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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지도
1. 예산군(禮山郡)의 개요
충청남도 중북부에 있는 군. 면적 543.43㎢. 인구 9만 8045(2002). 동쪽은 공주시·아산시, 서쪽은 서산시·홍성군, 남쪽은 청양군·홍성군, 북쪽은 당진군·아산시와 접해 있다. 군청소재지는 예산읍 예산리.
가 역사
백제 때는 오산현(烏山縣)이라 했고, 삼국통일 뒤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되었다가 919년(고려 태조 2) 예산현(禮山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천안부(天安府)에 속했다가 1895년(조선 고종 32)에 홍주부 예산군·대흥군(大興郡)·덕산군(德山郡)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덕산군·대흥군이 통합되어 예산군으로 개편되었고, 40년 예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73년 삽교면(揷橋面)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83년 오가면(吾可面) 효림리(孝林里)·월곡리(月谷里) 일부가 월산리(月山里)로 개칭되고, 좌방리(佐方里) 일부가 방아리(方阿里)로 개칭, 삽교읍에 편입되었다. 2003년 현재 행정구역은 2개 읍, 10개 면으로 되어 있다.
나. 자연
차령산맥(車嶺山脈)이 군의 동쪽을, 가야산맥(伽倻山脈)이 남서쪽을 각각 지나가면서 도고산(道高山)·덕숭산(德崇山)·가야산 등을 이루어 놓았고, 동부의 산지와 서부 구릉지대 사이로 삽교천(揷橋川)·무한천(無限川)이 북류하여 유역에 비옥한 예당평야를 이루었다. 기후는 서해안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으나 해양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여 기온의 연교차가 큰 편이다. 연평균기온 11.7℃, 1월평균기온 -4.2℃, 8월평균기온 25.1℃이고, 연강수량 833㎜(2001)이다.
다. 산업 교통
군의 중앙부에 삽교천과 무한천이있고 예당저수지가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다. 농가는 군 전체세대의 42%를 차지하고, 동서의 구릉지대에서는 양잠이 활발하며 젖소·닭 등의 축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예산사과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잎담배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외에 무연탄·활석 등이 산출되며 신례원(新禮院)을 중심으로 섬유공업이 발달해 있다. 농업용수·생활상수도·공업용수 등은 예당저수지와 삽교호 등에서 공급받아 이용한다. 상업활동은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예산·삽교·고덕(古德)·덕산·신양(新陽) 등지에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장항선철도가 군의 중앙을 종단하면서 승객과 화물을 수송하며, 예산읍을 중심으로 공주·아산·서산 등지로 통하는 국도와 지방도 및 관광도로 등이 발달되어 있다.
라. 사회. 문화
교육기관은 2002년 현재 초등학교 26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7개교, 대학교 1개교가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405년(태종 5)에 창건된 대흥향교, 13년에 창건된 예산향교, 1705년에 창건된 덕잠서원(德岑書院) 등이 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11년에 대흥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고, 12년에 예산공립보통학교와 덕산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으며, 22년 공주농업학교가 예산으로 이전하여 예산공립농업학교가 되었다. 65년 개원한 예산문화원을 중심으로 각종 문화활동이 이루어지며, 매년 4월에는 윤봉길(尹奉吉)의 구국충절정신을 기리는 매헌문화제와 10월에 예산능금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지방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진치기놀이 등이 있고, <수덕사연기설화> 등이 전해진다. 특히 역사유적과 유물이 많고 덕산온천과 예산읍·오가면 일대의 사과과수원은 유명하며, 신양팔경(新陽八景) 등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많다. 특히 수덕사(修德寺)·덕산온천·충의사(忠義祠) 등을 포함한 덕산 일대는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대흥임존성(사적 90)·
수덕사대웅전(국보 49)·
예산삽교석조보살입상(보물 508)·
예산화전리사면석불(보물 794)·
예산김정희종가유물(보물 547)·
예산정동호가옥(중요민속자료 191)·
매헌윤봉길의사사적지(사적 229)·
윤봉길의사유품(보물 568)·
보부상유품(중요민속자료 30)·
예산의 백송(천연기념물 106)
외에도 많은 불교사찰 및 석탑 등이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 추사 김정희 고택
예산군 신암면의 용궁리 마을에 있는 추사 고택은 명당에 앉은 번듯한 집들이 그렇듯이 햇빛을 담뿍 받는 양지바른 자리에 앉아 있다. 뒷산은 야트막한 동산인데 올라가 보면 추사고택 앞에 펼쳐진 너른 예당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평야 저쪽으로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물길이 있다. 이 집에서 추사가 났다. 명당설을 뒷받침하는지 추사의 위대성을 뒷받침하는지는 몰라도 추사가 날 때 집 뒤뜰의 우물이 갑자기 말라 버리고 뒷산인 팔봉산의 풀과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물도 다시 차 오르고 나무와 풀들도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추사는 어머니 뱃속에서 스물넉 달 만에야 나왔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추사고택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반가 주택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지금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채가 있는데 본래 곳간채가 더 있었다. 또 대문채와 사당채도 1977년에 집을 복원할 때에 다시 세운 것이다. 추사의 직계손이 끊어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사이에 헐렸기 때문에 변형도 꽤 심하게 되었었다고 한다. 말끔히 수리하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오른쪽에 비껴 있고 그 너머로 안채의 일곽이 조금 보인다. 집들이 전체로 동향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는 남향하여 있다. 사랑채 앞에 추사가 ‘石年’이라고 글씨를 새겨 세운 빗돌은 그 그림자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해시계이다.
