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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병 시절의 갖가지 사연들
초등학교 교사로서 첫 출발을 했던 문덕초등학교에서의 1년여의 세월이 어느덧 지나기가 무섭게 대한민국 남아(男兒)로서는 의당 거쳐야 할 곳, 바로 국토방위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 입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영 일자는 1965학년도가 거의 끝날 무렵인 1966년 1월 18일, 학교에 군 입대 휴직원을 제출하고 31사단 신병 훈련소에 입소하였다.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어딘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가득 차 있던 상태로 신병 훈련소 정문을 들어서고 있을 때 중학교 동기생인 친구와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었다.
"야! 너 ‘소정영’이지? 지금 군에 입대하는 거냐?”
친구의 당당한 물음에 나는 천길만길 낭떠러지에라도 떨어지는 것 같은 착잡한 심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 친구는 그 날 군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제대복을 입고 나오는 예비역 복장의 아주 늠름한 모습이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군에 입대하게 됐지? 대한민국 남자는 모두 한번씩 거쳐야 하는 거야. 처음에만 잘 적응하면 나중에는 저절로 돼”
라는 친구의 얘기를 뒤로하고 신병 훈련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군 입대에 필요한 신체검사 등 몇 가지 절차를 밟는데 이틀이 걸렸다. 그리고 1월20일 날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대한민국 육군으로서 첫출발을 내딪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신병 교육대로 숙소가 옮겨졌고 곧바로 신병 교육이 시작되었다.
정말 말로만 듣던 신병 훈련소의 훈련병 교육이 시작되었다. 옛 선배들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신병 훈련소의 훈련병 교육,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 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중에,
“너는 군대에 가면 밥도 다 못 먹고 빼앗기고 말텐데 정말 큰일이다.”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곤 하셨는데!
왜냐하면 밥을 너무도 느리게 먹어서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맨 마지막까지 먹고 있을 정도로 밥 먹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병 훈련소에서는 밥 먹는 속도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빨리 먹는 사람, 늦게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모두 같이 시작해서 거의 같은 시각에 끝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신병 훈련소를 거쳐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곳에서는 정말 모래도 삼키면 소화시킬 정도로 식욕이 왕성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점심식사 시간이었는데 오전 훈련을 끝마치고 기다렸던 식사시간이 돌아와 훈련병 모두가 내무반 침상에 가지런히 앉아서 식사 당번이 차려놓은 밥그릇을 쳐다보면서 조금이라도 많이 담긴 것 같은 밥그릇이 내 앞을 지나 옆자리로 전달되어 갈 때는 나도 모르게 그 밥그릇으로 시선이 쏠리곤 했던 그때 그 시절이었는데 훈련을 받고 있던 소대원 전원이 식사 배식을 받았음을 확인한 내무반장이
“식사개시” 라는 구령을 붙이자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고 일제히 복창하고 첫 숫가락을 먹으려는 순간,
“식사 끝” 이라는 내무반장의 앙칼스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너무나 당황스럽고 불안하여 모두들 밥을 먹으려다 말고 움츠리고 있을 때,
“0.5초 이내에 우물에 가서 식기를 씻고 선착순으로 연병장에 집합”
이라는 두 번째의 불호령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허지만 0.5초 이내에 식기를 씻은 다음 연병장에 선착순으로 집합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먹던 밥을 못다 먹고 집합한 훈련병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시절에는 고통스럽기만 했던 나날들이었는데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뒤바뀌어, 오히려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지나가버린 군 훈련병 시절!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2001년 8월
육군 군의학교 시절
6주간의 훈련병 교육을 끝마치고 드디어 어디론가 앞으로 내가 근무할 소속부대로 배속명령을 받을 날이 돌아왔다. 나는 어느 곳으로 팔려가게 될까? 무척 궁금하고 또한 기다려지기도 했다. 훈련병 시절의 마지막 점심을 끝마치고 곧바로 부대 연병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각자가 팔려갈 부대로 차출되어 가기 위해서였다.
초조하면서도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힘들고 생소하기만 했던 훈련병 생활이 드디어 마감되었다는 안도의 기쁨보다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팔려가야 할 앞으로의 생활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속성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해 보곤 한다.
