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규칙 해설 : 마르크스의 이념과 현실의 괴리
국제노동자협회의 규칙은 카를 마르크스가 초안을 작성하여 중앙평의회에서 채택되었습니다. 원래 이 규칙은 임시 위원회의 프랑스측 위원들이 마련해 가져온 규약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특히 규약의 전문에 해당하는 고려사항을 대폭 수정하였지만, 규약의 조항들은 거의 그대로 두었습니다. 규약의 조항을 거의 그대로 둔 까닭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창립과 안정적 운용에 프랑스측 노동자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전문에 해당하는 고려사항에 두가지 핵심 이념을 추가하였습니다. 하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노동자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해서가 아니라 모든 계급지배를 철폐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해방은 노동계급이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마르크스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 사회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공산주의사회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뚜렷이 규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자본주의사회의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고 그것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는 것이 더 시급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현실의 운동이라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언명과 공산주의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몇군데에서의 규정이 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의 두 언명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모든 개개인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말 그대로 전면적으로 자유로운 사회가 실정적으로는 적어도 목표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점점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는 누구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확장해가는 과정을 아예 공산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개인들의 상태를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시를 쓴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먹어야 하는데,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 당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취미를 즐기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개인들이 모여사는 공동체를 공산주의사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한 계급이, 그 계급이 설령 지금까지 착취당하고 억압당해 온 계급이라 하더라도, 다른 계급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 새롭게 지배당하는 계급의 개인들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일부 개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사회를 결코 어떤 한 계급, 노동자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계급지배 자체가 사라진 사회이고, 모든 계급지배가 철폐된 사회라는 것, 그래서 노동자들은 모든 계급 지배의 철폐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 전개입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러한 사상은 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그렇게도 강하게 자유주의를 비판했던 것일까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폐지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는 결국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이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를 마음껏 착취하는 자유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산물의 분배에서 차지하는 몫이 공평해야 합니다. 그러나 생산수단 소유자들이 공평한 분배를 용인할 리가 없습니다. 천연자원과 생산물의 분배를 규제하는 시스템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이러한 정치권력은 결국 생산수단 소유자들이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권력을 그들로부터빼앗아 오지 않는 한 생산물의 공평한 분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개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 생산수단 소유자, 대지주와 브루주아틀이 장악하고있는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가 볼 때 국가란 계급적 착취를 위한 폭력 장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해방되고 그를 통해 사회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의 권력을 노동자들이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폭력 장치 자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국가론은 무정부주의와 유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국가를 아예 없앨 수 있을까요? 언급했듯이 국가는 지배 계급이 계급지배를 관철하는 폭력장치입니다. 지배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을 말합니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생산물과 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계급이니다. 그들은 물질적 부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폭력 장치들, 즉 군대와 경찰을 비롯해 학교와 교회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수단까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마치 철옹성과도 같이 국가는 결코 고장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 장치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역사상 최초로 자본주의사회에 이르러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그 과업을 성취할 있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프롤레타리아는 이전의 피지배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있게 자기계발을 위해 힘쓸 수 있게 되었고 대공업의 발달로 인해 마치 군대와도 같은 조직 훈련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농민이나 도시 자영업자가 중심인 소부르주아는 국가 전복을 위한 혁명 투쟁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특지 소브루주아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계급의 이해를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대항 투쟁에 나서더라도 지배계급에 큰 타격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계급 이익과 개인 이익이 일치하며 더욱이 단결된 파업이라는 무기를 활용하여 자본가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대공업사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여 투쟁에 나선다면 국가 전복이 가능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편혁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이 동시에 혁명을 일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전 지역이 자본주의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완전히 진행되었더라도 혁명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당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혁명은 시작되어 세계 전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반혁명(카운터 레볼루션)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보편혁명 사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아직 자본주의가 성숙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혁명이 불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에 마르크스는 격려 차원에서 꼭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답변한 적이 있을 뿐입니다.
탁월한 이론가이자 불세출의 실천가인 블라드미르 일리치 레닌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약간 수정합니다. 첫째로 약한 고리 이론입니다. 자본주의의 성장이 제국주의 단계에 들어선 20세기 초에는 자본주의 모국이 식민지를 착취함으로써 자국 내의 모순을 둔화시킬 것이므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선도적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모순과 식민지적 모순을 함께 가지고 있는 러시아와 같은 사회가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이고 따라서 혁명을 이 약한 고리를 타격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론적 수정은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어 혁명을 추진할 때, 그들 주변에 반봉건적 모순 심화로 신음하는 소농민과 도시 빈민을 비롯한 소브루주아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레닌은 이러한 수정을 거친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천하여 혁명을 일으켰고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혁명입니다. 역사상 최초로 피지배계급이 혁명에 성공해서 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감격적인 일대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제자 레닌은 러시아의 정치권력을 탈취한 후 곧바로 국가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을까요? 아시는 바와 같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선 당장 러시아 내의 반동적 지주와 자본가들의 반혁명을 저지해야 했습니다. 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의 확산을 방어하려는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레닌을 필두로 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권력을 약화시키기 보다는 강화해서 이 권력을 혁명주체 세력인 프롤레타리아가 독점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 그것입니다. 혁명 성공 후 우선 당장은 국가를 소멸하려 할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독점하여 다른 계급을 철저히 지배함으로써 반혁명 가능성을 차단해서 모든 계급 지배를 철폐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가혹한 계급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지주와 브루주아 등 반동세력 뿐만 아니라 함께 혁명에 참여했던 동지들까지 극심한 탄압과 감시가 가해졌습니다. 혁명의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부류의 개인들은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국가를 소멸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기는 커녕 국가는 건재하여 탄압과 감시를 추진하는 관료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생산수단을 집단화하여 노동력의 착취를 근원적으로 불가능하게 했지만, 생산력은 일시적 거품을 거쳐 폭락했으며, 그나마 생산물은 공평한 분배는 허울에 불과하고 관료들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이러다가 현실 사회주의는 무너졌던 것입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라는 현실 사회주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과 이다지도 큰 괴리를 남긴 채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괴리와 간격을 가져왔을까요?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을 놓쳤기에 결국 이런 실패를 겪게 되었을까요? 마르크스가 놓친 것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를 성급하게 계급 착취의 폭력 장치로 규정해 버린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당시 영국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보통 비밀 직접선 선거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선거권개혁운동입니다.당연히 마르크스도 이를 지지하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이 운동을 주도하도록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보통선거가 전면적으로 실시되어 노동자들이 선거에 참여한다면 국가 정책을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국가의 근본 성격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선거를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때문에 국가의 성격을 서서히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곧바로 국가를 없애지 않으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가 미국의 링컨 대통령 재선을 축하하는 서한을 다루면서 재론하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