Γ자를 이룬 사랑채 맨 앞쪽은 높은 주추 위에 누마루와 같이 돌출하여 있어서 매우 권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꺾이는 부분에 대청을 두고 동쪽으로 큰방을, 서쪽으로 건넌방을 두었다. 재미있는 것은 대청 쪽으로 난 문짝들이 모두 들어열개로 활짝 열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개방과 폐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문짝을 내렸을 때의 보온과 폐쇄를 위해서는 문이 두꺼운 맹장지를 달았다. 그러면서도 빛이 통하도록 중간에 창을 내어 창호지를 바른 불발기창을 냈다.
안채는 ⃞ 자형 집이다. 본래 중문으로 들어서는 곳에 내외벽이라는 벽이 문간에 있어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쪽에는 안방과 부엌이, 왼쪽으로는 안사랑과 작은 부엌이 마주하고 있다. 대청은 매우 넓은데 6칸이니 ‘육간대청’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대청 뒤쪽은 칸마다 문짝과 창이 달렸는데 중앙간 분합문짝을 열면 사당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돌층계와 대밭이 어우러진 운치 있는 길이다. 안사랑은 젊은 도령이나 신방을 차린 서방님이 기거하는 방으로, 바깥마당 쪽에 툇마루를 달아 안방 쪽에 인기척을 내지 않고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작은 부엌에는 쪽문이 나 있어 바깥마당으로 통하며 바로 밖에는 우물이 있다. 이처럼 군데군데에 매우 세심한 배려를 한 점이 적지 않은데, 이 집을 지을 때 서울에서 경공장을 불러다 했다고 한다. 더구나 비용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을 부조하여 53칸짜리 저택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 추사 집안의 세도를 알 만하다.
집 자체 형식이 깔끔하거니와 보수한 흔적이 세월이 입혀 준 옛집의 맛을 좀 깎아 내리고 있기는 하다. 게다가 기둥마다 붙인 주련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수하면서 추사의 글씨들을 붙여 놓은 것이다. 사랑채 큰방에는 「세한도」복제본도 걸려 있는데 이런 치장은 이 집을 어딘지 어색하게 하고 있다.
추사의 무덤은 고택을 바라보아 왼쪽에 계곡 하나 지난 자리에 있다. 봉분도 나지막하고 석물 치장도 화려하지 않아 흔히 고택만 둘러보고 묘는 지나치기 쉽다. 가지를 드리운 반송의 운치가 그윽하다. 오른쪽으로는 둔덕을 하나 넘으면 추사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묘가 있다. 무덤에 다다르기 전에 있는 집은 그 묘막으로서, 정조가 내린 열녀문이 대문 앞에 있다.
거기서 길을 따라 한참 가면 추사 집안 어른들의 무덤 앞에 백송이 한 그루 홀쭉하게 서 있다. 나이가 200살이 채 안되는 이 백송은 김정희가 아버지를 따라서 청나라에 갔던 1809년에 연경에서 종자를 얻어 와 고조부 묘소 앞에 심어 키운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106호인데 기후와 풍토가 잘 맞지 않아서인지 또는 200년이면 거의 수명을 다한 편이라 그런지 가지가 무성하지는 못하다.
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누구나 알 듯이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이다. 또한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학자이기도 하며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났다. 자는 원춘(元春)이며 호는 추사말고도 완당(阮堂), 노과(老果), 보담재(寶覃齋) 등 여럿 있다.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경주 김씨는 훈척가문이 되었으니 그의 가문은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도가였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였으며 당대 실학의 거두 초정(楚亭) 박제가(朴薺家, 1750~1805)가 그를 가르쳤으니 추사의 실학은 그에게서 비롯한다.
