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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철도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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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관사마을 사람들 이야기 스크랩 성락희 어르신(84세)
첫마음 추천 0 조회 59 13.08.03 1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2>

 

철도관사마을이 내 고향이나 다름없어

 

성락희(84세), 철도 44년 근무

 

1930년. 전북 남원 출생

1944년. 순천철도 입사(15세)

1951년. 결혼(22세)

1957년. 기관사(28세)

1988년. 철도 퇴직

 

 

 

진짜 어렵게 생활했던 분들은 10년전에 다 돌아가셨는디...

 

 

철도퇴직자들의 모임인 철우회 사무실은 철도관사마을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철도운동장 건너편 철도노조 사무실 옆에 자리하고 있다. 1층 사무실은 항상 어른신들 예닐곱분이 신문도 보고 담소도 나누며 계시고, 2층 관사경로당은 십여분이 바둑, 장기를 두며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인터뷰하러 왔다는 이야기에 “우리같은 사람들헌티 머시 들을것이 있다고, 진짜 어렵게 어렵게 쭉 생활했던 분들은 한 10년전에 다 돌아가셨어. 그 분들이 살아계셨으면 좋았을텐데...”라며 말문을 여신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해방후에 들어오거나 60년대에 들어온 분들이 많아. 난 44년도에 들어왔는디, 그때는 여기가 일본사람들 관사라 한국사람들은 전혀 못들어왔어. 해방이 되고 그 사람들이 보따리 싸갖고 가부는 바람에 우리 한국 철도직원들이 여기 와서 살 게 된 거여.”

성락희(84세) 어르신이다. 전북 남원이 고향이고 1944년 11월 11일 열다섯의 나이로 순천철도에 입사한다. 해방전후의 순천철도와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을 이야기하는 몇 안되는 분이다.

 

 

아, 그때는 사람다운 대접을 못받았제

 

 

열다섯때 시험보고 들어왔지. 국어, 수학, 요새(요즘) 같으면 논문, 그때는 작문이지. 30문제 정도인가, 경쟁률이 2:1이었어. 그때는 솔직히 좋은 자리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갔고, 우리 같은 사람은 가난해서 못 배웠기 때문에 초등학교 나와갖고, 가서 뭐 시험 본 거이 어떻게 붙여주더만. 그래가지고 쭉 기관사까지 헌거지.

 

 

처음에 들어가면 증기기관(차) 청소부터 했어요. 그때는 일제 때, 뭐 있어요? 기름묻은 쌔까맣고 그런 기차를 막 번쩍번쩍하게 닦고 청소하는 것이 일이여. 그러고 한 6개월 정도 있다가 인자 그 승무를 하는데, 화부 아니야, 화부. 기관차 불을 때는 거지. 기관조사라고 기관차 불 때는 훈련을 해야 돼, 모형을 만들어 놓고. 꼭 기관차같이 이렇게 불 때는 걸 실물처럼 만들어 가지고 석탄을 때는 훈련을 상당기간 해요. 그러고나서 견습생으로 차를 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부터 견습에서 진짜 조수로 되려면 또 테스트를 해. 그래갖고 조수로 타고 댕기다가 기관사 시험을 봐요.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면 서울 중앙교육원, 철도학교 잉, 그때는 철도학교가 있었지, 거 가서 한 6개월 동안 공부를 하고 와야 인자 진짜 기관사가 되는 거요.”

 

 

그때는 철도를 움직이고 이렇게 했던 사람들이 다 일본 사람들이잖아요. 아, 그 에로사항은 다 말할 수 없어. 아 그거, 어떻게 말을 해야 될까. 참, 사람다운 대접을 못 받았다고 해야 돼. 그저 한 마디 해갖고 안 들으면 이거여.(주먹을 쥐며) 이거.

아, 뭐 바로, 한 마디해서 안 들으면 두 번째는 요거여.(주먹과 발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44년이면 몸도 약한데다가 아직 어렸을 때 아니여. 열다섯 살인께.

우리가 같은 민족끼리한테 그렇게 꾸지람 듣고, 뺨 한 대씩 맞고 한 건 괜찮은데, 그 놈들은 민족적으로다가 멸시도 하고 그냥 뭐 세 번, 두 마디도 안해. 한 마디 해갖고 안 통하면 차고 때리고, 일 잘 못하네 하면서 말이여.

 

 

아까 내가 차타기 전에 그 불땐 훈련을 받는다고 안했어요? 그것은, 지상에서 하거든. 그런데 실물을 타면 증기기관차 구조를 아는가 모르지마는, 뒤에는 석탄 차, 물 차요. 이쪽(앞쪽)엔 엔진부분이야 보이라잉(보일러). 그래 이렇게 연결해갖고 하나가 되는 거여. 그러면 가운데에 철판이 있으니까 그러면 흔들리잖아.

지상에서 하다가 실제로 타면 흔들리니까 중심을 잡기가 힘들어. 그것도 상당히 익숙해져야 해. 증기기관차는 증기로 가는 거 아니야. 증기가 많아야지만 속력도 내고 올라갈 땐 막 고압으로 올라가고 그러거든. 근데 불을 잘 못 때면 증기 소비량을 맞추질 못 해버려. 김이(증기) 덜 끌어올리니까. 보일라에 물이 펄펄 끓어야 힘이 많이 나는데, 불을 잘 못 때면 불이 시들해갖고는 증기 발생이 적을 거 아녀. 그럼 못 올라가는 거여. 그럼 쉬었다가 또 증기 올려 가고. 그러면 인자 불 못 떼서 그런다고 막 차고 때리고 그러는 거지.

