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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부터 걷기열풍이다.
스페인 산티아고가 세계적 인기라면 대한민국은 올레길이 인기... 제주도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그러다보니 지자체별로 무슨길 무슨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각 종교단체도 합세하여 저마다 길이름 짓기에 나섰다.
요즘 어지간한 곳에 가면 걷기 길 없는 곳이 없고, 아직 변변한 길 하나 없는 지자체는 안달이 났을지도 모른다.
이와같은 걷기열풍은 국민들 체력향상과 건강증진에 큰 도움이 될것이다.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점-선-면-입체공간이 아니던가
과거 유명한 곳을 둘러보고 천하절경에 구름처럼 몰려들던 여행이 점을 찾는 일이었다면
요즘 전국민이 즐겨걷는 이런 저런길이 선이라고 할수 있다. 점에서 발전한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추세는 면이다. 공간적 의미를 뜻하는데 이제 걷기도 길을 따라 걷는것이 아니라 공간을 마음대로 다닌다.
바닷가 백사장을 걷거나, 산자락이나 들판을 걷는것도 모두 공간을 다니면서 선보다는 면을 만나는 일인데
조선왕조 5백년 도읍지 한양에서도 북촌마을 걷기, 서촌마을 걷기같은 일정한 공간, 면을 걸어다니는 일이 점점 알려지고 있다.
물론 마을안에서야 골목길을 따라 걸어야하겠지만 여기저기 문이 열린 상점이나 시장, 고가옥, 전시관, 갤러리등을 무시로 들어가 둘러 볼 수 있고 쉬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휴식공간이 잘 준비되어 있으며, 곳곳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어 설명을 해주는 스토리 텔링이 풍부하여 이 커다란 공간안에서 걷기와 보기, 듣기, 먹기, 쉬기, 사기(쇼핑) 같은 일들을 너무 자연스럽고 편하게 할 수 있어 인기가 많은 아이템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둘레길이나 산길을 찾아 교외로 나가던 시민들을 시내 한복판으로 불러 들이고 있는 지금이다.
아마도 먼 미래에는 면으로도 부족하다고 하늘로 올라가 입체공간을 즐기는 어떤 일(?)이 유행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번에는 경복궁 서측, 한동안 西村(서촌)이라고 부르던 '세종마을'을 돌아본 이야기를 풀어 본다.
걸어서 한양 답사 (6) 경복궁 서쪽 '세종마을'
ㅇ 잘못된 이름 西村(서촌)
경복궁 서쪽을 그동안은 서촌이라고 불러왔다.
이는 현 북촌지역에 대비하여 상대적으로 경복궁 서쪽에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부른것으로 보이며, 특히 2008년 최초의 서울대학교 외국인 국어교육과 교수 로버트 파우저씨가 서촌과 북촌을 오가며 한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촌 살리기에 나서면서 알려지게 된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서촌이라는 이름이 역사적인 근거도 없고, 고래로 서측은 쇠락의 의미를 가진 말이기에 나름대로 불만이 팽배하였던 것인바, 종로구에서는 얼마전 지명위원회를 열어 ‘경복궁 서쪽지역을 옛 명칭인‘上村(상촌)’또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세종마을’로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의결 공표했다.
이에 대하여 로버트 파우저 교수도 오류를 시인하고 잘못을 사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4대문 안에 형성된 마을을 동촌, 서촌, 남촌, 북촌, 중촌등으로 구분하여 부른다면 이는 경복궁을 기준으로 한것이 아니라, ‘도시의 方位(방위)’를 기준으로 붙여진 명칭이라는 것이며 이렇게 볼때에 서촌은 서소문, 또는 정동 일대가 되어야한다는 것인데 경복궁을 기준으로 이곳을 서촌으로 부른다면 북촌은 동촌이라야 맞는다는 주장이다.
당시 사료에 의하면 경복궁 서쪽은 물이 내려오는 곳이라는 뜻의 上村(상촌) 또는 웃대에 속한다고 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개벽, 별건곤 등에는 서촌을 모두 정동 일대로 기록하고 있다. 또 1899년11월27일자 독립신문 1면 논설에는 ‘서촌에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다섯 나라의 공사관이 있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당시 5개 국 공사관이 모여 있던 지역은 바로 정동 일대이다.
이곳은 세종대왕이 이방원의 셋째아들로 태어나신 한양 준수방(현 통인동)이며, 조선왕조 임금중 최초로 한양에서 태어나셨다.
결론적으로 西村(서촌)은 잘못된 지명이며, 세종대왕이 나신곳이기에 '세종마을'로 부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세종마을은 경복궁 서측 지역인 11개동 전체(청운·신교·궁정·효자·창성·통인·누상·누하·옥인·통의·체부동)와 4개동(사직·필운·내자·적선동) 일부 지역이 해당된다.