그의 재질은 25세에 아버지가 청나라 연경으로 가는 사행에 동지부사로 가게 되었을 때에 그 자제군관으로서 동행하게 되면서 활짝 꽃피었다. 그는 이미 스승 박제가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당대 석학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에게서 한나라와 송나라 때 비첩을 기준으로 하는 고증학의 세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78세로 청나라 제일의 석학이었던 옹방강도 이 젊은 청년의 명민함을 높이 사 “경술문장이 해동제일(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까지 추켜세웠다. 그가 이 인연을 어찌나 소중히 여겼는지는 호를 옹방강의 호 담계(覃溪)와 보소재(寶蘇齋)를 본떠 ‘보담재(寶覃齋)’라고 하였으며, 완원의 ‘완’자를 따서 ‘완당(阮堂)’이라고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문물과 사람을 지나치게 숭상하게 되었으니 그의 편지를 보면 그 뒤로는 조선을 ‘답답하고 촌스러운 나라’로 여기며 끊임없이 연경의 화려한 문물을 그리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추사가 실학파적인 측면이 있었음에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것은 그의 가문이 노론에 속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기가 처한 현실에 기반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주체성 없이 선진문물을 숭앙하는 이런 면도 작용했던 듯하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1819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제, 호서안찰사(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는 옹방강에게 옛 비문의 탁본을 보낼 겸해서 많은 옛 비를 조사하였는데 그중에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는 등 금석학에 일가를 이루었고 그 결과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같은 책을 내었다.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추사에게 탁친 최초의 좌절은 1830년에 그의 아버지 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배후조종혐의로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면서 일어났다. 그 일 때문에 추사 자신도 일시 관직에서 밀려났으나 순조의 배려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인영, 권돈인과 삼두체제를 이룰 만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1840년에는 동지부사로서 꿈에도 그리던 연행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풍양 조씨의 득세에 다시 반격을 가한 안동 김씨가 10년 만에 윤상도 옥사를 다시 거론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연행길은커녕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추사 개인으로서는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일이었지만 이 귀양으로 하여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전화위복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그에 얽힌 일화가 전한다.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길에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생가 주변의 화암사에서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등 불교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터였고 대둔사의 초의선사와는 특히 귀양살이 가운데에도 차(茶)를 받는 등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때에 그는 대둔사에 걸린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현판 글씨를 보고는 “저런 촌스러운 글씨를 달고 있느냐”며 글씨를 써 주어 바꿔 달게 했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로서 글씨에서 겸재 정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으니, 향색(鄕色)이 나는 ‘촌스러운’글씨가 추사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년여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둔사에 들른 추사는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였다”며 자신의 글씨를 내리고 다시 원교의 글씨를 걸게 하였다. 유배 생활이 주는 삶의 깊이가 그의 눈을 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도 완성시켰던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세한도(歲寒圖)」도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린 것이다.
그는 글씨(書)와 그림(畵)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니 글씨나 그림이나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는데 그의 「부작란(不作蘭)」은 그의 그러한 서화관을 잘 드러내 보여 준다. 이런 생각은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다.”는 양반 중심의 사고를 낳아 이후 그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던 서화계에 거역할 수 없는 보수화의 물결을 일으켜 놓았다.
1851년에 다시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북청에 유배되었다. 2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그는 파란 많았던 벼슬살이를 더는 하지 않고 과천에 기거하면서 봉은사를 오가며 여생을 보내다가 71세 되는 해인 1856년에 죽었다.
추사의 유물은 생전에 지니던 인장과 벼루 등과 편지와 서첩, 이한철이 1857년에 그린 추사영정을 일괄하여 보물 제547호로 지정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하여 보관하고 있다.
▲ 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매달린 끝에 결국 다시 찾아왔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으니 <세한도>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다. [종이에 수묵/23cm x 69.2cm/개인 소장/1844(헌종 10)]
▲ 부작란도(不作蘭圖)
〈부작란도〉는 김정희의 전형적인 난 그림과 글씨체를 동시에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람을 받은 듯 오른쪽 구석에서부터 꿈틀대며 힘차게 솟아 굽어진 난초를 화면의 중앙에 그려 넣고 그 주변의 여백에 제찬(題讚)을 써 넣었다.
활짝 핀 난꽃에 있는 화심(花心)은 그림인지 글씨인지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
이러한 난 그림은 실제 난의 묘사라기보다는 난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추사는 제주 한란을 아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씨는 굵고 가는 획들이 서로 엇갈려 몹시 거칠면서도 힘차다.
난초의 굴곡진 모습이 마치 그의 글씨를 보는 듯하며, 그의 명성만큼이나 많은 도장이 찍혀 있다. [종이에 수묵/55cm x 30.6cm/개인 소장]
나. 화암사
용궁리 마을 추사고택에서 등성이 건너편의 앵무봉에 자리잡은 화암사는 추사가 어려서부터 드나들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다진 곳이다. 화암사는 김한신이 별사전으로 받은 땅 안에 있어 추사 집안의 원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화암사에는 그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竟樓) 현판이 있고, 법당을 돌아 뒷마당을 h가면 바위면에 단정한 예서체의 시경(詩境), 반듯한 해서체의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 새겨져 있다. ‘천축고선생댁’의 ‘천축’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며 ‘고선생’이란 부처를 옛선생이라 이른 말이다. 그러니 이는 ‘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뜻인데 불가에의 친근함에 추사의 재치가 어우러진 재미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화암사 입구에서 시멘트 길을 따라 절로 들어가면 곧 왼쪽으로 난 산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안으로 150m 정도 들어가면 산길 오른쪽에 있는 바위 한 면에는 ‘소봉래(小逢萊)’가 새겨져 있다.
