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빌립보서 1장 9 제목 : 바울의 기도 제목
바울 사도는 지금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불안하거나 초초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평안이 임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힌 상태이지만 영적으로 그의 심령은 자유함이 있었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는4장 12절에 자신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고 환경에 지배를 받아 괴로워하기보다는 오히려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여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감사하고 성도들을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은 바로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지금 이렇게 기도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지식과 총명이 수반된 사랑이 넘치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바울은 본문에서 기도의 내용을 밝힙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사랑 속에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누구를 향한 사랑인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믿음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을 향한 사랑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함께 믿음 생활을 하는 동료 성도를 향한 사랑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또 바울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특정한 대상을 향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내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포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쏟아 부어주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사랑은 지식과 분별력이 동반된 사랑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흘러 넘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단순히 지식이 풍성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사랑이 지식으로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바울은 기도합니다.
한 편으로는 지식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얻게 된 새로운 지식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그 지식에 입각해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만 풍성해지면 다 된다는 입장이 아닙니다.
사랑이면 무엇이나 다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사랑으로 덮어 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편하고 좋은 사람만큼 더 큰 잘못을 범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방향설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찬양할 만한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랑을 바로 잡아줍니까?
그 가운데 하나가 여기 바울이 기도하는 '지식'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헬라말에는 단순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여기서 사용하는 깊고도 경험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신앙 세계에서 배우는 지식입니다.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달을 때 생기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랑의 목표와 방법을 알게합니다. 이 지식이 함께 하지 않으면 사랑은 쉽게 잘못된 길을 가게 됩니다.
바울은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생의 문제는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좋다고 다 덮어 버릴 위험이 있는가 하면, 다른쪽에는 계속적으로 파서 들추어 내는 위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체험과 느낌 위주로 사는 사람입니다.
배우는 것을 싫어합니다. 책을 읽는 것을 기피합니다.
성경 조차도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리를 연구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지금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함께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간구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지식은 전적으로 영적인 지식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에 해서 바로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보다 더 풍성한 지식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베드로가 지적하듯이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벧후 3:16)이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넘어지는 사람들은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지식이 밑바닥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려주는 솔깃한 이야기에 넘어갑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혼란 속에 빠집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속에 빠져듭니다.
이런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식과 함께 한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여기 "모든 총명"은 통찰력, 분별력 혹은 식별력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 사랑을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잠언에서는 자주 나오지만 신약에서는 여기에만 나옵니다.
사실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정황에서 바른 도덕적 결정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와같은 어려운 상황에 자주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찰력이요 분별력입니다.
세상을 살아 갈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목사로서 목회를 할 때도 이러한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성해 지기를 기도하는 동시에 선과 그럴듯한 것과 실제로 진리에 속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인조꽃이 생화와 아주 흡사해서 만져 보아야 알게 됩니다.
가짜가 진짜처럼 득세하는 시대라서 판단하기가 혼란스럽습니다.
당시의 교회에도 이러한 분별력이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언제나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에 마주치면 어느쪽이 더 옳은지에 대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심오한 인간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지식과 분별력을 구분합니다.
지식과 판단력을 구별합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그가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지식은 가지고 있어도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도 많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지혜는 별개의 것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학식은 풍부하지만 학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률의 대가이지만 법정에서 바른 판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학 지식은 풍부해서 어떤 시험이라도 통과할 수 있지만 진찰실에 찾아온 환자를 바로 진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적용시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당대의 철학자들은 '지식과 모든 총명'이라는 말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적 세계의 개념과 전통을 싫어하지 아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신자들로 하여금 바르게 살도록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삶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준수에 기초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에 근거한 것이기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랑은 어디에서 옵니까?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으로부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랑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과 모든 총명"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의 바울의 기도에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도만 하고 있었서는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반응을 보일 때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회있을 때마다 배우십시오. 그리고 배운 사람은 가르치십시오.
지식 뿐 아니라 모든 총명도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배양됩니다.
올바른 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사모하는 도덕적 입맛도 경험을 통해서 획득됩니다.
결심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히 5:14) 일은 개인의 결단과 애쓰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우리가 기도해야할 사랑은 점점 더 넘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사랑이 있기에 이제 그것이 더욱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는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은 부활의 생명 속에 살아가는 새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동터오는 새 시대는 모든 것이 모자라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좋은 것이 풍성히 흘러 넘치는 시대입니다.
옛 시대처럼 한 민족만 택하시고 그 가운데 남은 자들에게만 한정된 은혜가 아닙니다.
부활로 전개된 새 시대는 모든 열방을 부르시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풍성히 베푸시는 은혜의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