저녁 해가 서산에 걸쳐 넘어가고 있을 무렵 육군하사 계급장을 부착한 호송병 한사람이 우리들 전출 대기병들이 도열하여 서있는 앞에 와서 부대이름과 전출자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홍길동, 김개똥‥‥ 하면서 한참을 부르는가 싶었는데 드디어 “소정영” 하고 내 이름도 힘차게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 8명 군의학교” 라고 하면서 앞으로 배속되어갈 소속 군부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너무도 기뻐서 하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 무렵에는 아무런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기도를 드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얼마 후 호송병의 인솔하에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다음 우리를 태우고 갈 군용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출발하고 있었고 얼마 후 도착한 곳은 송정리 기차역이었는데 그곳에서 중학교 동기생이었고 함께 보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인연(因緣)으로 훈련병 생활을 함께 하면서 늘 다정하게 지냈던 손옥균이라는 친구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너는 군의학교냐? 잘됐구나. 나는 3보충대야”
라고 하면서 눈시울을 울먹이며 나와 악수했던 그때 그 순간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된다. 얼마 후 우리는 기차를 타고 어둠을 뚫고 저녁 내내 달려가서 도착한 곳은 대구에 있는 육군 군의학교 연병장이었고 그때부터 육군 군의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의학교(軍醫學校)에서는 우리들이 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서 공부했던 것처럼 학과교육을 위주로 훌륭한 교실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신병 훈련소에서의 훈련 교육과는 너무나도 큰 대조가 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중대 본부 앞마당에 집합하여 학과 교육장으로 출강하면서 늘 불렀던 군의학교 교가(校歌)가 지금도 내 머리를 스쳐가면서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움으로 되세겨 지곤 한다.
“동해에 찬란한 태양을 받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
5천년 이어받은 젊은 우리는
인술(仁術)의 역군(役軍)이다. 평화에 사도(使徒)‥‥”
나는 지금도 가끔씩 이 노래를 혼자서 콧노래로 불러보며 젊은 날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려보곤 한다.
환자 간호법, 긴급환자 후송법, 일반적인 의료상식 등 군 생활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료상식들을 그때 군의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비록 그때는 어렵고 힘들어했었지만 그러나 잊혀질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되어 그때 그 시절로 나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2001년 8월
제 98육군병원 근무시절
군의학교에서 제98육군병원으로
6주간의 육군 군의학교에서의 교육기간도 어느덧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 부대 배치를 위한 학과교육평가 시험을 치루었는데 내 성적이 전체에서 3등을 했다는 통보와 함께 부대장 표창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성적우수자 상위부터 5위까지는 부대 배치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격려의 말씀도 들려주시어 나는 너무 좋아서 하늘에 감사를 드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저와 같은 기간에 입대하여 신병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도 모두들 오고 싶어 했던, 이곳 육군 군의학교에 선택되어 온 것만 해도 하늘의 특별한 가호(加護)가 있었기에 이루어 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저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정말 하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은혜에 보답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배워서 군의학교 교가의 가사 처럼 ‘인술의 역군이고 평화의 사도’로서 열과 성을 다하겠음을 약속드립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도를 끝마치고 98육군병원이 있다는 전라북도 전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부대를 출발하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군의학교의 이곳저곳들이 이제 막상 떠나려고 하니 오히려 그리움과 정겨움이 되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전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함양, 남원을 거쳐 어느새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인 전주에 도착하고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98육군병원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병원 앞에서 내려 병원 정문을 들어가면서 전입신고를 했다.
“육군 이병 소정영. 98육군병원에 배속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라고 큰 소리로 신고를 했는데 정문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위병들이 몇 차례씩 반복하여 전입신고를 시켰고 어쩔 수 없이 시키는데로 꼬박꼬박 전입신고를 했더니
“그래! 이제 됐다. 이 길로 곧장 가서 인사행정실로 가면 된다.” 라고 안내하여 주었다.
2001년 8월
제98육군병원 위생병이 되어
98육군병원에 배속되어 인사행정실에서 3일간을 대기했는데 아침저녁으로는 청소를 하고 낮에는 사역병으로 차출되어 이것저것들을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다가 드디어 3일만에 내가 앞으로 근무 할 곳으로 배속 특명이 하달되었다.
「외과 수술실」로 특명이 났다고 하면서 외과 본부로 인계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수술실로 안내되었고 그때부터 수술실 요원으로 근무가 시작되었다.