완전히 군대식이라 잘못하면 삽으로 방댕이 안 맞은 사람이 없어. 납작한 삽이 있어. 그걸로 일본 지도원이. 겨울에도 그렇게 잔인했다고, 찬물 쫙 깔아놓고 엎드려 뻗쳐 시켜봐. 그런 거 애로사항이 많았지.”

 

 

지금이야 편하지, 그때 증기기관차 승무원들은 중노동이여, 중노동

 

 

해방 되고 일본놈들 싹 가버리고 그때도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보수하는데 기술이

부족하지, 또 자료 같은 것도 얼른 안되고. 그러다 보니까, 기차가 가다 쉬고 가다 쉬고 많이 했어.

 

 

그때는 불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 저녁에 불만 안 꺼지게 보고. 보일러 안 터지고. 물 안 떨어지게 하고, 그럼 뭐야, 저녁 내내 우리가 그걸 보는 거야 인제.

아, 그러고 거시기. 기관차에 모래가 필요해. 모래. 망에다가 자갈 없이 모래를 쳐갖고 철길에 깔거든. 공전을 안하게.

석탄도 올려줘야 해. 그 일은 탄수원이라고 또 있어.

어. 물도 올려줘야 해. 탄수라고 그래. 여기 저(순천역) 가서 보면 급수탑이라고 지금 높디 높은 거 하나 있을 거야, 거기 올라가 기관차에 탱크에다 물 담아주는 거지.

청소허는 사람 따로 있고, 보수허는 사람 따로 있고. 차타고 다니는 사람 따로 있고 그랬지.

 

 

해방되고 그 때는 나이가 어리니까 우리가 겪은 그 기관차 타고 댕긴 사람들이 겪은 애환은 말할 수 없어.

석탄 질이 나뿌지, 입으로 말할 수 없이 힘들었지. 가다가 못가면 쉬고 가고 쉬고 가고.

터널에 들어갈 때는 그대로 순조롭게 가도 거시기(연기) 들어 마시지.

그러지만 인제 그것이 가다가 힘이 부족하거나 또 거시기하면은 그 또 보통 애로가 아니여.

공전해불면 증기가 팡팡 튀고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것어. 막 등짝이 뜨겁고, 수건으로 막고. 그래도 불은 떼야 (하니까)증기가 있어야 가니까.

굴에 들어가면 대충 물이 새잖아. 그게 철길에가 떨어지믄 공전해분다말이여.(바퀴가 굴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회전한다는 것)

글믄 모래 들어있는 장치가 있어 모래를 철길에 딱 깔게 되있어. 모래가 잘 나오면 고생을 안해도 되는디 고놈이 고장 나불 때가 있어. 맥힐 때가 있어. 안 나와. 그럼 우리가 가서 쳐야(뿌려야) 돼. 굴 속에다 차 세워 놓고, 둘이 가서 철길에 깔아 놓고 올라와야 돼.

그러면 또 갈라믄 실패하고, 안되면 내려갔다가 탄력을 이용해서 또 올라가려고 하고, 손님들은 아우성이고, 그럼 손님들 코도 새카매. 굴속에서 그러다보면. 한 번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것도 어딘디. 이제 하다하다 안되면, 인자 탄력을 이용 할라고 해서 한번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그래서 가고 했지.

 

 

터널에서 질식사한 경우도 있었제. 요쪽에서는 그런 일이 없는데, 아 저기 저 안동. 안동가믄 죽령 그 똬리굴이라는데가 있어. 거가서 열차가 멈춰서 사람들이 많이 질식해서 죽었어.

 

 

1949년 8월 18일 오후 6시25분 경 서울발 안동행 중앙선 제505열차가 죽령터널 속에서 원인모를 사고로 정차했다.

이 사고로 승객 3백80여 명 중 48명이 연기에 질식해 사망하고 64명은 중태에 빠졌다. 마침 선로감시반이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긴급 연락했으나 사고발생 2시간30분만에 겨우 구조작업이 시작돼 인명피해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원인은 제3번 객차 후미와 제4번 객차 머리부분 사이에 기관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단양과 죽령 사이에 있는 이 터널은 그 길이가 6km나 돼 기차가 통과하는데 만 약15분이나 걸리는 남한 최장의 터널이다.

 

 

 

우리보단 젊은이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때 일은 당신네들 상상이상이야. 오뉴월에 불 앞에서 그것이 몇 천도여, 그것이. 그 온 거시기가 다 증기파이픈디 잉? 그거 뭐 말할 수 없지. 참말로.

차탈 때는 반팔은 못입어. 파이프에 살짝 닿으면 디는 거잖아요. 아, 이런데(팔을 가리키며) 많이 데였어. 근데 오래되니까 다 가셔버리는구만. 주로 여기가 많이 데여.

역무원들도 옛날에는 반팔이란 건 전혀 없었어. 여름에도 그렇고. 역무원들도 그랬고, 열차승무원들도 그랬고

 

 

뭐 큰 놈은 괜찮아. 여름에도 터우?미카(증기기관차 종류)같이 큰 놈은 괜찮은데 앞에 문 열어놓고 그러고 가면 괜찮은디. 겨울에 춥고 여름에 좀 시원한디.

경전선 그 광주까지 댕기는 거. 푸로라고 쬐깐한 거 있어. 에--(기관차 소리) 하고 댕겨. 꽉 맥혔어. 바람 한 점 들어올 때가 없어. 그걸 타면 여(겨드랑이)가 휘어져분다니까 여름에, 여가 휘어져 땀때기 열 때문에, 거짓말 같지.