3. 남연군 묘
남연군 묘는 조선조말 야심가였던 흥선 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동 김씨 세도가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종친들은 조금이라도 잘못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가기가 예사이던 시절이라 흥선군은 한편으로는 파락호로, 또 한편으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 오랜 계획을 실천에 옮긴 교두보가 바로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곳으로 옮긴 일이다. 그 옮긴 장소와 옮기던 내력이 모두 숱한 뒷 얘기로 남았으니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소상히 전하고, 조금씩 다른 점이 있지만 예산의 향토사가 박흥식 씨의 『예산의 얼』에도 전한다.
1822년에 남연군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날 한 지관이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한편으로는 흥선군이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알려 달라고 했다고도 한다).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했다. 흥선군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야산을 택했다.
그러나 정작 가야산에 지관이 가리키는 자리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자리에 아버지 묘를 쓰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려서 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어 옮겼는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다.
두 번째 일은 가야사를 폐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중들을 쫓아내고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하고, 충청감사에게 중국 명품 단계벼루를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쫓아내고 마곡사의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절집을 폐허로 만든 뒤에는 탑을 헐어 내는 일이 남았다. 탑을 헐기 전날 밤 잠을 자던 흥선군의 네 형제는 똑같은 꾸을 꾸었다. 꿈에 수염이 흰 노인이 나와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벌인다면 네 형제가 폭사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 깬 형들이 꿈 이야기를 하니 모두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흥선군은 “그렇다면 이곳은 진실로 명당자리”라며 운명을 어찌 탑신이 관장하겠느냐고 하여 형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탑을 부수자 바닥에 바위가 드러났는데 도끼가 튀었다. 그때 흥선군이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말란 말이냐”하고 하늘에 소리친 뒤 도끼를 내리치자 바위가 깨졌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1845년에야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곳에서 묘를 옮겼다. 뒷날 도굴의 일을 염려하여 철 수만 근을 붓고 강회로 비비고 봉분을 했다. 임시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舊壙地)’라고 하여 지금도 움푹 패어있다.
남연군 묘의 자세는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는 석문봉(石門峰)이 주산이 되고, 바라보아 오른쪽으로는 옥양봉,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청룡세를 이루고, 왼쪽으로는 백호의 세는 가사봉, 가엽봉에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청산 월봉에 뭉쳐 감싼 자리이다. 동남향을 바라보면 평야를 지나 멀리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산(鳳首山)이 안산이 된다. 남연군 묘 앞에 있는 장명등 창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그 동그란 창 새로 보이는 곳이다. 또 청룡맥의 옥녀폭포의 물과 ,백호맥의 가사봉 계곡의 물이 와룡담에 모였다가 절 앞에서 서로 굽이치며 흐르니 임수(臨水)의 지세도 얻었다. 가야사는 그 두 물줄기가 합치는 곳에 있었다. 금탑이 있던 자리라는 남연군 묘는 그 뒤에 우뚝 솟은 언덕배기이니, 흔히 절 마당이나 법당 앞에 탑을 놓는 방식과는 달리 절 뒤쪽의 언덕에 탑이 있었던 것만도 예사 자리는 아니다. 옛 탑 자리, 곧 남연군 묘에 올라가려면 요즈음에 해놓은 층계를 꽤 걸어올라가야 하며,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시야는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남연군 묘에서 보아 왼쪽 산기슭에 돌부처가 한 분 있다. 풍채도 자그마하고 생김도 그만저만한 민불인데, 재미있는 것은 골짜기 앞쪽이 아니라 골짜기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 내력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남연군 묘의 풍수에서 보면 그쪽이 좀 비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골짜기로 빠져나가는 기를 막느라 부처를 세웠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는 그와 정반대로, 돌부처는 원래 거기에 있었는데 흥선군에 의해 가야사가 불타 버리자 그 모습이 보기 싫다고 돌아섰다고도 한다.
흥선군은 이 자리에 남연군 묘를 쓴 지 7년 만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載晃, 아명은 命福)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이 아이가 고종이 되었으며 그 아들이 순종이 되었으니 2대 천자를 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두 임금을 끝으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맥이 끊기고, 남연군 묘는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파헤친 바 되었으니 과연 그런 수난을 당하고 2대 천자의 결말이 그렇게 난 자리가 결과적으로 명당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오페르트 사건은 고종 5년인 1868년에 일어났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왔다.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내린 그들은 한국 천주교인을 앞세워 와서 남연군 묘를 파헤쳤다. 밤중에 일어난 급습이었으므로 막을 틈이 없었는데 날이 밝아오고 썰물 때가 다가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해 버렸다. 대원군이 선견지명으로 비벼 놓은 강회 때문에 정작 그다지 파헤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대원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잔존하는 천주학쟁이를 가일층 엄단하라”고 지시했으니 이땅 천주교 신자들은 또 한차례 회오리바람을 맞아야 했다. 한편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물의를 일으켜서 자본주 젠킨스는 불법파렴치죄로 기소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버렸다.
