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진달래가 피고 여름이면 장미가 피고 가을이면 국화가 피는 자연의 순서는 어떻게 매겨지는가. 식물은 어떻게 특정한 계절에 맞추어 꽃을 피우는 것일까. 모든 식물들은 나름대로의 생체 시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흔히 기온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구분하지만 식물은 좀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다. 바로 밤낮의 길이다.
기온은 대기의 상황에 따라 계절과는 별개로 변할 수 있다. 봄의 한 가운데에도 가을과 같은 날이 있고, 겨울의 한가운데에도 따뜻한 날이 있을 수 있다. 사계절 기온에 관계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식물은 일정하지 않은 기온에 생체 시계를 맞춘다면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겨울날 일시적으로 기온이 올라 봄인 줄 알고 잎을 피우거나 꽃을 피웠다가는 찬바람에 얼어 죽기 쉽다. 뭔가 더 정교한 시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식물은 밤낮의 길이와 그에 따른 계절의 변화를 곧 깨달았다.
밤낮의 길이는 지구와 태양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태양계가 별다른 이상이 없이 존재하는 한 거의 일정하다. 식물은 바로 이 밤낮의 길이로 계절을 감지하는데 이를 전문 용어로 '광(光)주기'라고 한다. 광 주기란 낮과 밤의 상대적인 길이를 의미한다. 식물은 광 주기에 따라 줄기의 생장, 둘레의 생장, 꽃 피는 시기, 낙엽 지는 시기, 잠자는 시기 등을 결정한다.
한편 식물의 몸속에는 파이토크롬(phytochrome)이라는 빛 감지 색소가 들어있다. 파이토크롬은 식물의 몸속에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며 어떤 종류의 빛을 받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결정된다. 이 색소는 받아들인 빛의 양을 정확히 측정하여 낮과 밤의 상대적인 길이를 알아내는데, 이를 통해 식물의 꽃 피는 시기가 결정된다.
개나리, 무궁화, 장미 등은 봄이나 여름철에 꽃을 피우는데 이들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야 한다. 이를 '장일 식물'이라고 한다. 반대로 코스모스나 국화같이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짧아야 하는데, 이들을 '단일 식물'이라고 한다.
만약 낮의 길이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계절에 관계없이 다양한 꽃을 구경할 수 있다. 봄에 국화가 보고 싶다면 온실에 빛을 가릴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여 낮의 길이를 짧게 해 주면 된다. 그러면 국화는 가을이 온 줄 알고 꽃을 피운다. 가을이나 겨울에 장미가 보고싶다면 인공 빛을 이용하여 낮의 길이를 길게 해 주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밤낮의 길이의 조합이 하루 시간인 24의 배수로 이루어질 때만 꽃이 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일 식물인 콩이나 도꼬마리는 낮이 8시간에 밤이 28시간, 혹은 낮이 8시간에 밤이 52시간으로 밤이 아무리 길어도 꽃봉오리를 맺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 밤낮의 길이의 합이 24(8+16), 48(8+40), 72(8+64)시간으로 24배수가 될 때는 꽃봉오리를 맺는다. 이는 식물의 몸속에 24시간의 리듬이 기본 주기로 존재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끔 인공적인 빛이 식물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가로등이 대표적인 예인데, 특히 단일 식물에게 밤늦게까지 커져 있는 가로등은 말 그대로 고문이다. 도시 외곽의 도로변에 있는 벼들은 가로등 불빛 때문에 꽃이 피지 않고 이삭이 달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전체 논 중에서 가로등 불빛을 받은 부분의 벼들에게만 이러한 피해가 나타난다고 하니, 식물의 생체 시계가 얼마나 정교한지 놀라울 따름이다.
과학적인 지식과 기술의 발달로 식물이 꽃 피는 시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봄에 국화를 창가에 놓아두는 것은 아무래도 감흥이 없다. 결국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그 감성이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라 조절되어 왔기 때문이다.
-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차윤정 전승훈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