수술실에서 해야 할 일이란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사전준비를 해야 했고 또 수술중에는 각종 심부름과 수술 장비들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일과 수술이 끝난 다음에는 수술 뒷처리를 깔끔하게 처리하는 일이었다. 수술실에서 근무하는 사병이 3명이었는데 가장 선임자 한사람은 수술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약품 등의 입.출 내역을 기록하는 기장 요원으로서 활약을 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수술을 할 때는 간호장교와 군의관의 심부름을 하면서 대기하다가 수술이 끝나면 수술실 내?외부를 청소를 하고 그 날 사용했던 수술 기구들을 깨끗이 씻은 다음 수술셑트 별로 포장하여 소독까지 끝낸 뒤에 취침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거의 매일 수술 기구들을 씻고 닦은 뒤에 소독실에 가서 소독이 모두 끝나게 되면 밤11시가 넘어서야 끝이 나는 그야말로 고행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수술실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은 내가 모두 챙겨서 처리해야 했고 또한 외과 본부의 일까지도 돌보아야 하는 졸병 생활의 고단함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수술실에서 수술을 하다가 갑자기 간호장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소병사님! 약제과에 가서 ‘캡’ 하나 가져와요.”
“예, 그런데 ‘캡’이 무엇입니까?” 라고 다시 되물었더니 “CAP 즉 모자” 라는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웠던 'CAP' 마저도 다시 묻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수술실에서 사용하는 수천 개의 수술실 기구들을 모두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부르고 있었기에 갑작스럽게 처음 대하는 생소한 이름들을 들을 때마다 무엇인지 몰라서 허덕이곤 하였다.
그 후 수술 기구 및 장비 등의 이름들을 하루 빨리 알기 위하여 하나하나 노트에 메모하면서 알려고 노력했더니 두어 달 만에 거의 모든 업무를 파악 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수술실 업무 처리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1년여의 세월이 또 흘러가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추억 중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은 대한민국 남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자꾸만 다시 되돌아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임에 틀림없으리라.
2001년 8월
베트남 전투에 참전하다!
98육군병원에 전입되어 6개월 정도 근무하고 있을 무렵 나라에서는 주월 한국군 전투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고 백마부대가 월남에 파월하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이어서 월남 파병 장병들의 차출명령이 각 부대로 하달되었다. 내가 근무했던 98육군병원에서도 파월장병 차출 때문에 모든 병사들이 비상에 걸렸고 가급적 파월되지 않으려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는 적자생존의 분위기가 저절로 움터오고 있음을 직감 할 수 있었다.
그러고나서 또 몇 달이 지난 후에 주월 맹호부대 교체병력 차출이 매달 두세 명씩 계속해서 차출되어 가곤 하였는데 한번은 파월 차출 명령을 받은 한 병사가 부대를 탈영(脫營)해버린 일이 생기고 나서 파월 차출이 올 때마다 부대 전체가 뒤숭숭해지곤 하였다. 그런데 위생병으로 육군병원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일과시간에 업무를 처리하는 일보다 일과 후에 시작되는 내무반 생활이 훨씬 더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여름철 보다 겨울철이 훨씬 더 힘들었는데 그것은 내무반 난방 문제 해결을 위한 분탄난로(粉炭煖爐) 때문이었다. 분탄난로는 석탄 가루와 황토를 물을 붓고 잘 섞어 으깬 다음 난로 통에 차곡차곡 올려 쌓은 다음, 구멍을 뚫어 놓으면 불이 붙는 난방 방식인데 불이 꺼지기 전에 분탄(粉炭)을 갈아주어야 하는데도 불침번을 서는 병사가 잘못하여 분탄(粉炭) 갈아주는 시기를 놓쳐버리면 분탄(粉炭)을 갈아주어도 불은 저절로 꺼져버리곤 했는데 불이 꺼져 버린 내무반은 추위로 한기(寒氣)가 느껴져 잠을 잘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불침번을 섰던 졸병들은 빳다 방망이로 궁둥이를 얻어맞아 궁둥이가 피멍이 생겨 열흘 정도씩은 고통을 격곤 했었는데 나는 다른 것들은 모두 이겨낼 수 있었지만 빳다 방망이로 궁둥이 얻어맞는 기합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할까? 차라리 월남에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꼭 가야 할 곳이라면 차라리 지금 가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 아닌가?”
라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래 월남에 가자” 라고 결정하고 인사행정실에 들려 파월 지원 의사를 밝혔고 그로부터 2개월 정도의 훈련기간을 거친 후 월남에 파병되었다.