ㅇ 사직단 (사적 제121호)
경복궁 서측마을 답사를 社稷壇(사직단)부터 시작했다.
社稷(사직)은 무엇인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중에 '종묘사직을 어찌할꼬?'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직이다.
즉, 왕실의 조상들 신위를 모신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 社(사)와 곡식의 신 稷(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말한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새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법궁 경복궁의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두었다.
이런 종묘사직을 줄여서 종사라고도 하였으며, 유교문화의 경제적 토대인 농업의 중요성과 국왕의 통치행위의 상징인 것이다.
물론 사직단은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멀리는 중국의 周禮(주례)에 '종묘는 궁궐의 왼쪽에 세우고, 사직은 오른쪽에 세운다는 左廟右社(좌묘우사)'법식에 따른 것으로 삼국시대로부터 계승되어 왔으며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있던것을 한양 천도에 따라 이곳에 새롭게 세운것이며, 이후 태종대에 이르러서는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우리의 사직을 끊으려는 일제의 만행으로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이후 사직단은 해방후에도 사직공원으로 불리면서 수영장, 매점, 배드민턴, 조기축구등으로 놀이터화 하였으며 1988년 사직대제(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의 복원과 함께 현재 모습으로 일부 복원되었으며, 2012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역사를 공부할수록, 문화유적 답사를 진행할수록 일본이 더 미워지고 그들의 만행에 점점 더 치가 떨리게 된다.
그래서 학교교육에 한국사를 올바로 가르쳐야 할것이며, 문화유적 답사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직단 정문...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으며 보물 제 177호이다.>
<사직단을 관리하는 社稷署(사직서)가 있던 곳... 현재는 香(향)과 祝(축)을 봉안해두던 안향청만이 복원되었다.>
<北神門(북신문)... 사직단을 둘러싼 외곽 담장의 북쪽문, 神이 출입하는 문이라 三門 형식으로 격을 높여 지었다.>
<香(향)과 祝(축)이 들어오는 향축로가 판위까지 뻗어 있다. 2개의 壇(단), 좌측(동쪽)이 社壇(사단), 우측(서쪽)이 稷壇(직단)>
사직단 바깥담장을 周垣(주원)이라 하고, 안으로 낮게 두른 담을 壝(유)라고 한다.
周垣(주원)에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듯이 壝(유)에도 4개의 문이 있어 유문이라고 부른다.
<북유문을 들어서서 북신문을 바라본 모습.. 우리가 흔히 보던 홍살문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안쪽으로는 예감이 보인다.>
<북유문 아래를 보면 대문이나 어떤 구조물이 있었던듯... 돌쩌귀 비슷한 모양이 바닥에 보인다.>
<남서쪽 귀퉁이에 神室(신실)이 있다. 신위를 모셔놓는 장소이다.>
<남서쪽의 신실에서 바라본 사직단 전경... 좌측(서쪽)이 稷壇(직단), 우측(동쪽)이 社壇(사단)>
<각 단에는 방위를 상징하는 색깔의 흙을 쌓고 황토로 덮었다.
社壇(사단)에는 柱石(주석)이라 부르는 돌이 보이는데 낙서가 조각되어 있다. 왜 이곳에만 박혀있는지 알수 없다.>
ㅇ 경복궁 서쪽마을 돌아보기
다시 사직단 밖으로 나와 사직동 주민센터를 지나 매동초등학교 너머 배화여중고, 배화대학으로 향한다.
백사 이항복 대감의 집터가 있던곳에 '弼雲臺(필운대)'라 새겨진 刻字(각자)바위를 보기 위함이다.
약간의 오르막 일방통행로를 따라 걷노라면 특색있는 찻집 두곳이 눈에 띤다.
<수익금으로 티벳 망명정부를 돕는 사직동 그가게.. 네팔, 티벳등의 차종류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조금 위에는 그옛날 펄시스터즈의 커피한잔을 걸어놓고 화덕호떡을 판다고 써붙인 숯불로 커피 볶는집...>
일방통행로가 우측으로 꺾어지는 곳 정면이 배화여중고이다. 대학도 함께 있다.
이 학교 제일 윗쪽 배화여고 본청 뒤쪽 산을 깎은곳 바위에 '弼雲臺(필운대)'가 刻字(각자)되어 있다.
여기가 이항복 대감 집터 뒷산인듯한데 당시 봄철이면 가장 경치좋은 전망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건물에 가려 안보인다.
