신리마을의 형성년대와 같은 시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거주민은 함안이씨(李氏), 광산김씨(金氏), 합천이씨(李氏), 여주이씨(李氏), 단양우씨(禹氏)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지세(地勢) 신지마을은 마암면의 최단 서쪽에 신지와 어은골로 형성된 행정마을로 어은골을 경계로 대가면과 연접하고 있으며, 신지의 배치고개를 넘어 개천면(좌연리)과 경계를 하고 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산골마을로 양 산골짜기에 조성되어 있는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세이다.
◎주민(住民) 마을 주민은 37가구에 126명(남자:67명, 여자:59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주민은 함안이씨(李氏), 광산김씨(金氏), 여주이씨(李氏), 합천이씨(李氏), 단양우씨(禹氏), 고성이씨(李氏), 김해김씨(金氏), 김해허씨(許氏), 장수황씨(黃氏)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주민의 생업(生業) 주민의 생업은 미·맥위주의 농업으로 축산(한우 호당 2∼3두 사육)과 많은 밤나무 과수단지를 조성하여 밤을 생산하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는 원예작물을 재배하여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는 농가도 있다.
◎주거환경(住居環境) 마을의 초가지붕은 1970년대에 스레트 등으로 전면 지붕개량을 하였으며, 지금은 현대식 주택을 건축하는 주민도 있고, 가옥구조도 입식부엌과 수세식 화장실 등으로 개량을 하고 있다.
◎교육(敎育) 초등학교는 마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중·고등학교는 회화중학교와 고성, 마산, 진주 등지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고 있다.
◎ 예수의 작은 마을 신지 어은골의 산수가 수려한 아늑한 곳에 1981년도에 천주교 마산교구에서 "예수 작은마을"의 사회복지시설을 설치하여 지체장애자와 결핵환자 등을 수용 보호하고 있다
◎ 피바위에 얽힌 전설 옛날 신지마을에 노씨 성을 가진 천석부자가 살았는데 이 시절에는 매년 흉년이 들던 때라 노부작 집에는 매일같이 노객이 끊이지 않아, 이들에게 먹일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은 뜨물이 흘러 20여리 아래에 있는 원진마을 앞개울까지 흘러도 그 흰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노부자는 이를 귀찮게 여기고 아깝게 여기던 차에 하루는 노승(老僧)이 노부자집에 시주를 왔기에 노부자 부인이 노승에게 말하기를 "노객들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해주면 시주는 얼마든지 하겠노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몹시 괴이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앞산에 있는 바위의 귀를 떼어버리면 노객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부자 부인은 머슴을 시켜서 앞산에 있는 바위의 귀를 떼었더니 귀를 떼낸 바위자국에 피가 흘러 내리면서 산아래로 흘러 내렸다. 그 후로 노부자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 망하고 찾아오는 노객이 업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 피바위는 마을 앞에 있는 대밭속에 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