용케 기관차 타는 기간이 시원할 때 앵기면(걸리면) 좋은디 돌아가면서 타니까 서로 안탈라 그래. 서로 시원한 놈 탈라고 하고. 근디 그렇게 근무가 돌아가니까, 하여튼 그 뭐여 그 놈 앵기면 죽어. 그 해 여름은 죽는 거여. 나같이 몸땡이 가는 놈은 허리가 휘어져. 흠, 인자 그런 고생을 했고.

 

 

그때 증기기관차 전라선 60키로가 최고속도여. 선로 최고속도.

겨울에는 아, 춥지. 불 옆에 있는다고 하더라도 불은 딱 열었다 닫았다 불 땔 때만 불이 필요하지. 겨울에는 보일러가 미쳐서 막 터지고 춥고 말도 못해. 인자 굴 속에 가서 언덕을 못 올라가서 공전한건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증기기관차 중 가장 큰거가 ‘미카’, 그 다음으로 ‘터우’, 가장 작은 게 ‘푸러’였다.)

 

 

인자 또 하나 예를 들어서 얘기하자면, 그 목숨 바쳐놓고 한 거야. 그 모래가 있어야 공전안하고 올라가요. 응?

그러면 견습 있으면 너이 아니여. 아까 기관사, 조수, 조수심득, 견습 이렇게 너이 탈 때가 있어.

그러믄 기관차 제일로 앞에 가서 앉아서 모자에다가 모래를 넣고 앉아서, 한 손으로는 요렇게 기관차 잡고 한 손으로는 요렇게 앉아서(모래 뿌리는 장치가 고장 났을 때 배전판에 앉아 손으로 직접 모래 뿌리는 행동을 묘사) 모래를 뿌려.

근데 굴 속에서 그런디 그걸 누가 알꺼여. 물은 떨어진디 그걸 넘어갈라고. 모래는 안나오니까. 거길 넘어가야 되는디. 거기만 넘어가면 괜찮거든. 그래서 기관차 앞에 가서 그러고 있단 말이여.

그거 참말로! 완전히 요렇게 되부는디.(머리가 반쪽으로 되는 흉내를 내며). 그거 만에 요소로(하나로) 쥐가 나서 놨다하면 꼭 요렇게 짜개질 판이여. 몸이. 그렇게 그 위험한 일도 하고 그랬어. 그 책임감이 커서 거기를 넘어갈라고. 긍게 꼭 그놈의 것이 꼭 다 와서 물이 떨어지는 데가 있거든. 불과 몇 미터 냄겨 놓고. 아이~ 사람 미쳐. 그런 애환이 있고 그랬어. 아이고, 우리보단 젊은이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6.25때 우리 동료도 죽고 겪을거 다 겪었어

 

 

대한민국 징병제도가 생겨갖고 우리 1930년생이 1기여. 근디 그 때 기관사나 기관조사들은 보류가 됐어. 아, 그래갖고 갈라면 징병 제1기로 가야 되는디 다행히 여기 댕기면서 면제 받은 거야. 그때도 정거장에 있는 분들은 갔어. 우리 기관차 사람들은 보류가 됐어.

여기서 딱 영장 나오면 철도직원들이 쌨어. 많잖아. 영장 받은 사람들이 소속별로 병사부 사령부가서 밤새도록 심사를 하는 거여. 그럼 병사부 사령부에서 “이 사람 안돼, 이 사람 가야 돼, 이 사람 됐어.” 그렇게 해가지고 아침에 보면 군에 갈 사람들은 싹 부르거든. 싹 부르고, “여기 남아있는 사람 가쇼.” 그러거든.(웃음)

가고 안가고 기준은 우리는 군사 요원으로 해서 좋은 거시기, 특수한 기술을 가졌다 해가지고 그래서 혜택을 본 것 같고. 그 정거장에나 음~ 또 저 그 객화차 보수원들잉 이런 분들은 갔고, 하여튼 기관사 기관조사는 보류가 됐어.

 

 

우리가 여기서 겪을 거 다 겪었어. 여순사건, 6.25, 4.19, 5.18 여기서 다 겪었어. 나는 고향에서 우리 나이로 열 다섯살 먹어서 내려왔잖아. 그래서 지금까지 산께로 난 여기가 고향이여.

6.25 때는 기관조사지. 그때 승무를 하면, 지금은 다이아(근무표)가 있지만 그때는 열차가 막 들쑥날쑥하니까 운전을 뭐 심하게 시켰어. 6.25 때는 피난할 때도 많았지. 그렁께 막 한때는 복잡했지.

 

아, 6.25 때는 인자 막 때려싸니까 낮에는 못댕겨.

주로 뭐 폭탄 실은 화물차 운행을 했지. 여객열차는 못다녔어.

6.25 때 (국군이) 완전히 후퇴해버리고 쟈들(인민군) 세계가 됐을 때 얘기여. 그때는 낮에는 차 움직일 수가 없어. 막 때려불고(폭격) 하니까 밤에 가. 밤에 가도 이렇게 (화구를) 열면 불이 비추잖아, 불 땔 때. 그럼 싹 가마때기 덮어. 불빛 안새게. 그래갖고 인자 가는 거여.

여기가 북한군한테 점령을 당했을 때, 북한군이 시키면 그대로 그냥 해야지. 뭐 어떡혀. 살라믄 해야지 뭐.

 

 

북한군도 기관사나 이런 사람들. 함부로 못해. 이용해먹을라 그랬겠지.