흥선대원군이 폐해 버린 가야사는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수덕사보다 앞에 들고 있어, 수덕사보다 큰 절이었던 듯하다. 형승(形勝)조에 설명한 ‘금탑(金塔)’은 “그 윗머리는 구리쇠로 씌우고 네 모서리에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걸어 늘어뜨리고 풍경을 달았다. 그 형태가 웅장하고 만든 법이 기이하고도 교묘하여 다른 탑과 다르다”고 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공주 미곡사에 있는 라마교 방식의 탑처럼 탑 상륜에 구리쇠로 보개를 씌웠는데 빛을 받으면 반사하여 번쩍이므로 금탑일 한 듯하다. 그렇다면 고려 말기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고 적고 있다. 또 가야사 보웅전에는 철불 세 분이 모셔져 있었는데 불에 타 녹아서 쇳덩어리가 되었다. 철불이었다면 신라 하대 또는 고려 초중기의 것일 수 있다. 뒷날 봉산면의 대장장이가 파묻혀 있던 쇳덩이를 녹여 쓰려고 했으나 가루가 되었다고 한다. 남연군 묘 아래쪽의 넓은 절터는 지금 논밭으로 변해 버렸는데 군데군데 깨진 석등, 부도, 탑비 조각이 있었으나 더러는 묻히고 더러는 캐 가서 건물 자리와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석등 화사석은 보덕사에 옮겨져 있다.
탑을 깨부수고 절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린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몇 달 뒤에 가야골 아래 상가리에 한양에서 목수를 보내어 은덕을 보답한다고 지은 절이 보덕사(報德寺)이다. 장남 재면(載冕)의 이름으로 지은 이 절은 왕실의 원찰이 된 셈이다. 규모로는 보잘것 없어서 가야사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던 이 절에 있는 가야사 석등 화사석은 그나마 가야사가 어떤 절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팔각의 몸돌에는 돌아가며 창이 넷 뚫려 있고 그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귀신을 밟고 있는 형상으로 갑옷이 정밀하고 천의 자락이 날리는 품이 예사 조각과는 다르다. 석등의 몸돌만도 높이가 87cm나 되니 전체 크기는 꽤 컸을 듯하며 형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야사 석등의 운명만 보아도 가야사가 양택으로 명당이었는지도 의문스럽다. 2대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도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까지 왕이 되었기에 붙은 후대의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남연군 묘에 얽힌 처절한 이야기들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한 구석으로 남아 있다.
4. 예덕 상무사와 보부상
덕산면 사무소 뒤뜰에는 우리 나라의 마지막 보부상 단체였던 예덕 상무사(禮德 商務社)의 위패를 모신 조촐한 사우와 충의사에 보부상의 유품을 보관한 기념관이 있다.
보부상(褓負商)이란 봇짐을 싸서 이고 다니는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지게에 등짐을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 부상(負商)이 합쳐진 말이다. 보부상은 그렇게 짐을 지고 장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사고팔아 교역을 하여 물산의 유통을 주도했다.
우리 나라 보부상의 내력은 확실치 않으나 백제가요 「정읍사」에 나오는 남편이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므로 늦어도 삼국 시대에는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보부상 조직이 전국적으로 된 것은 조선 초기의 일이다.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가 함경도 만호로 있을 때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크게 다쳤는데 이를 본 등짐장수가 지게에 져서 이성계를 구해 준 일이 계기가 되어, 행상들이 조선 건국에도 큰 몫을 하게 되었고 이성계는 보부상에게 상행위의 전매권을 주고 관이 보호하도록 했으며 그를 도운 백달원에게 전국의 보부상을 관할하는 직책을 주었다.
이로부터 보부상은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며 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관의 일에 절대충성을 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식 정경유착인 셈이다. 전성기에는 8도 360주 872임방 3,000시장에 보부상이 2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부상은 국가적인 위기인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운반, 정탐을 맡고 때로는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여 큰 역할을 했고 임술민란 같은 때에는 난민을 돕거나 민란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민중이 봉기한 동학농민전쟁에서는 황토현전투 등에서 관군을 도와 농민군을 토벌하는 데 가세했으며 개화기에 만민공동회 같은 것이 열릴 때 개화파 인사들에게 집단테러를 하는 등 근대기에 와서는 부정적인 역할도 많이 했다.
한말인 1899년에 상무사에 소속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일제의 말살정책과 근대적 교통기관의 발달에 따라 전국적인 조직은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해방 이후에까지 명목을 유지한 곳은 충남 부여, 한산 일원인 저산팔구(苧産八區)의 보부상단과 예산과 덕산의 보부상이 합친 이곳 예덕 상무사 두 곳이다. 덕산의 부상은 바다가 가까운 점을 이용하여 바다 물때에 맞추어 해미, 갈산, 사구시에서 해물을 사서 30리길 가야산 줄기를 넘었으며 각 고장에서 온 부상들은 윤봉길 의사 사적지가 있는 덕산 목바리에서 짐을 부려 한숨을 쉬어 가곤 했다.
해방 이후에는 보부상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어지고 예덕 상무사에서는 덕산 장의 장세를 받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명목을 유지했으며 임방, 판수, 집사 등의 직책도 명예직으로 이어져 요즈음에도 지방민 가운데 명예직 두령을 선출한다.
