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조금은 사소하고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오해인데,
변증법을 정반합으로 보고 있는 대목이네.
이 오해는 상당히 뿌리 깊은데,
영국의 철학자인 롯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
롯체는 피히테의 고유한 용어인 테제, 안티테제, 진테제를 끌어들여 가지고
헤겔의 삼단론(trihotomy)적인 체계구성을 해명하려 했네.
롯체의 이런 방식의 설명은 한편으로는 엥겔스에게로 전파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변증법을 이해하는 가장 손쉽고도 전형적인 개념틀로 자리잡게 된다네.
이 때문에 변증법은 정반합이라는 도식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던 것이지.
나를 포함한 헤겔 전공자들이 언제나 강조하는 바이지만
헤겔은 자신의 변증법을 정반합이라는 틀로 설명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네.
내가 눈을 부릅뜨고 헤겔 인덱스를 뒤져 봐도
그의 저서, 편지, 강의록, 메모장 그 어디서도 정말 단 한번도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데.
그런데도 우리의 지성 환경에서 헤겔 변증법 하면 정반합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 배경이 있다고 볼 수 있겠네.
하나는 근대 이후 우리의 개념 이해가 일본을 경유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정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변증법이라는 철학사상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중적인 해설서를 통해 알려졌다는 사정이 그것이네.
일본에 헤겔철학 사상을 전해준 이는 188,90년대 동경대학에서 철학과 예술을 가르친
미국인 페놀로사(일본 미술사를 구미에 소개해 준 그 페놀로사)인데,
이 사람의 선생이 롯체의 제자네.
요즘 일본에서는 그 페놀로사에게서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강의노트가
세 종류나 출판되어 그의 철학사상과
그것이 일본의 근대사상 형성에 끼친 영향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더구만.
여하튼 페놀로사의 근대철학 강의는 주로 헤겔을 소개하는 내용인데
첫마디가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으로 해석하는 것이네.
여기서부터 일본의 헤겔연구자들이
변증법을 정반합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지.
여기에 덧붙여 일본에서 1910년대 후반에 벌써
대중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설서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데,
이것들이 한결같이 변증법과 정반합을 동일시하고 있네.
우리나라에서도 45년 이후 해방공간에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문헌이 간행되지 않는가.
이 때 나온 한글본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도 예외없이 변증법은 정반합으로 소개되고 있데.
그로 인해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과서에서
변증법하면 정반합이고
그래서 헤겔의 변증법은 정반합 변증법이라는 설명이 버젓이 횡행하게 된 거지.
물론 그래.
헤겔이 설령 정반합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이 변증법의 핵심을 오해 없이 표현해 주기만 한다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을 백안시할 건 없겠지.
실제로 일본이나 한국의 헤겔연구자들 중 연로한 분들은
정반합이 헤겔이 아니라 피히테의 것이라는 정을 알면서도
헤겔 변증법을 정반합과 동일시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