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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 革 敎 會 스크랩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회관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63 14.07.12 17: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교회관

 

 

페이스 북의 친구들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몇가지 그간 정리되지 않았던 저 자신의 교회관의 문제들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그간 아실만한 목사님들께 여쭈어도, 이런 저런 책들을 보아도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는데, 최근에 교회관에 관한 이해가 넓어진 부분이 있어서 이를 정리하면서 저도 유익을 얻고 양무리 회원들과도 나누고자 합니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서 미진한 부분은 이해하시고 양해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배워가고 있는 처지라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따끔한 질책도 함께 당부드립니다.

 

 

우선 장로교회는 교회는 '하나'라는 사상이 강하게 지배합니다. 장로교회인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교단 이름이 'Free Church of Scotland'인데, 교회가 단수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는 교회를 하나라 보지 않고 여러 교회들이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혁교회인 '네덜라든 개혁교회'의 교단 이름은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로 교회를 복수로 '교회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장로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Church)를 하나로 보고 이 교회가 불가피하게 여러 회중(congrgation)으로 나뉘어서 예배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공교회에 대한 고백에 대한 강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장로교회는 원래 하나의 교회인데, 여러 지역적 불가피성 때문에 따로 여러 회중으로 모이는 것을 '지역 교회'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는 지역 교회가 개체 교회로서 교회의 실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지역 교회는 하나의 독립된 교회이고 그 독립된 교회들이 모여서 '노회'를 형성한다고 본다는 점입니다. 장로교회는 개체교회들(particular churches)을 보편 교회(the general church)의 지체(members)로 보고, 개혁교회는 개체교회들 자체를 보편교회로 보는 것입니다. 장로교회가 '위로부터의 교회론'이라는 것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둔 표현인 걸로 이해됩니다.

 

 