딴 소속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소속에서는 저녁에 되면 요리 나가고 저리 나가고 그런단 말이야. 전부 다잉. 필요에 따라서. 가면 막 5일씩 못나온 사람도 있고 6.25때잉. 안 나온 사람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사람이 적어. 그러다보면 여수 방면나가는 사람, 저 보성방면 나가는 사람, 남원방면 나가는 사람 이렇게 있었을 거 아녀. 그럼 며칠 씩 가서 있단 말이여. 낮에는 어떻게 하냐 하면 전부 굴에다 갖다놔. 불만 안 꺼지게 해놔. 인자 저녁에 화차 갖고 가려면 물고 딱 있다가 밤에 되면 활동한다고.

 

 

6.25 때 군사물자 싣고 가다가 경전선, 전라선에서 돌아가신 동료들이 몇 분 있어. 한 때는 쟤들이(인민군) 와갖고 주간에는 열차 움직이들 못하고 야간에만 움직이게 했고.

인천상륙 작전으로 유엔군 들어와가지고 그때는 낮에도 댕겼거든. 낮에 댕기면 필요한 물건 수송해야 되잖아. 그러면 도망 못간 빨치산들이 막 습격해분 거여. 불안해도 어떻게든 가야지. 자기 탈 자리가 되면 가야지.

 

 

나하고 동기생이여. 하필 그날 그 다이아(근무)에 지정이 돼갖고 나갔단 말이여. 광주 가는 데 산 절벽이고 이렇게 돌아가는 데여. 저짝에는 냇가가 흐르고 있고. 에- 하고 다니는 게 있어. 뿌로(증기기관차)라고 해갖고.

광주행 기관사가 근디 그 때 말 들으니까잉. 빨치산들이 와갖고 동네사람 잡아다가 야간에 철길을 파버렸어. 기관사가 보면 이상이 없지. 가다가 둬 바퀴 궁구러갖고 냇가 상에 요러고(쳐박혀) 있어. 기관차가 하늘을 보고 있어. 거기서 증기파이프가 터졌어. 막 차가 공굴다보니까. 그래서 파싹 익어갖고 내 동기 하나가 거기서 그냥 죽었어.

 

 

아, 또 어떤 기관사는 습격으로 조준 하니께 요거(총) 맞고 죽었을 거야. 그리고 내 동기하나는 그 파이프가 터져갖고 김으로 그냥 한 번에 익어가 죽고, 또 한사람은 목숨을 구해갖고 왔는디 싹 익어부렀어. 그래갖고 한 오년? 요기 철도 뭐 유치원 진다고 공사하는데 있을 꺼야. 그거 철도병원이라. 철도 직원들만 갈 수 있는 병원인디, 거기서 오년 더 있었지. 근근히 목숨만 건져갖고 조금 댕기다가 일찌감치 죽어불드만. 그런 일이 있었고, 전라선 나가다가 죽고, 희생 많이 당했어.

 

 

아, 6.25 때 저쪽에 시설공단 있는데, (거기가) 순천지방철도청이거든. 그 6.25때 때려부렀어. 인자 훼손돼갖고 철도청 그대로 운영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인자 요리(현재, 철도아파트) 왔당게. 청이. 구락부 있는데 거기 가청사, 여기 철도청이었당께.

 

 

아이고, 생활은 힘들었제

 

 

44년도에 첫봉급이 제가 기억으로잉. 29원인가 받았을 거여. 내 기억이. 29원. 알송알송하긴 한데, 봉급을 받아가지고 일제 때는 쌀 한가마니는 살 수 있었어.

그때만 하더라도 쌀 한가마니는 살 수 있었고, 해방되고 어려울 때 쌀 한가마니도 못사고.

 

 

내가 스물두살에 결혼했는디 우리 집사람은 시집와갖고 일편단심 나만 보고 살아. 지금이야 뭐 다른데 직장갖고 그러지, 옛날엔 뭐 내가 직장갖고 싶다고 뭐 그런거 없어.

해방 막 되고 밀수품이 한창 막 일본서 들어오고 그때 밀수품이 성행했어. 주로 인자 여자들한테 필요한 거, 화장품, 빠라소로(파라솔) 그 때 여수로 막 엄청 들어왔지. 여수서는 여기로 다 냄길대로 냄기고 제일로 끝판에 해갖고 이득이 적은 데여. 긍께 여서 순천사람 아닌 다른 사람이 하나 구하고 싶다믄 그놈 구해주고 좀 붙이고 그러고. 또 한때는 저 남원지방에 소금이 귀할 때가 있었어. 소금도 가져가서 조금 붙이고 주고 그렇게 했제. 아 그때 뭐 그런 것도 하고.

 

 

그래가지고 인자 어디서 풀렸냐. 경부선에서 인명 피해사고가 크게 났어. 복선에서는 뒤에서 받은 것이 위험하거든, 근데 경부선에서 그런 사고가 나서 인명피해가 많이 났어요.

그때 언제 사곤가? 69년인가. 박대통령이 기관사들한테 싹 사고 원인분석해서 청와대에 보고서가 들어갈 거 아니야. 박정희 대통령이 ‘기관사들한테 파격적인 대우를 해라.’ 그래서 그때 상당히 많은 돈을 올려줬어. 그때부터 ‘운전수당’이 나왔어. 지금도 나오고 있어. 기관사들한테만 주는 거여. 조수는 안줘. 그때부터 풀렸지.

 

 

내가 집사고 빚을 졌거든. 아이~ 뭐 이자주고 어쩌고 하면, 그때도 이자가 고리(高利)여. 이자주고 어쩌고 나면 힘들어, 다음 달까지 못써. 하~ 그러니까 집사람이 행상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고생해서 살았는데, 운전수당을 받고나서 물건사고 전부 외상 긁어놓고잉. 흠, 그래도 가면 공무원이면 외상도 많이 줬응게. 큰 돈 외상은 아니지. 생필품 같은 거. 또 막걸리를 먹고 적어놓으면 25일날 월급 들어오면 돈 주고 그럴 때가 있었거든.

