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한 사람이 혼자 숲속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100m 앞에 굶주린 늑대가 나타나 달려듭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두려움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로 나누자면 두려움의 정도는 10입니다. 그런데 만약 손에 칼이나 창을 들고 있다면 두려움의 정도는 9 정도로 낮아지게 되고 만약 한 손에 창이 있고, 다른 손에는 횃불까지 있다면 두려움의 정도가 7이나 8 정도로 낮아지게 됩니다. 옆에 동행자가 있고 그 사람 손에도 창과 횃불이 들려 있다면 두려움의 정도는 5나 6 정도로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총을 가지고 있다면 두려움의 정도는 4로 낮아질 것입니다. 위험할 때 타고 도망갈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옆에 있다면 두려움은 3 정도일 것입니다. 무언가 힘이 되고 의지할 것이 있을수록 두려움은 낮아집니다. 만일 차 안에 있었다면 두려움은 거의 없을 것이고 다만 가슴만 덜컥 내려앉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옆에 무장한 군대가 수십 명 있었다면 두려움은커녕 늑대를 잡으려고 덤볐을 것입니다. 위르겐 횔러(Jurgen Holler)가 쓴 ‘성공의 비법’이라는 책에서 두려움의 상대성을 늑대를 만났을 때의 비유로 설명한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마귀는 ‘죽음’이라는 무기로 모두 사람을 겁박하여 두려움에 떨게 했고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을 가장 크게 느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귀는 이런 죽음이라는 무기를 휘둘리며 죄인 된 인간을 자기 밑에서 한평생 종노릇 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5)
무지, 무능해서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통과한 후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이셨고 부활을 통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평생 매여 종노릇 하던 모든 이를 놓아주셨습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 주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물에 빠진 사람을 산 사람이 건져낼 수 있을까요, 죽은 사람이 건져낼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죽어 아직 무덤에 있는 자가 누구를 구원하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이 누구를 구원한다는 말입니까? 무덤은 죽은 사람을 묻는 곳으로 죽었다는 증거이고 빈 무덤은 살아나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종교 창시자의 무덤을 성지로 자랑한다면 아직 죽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죽은 자가 누구를 구원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에 굳이 무덤을 자랑한다면 빈 무덤을 자랑할 뿐입니다.
두 사람이 초행길을 함께 걷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길을 모르면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나? 죽은 사람에게 물어야 하나? 그야 산 사람이지요. 그럼, 가장 중요한 내세의 길, 영원한 천국을 가는 길을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죽은 지 오래되어 지금도 무덤에 있는 그 죽은 사람에게 물어야 할까요,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물어야 할까요? 우리가 믿고 증거 할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