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필통과 맨드라미 사랑
전 해주
그림을 그리려고 찍어둔 사진을 꺼냈다. 개심사에 갔을 때 절문 옆에 피어있던 맨드라미 군락이다.
붉디붉은 선홍빛이 만지면 금방 손에 배어나올 듯하다. 붓으로 화폭 가득히 메워지는 저 열정적인 색 아래에 앉으면
그리운 사람을 온 가슴을 다 바쳐 그리워하고 싶다. 오늘 따라 저 붉은색이 내 가슴을 더욱 아릿하게 찌른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이면 우리집 화단에도 맨드라미가 피었다.
뜰 안 가득히 핀 맨드라미가 유난히 핏빛으로 붉었던 그해 여름 어느 날, 아버지는 아침 일찍 대구로 몇 주 간 출장을 떠나셨다.
다녀오는 날에 평소 가지고 싶어 졸랐던 자석필통을 사오겠다고 하셨기에 나는 아버지의 선물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제 나도 짝궁 친구가 가진 이쁜 필통을 갖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밤중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대문간을 자주 드나드셨다. 우리 또한 기다림에 지쳐 설핏 잠이 들었다.
잠결에 비명소리가 들려 화들짝 눈을 떴다.
"악! 여보."
어머니의 놀란 목소리였다. 선잠에서 깬 우리는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며 아버지를 부축하고 있고, 전등에 비친 아버지의 러닝셔츠에는 맨드라미빛 피가 군데군데 묻어나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린 채 잘 걷지도 못했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 아버지를 부르며 울먹였다.
아버지는 우리를 바라보며 "걱정마라, 나 괜찮다.”고 하셨다. 생채기가 난 얼굴로 가늠하건데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간신히 아랫목에 누운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우리는 그 정황에도 혹시 선물이 있을까 하고 연신 안방을 기웃거렸다. 어머니가 나와 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검지를 입에 갖다 대셨다.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다음날, 못 일어나실 줄 알았던 아버지는 의외로 거뜬히 일어나셨다.
“괜찮으세요?”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침 밥상에 둘러앉아 아버지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출장 마지막 날, 수중의 돈을 거의 털어 선물 사는데 썼다.
한 손엔 출장 가방을, 다른 손엔 선물 꾸러미를 들고 마지막 완행열차표를 샀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아뿔사!” 선물 보따리를 매표소에 두고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순간 오직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눈치를 챈 열차 안 사람들이 술렁였다.
아버지는 우선 양복저고리를 열차 밖으로 휙 날렸다. 그리고는 난간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밖으로 몸을 던졌다.
남달리 실험정신이 강했던 아버지는 속으로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열차의 속도와 비례하듯 달리는 방향으로 날렵하게 뛰어내리는 동시에 땅 위에 몸을 살짝 궁굴리기만 하면
넘어지더라도 별로 다치지는 않으리라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이론적으로 꽤 그럴듯한 방법이었지만 불어난 체중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열차에서 사람이 뛰어내렸다는 연락을 받고 역무원들이 달려왔을 때 아버지는 몸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다행히도 아버지를 잘 아는 역무원이 있어 찢어진 러닝셔츠를 새것으로 갈아입혀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역무원은 바로 양복저고리는 찾아주었으나 선물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제대로 뛰어내려서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몸을 앞으로 구르면 되는데, 아 글쎄 엉덩이가 먼저 떨어지는 바람에 낭패를 본기라."
아버지는 자신의 용기 있는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내가 통로를 빠져나오자 어떤 할머니가 날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기라.
이번 선물은 여러 문방구를 돌아다니며 겨우 구한 것이라 무척 아깝더라고. 자석필통 뿐만 아니라 필통 안에 연필도 많이 들어 있다구"
나는 아버지가 말씀 도중 고통스러워 여러 번 숨을 멈추곤 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안 되었던지 당신의 무거운 엉덩이를 탓하시고는 껄껄껄 웃으셨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계시던 어머니가
“아이고, 그 할매가 당신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지만 않았어도 성공했을 낀데.” 하셨다.
아버지께 동조하는 어머니 말씀에 우리는 그만 웃음보를 터트렸다.
자신의 생사가 걸렸던 일을 두고 가족 앞에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
맨드라미를 그리며 그 말씀이 애잔한 그리움으로 밀려든다.
자석필통과 문방구에서 샀던 선물을 비록 갖다 주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보다 더 큰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붉은 빛 맨드라미의 타오르는 사랑을.
첫댓글 전해주선생님 감사합니다
발표 글 파일도 함께 공유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을비가 사그락 내립니다~^^
뵈올날 기다리며~~
네
제가 서둘러 올리느라~
많은 회원 들의 활발한 활동66
강동문인협회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