근대기에 정치적인 실책도 했으나 보부상은 근본적으로 상인단체로서 내적으로는 상부상조하여 밑천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밑천을 주어 장사하게 하고, 악덕행위를 했을 때에는 조직에서 축출하는 등 자체규약으로 상거래 질서를 세웠다. 또 보부상들은 같은 일에 종사한다는 뜻으로 서로 ‘동무(同務)’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부상 유품은 근대 상업경제 형성기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곳 예덕 상무사의 유품, 저산팔구 상무좌사(부상)의 유품과 저산팔구 상무우사(보상)의 유품이 일괄해서 중요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덕 상무사 유품으로는 인장과 인궤 등 기물과 역대 두령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선생안(先生案)』, 군단위 보부상 조직의 규약을 적은 『임방, 임소절목』 등 각종 전적과 공문들이 있다.
사우에는 보부상의 창시자인 백달원의 위패를 비롯해 두령들의 위패 109위가 모셔져 있어 보부상의 옛 위력을 말없이 보여 주고 있다.
5. 윤봉길 의사 사적지
예로부터 큰일을 한 사람이 나면 가까운 산이나 땅의 정기를 받아서 그런 인물이 태어났다는 얘기들이 많고, 우리 오랜 풍속은 흔히 집터를 풍수지리에 연결지어 생각하는 일이 많다.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의 사적지도 그런 대표되는 곳의 하나이다.
사적지에는 생가와, 네 살 때부터 중국 망명 전까지 살던 집이 따로 있다. 생가는 두 물길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배 모양의 도중도(島中島)에 있고 ‘광현당(光顯堂)’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다. 옛집은 그가 네 살 때 옮겨온 곳이다. 이 집에는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윤봉길이 지어 붙인 ‘저한당(狙韓堂)’이라는 당호가 있다. 둘 다 조촐한 초가집이다.
이 자리는 윤봉길의 증조부 윤재가 정착한 곳으로 풍수가들은 이 터를 큰 인물이 날 자리라고 풀이한다. 가야산의 원효봉을 주산으로 삼아 마주한 자리로서, 차령산맥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용봉산의 한 지맥인 수암산의 끝자락이 평지로 내려와 조산을 돌아보는 형세인‘회룡고조(回龍顧祖)’의 양택지에 앉은 집이라는 것이다. 또 오른쪽에는 덕숭산(수덕산의 다른 이름)의 세 봉우리가 붓끝처럼 솟아오른 ‘삼태필봉(三台筆峰)의 형세를 하고 있어 지사나 유학자가 나올 자리라고 한다. 게다가 가야산과 덕숭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져 윤의사 생가인 목바리 앞에서 작은 삼각주를 이루었다가 다시 덕숭산과 용봉산 사이에서 흘러내려오는 시내와 만나는 곳에 있으니 물길로도 득수가 제격을 이룬 자리라고 한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본명은 우의(禹儀)였고 봉길은 별명이다. 뒤에 지은 아호는 매헌(梅軒)이다. 그가 지은 『자서략력(自書略歷)』에 따르면 성품이 남에게 지기 싫어하여 싸워서 진 적이 없었다. 때로 씨름에서 지는 날이면 하루종일을 맞붙어서 이길 때까지 붙늘고 늘어졌으므로 별명이 ‘살가지(삵쾡이)’였다.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이듬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깨달은 바 있어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을 수는 없다며 자퇴하였다. 사숙에서 한학을 배우며 애국심을 고취하던 그는 1926년에 농민계몽과 농촌부흥을 위해 뛰어들었는데 그 계기가 된 일이 있다.
열아홉이 되던 그해, 한 젊은이가 “글을 아느냐?”며 길가던 윤봉길을 붙들었다. 그는 안고 있던 공동묘지의 무덤푯말들을 한꺼번에 내려놓으며 그 가운데 자기 아버지의 이름인 ‘김선득’이 적힌 것을 찾아달라고 했다. 윤봉길이 그 이름이 적힌 푯말을 골라 주며 “묘표를 뽑은 뒤에 표라도 해놓고 왔는가”고 묻자 그 젊은이는 주저앉으며 “아이고, 우리 아버지 산소를 아주 잃어버렸네”하며 통곡하더라는 것이다. 이 일을 겪은 윤봉길은 그 젊은이가 무식하여 아버지의 산소를 잃어버린 것처럼 국민들이 무식하여 나라를 잃어버린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그는 이듬해에 야학을 열어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쳐 깨우치는데 힘쓰는가 하면 자활적 농촌진흥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23세 되던 1930년에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 生不還).”라는 글을 남기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31년에는 상해로 옮겨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가서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1월에는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동경에서 일본 천황을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고, 1월 28일에는 일제가 상해 사건을 도발하여 상해는 한창 어수선하던 때였다. 시행착오와 준비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4월 29일 일본인들이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행사를 벌이던 홍구공원에서 야채상으로 가장하였던 윤봉길은 단 위에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던져,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를 폭사시키는 등 축제장을 그야말로 쑥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중국의 총통이었던 장개석은 “중국군 백만 대군이 못 하는 일을 해냈다.”며 이 젊은 청년의 용감한 행동을 칭송했다고 한다.