 

 

운전수당 막 나온 첫달이여. 그때 내 기억으로 봐서는 통일배(벼) 쌀이 나올 때야. 기억이 낭가 모르지만, 통일배 쌀금이 싸서 그랬는가 몰라도 운전수당이랑 월급이랑 합하니까, 통일배 쌀로 해서 열가마니를 사왔더더라고. 아따 그냥 살겄대.

통일배 쌀하고 일반미 쌀하고 가격차이가 많이 났어, 그때. 통일배 쌀이 싸요. 그때. 한 때는 그럴 때가 있었어.

 

1969년 1월 31일 오전 11시 55분경, 경부선 천안역 남쪽 500m지점에서 정차중인 남원발 서울행 12호 완행열차를 부산발 서울행 1호 청룡호가 추돌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41명이 사망하고, 102명이 중경상(중상 58명, 경상 44명)을 입었다.

이 추돌사고로 12호 완행열차의 맨 뒷 2등객차가 타오름 현상을 일으켜 3등객차를 약 50%이상 넘게 덮쳤다. 이 바람에 이 객차에 타고 있던 승객의 대부분이 2등객차에 깔려 즉사하거나 객차내 시설물에 깔려버리게 되어 인명피해가 매우 컸다.

 

 

해방되고 나서부터 관사에서 쭉 살았제

 

 

하여튼 나는 일제 일 년간은 집에서 이렇게 통근을 허다가 일본애들에게 맞기도 많이 하고 그랬고, 해방되고는 여기 승무원 숙소라고 있을 거야.

여기도 하나 있었어. 여기(지금의 조곡동 지역아동센터 부근)는 지금 전부 민간인들이 불하해갖고 민간인들이 개조해갖고 사는 데, 일합숙이여. 정거정, 열차사무소, 차장들 독신자들 거시기고. 일본애들이 가니까 방이 비니까 거기 가서 살았어. 긍께 여기서(조곡동) 해방되고부터 여기서 살았다고 봐야지.

(저기는) 이합숙(지금의 승무원숙사 자리)....여기는 주로 일본놈들, 기관사, 기관조사들, 독신자 숙소여.

 

 

해방되고부터 여기서 살았다고 봐야지. 요 근방에서. 여기서 살면서 결혼도 한거고.

그 때 해방되고는 전부 총각들이여. 그러니께 인자 한 방에 서로 끼리끼리,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둘이, 서이, 많은덴 너이까지 한 방에 같이 있었어. 우리 기관차 승무원들, 순천 사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여수살고 보성살고 남원살고 이런 사람들은 독신생활을 하잖아.

방이 흠~ 다다미 알지? 다다미 여덟개짜리가 있고 여섯 장짜리가 있고. 한 장이 문짝만 한 거 있어.

여섯 장짜리에 그 보통 서이 살고, 여덟 장짜리에 너이 있고.

여덟 장짜리에 인자 서이 있는데도 있고, 매일 있는 거 아니잖어. 너이지만 다 너이 한 번에 못자. 어쩌다가 한번 만날 수가 있는 디 차타고 나가버리고 그러니까. 늦게 들어오고 새벽에 나가고 하니까 너이 한 번에 잘 때가 드물어.

 

 

방이 일본식 다다미방이면 거기에 쭉 복도식이여. 내가 23호에서 산 기억이 나는디. 총각 때. 25 26 27 한 30개 있었나봐.

서이면 서이 너이면 너이 살다가 장가가잖아. 결혼하고는 인자 나가서 방 얻어가 둘이서 사는 거지.

우리 서이가 포기할 순 없잖아. 결혼 늦으막히 했다고 해야 할까. 경우에 따라서. 그니까 제일로 늦게까지 거기 있는 사람이 방을 차지 한 거여.

혼자 있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돼갖고 그 때 적산지다 해가지고 전부 불하를 해부렀거든. 아, 그때는 이거 뭐 적산가옥이라 싼 편이었지. 큰 부담이 없었지.

나도 거기서 늦게까지 남아갖고 불하를 받아서 살다가 장가 가갖고, 방 하나에 둘이 살고 앞에다가 부엌하나 만들어갖고 살고 그랬지.

그러다가 어떻게 애들도 있고 하다 보니까 승무원 숙소 그건 팔아불고 애들도 크고 그래서 관사로 이사 온 거여.

 

 

개울 양 옆으로 벚꽃나무가 쫘악 다 있었어.

 

 

지금은 복개해버렸어요. 그때는 길 양옆으로 벚꽃나무가 쫘악 다 있었어.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고 일본 애들이 여기서 저 관사 터 닦아가면서 개울을 만든 거여. 물도 많이 흐르는 게 아니여. 양쪽에 벚꽃나무가 쫙~ 좋았어. 해방이 되고 오래 살다봉께 복개도 해갖고 집 안에서 쓰는 하수구가 전부 요리(개울) 빠지게끔 설계가 돼있어.

 

 

나는 화투, 술하고는 옆에도 못가. 그래서 쉬는 날엔 여기(철도 노동조합 호남지방본부)에서 당구대를 운영을 했어. 당구 고것도 좀 하다가, 한 때 그거에 바짝 유행이 돼갖고 춤도 좀 추다가. 술을 못 먹으니까 난 술친구가 한 개도 없응께 고독해.