2001년 8월
맹호부대 용사가 되기까지
파월 지원 의사를 밝히기 위해 인사행정실에 들렸더니 “정말 월남에 지원하는 거지?” 라고 하면서 흔쾌히 받아 주었다. 그리고 파월 지원을 장려하기 위한 10일간의 보상 휴가를 다녀오도록 배려해 주었다. 휴가증을 받아들고 우선 내가 근무하고 있는 수술실에 와서 파월 지원을 했던 경과 이야기와 휴가증을 보여주었는데 수술실 고참 선배님들의 이야기는 사뭇 나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월남 파병 지원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다른과 병사들은 모두 파월 차출이 되더라도 우리 수술실 병사는 본인이 희망하지 않으면 결코 파월 되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즉시 파월 지원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벌써 먼 월남 땅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수술실 감독 장교와 외과과장 등 장교들까지 나서면서 적극 파월 지원 최소를 종용했지만 한번 마음먹은 내 뜻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다음날 10일간의 휴가증을 갖고 고향집에 내려갔는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은,
“춥다. 어서 들어오너라. 조금만 있으면 설날이 돌아오는데 그때 왔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 왔구나.”
“예! 지금 왔으니까 설(구정) 때는 못 오는 거죠!”
하면서 설 때는 못 온다는 암시적인 말을 하면서도 파월 지원을 했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어머니께 불효를 하고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말로만 듣던 먼 월남에 가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나서 먼 외국 땅에 가 볼 수 있고, 또한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로 활용하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10여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다시 부대로 귀대해야 하는 날자가 돌아와 동구 밖 큰길로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차를 타는 큰길까지 전송해 주시고 돌아서는 모습을 버스속에서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발견하곤 하였다.
2001년 8월
파월 교육대에서
전주에 있는 98육군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파월 교육대가 있었던 강원도 화천에 있는 오음리 파월 교육장에 도착 할 때는 1966년 12월 20일이 저물어지며 어둠이 짙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선 전주에 있을 때보다 훨씬 추워서 어려움이 많았고 낯설고 생소한 곳이라서 마음이 초조해 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강한 자신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리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드디어 12월 26일부터 파월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베트남 현지의 지형지물들을 만들어 놓고 실전과 같은 적응 훈련을 받는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실감하면서 그날그날 훈련에 임하였고 6주간의 훈련을 끝마치고 어느덧 말로만 듣던 월남땅으로 출발하기 위하여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춘천으로 향하는 날이 돌아왔다.
춘천으로‥‥
부산으로‥‥
월남으로‥‥
2001년 9월
파월장병 수송선에 승선하여
강원도 화천땅 오음리에서 출발한 우리들은 도보로 걷고 또 걸어서 드디어 춘천에 도착해보니 벌써 해가 서산에 넘어가려고 하는 오후 늦은 시각이 된 것 같았다. 승선 번호대로 기차를 타고 앉아 있노라니 저녁 9시가 될 무렵 우리를 태운 열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간단한 환송식과 함께 가족 면회 시간도 마련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월남에 간다는 소식을 집에는 물론이고 아무에게도 알리지를 않았으니 누구하나 면회 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같이 가는 전우들의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서로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가족 간의 애틋한 정을 마음속으로나마 만끽하면서 먼 남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태운 기차는 또 다시 출발하고 있었고 드디어 부산에 도착하여 우리를 월남에까지 태우고 갈 수송선(輸送船) 빅토리아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부산항 제3부두에서의 파월 장병 환송식!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두근거리면서 울적해짐을 실감하곤 한다. 수많은 부산시민들과 학생들…, 부산항 제3부두를 꽉 매운 사람, 사람들이 저마다 모두들 태극기를 흔들며,
“이기고 돌아오라 맹호부대 용사들아‥‥”
를 외치고 또 외치면서 군악대의 반주에 맞추어, 일제히 손을 흔들면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 아 ~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스킴도 잘 있고요, 미쓰리도 안녕히
온다는 기약이야 잊으랴마는
기다리는 순정만은 버리지마라 ‥‥”
얼마 동안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허탈감에 사로잡힌 체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바다에는 무심한 갈매기들만이 우리가 타고 가는 배 위를 맴돌고 있었고 갑판 위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전쟁터로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우주의 오묘한 진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아 지금도 그때 그 순간들을 생각하면 늘 그때가 그리워지곤 한다.
2001년 10월
맹호부대 용사가 되다.