백사 이항복은 필운이라는 호를 갖기도 했었는데 이로 인해 필운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弼雲臺(필운대)라고 새겨진 바위... 그 아래쪽에는 샘물이 흘러가도록 원형으로 파놓았으나 물길은 말라 있다.>
<고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지은 필운대를 소개하는 글(좌측), 동추 박효관등 9명의 공사감독을 새긴 우측바위>
<배화여고 생활관... 1898년 배화학당을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가 1916년 세운 배화학당 선교사 주택. 등록문화재 제93호이다.>
<학교를 나와 내리막을 조금 걸어오면 왼쪽으로 이항복의 집으로 전해지는 가옥이 보인다.
현재 복원공사중인데 공사현황판에는 홍건익 가옥 개보수공사라고 씌어 있다. 그 관계를 잘 모르겠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사직터널 위에 권율장군 집터에 있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데 어린 이항복이가 감나무 가지가 권율장군 집안으로 넘어가 감을 뺏기게 되자 안방 장지문을 주먹으로 꿰뚫고 '이 주먹은 누구의 주먹이냐?' 고 항의하여 감나무 일을 사과 받았다는 옛날 이야기... 그래서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는 얘기인데 그 이항복의 집터가 여기라면 감나무가 그렇게 멀리 갈 리는 없을터이니 바로 옆에 살다가 이사를 했다는건지? 결혼후 살았다는 건지? 이야기와 현실이 다소 헷갈리는 곳이다.
아무튼 필운대 바위를 보고 내려와 큰길을 왼쪽으로 꺾어서 가노라면 통인시장이 나온다.
통인시장을 앞에두고 다시 왼쪽길로 올라가면 최근 복원한 수성동 계곡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에 나오는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에 들어섰던 시민아파트를 철거하고 그대로 복원하였는데 수성동계곡에는 안평대군이 살던 匪懈堂(비해당)이 있었으며,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돌다리는 그대로이다.
<자연상태로 복원된 수성동 계곡... 앞에 돌다리가 기린교이다.>
최근들어 수성동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통인시장부터 이곳까지 올라오는 골목길 좌우로는 각종 가게들이 아기자기하고 예쁜모습으로 생겨나 이 마을의 명소가 되고 있다.
수성동 계곡만 있는것이 아니라 올라오는길 왼쪽에는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고, 왼쪽으로는 지금은 종로구립미술관이 된 박노수 화가의 저택이 있는등 이곳저곳 세세히 살피며 올라와야 한다.
<큰길에서 만나는 시인의 집, 오른편으로는 통인시장이 보인다.>
<왼쪽길로 수성동 계곡을 올라가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작은 백화점(?), 어린이집, 예쁜 가게들이 보인다.>
<윤동주 시인 하숙집터...>
<가장 작은 갤러리 서촌재... 리틀 티벳...>
수성동 계곡 올라가는 골목 중간 오른쪽으로는 종로구립 미술관이 있다.
원래 화가 박노수 가옥이었는데 2011년도에 종로구에 기증하여 내부 수리후 구립미술관으로 무료 개방중이다.
1937년경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지어진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기법의 가옥으로 남정 박노수화백이 2011년도말까지 거주하였으며 미술관 준비공사중인 올 2월에 박화백은 타계하였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2층의 벽돌건물이며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 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로 등록되었다.
현재 개관전시 '달과 소년'展이 열리고 있으며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여 작가의 작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종로구립미술관, 박노수 가옥 입구... 뒷편 언덕에 올라 내려다본 전경, 관람객들이 줄을 서있다.>
<실내는 촬영금지였지만 상주하고 있는 구청직원에게 협조를 구하여 내부구조를 찍을수 있었다.
1층 복도, 좁고 긴 낭하식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도 그림을 걸었다.
2층 복도역시 1층과 비슷한 구조이며 전시실에 고인이 된 화가의 그림이 걸려있다.>
전시작품은 드로잉 몇점을 포함 작가의 작품 30점이 전시중이며 전시제목인 '달과 소년'그림도 있었다.
내부가 좁아서 한정된 인원을 입장 시킨후 퇴장인원만큼 다시 입장시키며 차분하게 운영중이다.
사실 이 부근에는 松石園(송석원)이 있던 곳인데, 원래는 인왕산 계곡 깊은 곳에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절경을 골라 정조때 평민시인 천수경이 詩社(시사)를 지어 松石園(송석원)이라 하였으며, 1914년 순정황후 윤씨가 치마속에 감춘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한일합방에 기여한 친일파 백부 윤덕영이 막대한 富를 모아 프랑스풍의 어마어마한 별장을 짓고 역시 송석원이라 하였으며 해방후 언커크 (UNCURK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사용하였으나 수리중 화재발생으로 몽땅 타버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위 박노수 가옥은 윤덕영이 딸과 사위가 살던 집으로 박노수 화백이 이어서 살게 된 것이다.
<송석원 별장은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지만 옥인동 빌라 골목 좌우로 송석원의 문설주로 보이는 기둥 2개가 남아 있다.