그때 술안주가 흔하들 안했어. 어려울 때 아녀. 해방되고. 여름철에 술 먹는 사람들 보면 열무김치 시리신 놈에 막걸리, 소주 뭐 이렇게 없어. 주로 김치에 막걸리, 돼지고기나 이런 건 그땐 특별안주지.

 

 

여기는 주거지역의 목적 말고 상가나 이런 것들이 없어. 그래서 여기가 발전이 안 되는 거여.

전부 뭐 요런 집이여. 뭐 똑같이 다 전부 요런 집 빼놓고 있는 건, 전부 개인들이 와서 개조하고 뜯어 불고 새로 짓고 한 거여.

여가 팔십 몇 호까지 있어. 긍께로 하나가 두 세대 아니여. 지금 하나가 두 집이거든. 요(관사) 한 채가 1,2가 있단 말이여. 그래서 두 집이 살아. 두 집인 거여. 그러다보니까 81호까진가 있어. 일본놈들이 여기서 160세대는 최소한으로 살았다 이 얘기여.

한 가족에 두명, 그다음에 애 하나씩만 잡으면 160, 320, 여기에 400명 정도 살았던 거여. 애들까지 하면. 그때 일제 때.

 

 

우리집사람 귀환동포라, 하~ 고생많이 했어

 

 

 

 

우리 집사람 자랑을 좀 헐라면은, 일본서 나왔어, 해방되고. 출생지가 일본이여. 그래갖고 하~ 고생 많이 했어.

장인장모가 일본에 가서 일본서 낳고 일본서 살고 해방되고 나왔어. 그때 해방 막 되고는 기가 막히게 어려웠거든, 일본서 번 돈 갖고 다 까먹어불고 고생 많이 해서 살았다고. 그래서 조혼을 했어. 나 스물두살이고 집사람 열일곱살이고 그랬어. 그때만 하더라도 뭐 일곱여덟되면 다 결혼 할 때니까. 51년도에 했나?

 

 

집 근처에 일가친척이 한 분 살았어. 여기보다는 자기 집이 나응께로 “무료로 와서 살아라.” 그러더만. 저 사람이 일본서 나와 가지고 한국풍속에 서툴러. 한국말도 어려운 말은 지금도 못해. 혀가 잘 안돌아가. 악센트가 하~ 못고치드만 못고쳐.

그 분이 나이가 많아.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남원에 계시고 나하고 집사람이 둘이 상께로. 여기 오면 내가 며느리 같이 잘 돌봐줄테니까 한국 풍속도 잘 모르고 그렁께. 가만 있어보니 그것도 그래. 돈 주고 간 것 아니고 빈 집이 하나 있응께로. 가서 봉께로 부엌도 따로 있고 딴 집 같혀. 집이 크고. 그래서 거가서 한 2년 살았나.

 

 

아들, 딸 낳고 살다봉께 여기 사람이 되브렀지.

 

 

44년도에 순천서 직장 가졌지만 여거(관사) 들어와보들 못했어. 해방되고 인자 일본사람들 가고 그러니께 인자 들어왔지.

직장이 청도 있고 정거장도 있고 열차하고 기관차, 객화차, 보선, 전기,건축 이렇게 소속이 있는디. 다 못 쓰잖아. 일본사람이라도 다잉. 그러니까 그 때 소속 별로, 인원별로 비율로 해서 몇 채 몇 채씩 주는 거여. 그러면 우에서부터 세야할 것 아니여. 순서대로, 직위에 따라서. 그렁께 해방이 되고 (일본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그 자기소속에 일본 놈들이 산 사람 집이 있을 것 아니여. 그러면 한국사람들이 그 직위를 인계를 받아가지고 있응께, 그 사람들이 주로 와서 많이 살았지.

전근 가면 비워줘야지. 다음 올 사람한테. 긍께 재수 있는 사람은 불하기간이 앵겨가지고 불하받아가지고, 자기 집 있고 딴 데 가잉. 그래서 자기가 권리가 있응께. 불하받을 권리가 있잖아. 그럼 불하받아가지고 팔아서 돈 냄긴 사람도 있고.

 

 

애당초에는 일본놈들 철도직원만 살고 해방 되고도 어느 때 어느 시점까지는 철도사람만 여기 살았어. 그 외부에서 오면 토백이가 안되잖어. 철도 아닌 사람은 이상하잖아. 전부다 유지해서(어울려서) 가족끼리 요렇게 사는데 일반사람 들어오면 좀 딴 데 보다 틀리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안들어 왔었어. 세월이 가다보니까 일반인들도 들어왔지. 여기가 막 좋잖아?

 

 

나 고향이 남원이라고 했잖아. 그런 사람들이 많애. 고향이 객지사람들이야. 처음에는 거의가 다 그런(외지) 사람, 젊었을 때는. 남원서 철도에 들어온 사람, 여수에서 들어온 사람, 보성서 들어온 사람, 광주서 들어온 사람 응? 또 경우에 따라서는 대전서도 온 사람. 긍께 객지사람들이여.

그러나 촌에 가면은 그 지방에서 보통 아버지에 그 아들들부터 토박이들 아니여. 촌에 가면은. 여기가 그렇지. 젊을때 들어와서 나도 여기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했으니까. 뭐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끼리라도 그렇게 한 집에서 살다보면 이웃이 되고. 그래서 여기 사람이 돼브렇지.

 

 

일본식이어서 화장실은 집안에 있었어. 근데 그것이 지금의 수세식이 아니고, 재래식. 그래서 딱 덮으게 돼있고. 이건 여담이지만은 근디 그때만 해도 비료가 얼마나 귀했어. 돈 주고 화장실을 퍼갔어. 오죽해서 그럴 때가 있었다니까.