우리를 태우고 간 미군 수송선은 4박5일 동안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달리고 또 달렸다. 배가 출발한지 몇 시간이 지나자 갑판 위에서 바라보이는 시야는 망망대해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쪽을 바라보아도 수평선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그런데 그 맞닿아 있는 수평선은 커다란 둥근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둥그스런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좋은 현장 체험학습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수평선이 둥그렇게 보이는 선상생활을 시작 한지 어느덧 5일째 되던 날 아침, 드디어 멀리 육지가 바라보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우리가 타고 있던 배는 어느새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정박 된 체 가만히 서 있음을 발견했고 그곳이 중부 월남에 위치한 퀴논 항구의 외항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집합 명령이 하달되더니 월남에서 근무할 소속 부대를 알려주는 특명 용지를 나누어주었고 그것을 보니 나는 맹호부대 1연대 의무중대 소속으로 배속되어 있었다.
“아~ 잘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스킴도 잘있고요 미스리도 안녕히…”
라는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달려왔던 그 베트남 땅! 이제 우리는 이곳 베트남 땅에서 씩씩한 한국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맹호부대 용사가 되어있었다.
2001년 10월
푸캇 이라는 곳에서
내가 근무했던 소속 부대는 맹호부대 1연대 의무중대였지만 실제로 근무했던 곳은 1연대 10중대 위생병으로 파견되어 10중대에서 실제 전투 작전에 참가하며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1연대 10중대는 故 강재구 소령이 지휘했던 부대로서 월남 파병을 위한 준비 교육 중에 부하 장병들이 수류탄 교육장에서 잘못 떨어진 수류탄을 강재구 중대장님이 감싸 안고 많은 장병들을 대신하여 장렬하게 산화했던 군인 정신의 귀감을 보여준 부대였기에 우리 중대를 특별하게 ‘재구부대’라고 명명하고 전방 부대에 위치하여 위험한 곳의 수색 작전은 물론이고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면 항상 가장 먼저 작전에 참가했던 부대 중의 하나였다.
1연대 의무중대에 배속된 나와 함께 왔던 교체 병력은 10여명 정도였는데 하룻밤을 자고 나니 그중 3명이 3대대 의무대로 배속 명령이 내려졌고 나도 그때 함께 뽑혀서 3대대로 갔는데 그곳에서 다시 하룻밤을 자고 나니 나는 10중대 위생병으로 파견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드디어 내가 복무할 맹호부대 1연대 10중대를 찾아가는 날 아침 대대 엠브런스를 타고 10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푸캇이라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야자수 나무숲을 지나고 바나나 밭과 파인애플 농장을 지나면서 여기가 과연 한국이 아닌 베트남이라는 곳인가보다’ 라는 이국적(異國的)인 정취를 느끼면서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허허 벌판에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안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는 한국군 주둔 지역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곳이 바로 내가 근무할 부대인가 보다”
하면서 10중대 의무실로 안내되어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의 제2의 군 생활인 월남에서의 군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1년 10월
맹호6호 작전을 회상하며
10중대에 배속되어온 나는 10중대 2소대 위생병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2소대 위생병이란 2소대가 참가하는 수색정찰, 야간 매복작전 등 모든 전투 활동에 소대장과 함께 참가하는 실제 전투병과 다름없는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어느 때는 대대 단위로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고, 연대 단위로 혹은 맹호사단 전체가 참가하는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내가 베트남에서 복무했던 1년여의 기간 중에서 가장 힘들었고 규모가 가장 켰으며 전투다운 작전을 했던 때는 맹호6호 작전이라고 명명되었던 맹호사단 전체병력이 전개했던 전투 작전이었다.
6월 초순에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작전이 모두 끝나고 부대에 돌아오니 어느덧 8월 초순이 지나고 있었으니 무려 60일 이상을 작전 지역이었던 중부 월남의 요충(要衝)지대였고 퀴논 항구의 배후(背後) 요새(要塞)였던 푸카산 일대에서 낮에는 푸카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베트공과 월맹 정규군(正規軍)을 상대로 소탕(掃蕩) 작전을 전개하였고 밤에는 적(敵)들이 다닐만한 곳에 야간매복(夜間埋伏)을 하면서 긴박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몇 가지 전투체험은 젊은 날에 겪었던 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하루는 푸카산 깊은 골짜기를 따라 수색과 정찰을 하면서 서서히 산 정상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10m앞쪽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따따땅 따따땅” 콩복는 듯한 요란한 총소리가 너무나 근접한 곳에서 우리를 향하여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맨 선두에 섰던 우리 병사들의 신음 소리와 함께
“위생병…… 위생병……” 하고 살려 달라는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 쪽에서도 대응 사격을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나는 제빨리 낮은 포복 자세로 위생병을 부르는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피아간(彼我間)에 서로 총 쏘는 소리가 빗발치듯 들려오고 있었지만 단 1초라도 빨리 도착하여 응급처치(應急處置)를 해야 우리 병사의 목숨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부상병이 있는 곳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었다.
