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회관
페이스 북의 친구들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몇가지 그간 정리되지 않았던 저 자신의 교회관의 문제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그간 아실만한 목사님들께 여쭈어도, 이런 저런 책들을 보아도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는데, 최근에 교회관에 관한 이해가 넓어진 부분이 있어서 이를 정리하면서 저도 유익을 얻고 양무리 회원들과도 나누고자 합니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서 미진한 부분은 이해하시고 양해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배워가고 있는 처지라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따끔한 질책도 함께 당부드립니다.
우선 장로교회는 교회는 '하나'라는 사상이 강하게 지배합니다. 장로교회인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교단 이름이 'Free Church of Scotland'인데, 교회가 단수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는 교회를 하나라 보지 않고 여러 교회들이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혁교회인 '네덜라든 개혁교회'의 교단 이름은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교회를 복수로 '교회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장로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Church)를 하나로 보고 이 교회가 불가피하게 여러 회중(congrgation)으로 나뉘어서 예배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공교회에 대한 고백에 대한 강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장로교회는 원래 하나의 교회인데, 여러 지역적 불가피성 때문에 따로 여러 회중으로 모이는 것을 '지역 교회'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는 지역 교회가 개체 교회로서 교회의 실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지역 교회는 하나의 독립된 교회이고 그 독립된 교회들이 모여서 '노회'를 형성한다고 본다는 점입니다. 장로교회는 개체교회들(particular churches)을 보편 교회(the general church)의 지체(members)로 보고, 개혁교회는 개체교회들 자체를 보편교회로 보는 것입니다. 장로교회가 '위로부터의 교회론'이라는 것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둔 표현인 걸로 이해됩니다.
제가 일전에 올린 글에서 교회됨의 표지로 말씀의 선포와 시행을 위한 <치리회(church-government)>의 존재가 교회됨의 근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 치리회에 대한 이해도 차이가 납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하나이기 때문에 <치리회> 역시 하나인데, 교회가 개체교회들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치리회가 여러개의 회(會, assembly)로 실행이 됩니다. 장로교회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회중이 하나로 모일 수 없는 이 불가피성에 대해서 <노회>의 하나됨을 통해서 장로교회의 '하나의 교회'라는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니케아 신조는 교회가 하나임을 우리에게 확인하여 주는데, 장로교회관은 이런 교회관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노회'로 번역하는 단어는 'presbytery'인데요. 말 그대로 하나의 장로회를 가리킵니다. 가끔 들어보셨을텐데, 노회의 장을 '회장'이라 불러야 옳은지 '의장'이라 불러야 옳은지에 대한 논쟁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로교회에서 노회(presbytery)는 일종의 회집(assembly)가 아니라 치리회(church-government)로 이해됩니다. 이 치리회가 government로 이해되고 그런 의미에서 노회(prebytery)로부터 파송을 받은 치리회가 있어야 그 교회는 그제서야 보편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노회는 상시기구로서 정부와 같은 기능을 하고 개혁교회에서 노회는 개별 교회들의 회집으로서 회의의 성격을 가져서 회집하고 파하는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회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의장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장로교회는 상시 기구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회장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로교회의 위임 목사는 그 소속이 항상 노회가 되는 것이고, 노회로부터 파송되어 개별 교회의 보편 교회와의 연합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에서 목사는 노회 소속이 아니라 개별교회의 회원으로 이해됩니다. 목사가 개별교회의 회원으로 이해가 되면, 목사는 교회 속에서 치리를 받는 구조가 되고 목사가 노회의 소속으로 이해가 되면 노회에서 치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장로교회관에서 목사는 일종의 감독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개별교회에 노회에서 파송한 감독자 개념으로 이해가 됩니다. 목사는 그 소속이 항시 노회에 있게 되고 노회의 명에 따라 교회를 옮겨 갈수도 있게 됩니다. 이 제도의 장점은 노회(prebytery)가 건강하고 성경적이다는 전제 하에서 개교회주의가 줄어들게 되고 목사가 교회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길 수 없게 되고 교회의 공교회성이 상당부분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교육부에 임명과 발령에 의해서 임지를 옮겨다니는 것처럼 목사가 그런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서 교회의 이기주의는 개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교권주의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개별 교회에서 목사 그릇된 행실과 신학을 보여도 개별교회는 이에 대응할만한 수단이 없다는 게 큰 단점입니다. 