거사 직후에 현장에서 잡힌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1월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12월 19일 25세의 나이로 총살형을 당했다.
정부에서는 1972년 윤봉길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고 사적지를 1972년에 사적 제229호로 지정하였다. 사적지를 정비하면서 여러 곳을 갈고 다듬고 하여 건물 자체의 옛맛은 남아 있지 않다. 조촐한 초가집은 ‘너무’ 말끔히 단장이 되어 있고 주변에 널찍한 터를 잡아 돌담을 두르고 잔디를 심었고 한쪽에는 기념관이 있어 유품을 전시한다.
기념관 안에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할 때 지니고 있던 소지품과 그가 생전에 쓰던 유품과 서책,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회중시계는 상해에서 의거하기 직전에 김구 선생과 마지막으로 작별하면서 서로 바꾸어 가졌던 물건이라고 한다. 그가 사형을 당한 일본 가와사나 교외의 미코시 공병 작업장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윤봉길의 무덤에서 나왔다는 형틀대도 있다. 또 20세에 야학을 꾸릴 때 교재로 펴낸 『농민독본』도 있다. 이와 더불어 국립중앙박물관 등지에도 있는 윤봉길의 유품은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로 일괄하여 13종 68점이 함께 보물 제 5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지 길 건너에는 사당 충의사가 있어 해방 후에 돌아온 유해를 모시고 있다.
6. 수덕사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뚜렷한 기록은 없으며 고려 말 공민왕 때에 나옹이 중수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 시절인 19세기에조차도 가야산의 가야사보다 사세가 작았던 듯도 하다. 그러다가 한말에 경허(鏡虛)가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키고 그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하여 지금은 우리 나라 불교계 4대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는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다.
일주문을 지나 흙길을 따라 올라가면, 황하루 건물을 볼 수 있는데 대웅전을 본 뜬 모습이다. 옛 건물을 따랐으나 이전의 멋스러움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것은 세월의 무게가 실리지 못한 탓일까? 뒤쪽으로는 뜯어내다 만 돌계단이 엉거주춤 걸려 있어 위태해 보이기도 하고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예전의 아늑함이야 못 살리겠지만 자리 잡힌 모습이라도 빨리 되찾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둔덕을 올라 마주하는 조인정사 앞에는 통일신라 때의 균형있는 비례를 갖춘 삼층석탑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인 이 탑은 비례가 깔끔하여 여느 절이라면 꽤 대접을 받았겠으나 수덕사에서는 말없이 서 있다.
선방을 끼고 돌아가면 기품 있는 대웅전이 있다. 경내에는 그밖에도 명부전, 백련당, 청련당 등이 있다. 그러나 수덕사는 부속암자와 당우가 많은 편이다. 일제 시대에 신여성으로 화려한 삶을 누리다가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책을 썼던 김원주가 일엽 스님이 되어 수도하던 견성암과 환희대가 있고, 만공이 기거하던 금선대도 있다. 이 금선대에는 지금 경허와 만공의 영정이 있다. 또 정혜사로 오르는 중간쯤에는 1924년에 만공이 세운 미륵불입상이 있는데 7m가 넘는 거대한 체구에 굵은 기둥처럼 몸체를 새긴 것 하며 머리에 보관을 쓰고 갓을 얹은 품이 논산 관촉사의 미륵상 아래로 내려오는 충청남도 지역의 고려 시대 석불의 계보를 밟고 있다. 불상으로서의 위엄이나 우아함보다는 구김없이 웃고 있는 모습이 미륵상을 건립한 만공 스님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그대로 전파하는 듯하다.
가까이 있는 만공탑은 만공 스님의 부도이다. 팔각기단에 팔각기둥 셋을 받치고 그 위에 둥근 공 모양의 몸돌을 얹은 이 부도는 만공 스님의 제장니 동경미술학교 출신 박중은이 1947년에 세운 현대식 부도이다.
가. 대웅전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하여 앉아 있다. 장대석을 쌓아 이룬 축대 위에 의젓하게 앉은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우리 나라에서 손꼽는 오래 된 건물이다. 1937년에 해체 수리를 할 때 중수년대가 적힌 붓글씨가 발견되어 이 건물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건립년대가 분명하여 우리 나라 고건축의 기준이 되며 그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하여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다른 건물이 정면이 더 넓은 것과는 수효 면에서 다르다. 그러나 건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면은 한 칸에 문짝이 셋이나 달리도록 칸살이 넓고 옆면은 칸살이 매우 좁다. 그래도 대웅전은 비교적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다. 이처럼 정면 칸살이 넓은 것은 들이 넓어 개방적인 충청남도 지역 건축의 한 특성이다.