아 해방되고 얼마 안되서. 농사질랑께 비료는 없고. 아~ 돈 줬다는 건 좀 과장된 얘기고, 농사짓는 사람보고 퍼가시오 그러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막 퍼갔다고.

 

 

여기(관사마을)에는 일본놈들이 지어논 목욕탕이 있었어. 요기 가면 아파트(철도아파트) 있어. 일본놈들 쓸 때 하나 지었고, 구락부도 있었어. 구락부(현재 철도아파트 부근). 그 영화도 하고 극단도 하고 클럽 같은 데. 그 뭐냐? 말하자면 와서 영화도 보고 연극할라고 무대도 있고 그랬어.

목욕탕이랑 구락부는 6.25까지 있었어. 6.25때 철도청 건물을(현재 철도시설공단 위치) 때려부렀어(폭격). 요건(구락부) 안 때렸거든. 그래서 순천지방 철도청이 요리(철도아파트) 와 있었어. 그래서 그 뒤에 뜯어 불고 아파트 지어놨지. 직원들 아파트.

 

 

사고날 때 심정은 말로 표현을 못해

 

 

운전하다가 사고 많이 냈지. 전과자여(웃음) 업무상 과실치사. 죽은 사람이 잘못해서 업무상 과실치사로 들어간 거여.

아이고~ 참 표현하기가 그려. 사람 발견하면 비상브레이크 써야 할 것 아니여 응?

내려가서 치울 수도 없고. 차는 공굴러 가는디. 그 심정 알겄어? 응?

그 막 넘어가는 순간, 저 앞바퀴가 뽈딱 넘어가는 순간,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 못해. 그 순간 아이쿠~~

기관사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한번씩 검찰청에 경찰서에 다 갔다왔어. 한번이 아니라 몇 번씩. 후유증이 얼마동안은 가지.

내가 술을 체질적으로 못 마시니까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지.

아예 술은 지금도. 아버지 때부터 그래. 그래서 내가 오죽하면 아들놈 군대 갔다 왔거든. “야! 너 술 좀 배워갖고 와라.” (그래도) 안되드만 체질이 그러니까. 지금도 소주 요만한 거 하나 먹음 뻘개가지고 잠만 자. 집에 와서 어리해갖고. 취직해갖고 말야. 아니 제대해갖고. 술을 가르키려 해도 안돼.

 

 

기관사, 나도 한번 해야겠다.

 

 

아 내가 철도에 와서 맨 처음 느낀 것은, 어렸을 때 얘기여. 철도하면 정거장만 철도인지 알았거든. 촌에서 와서 봉께로 차를 타는 거여. ‘아! 철도구나’ 그때서부터 철도를 다시 알게 되었단 말이야. 그래가지고 인자 댕기다 보니까 그 기관사들, 아~ 또 조수들, 선배들, 선후배들잉. 거 가서 보니까 기관사가 이렇게(엄지손가락을 보이며) 보이더라고. 왕으로 보여. 그때는 작업복이 말이여 파란색 하늘색 같은 거야. 딱 입고. 기관사라는 ‘기’자 딱 완장 딱 두르고 선글라스 딱 쓰고 가방 매고잉.

 

야~ 어린마음에도 말이여 진짜 선망의 대상이라. 그래서 목표를 정하고 ‘나도 한 번 기관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만. 남원서 댕길때 비오고 눈오고 글믄 순천으로 못 넘어와서 결근이 많아서 성적 불량혀. 그래서 기관사가 조금 늦게 됐어. 44년에 들어가서 57년에 됐는디 기관사를 하고 보람을 느껴요. 그거를 내가 느낀 거야.

 

 

하~ 내가 그래도 저 양반들한테 좋은 일 했구나

 

 

여수 같은데 종착역에 들어가고, 중간에 (손님이)내린다든지 하면 하~ 내가 그래도 저 양반들한테 좋은 일 했구나 그랬고.

군인(입영열차) 열차는 또 (시간을) 못 끌어. 또 그 (열차에) 해당되면 눈물이 끌적끌적 나. 그때 열차에 나와서 “아이고! 내새끼 내새끼” 막 홀딱홀딱 뛰고 그거 이제 딱 바라보고, 우리는 이제 발차만 하면 되는거인디. 그래 전송하러 나와서, 홈에 나와서 애들 붙잡고 울고 짜고. 또 애인 있는 사람들은 애인하고 나와서 둘이 붙잡고 울고짜고 하고, 군인들은 못 가게 총들고. 그때만 하더라도 도망갈까 싶어서 못가게 쳤어. 그럴 때 이제 조금 보람을 느끼고 하여튼, 좀 자부심은 가졌지.

야! 그래도 내가 어려서 봤던 기관사 ‘나도 해냈구나’ 하는 그런 자부심을 가졌지만은 아이고~ 애로사항은 말할 수 없지.

 

 

기관사로서 자부심은 있었제

 

 

아~ 고내수하고 그럴 때, 기름 때 손에 묻고 그럴 때는 ‘아이고! 잘 못들었다’ 생각을 했지. 근데 인자 거가서 잔뼈가 굳고 자기가 희망했던 ‘기관사를 한번 해야것다’ 그런거 있으니까 뭐라 그럴까 조금 거시기가 좀 적어지더마.

나 같은 경우는 알다시피 열 다섯살 먹어서 들어와서 그때 기관사들 중에서는 연소자에 속했어. 그래서 자부심 있었제.