또한 다른 빌라의 옆문 안쪽에도 문설주 2개가 생뚱맞게 박혀있다. 이곳 거주자들은 이것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이렇게 송석원 터까지 보노라면 옥인동 군인아파트가 나온다.
계속 진행하면 약간 오르막에 제법 고급스런 빌라촌이 나오고 다시 내리막으로 걸어가면 왼쪽으로 맹학교와 농학교가 보인다.
맹인과 농아들을 위한 특수학교... 어느새 100년이 되었다는데에 감회가 새롭다. 불편없이 살아야할텐데...
<맹학교 담벼락에는 점자벽화가... 농학교 담벼락에는 수화벽화가 보인다.>
<농학교를 들어서면 100주년 기념 조형물이 보이고, 학교 건물 뒷편에는 영조후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를 모셨던 사당 선희궁이 보인다. 지금은 청와대 바로 옆 칠궁으로 옮겨자 건물만 남아 있다.(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
맹학교와 농학교를 돌아보고 나오면 청와대로 가는길과 자하문 터널로 가는길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자하문 터널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는 청운초등학교, 길건너 오른쪽에는 청운중학교와 경기상고가 있는데 청운초등학교는 송강 정철의 집터였으며, 경기상고 뒷편은 조선시대 조광조의 제자 청송 성수침의 서재 청송당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 집터였다는 표석과 싯귀를 적은 판 몇개를 도로에 연하여 세워놓았으며 청송당 흔적은 더욱 찾기 어렵다.
<송강 정철의 집터였던 청운초등학교 담에는 송강 시비를 세워놓았다... 경기상고 뒷편에 있는 성혼의 부친 청송당 유지...>
이쯤 걸어오면 시간도 꽤 흘러가고 다소 지칠 즈음이다.
그러나 꼭 보아야할 刻字(각자) 바위 2개가 있어 마지막으로 힘을 내기로 한다.
하나는 경기상고 지나 자하문 터널 직전에 있는 후기성도교회 뒷편의 白雲洞天(백운동천)과 청운초등학교 지나 왼쪽으로 꺾어올라 윗쪽 고급빌라촌 담 아래 인조 당시 주전파 김상헌 대감의 집터였다는 淸風百世(청풍백세)글씨를 찾아보는 일이다.
아무런 안내나 표식이 없어 찾기가 쉽지 않지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찾을수 있다.
<교회뒷편... 독립운동에 아들, 며느리와 함께 몸을 바친 구한말 농상공부대신 동농 김가진이 새긴 白雲洞天(백운동천)...>
<주변에는 용도를 알수없는 철문으로 막힌 2개의 지하통로 입구가 있었고, 석탑인지 분명치 않는 것도 보인다.
얼마전까지 이곳이 요정이었다는 설을 증명하듯 건축흔적과 조경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청운초등학교 옆길로 올라가면 김상헌의 싯귀를 적은 전봇대가 눈길을 끈다. 고급빌라 축대아래에 청풍백세 각자가 보인다.>
<도로 끝까지 올라가니 유진인재개발원이라는 문패가 붙은 어떤 종교단체같은 거대한 한옥식 건물이 보이고 철대문 우측 상단에
역시 각자바위가 보이는데 거리가 멀어 청운OO이라고 일부만 읽을수 있다.>
점심 식사후 모여서 반나절 답사로 돌아본 경복궁 서쪽 세종마을...
이때쯤이면 날도 어두워지고 힘들며 허기진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참 촘촘하게 많이도 둘러보았다.
그래도 자하문 고개 좌우에 있는 윤동주 공원과 창의문등은 못보았으며 자하문 터널로 가는 도로 우측지역은 남겨놓았다.
그밖에도 이곳은 인왕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물줄기를 막거나 복개한 곳으로 그 옛날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렵게 되어 이름만 전해오는 여러 다리들과 宮들이 말해주는 스토리 텔링이 가득한 곳이다.
조선조 궁녀, 의관, 중인들의 생활공간이었으며 세종대왕, 권율, 이항복, 정철등의 생가 집터가 있는 곳
인왕산 자락의 명승지에 전해오는 유명세도가들의 별장과 예술가들이 모여 들던곳
西村(서촌)은 잘못된 명칭이니 세종마을로 부르기로 한 곳
660여채의 한옥과 옛 골목, 재래시장, 근대문화유산등이 최근 생겨난 각종 소규모 갤러리, 공방, 커피숍등 이쁜 가게들과 어울려 나름대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알음알음으로 수많은 답사꾼들이 모여들면서 북촌과는 또다른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 계 속 >
첫댓글 새벽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서촌에 대한 거의 완벽한 후기네여~ 즐감합니다...^^
사직단, 한국사 고급 시험 10회 22번 기출 문제 풀다가 클릭하게 되었는데 저도 시험 끝나면 두루두루 다녀 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