이 건물이 고식을 보여 주는 특징 하나는 기둥이 뚜렷한 배흘림을 하고 있는 점이다. 대웅전 옆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고주(高柱)를 보면 그 특징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 한 가지 공포 구성이 주심포라는 점이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두어 지붕의 무게를 받는 주심포 양식은 화려하지 않은 건물에 썼으며 고려 시대, 조선 초기 건물에 주로 남아 있다. 공포가 단순하지만 이 건물은 11량이나 되어 지붕이 큰 편이며 그러므로 맞배지붕으로 엄정하게 처리했다. 맞배지붕과 11량의 아름다움은 옆에서 보면 잘 드러난다.
창방 위쪽 기둥머리에는 파련 모양의 받침을 달아서 항아리 모양의 충량을 받았으며 그 위에 다시 파련대공을 얹어 고주가 받고 있는 가로부재를 받게 했다. 그 위에 지붕의 무게를 받는 우미량이 있다. 이런 모든 장치는 지붕의 무게가 기둥에 골고루 분산하여 전달되도록 고안된 것이면서도 드러나는 면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도록 정교하게 치장되었다. 그러면서 가로선과 세로선, 대각선이 빚어내는 세모와 네모의 비례가 황금비례를 이루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고려 시대에는 벽화로 화려하게 치장했을 벽면에는 단순하게 노란 칠이 되어 있어 부재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우미량이나 파련대공의 우아한 곡선은 이 건물이 백제계 건축의 맛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다.
지금은 마루가 덮여 있으나 고려 때의 건물들이 그렇듯이 원래는 전돌이 깔려 있다.
나. 대웅전 벽화
대웅전 부재들 사이에 예전에는 작은 벽화가 있어 장엄에 큰 몫을 했다. 1937년 수리 때에 공양한 꽃꽂이, 작은 부처와 나한들, 극락조, 악기를 타는 비천 등 많은 벽화들이 발견되어 사람들을 찬탄하게 했다. 악기를 타는 비천은 풍만한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와 손, 유연한 자태와 힘차게 펄럭이는 옷자락 등이 매우 생동하는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으며 꽃꽂이 그림은 수반처럼 생긴 도자기에 홍련, 백련과 여러 야생화가 한아름 소담스럽게 꽂혀 있는 사실적인 그림으로서 고려 벽화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수리할 때에 떼어놔 두었던 벽화가 한국전쟁 때에 부서져 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불행중 다행인지 모사한 그림 몇 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7. 임존성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봉수산 거의 정상부까지 난 가파른 산길을 아홉 굽이 돌아 숨차게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장대한 성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이곳 대흥 임존성은 백제 시대에는 수도 경비의 외곽 기지였으나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로서, 그마저 스러져 버린 뒤 후삼국 때에는 다시 견훤과 왕건의 겨루었던 곳으로 깊은 시름을 담아온 곳이다. 이곳과 함께 부흥운동의 주요한 근거지였던 주류성은 서천의 건지산성으로 추정한다.
높이 484m인 봉수산과 그 동쪽 900m쯤에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이어서 한편으로는 봉수산성이라고도 한다. 산 아래로 예당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데, 옛날에는 그 아래로 흐르는 무한천을 통해 바닷물도 들어왔다고 한다.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석축산성으로 안으로는 흙을 파내서 다지고, 밖으로는 축대를 쌓는 방식으로 성을 쌓은 내탁외축(內托畏築)형이다. 주변에 돌이 많아 돌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듯 하다. 온전히 남아 있는 동북쪽 성벽높이가 최대 4.2m에 이르러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또한 까마득하다. 백제 시대 최대의 테뫼형 산성으로 산등성이를 둘러 성벽이 이어졌으니, 그 구불거리는 곡선이 햇빛 받아 빛나는 모습은 퍽 아름답다. 둘레가 2.450m나 되어서 산을 오르내리는 것까지 해서 가벼운 등산로로도 괜찮다. 성 안쪽으로도 7~8m에 이르는 호를 둘러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다. 백제 때의 성이 이만큼 견실하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 사적 제90호이다.
세계에 하나뿐인 수정식 성인데, 이는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성안에 모았다가 적이 공격할 때에 물꼬를 터뜨려 1차로 곤경에 빠뜨리고 나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남쪽 성벽에는 수구도 있어 물이 흘러나간 자리를 보여준다. 수구 쪽으로는 물이 잘 흐르도록 폭 60cm 깊이 90cm의 도랑을 팠고 그 위를 판석으로 덮었다.
남쪽 성문 자리에 거대한 석축이 있어서 그 흔적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성 안은 경사를 약간 이루면서도 평평한 넓은 분지인데 넓이가 28만 8,000평에 이른다. 계단식으로 된 건물터도 곳곳에 있고, 우물자리도 있다.
그만큼 높은 산 위까지 오르기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그토록 깎아지른 성벽을 공격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방어에는 유리한 고지였겠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지키는 자의 의지가 굳지 못하면 소용없는 노릇이다. 이 대흥성은 성 안 사람들이 내분으로 인해 죽고 죽이고 항복하는 통에 당군에게 내주고 말았으니 그로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고 유민들의 피어린 한숨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