제가 일전에 올린 글에서 교회됨의 표지로 말씀의 선포와 시행을 위한 <치리회(church-government)>의 존재가 교회됨의 근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 치리회에 대한 이해도 차이가 납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하나이기 때문에 <치리회> 역시 하나인데, 교회가 개체교회들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치리회가 여러개의 회(會, assembly)로 실행이 됩니다. 장로교회가 교회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회중이 하나로 모일 수 없는 이 불가피성에 대해서 <노회>의 하나됨을 통해서 장로교회의 '하나의 교회'라는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니케아 신조는 교회가 하나임을 우리에게 확인하여 주는데, 장로교회관은 이런 교회관에 대한 충실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노회'로 번역하는 단어는 'presbytery'인데요. 말 그대로 하나의 장로회를 가리킵니다. 가끔 들어보셨을텐데, 노회의 장을 '회장'이라 불러야 옳은지 '의장'이라 불러야 옳은지에 대한 논쟁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장로교회에서 노회(presbytery)는 일종의 회집(assembly)가 아니라 치리회(church-government)로 이해됩니다. 이 치리회가 government로 이해되고 그런 의미에서 노회(prebytery)로부터 파송을 받은 치리회가 있어야 그 교회는 그제서야 보편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노회는 상시기구로서 정부와 같은 기능을 하고 개혁교회에서 노회는 개별 교회들의 회집으로서 회의의 성격을 가져서 회집하고 파하는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회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의장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장로교회는 상시 기구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회장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로교회의 위임 목사는 그 소속이 항상 노회가 되는 것이고, 노회로부터 파송되어 개별 교회의 보편 교회와의 연합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개혁교회에서 목사는 노회 소속이 아니라 개별교회의 회원으로 이해됩니다. 목사가 개별교회의 회원으로 이해가 되면, 목사는 교회 속에서 치리를 받는 구조가 되고 목사가 노회의 소속으로 이해가 되면 노회에서 치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장로교회관에서 목사는 일종의 감독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개별교회에 노회에서 파송한 감독자 개념으로 이해가 됩니다. 목사는 그 소속이 항시 노회에 있게 되고 노회의 명에 따라 교회를 옮겨 갈수도 있게 됩니다. 이 제도의 장점은 노회(prebytery)가 건강하고 성경적이다는 전제 하에서 개교회주의가 줄어들게 되고 목사가 교회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길 수 없게 되고 교회의 공교회성이 상당부분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교육부에 임명과 발령에 의해서 임지를 옮겨다니는 것처럼 목사가 그런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서 교회의 이기주의는 개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교권주의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개별 교회에서 목사 그릇된 행실과 신학을 보여도 개별교회는 이에 대응할만한 수단이 없다는 게 큰 단점입니다. 반대로 개혁교회는 목사는 개별교회의 치리회가 위임 목사로 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목사는 교회의 치리 장로에 의해서 늘 그 설교에 대해서 감시와 독단적 결정에 견제를 받게 됩니다. 목사가 잘못할 경우 개별교회의 치리회는 이를 치리할 수 있습니다. 장점은 목사의 잘못된 전행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지만 단점은 교회개 개교회화하고 이기주의화하는 문제의 발생이라든지, 공교회적 연합에서 약점을 보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에 감독권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영적 아버지로 군림하게 될 가능성도 상존합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다른 이해는 치리회간의 위치에 대한 이해에도 차이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서, 당회, 노회, 총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로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거룩한 공회를 지향함으로 일종에 위계(hierachy)가 발생합니다. 총회장은 감독(episcopus)로 이해가 되고 노회는 당회의 상회, 총회는 당회의 상회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초기 장로교 평양 독노회의 여러 기록들을 보면, 이런 흔적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일대기만 살펴보아도 이 어른이 여러 교회를 담임하고 다시 옮겨 가시고, 종래에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는데 이게 다 노회의 명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독자 및 감독이 되는 치리회로부터 회중과 하회들은 복종(subordination)을 의무로 요구받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개혁교회는 박윤선 박사의 교회론에서도 보듯이 당회와 노회의 관계는 치리에 있어서 수평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총신에서 합신으로 분리하실 때, 교권주의를 온 몸으로 체험하신 분이어서 그런지 개혁교회적 전통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교회들은 장로교회적 이해를 네덜란드쪽은 개혁교회적 이해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경우 노회나 총회의 결정은 구속력은 가지지만 강제할 수 없는 반면, 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의 결정은 개별교회를 구속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질서에 관한 칼빈의 기본적 이해는 <치리회에 의한 다스림>이라는데는 이 두 교회 전통에서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것이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났는데, 현실적으로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제네바는 소도시이고 스코트랜드나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는 국가 전체에 많은 교회들이 있음으로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 칼빈의 후예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회 목사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서 대체로 현재 위에서 설명하는 장로교회적 교회관으로 교회가 진술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은 개혁교회의 표지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현 양무리 카페에서 담보할 수 있는 바는 <말씀과 성례(보이는 말씀)>와 그 말씀에 의한 다스림을 의미하는 치리(권징)을 모두의 공통분모로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럼 그 치리의 방식은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할 때, 장로교회적 교회관을 택할지, 개혁교회적 교회관을 택할지는 저의 의견으로는 솔직히 여러분의 자유라고 생각됩니다. 일전에 백스터의 글을 인용했듯이 "필요한 일에는 일치를, 의심스러운 일에는 자유를, 모든 이에게는 자비를"이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때, 그곳에 참여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도 현재 우리들처럼 이런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과 일치의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내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선배들의 그러한 길을 본받길 소망해봅니다. 그리고 저의 입장을 간략히 표명하자면, 제가 속한 교단은 박윤선 목사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한국의 보수교단 중 안그런 곳이 없습니다만..) 교단 헌법의 기초도 그분이 놓으셨고 현재 교단 정치도 이와같이 장로교회임에도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개혁교회적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장로교회의 목사이지만 제가 속한 교단의 교단적 일치를 위해서 이런 견해를 수용합니다. 또한 이 문제가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하는 문제가 아님으로 더 이상 양무리에서 그와 같은 불필요한 논쟁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며, 다른 견해 곧, 장로교회적 교회관과 목사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견해도 존중함을 표하는 바입니다.

 

 

 
  • 2012/01/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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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이해에 관한 주요한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THERE is one general church visible, held forth in the New Testament (Of the Church).

    IT is lawful and expedient that there be fixed congregations, that is, a certain company of Christians to meet in one assembly ordinarily for publick worship. When believers multiply to such a number, that they cannot conveniently meet in one place, it is lawful and expedient that they should be divided into distinct and fixed congregations, for the better administration of such ordinances as belong unto them, and the discharge of mutual duties (Of Particullar Congregations).

    Particular visible churches, members of the general church, are also held forth in the New Testament (Of the Church).