반대로 개혁교회는 목사는 개별교회의 치리회가 위임 목사로 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목사는 교회의 치리 장로에 의해서 늘 그 설교에 대해서 감시와 독단적 결정에 견제를 받게 됩니다. 목사가 잘못할 경우 개별교회의 치리회는 이를 치리할 수 있습니다. 장점은 목사의 잘못된 전행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지만 단점은 교회개 개교회화하고 이기주의화하는 문제의 발생이라든지, 공교회적 연합에서 약점을 보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에 감독권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영적 아버지로 군림하게 될 가능성도 상존합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다른 이해는 치리회간의 위치에 대한 이해에도 차이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서, 당회, 노회, 총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로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거룩한 공회를 지향함으로 일종에 위계(hierachy)가 발생합니다. 총회장은 감독(episcopus)로 이해가 되고 노회는 당회의 상회, 총회는 당회의 상회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초기 장로교 평양 독노회의 여러 기록들을 보면, 이런 흔적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만 살펴보아도 이 어른이 여러 교회를 담임하고 다시 옮겨 가시고, 종래에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는데 이게 다 노회의 명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독자 및 감독이 되는 치리회로부터 회중과 하회들은 복종(subordination)을 의무로 요구받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개혁교회는 박윤선 박사의 교회론에서도 보듯이 당회와 노회의 관계는 치리에 있어서 수평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총신에서 합신으로 분리하실 때, 교권주의를 온 몸으로 체험하신 분이어서 그런지 개혁교회적 전통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교회들은 장로교회적 이해를 네덜란드쪽은 개혁교회적 이해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경우 노회나 총회의 결정은 구속력은 가지지만 강제할 수 없는 반면, 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의 결정은 개별교회를 구속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질서에 관한 칼빈의 기본적 이해는 <치리회에 의한 다스림>이라는데는 이 두 교회 전통에서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는데, 현실적으로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제네바는 소도시이고 스코트랜드나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는 국가 전체에 많은 교회들이 있음으로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 칼빈의 후예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회 목사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서 대체로 현재 위에서 설명하는 장로교회적 교회관으로 교회가 진술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은 개혁교회의 표지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현 양무리 카페에서 담보할 수 있는 바는 <말씀과 성례(보이는 말씀)>와 그 말씀에 의한 다스림을 의미하는 치리(권징)을 모두의 공통분모로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럼 그 치리의 방식은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할 때, 장로교회적 교회관을 택할지, 개혁교회적 교회관을 택할지는 저의 의견으로는 솔직히 여러분의 자유라고 생각됩니다. 일전에 백스터의 글을 인용했듯이 "필요한 일에는 일치를, 의심스러운 일에는 자유를, 모든 이에게는 자비를"이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때, 그곳에 참여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도 현재 우리들처럼 이런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과 일치의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내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선배들의 그러한 길을 본받길 소망해봅니다. 그리고 저의 입장을 간략히 표명하자면, 제가 속한 교단은 박윤선 목사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한국의 보수교단 중 안그런 곳이 없습니다만..) 교단 헌법의 기초도 그분이 놓으셨고 현재 교단 정치도 이와같이 장로교회임에도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개혁교회적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장로교회의 목사이지만 제가 속한 교단의 교단적 일치를 위해서 이런 견해를 수용합니다. 또한 이 문제가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하는 문제가 아님으로 더 이상 양무리에서 그와 같은 불필요한 논쟁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며, 다른 견해 곧, 장로교회적 교회관과 목사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견해도 존중함을 표하는 바입니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