얼마 후 총상(銃傷)을 입고 쓰러져 있는 우리 병사에게 다가가서 살펴보니 한사람은 가슴에 총상을 입고 위급한 상태에 있었으며 또 한사람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업드려 누워있었다.
“얘들아 괜찮아 이제 내가 왔으니 너희들은 꼭 완치(完治)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아”
하면서 즉시 압박붕대를 꺼내어 총상을 입은 곳을 응급 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가엾은 우리 병사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반드시 완쾌되어 부모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본인 스스로도 이와 같은 고통에서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갖도록 배려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서 응급 처치를 했는데 가슴에 총상을 입은 병사는 상태가 매우 위독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응급 처치가 끝난 뒤 소대장님께 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함을 알리고 즉시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를 기습 저격했던 베트공들도 우리 병사들의 용맹스런 대응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하늘에는 엠블런스 헬리콥터가 우리를 찾으려고 공중을 선회(旋回) 비행하고 있었다.
“소대장님 강응구 병사의 가슴에 총상이 매우 위급하니 제가 직접 6후송 병원에까지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소대장님께 보고 드리고 그 길로 작전 지역에서 퀴논에 있는 한국군이 운영하는 제6후송병원까지 환자와 함께 공수(空輸)되어 갔고 얼마 후 병원에 도착하여 두 사람의 전우(戰友)를 인계(引繼)하면서 꼭 완치(完治)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는데 그때 그 병원의 진료(診療) 체계(體系)가 위급한 환자가 도착했을 때 신속(迅速)히 진료(診療)에 임(臨)하고 있는 든든한 모습들을 확인(確認)하고 흡족(洽足)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1년 11월
푸카산 OP에서
맹호6호 작전이 끝나고 부대에 귀대하여 낮에는 부대가 위치해 있는 인근 촌락들을 수색 정찰을 하면서 한동안 별 다른 작전이 없이 부대 방어와 야간 매복 작전에만 치중하고 있을 때였는데 부대 앞에 있는 월남민간인 거주 지역에 나가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대대 의무대의 지원을 받아 군의관의 진료에 따라 우리 위생병들은 간단한 치료와 약을 조제하여 주는 봉사 활동의 기회를 갔게 되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 하루해가 넘어가도록 끝날 줄을 모르고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표정에 앞으로도 가급적 오늘과 같은 기회를 자주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 날의 일과를 끝마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있었는데 내가 복무하고 있었던 10중대의 중대 베이스 기지를 푸카산에 있는 하나의 산봉우리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으로 옮겨가면서 중대 베이스에서 외부로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는 헬리콥터를 타고 대대 본부를 거쳐 왕래하는 길밖에 없게 되어 한번쯤 더하고 싶었던 의료봉사활동이나 대민 지원사업에 나설 수 없게 되었으며 중대 베이스기지가 푸카산 OP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푸카산 일대의 경계 활동에만 치중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으며 월남에서의 생활도 어언 1년여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푸카산!
중부 월남의 전술적 요충지대였던 푸카산을 어느 쪽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전세(戰勢)가 결정적으로 유리해지기도 하고 불리해지기도 하는 정말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그 푸카산을 내가 근무했던 중대가 지키는 임무를 띠고 수색과 정찰을 계속했던 그때의 그 기억들이 아련한 추억이 되어 젊은 날의 그리움으로 되세겨 지곤 한다.