  • 2012/01/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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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 hath instituted a government, and governors ecclesiastical in the church: to that purpose, the apostles did immediately receive the keys from the hand of Jesus Christ, and did use and exercise them in all the churches of the world upon all occasions.

    And Christ hath since continually furnished some in his church with gifts of government, and with commission to execute the same, when called thereunto.

    It is lawful, and agreeable to the word of God, that the church be governed by several sorts of assemblies, which are congregational, classical, and synodical (Of Church-Government, and the several sorts of Assemblies for the same).

  • 2012/01/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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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트로스 THE scripture doth hold out a presbytery in a church…

    Thirdly, Therefore the scripture doth hold forth, that many congregations may be under one presbyterial government…

    Secondly, That there were many elders over these many congregations, as one flock, appeareth.

    Thirdly, That these many congregations were one church, and that they were under one presbyterial government,

  • 2012/01/2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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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트로스 appeareth (Of Classical Assemblies).

    It is lawful, and agreeable to the word of God, that there be a subordination of congregational, classical, provincial, and national assemblies, for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Of Synodical Assemblies).

    또 다른 출처는 와타나베 노부오의 <칼빈의 교회관>입니다.

  • 2012/01/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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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 2012/01/2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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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교회 정치관과 장로교회 정치관이 차이가 나고 그에 따라서 노회나 총회를 보는 시각도 달라지는 군요. 결국 교회관이 중요하네요 :) 감사합니다 ^^

  • 2012/01/25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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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본 듯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목사님이시군요. 평안하시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12/01/2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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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목사님... 목사님도 설 잘 지내셨는지요? 늘 강령하시길.. ^^

  • 2012/01/2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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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교회에서 항존직인 목사-장로-집사는 상.하 관계가 아니어서 높고 낮음이 없다고 배웠는데, IRC(독립개신교회)헌장에는 장로는 한 교회의 치리와 목회에 있어서 목사의 지휘를 받아 봉사하는 직이다./집사는 한 교회의 서무와 재정에 있어서 목사의 지휘를 받아 봉사하는 직을 말한다./목사아래 장로,집사가 있는 것으로 헌장에는 되어있어 목사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그 교단만의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했겠지만 개혁교회 내에서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 2012/01/26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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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문제가 바로 외국의 개혁교회들이 IRC에 대해서 의아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IRC의 직분관이 개혁교회적이거나 장로교회적이라기 보단 감독교회적이기 때문이지요. 개혁교회라는 이름이 개혁교회임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들이 어떠한 가르침을 가졌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현 교회를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2012/01/2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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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길어질까봐 답글로 달려고 했더니, 성실회원이라 안되네요.

    일반적으로 개혁교회의 단점으로 언급되는 것이 개교회주의로 빠질 수 있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캐나다개혁교회를 지금껏 경험해본 봐로는 실제적으로는 크게 그렇지 않습니다. 캐나다개혁교회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한국의 장로교회들보다 훨신 공교회적입니다.

    먼저 한국의 성도들을 보면 자기가 속한 개별교회로 자신의 소속감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이곳 캐나다 회원들은 개교회보다는 교단으로 소속감을 나타냅니다.
    교단 안에 개교회들 간의 유대감이 아주 높습니다. 다른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서로 잘 알고, 자주 긴밀히 교제를 나눕니다. 한달에 한번 또는 그 이상 교단안에 다른 교회 또는 자매 교단의 교회와 강단 교류를 갖습니다. 교회를 넘어 교단 차원의 사교나 성경공부 모임이 있습니다. 아는 지체의 결혼식이나 유아 세례가 있을 경우 그 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립니다. 이웃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 2012/01/26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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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선교나 해외 선교의 경우 교단 안에 개교회들이나 심지어 다른 교단 교회와도 같이 일합니다. 교단의 총회가 있는 경우 총회록(책으로 출간)을 개교회 모든 회원들에게 배부하고 직분자들은 총회록을 모두 읽습니다. 개혁교회 교단마다 교단 잡지(한달에 한두번 발간)가 있는데 거의 모든 성도가 이걸 읽습니다. 그래서 교단안에 일어나는 일들이나 주된 이슈에 대해 성도들이 비교적 잘 알고 있습니다. 교단의 결정사항은 대게 각 노회에 권유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닌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 결정을 따릅니다. 대게 보편교회에 대한 인식이 강한 편입니다.

