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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안의 눈물
미국과 베트남의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국군이 휘말려 들었습니다. 1964년 한국군이 월남에 파병할 때 나는 편안하게 대학을 다니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파월장병의 활약상, 분단국가로서 응당히 갖추어야할 군인의 실전경험, 공산게릴라군을 쳐부셔야 한다는 인식, 국가재건을 위해 곡 필요한 과정으로만 알고, 방송에서 라이따이안등이 나오면 그져 스쳐지나갔다.
이번 베트남 여행을 하면서 나의 잘못된 사고(思考)였음임을 알았다. 베트콩, 호찌민 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6.25전쟁 시 빨갱이 생각만 하였다. 그러나 24년이나 동남아 가이드를 한 000씨의 베트남인들의 호찌민 사랑과 국부로서의 인물됨, 우리나라 김구가 떠 올린다.
그리고 라이따이안의 삶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러주며 오늘이 라이따이안들이 한국에서 기술을 배우고 돌아오는 날이라 공항에는 환영 물결로 덥힐 것이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6.25 전쟁이 나고 미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 그 부산물로 ‘깜둥이, '튀기’라는 단어가 생겨나고 지금까지도 천대(賤待)와 멸시(蔑視)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라이따이안의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 주는가?
미군들은 전쟁 혼혈아들을 모두 본국으로 달리고 가 뒷바라지를 해 주었는데 우리나라는 내 몰라 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어 지금은 그 일부나마 한국으로 다려와 기술 교육을 시켜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 해주었다고 현지 가이드는 여러 번 고마워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은 우리가 거두어야 한다고???
<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네요!> ================================================================
~ 아래 들향기 님이 올린 내용을 읽고 눈물이 나와 올려봅니다~
제가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프로그램명은 SBS 스페셜이었지요. 그것도 정규 방송은 이미 지났고 컴퓨터에서 내려 받아 보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정리하여 제가 글을 써보지만 아이하나를 홀로 키우며 살아가는 어떤 여인이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며 연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취재 기자에게 피디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 말이 제의 가슴을 울리며 기어이 남자의 눈물샘을 자극하여 한 없이 울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왜 당신들이 미안합니까? 그대들이 왜 미안하다고 말합니까? 오히려 당신들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시궁창에 밀어 넣은 피해를 준 저도 한사람의 한국남자입니다. 진정 미안 합니다.
그리고 너무 부끄럽습니다. 들 향기 삼가 머리 숙어 사죄를 드립니다. 그리고 더더욱 부끄럽게 제 마음을 아리게 당신들은 기어이 만들고 마는 것입니까? 작게는 몇 년부터 많게는 30여년을 넘게 반드시 돌아온다는 거짓된 약속을 믿으며 재혼도 안하시고 아이들에게 없는 살림에도 한국어를 가르치며 그 아이들을 키우시며 원망도 했으련만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의 나라! 또 아버지에 대해서도 원망 섞인 말 한마디 안 하시며 어쩌면
그리도 아이들을 반듯하게 키우시다니요, 그리고 한없이 기다리기만 하십니까? 미안 합니다. 미안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희들 한국남자인 할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월남전이 언제였습니까? 맹호부대 청룡부대 국위를 선양한다고 마음으로 응원을 하고 자유대한의 긍지를 높이기도 했었던 그 이면에는 이처럼 그늘진 구석이 있었다는 것을 들 향기는 이제서야 알았다지만...
어쩌면 이미 지나간 옛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벌써 끝난 일이라고 생각 할 수도 치부 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슬픔과 그리움은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결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형입니다.
전쟁, 사랑, 그리고 생이별 라이 따이안은 그렇게 태어났다.
온다는 약속만을 믿고서 아들을 잘 키우라고 말한 아이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래도 괜찮은 혼담신청도 많이 들어 왔지만 모든 것을 거절하고 재혼도 하지 않고서 오늘 올까 내일이면 올까? 그대로 기다림의 세월이 3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더 가슴 아픈 일은 그러한 아픔을 어머니가 겪었는데 그 딸이 또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순서는 이렇게 됩니다. 월남과 월맹이 통일이 되었지요. 미국도 처음으로 베트남전쟁에서 패하여 남쪽의 월남이 북쪽의 월맹에게 져 베트남이 되었지요.
그렇게 수년을 흘러 개방이 되고 돈이 흘러들고 그리고 사랑. 배신. 그렇게 (新)라이 따이안이 태어나고 있다. 어쩌면 한국남자들은 사업이라는
이름하에 베트남에서 그 어머니에게 했던 일을 그 딸에게 똑같이 되풀이 합니다. 왜 용서받지 못할 일을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는 것 입니까?
어떤 라이 따이안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제가 성공했지만 아버지가 어려우시면 도와드리고 싶어요. 의류 공장을 운영하며 직원을 600여명을 거느린 “용엔비엣송”이라는 이름의 남자 분은 취재기자가 아버지를 미워하지 안했느냐! 물으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말을 한다.
아버지 안 미워했어요. 아마 살아 계시면 꼭 돌아오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했어요. 지금도 그 어머님은 생존해 계시더군요.