2001년 11월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던 귀국 길
1년 전 베트남 땅에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들이 신기롭기만 했었는데 이제 다시 이곳 월남에서의 복무의 임무를 훌륭히 끝마치고 내 고향이 있고 부모 형제가 기다리고 있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친지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 다시 귀환하기 위하여 귀국선에 몸을 싣고 바라보는 퀴논 항구의 풍경들은 사뭇 희망의 등대처럼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군 생활의 남은 임기를 보람 있게 끝마치고 내가 가야할 교육자의 길을 훌륭히 걸을 수 있도록 밑받침이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도록 노력하려고 다짐하면서‥‥
어느새 우리를 태운 귀국선은 3박4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항에 접안 되어 있었다. 1년 전 우리가 부산항을 떠나면서 힘차게 노래했던
“아아 잘 있거라 부산 항구야
미쓰킴도 잘있고요 미스리도 안녕히”
를 목이 터져 라고 외쳐 부르면서 떠나갔던 그 부산 항구가 이제 다시 우리들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가슴 뿌듯하고 벅찬 환희를 맛보면서‥‥
우리는 돌아오고 있었다.
2001년 11월
휴가증을 받아들고 고향으로
월남에서 귀국하여 부산에 있었던 제 9 보충대에서 2박3일간을 대기하고 있다가 25일간의 휴가증을 받아들고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부산에서 광주까지는 군용열차를 이용하여 광주역에 도착했고 광주에서 내 고향 복내까지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버스를 타고 가는 고향 길은 유난히도 새롭고 반갑고 정다움이 넘치는 밝은 미소를 내게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면 무어라고 말씀드릴까?”
월남에 지원하여 파병되어 가면서도 말 한마디 못 드리고 가야만 했던 그때의 그 불효스런 송구함을 어떻게 사죄드릴까? 동생들에게는 무어라고 그 동안의 경과 이야기를 전해야 할까? 등등 상념에 잡혀 있노라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가 탔던 버스는 복내 장터 정류소에 도착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동네 어귀까지 걷고 있을 때 우리 마을의 몇 분 어른들을 만나 뵙게 되었고 그분들께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그 동안의 동네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마을을 향해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 저의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벌써 이렇게 어머니를 뵙고 인사드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고향집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2001년 12월
서울용강초등학교에서 소정영
제 63 육군병원에서
25일간의 귀국 보상 휴가를 보내고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했는데 그때 배속 받은 부대가 대전에 있었던 제63육군병원이었다. 새로운 부대 제63육군병원에 도착해보니 내가 근무할 부서는 정형외과 병실로 결정되어 있었고 그곳 정형외과 병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 보니 80여 병상이 모두 팔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입원되어 있는 정형외과 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근무했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근무하게 됨에 따라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80여명의 정형외과 환자들을 돌볼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받은 것 자체가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들여 즐거운 마음으로 근무하리라 굳게 다짐하였다.
나는 여기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80여명의 정형외과 환자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깨끗한 병실, 오순도순한 병실을 만드는데 내가 먼저 앞장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하루에 한번씩 꼭꼭 바닥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병실 바닥이 몰라보게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병실 바닥을 물걸레로 청소하기 시작한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부터 우리 병실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도 저절로 병실 바닥을 깨끗이 관리하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우리 정형외과 병동은 병원 전체에서도 가장 깨끗한 병동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서양 속담의 가르침처럼 내 자신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에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정형외과 병동의 분위기가 몰라보게 활기차고 오순도순 하고 정다운 분위기로 바꿔져가고 있음에 긍지를 느끼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병원 정형외과 병동이 몰라보게 깨끗하고 오순도순 하며 활기차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병실 분위기로 바뀌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또 다른 병동까지도 확산 되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근무하고 있는 동안 시간은 나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었고 드디어 군 생활을 마감하는 제대 특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1년 12월
아듀, 63병원
3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감하는 제대 특명이 하달되었다. 그동안 정들었던 병원 이곳저곳들이 이제 헤어져야 하는 석별의 정을 나누려고 하니 더욱더 아쉽고 그리워짐을 느끼곤 했다.
처음 전입했을 때는 그토록 서먹서먹하고 무엇이든지 까다롭기만 했었는데 이제 막상 제대특명을 받고 보니 어렵고 힘들고 까다롭기만 했던 일들이 오히려 그리워지고 아쉬움으로 뒤바뀌어지는 싫지 않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었다.
정형외과 병실에서 근무한지 6개월 정도였는데 그들과 쌓은 정(情)이 이처럼 애틋한 그리움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정형외과 병실 환자들이 마련한 송별연에 참가함을 마지막으로 대전에서의 군 생활을 마감하였다.
63병원이여 안녕‥‥
군 생활이여 안녕‥‥
2001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