 

 

기량을 향상시킬려고 전국 갱기가 있어. 기관사는 기관사대로 갱기가 있고. 또 조수는 아까 불 때는 거잉(투탄경기). 고거 갱기가 있고, 전국적으로 해. 근데 나는 요거는(투탄) 힘이 약항께 못했어. 그 상은 못타봤어. 근데 기관사 돼갖고는 운전갱기가 있어. 거기서는 상도 탔지.

 

 

그 설명 허자면은, A역에서 B역까지 가는데 오분 운전이야 응? 운전시간이 다 있어. 그래가 전부 각 역에 시간표를 걸어 논거 아니여. 일반 여객들하고 약속한 시간이거든, 그것이. 그러면 그 시간 안에 딱 정확하게 맞춰 가야 돼. 20초를 초과하면 감점이여. 빨리 가든지 늦게 가든지.

스톱워치 갖고 딱 잰단말이여. ‘발차’ 움직이기 시작하면 딱 눌러 심사원이 앉아갖고. 다음 역에 5분 도착이다 하면 5분간에 가야돼. 근데 쁘라스 마이너스 20초씩은 봐줘. 20초 빨리 가도 되고, 늦게 가도 감점은 없어. 20초가 초과하면은 감점이여. 10초마다 얼마씩 감점을 해. 그래서 성적을 매고.

 

 

그러고 그 때는 증기기관차에 속도계가 없었거든. 몇키로로 달린지를 몰라. 증기기관차는 응? 자기 육감으로밖에 못 봐. 근데 심사원은 (스톱워치를) 갖고 있어. 응? 1km 구간에 몇 초 달리면 시속이 얼만가 나오잖아 계산상으로.

처음에는 속도가 제대로 안 붙잖아. 가다가 “이 구간에서 다음 구간까지 50키로 내봐!” 그라거든. 자기가 눈으로 보고 짐작을 해서 50키로로 가는 거여. 그럼 심사원은 딱 스톱워찌를 누르고 있어. 그럼 일초에 얼마믄 시속이 몇 키로당가 계산이 딱 나와 불잖아. 그걸로 계산해서, 거기서 인자 또 쁘라스 마이너스가 있어. 얼마초과까지는 괜찮고 또 얼마 미달 초과할 때는 거시기하고.

 

 

그러고 종착역에 가서는 시문(시험)을 하지. 운전규정, 기관차 관계, 응급조치 기술 같은 거. 요거까지 종합해서 성적을 매겨. 처음에는 사무소에서 선발을 해. 일년의 행사라 전 기관사들이 다하거든. 거기서 선발되면 (지방)청에서 해. (지방)청해서 해갖고 선발된 사람들이 전국 소속 대항으로 나가는 거여. 각 소속별로. 한조 아님 두 조, 스물 두 개 팀쯤 됐네.

그 심사원들이 이 사람이 하고 저 사람이 하면 혼동이 있을까 싶응께로. 한 조가 소속별로 한달 동안에 댕겨부려. 같은 심사를 해야지. 물론 규정이 있응께. 영철(영주철도)관내, 순철(순천철도)관내, 부철(부산철도)관내 요렇게 해서 규정가지고 가서 허고 나녔지.

거기서 상도 탔지.

 

 

명절도 없고 생일도 없이 댕겼지

 

 

57년에서 74년까지 기관사였다가, 그 때는 조역, 조역시험 합격해갖고 지금은 계장. 팀장이라고 쭉 했지. 그래갖고 지방청 안전지도관도 좀 했고, 운영(운용)계장, 지도계장 다 하다가 88년 12월에 퇴직했지.

우리 기관차 승무원들은 명절도 없고 생일도 없어. 명절이고 뭐이고 다이아(근무표) 앵기면 가야 돼. 아 그런 명절 때 누가 바꿔주갔어? 한 달 월간 표가 나와부러. 명절인데 부모님 만나러 간다던지 이런 거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그런 개인사정은 다 있응께.

자기 생일날도 가야 돼. 생일 날 새벽 한시 출근이면 그 차를 타고 나가야 되니까. 그렇지 않고 꾀병이라도 한다든지 다른 핑계를 대면 몰라도. “야! 오늘 나 생일이다. 나 새벽 한시에 나가겄냐?” “너 오후에 나강께 나하고 좀 바꿔 타자.” 그럴 수는 있어. 개인적으로.

아, 인자 서로 친구니까 서로 바꿔서 고런 거까지는 있었는디, ‘나 내일 생일이니께 차 못타겄소.’ (그것은) 안돼.

 

열차 내려서 기관사들보고 “수고했소” 이런 소리 해 봤소

 

 

열차타면서 조금 서운한게 있다면, 당신 같은 사람들 솔직허니 얘기해서 종착역에 내려가지고 정거장에 개찰구로 나가지. 근데 기관사들보고 “수고했소” 해봤어? 안 해봤지? 그런 고독한 직업이라.

그러고 증기기관차보다는 디젤기관차 돼갖고는 피곤한 노동은 아니잖애. 정신적인 노동은 있어도, 육체적으로는 안 피곤하거든.

그 증기기관차 있을 때는 젊은놈이니께 살았지. 나이 먹으면 못 해먹어. 지금 막 그런 일 시켜놓으면 고만둔 사람 많을 거야.

 

 

 

 

성락희(84세) 어르신은 전북 남원이 고향이지만 69년을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에서 살았으니 이곳이 자신의 고향이란다. 해방전후의 순천철도와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올해로 114년을 맞이하는 한국철도의 역사를 읽는다.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민들의 애환과 근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했던 한국철도의 가쁜 호흡을 느낀다. 그는 “우리같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 라며 철우회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 말고 자신이 필요한 공간에서 일하고 싶다는 바램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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