또 다른 분은 먹고 살기위하여 청소를 하고 쓰레기도 줍고 식당일을 하면서도 혹시라도 사진속의 아버지가 색이 바랠까보아 사진을 비닐 코팅까지 해서 30여년을 보관 했노라 는 애달픈 사연 청소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배고픔 속에 혼자 잠이 들고 학비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는 라이 따이한 그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30여년을 청소일하며 살았으나 이제는 손수레를 끌힘도 없어 현재 베트남에서 제일 못사는 사람들이 한다는 복권행상을 하시는 조 김마이 아주머니 다시 오겠다는 약속만을 믿으며 재혼도 안하시고 어려운 환경아래에서도 아들을 잘 키웠다는 말씀도 하시고
바로 연신 미안하다는 울먹이며 말을 했던 영어를 잘하여 영어통역을 하다 한국인 사업가를 알게 되었다는 응우앳안 이라는 이름의 여인 사업부진 때문에 신랑과 헤어지게 되었고 시댁에 먼저 가서 결혼 승낙을 받아오겠다며 떠난 남편이 그리 원망은 않지만 아빠 없이 아이를 키우려니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줄 때 또 아이의 학비가 없을 때가 제일 힘들었으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한국에서 남편이 재혼을 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미안합니다. 피디님! 미안합니다. 울면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들 향기의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병이 생겨서 약 없이는 살수가 없어 직장생활도 어렵다는 그녀 빨리 병이라도 나아서 하루빨리 몸을 추슬렀으면 하는 간절한 들 향기의 바램입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1개월 때 아이 아버지와 과 헤어지게 되었다는 (신) 라이 따이한 푸옹이라는 여인 그 여자 분의 아들(라웅) 그래도 남편이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분은 아빠가 엄마 많이 사랑했고 전쟁 때문에 오지 않았을 거라는 그녀들의 말. 아들이 방황할까봐 아버지이야기를 제대로 못했다는 신 라이 따이안은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출생신고 할 수 있게 최소한의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렁이라는 이름의 신 라이 따이안은 아침 6시면 일어나 출근을 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여 또 식당으로 출근하여 1시까지 일을 하고 4시간의 잠을 자고서 6시에 또 출근을 한다고 합니다.
김 상일님의 시가 흐르더군요. 조금 소개를 하자면.... 아버지 저희들을 기억 하시나요! 자식들을 위해 고생 하시는 어머니를 기억하시나요. 남겨진 핏줄 전쟁 속에서도 잘 키운 저희들을 기억하시나요.
이런 시가 흐르고 나서 흐느끼듯 애조 띤 아리랑이 흐릅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내 님은 날 버리고 가실 수 없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새벽이슬 눈물로 돌아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이러한 노래가 흐르며 방송은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
들 향기가 제안을 하자면 【라이 따이안】 그들도 한국인의 핏줄이 분명합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에서 나서서 올바른 실태 파악을 하고 직업교육과 함께 그네들을 위한 한국인 학교를 세웠으면 합니다.
흐르는 향기의 눈물은..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자판에 글씨가 흐릿해져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어요!
국가적인 정책으로 버려진 우리의 2세들을 구제할 길을 속히 찾아주었으면...
라이따이한이란?
라이따이한이란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혼혈아를 지칭하는 말이며 현재 베트남에는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며 살고 있는 라이따이한이 5000~2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노란 들국화의 향기가 흐르는 계절에 -들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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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다이안 극적으로 아버지와 전화 상봉~~
부인 이름은 NGO THI PAN THU ANH (1989 사망)
큰딸 Trang 1971년생, 둘째딸 Diem 1972년생, 셋째딸 Thai 1975년생...사진은 둘째딸.
파월기술자 BYS씨의 막내딸 Thai 양...생전에 그리던 아버지의 음성을 태어나서 처음 듣다.
극적인 사연...1975년 1월, 베트남에서 미국회사에 근무하던 B씨는 두딸과 부인을 데리고 회사 근무지따라 태국 방콕에 건너가서 4개월 정도 생활하다가, 사이공 은행에 조금 남은 돈 때문에 그 돈을 찾으러 부인이 두딸을 데리고 막내딸은 임신하여 배부른 상태로 1975년4월28일 사이공에 도착했으나 이틀만인 1975년 4월30일 자유월남이 패망하여 사회주의 체제가 되는 바람에 32년 세월동안 생이별하게 된다.
공산화된 지옥같은 베트남 땅에서 세 아이를 키우던 부인은 1989년 39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공산치하 그 고난의 세월 동안에 부인의 삶속에 많은 시련과 고통과 한을안고 세상을 떴을 것이다.
그리고 32년후 오늘 2007년 4월19일 베트남시간 오전 11시, 한국시간 13시, 호주시간 14시에 극적인 부녀지간에 전화 통화가 이루어져 호주와 베트남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같은 라이따이+한 처지인 베트남 김상일씨가 한국말 통역을 맡았습니다. 호주의 아버지 옆에도 월남말 통역을 하는 분이 계신다고 합니다. 눈물에서 눈물로 50분간 통화를 하였습니다.
헤어질때 뱃속에 있었던 셋째딸 입니다.
셋째딸 : 아빠 보고싶어요 엉 엉 엉 ...말을 하지 못한체...아빠사랑해요...엄마는 하늘나라에 있어요.
호주 아버지 : 그래 나도 보고싶다 내 딸들아....소리없는 흐느낌......
호주 아버지 : 이제 아빠가 너희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줄것이다. 그리고 빨리 상봉할 수 있도록 하겠다.
셋째딸 : 아빠 아무것도 필요없으니.. 빨리 아빠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호주 아버지 : 그래...그래...계속 흐느끼는 소리..... 김상일 씨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엉엉 운다.라이따이한 김상일씨는 한국에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아버지의 문전박대를 당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은 vietvet 사이트가 없었다면 불가능 한 일...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사람 너나없이 국적관계 없이 어린아이도 함께 울었습니다.
이제그만 다음세대에는 이런 슬픈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번 라이따이한의 아버지를 찾는데는 베트남에서는 남까페가 한국에서는
월남전과 한국 최진현전우,호주의베트남참전유공자회의 이윤화전우들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협조해주신 모든전우여러분 감사합니다. Saigon 에서 Saigon Kim.
첫댓글
눈물이 흐르네요. 안타까운 사연들....
ㅠ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