    제가 받는 인상은 교단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 같습니다. 그리고 개개인이나 개교회는 약해 보여도 그 교단이 내는 힘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가 각자의 개성은 있지만 큰 부분 공통 분모를 가지고, 교회의 운영도 그러합니다. 반면에 한국 장로교회는 목사님들 마다 설교의 차이가 크고, 교회 운영의 차이도 큽니다. 성도들도 사실상 목사님 보고 교회를 결정하고요.

  • 2012/01/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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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uthh 제가 듣기로는 화란의 기독개혁교회(CGK)의 경우 교단 차원에서 교회 목사님들을 회전시킨다고 합니다. 캐나다개혁교회도 좀 길어도 몇년에 한번씩은 목사님이 바뀝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시면 은퇴할 때 까지 바뀌지 않고 심지어 교회가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고요.

    장로교회의 경우에도 북미의 PCA나 OPC를 보면 개교회 목사가 교리나 행실에 문제점을 가질 경우, 장로나 일반성도가 문제를 제기해서 교단에서 치리하는 경우가 오히려 한국보다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정치 체계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 현실에선 실제적으로는 그 원리적 차이보다도 그것을 운영하는 성도들의 성숙도가 더 큰 요소가 되는거 같습니다.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얼마나 잘 받아서 현실화 하는냐가 원리적 논의에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봅니다.

  • 2012/01/2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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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uthh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 2012/01/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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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제가 속한 합신교단은 장로교회이면서, 그 헌법적 특징은 개혁교회적이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2012/01/2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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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 대한 알바트로스님의 분석은 교회 역사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매우 충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 대글에서 합신 교단은 (교회정치적으로는) 장로교회이며, (헌법적 특징으로서는)개혁교회적이라는 평가도 일견 공감이 되고, 이것이 고 박윤선 목사님의 영향이라는 것도 평소 저의 지론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참 '먼나라 이야기'같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교회 현실을 감안하면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고매한 이상론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이는 역설적으로 작금의 한국 장로교회의 상황은 장로교회의 원류적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이탈해 있음을 나타내는 (부정할 수 없는) 반증이기도 하겠지요.

  • 2012/01/2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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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정통 장로교회에서는 보편교회의 특징이 강합니다. 그것도 예정론적인 시각에서 말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장로교단 중에서도 실제로 예정론적 보편교회의 특성을 잘 발휘하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속한 교단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교회의 보편성을 함의하는 모임이나 기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교회 정치적 이해를 돕는 신학적 준거들도 명확하게 남아 있고요. 하지만 교회 현실에 들어가서 본다면,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는 전혀 다른 점에서 교회적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소위 교단적 통합과 연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힘에 의한 보편성, 혹은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실은 정통 장로교회에서의 보편성이란 다름 아닌 동일한 신앙고백과 그에 대한 적확한 적용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진정한 교회 연합 운동도 이러한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서 그 가치와 목적을 온전하게 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 2012/01/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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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점에 있어선 유럽과 북미 지역의 개혁교회는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개혁교회들마다 약간의 신학적 강조점과 나름대로의 역사적 정황상의 차이가 있지만, 소위 개혁교회 3대 신앙고백(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이라고 불리는 Three Forms of Unity를 통해 보다 철저하고 정교하게 교회적 보편성을 실현해 가는 모습은 대부분 진리 외적인 요소에 의해 분열과 갈등이 조장되고 무분별한 연합과 통합이 시도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가 배워야 할 좋은 귀감입니다.
    저도 해외 경우를 통해서 몇 개의 개혁교단 교회들을 접해 보고,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 목격해 본 결과 현재로선 한국의 장로교회보다도 그들이 더 개혁적이며, 심지어 더 장로교회적인 신앙과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 2012/01/2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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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도 신앙 고백에 의한 교회의 보편성이 지교회에서 강조될 뿐 아니라 성도들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항상 무슨 문제나 사안을 논할 때에도(그것이 특별히 진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교단적 차원에서 논의와 결정을 거쳐서 지교회와 성도들이 수납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서 외국의 개혁교회(단)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더불어 보다 개혁된 교회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는 분들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의 녹록지 않은 중에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현실 교회 상황은 열악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 가는 보편 교회를 이루기 위한 좋은 수단들, 즉 교리와 신앙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개혁교회나 우리가 추구하는 장로교회나 근원적으로 한 부모(뿌리)에서 난 형제(열매)입니다.

  • 2012/01/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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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으로 칼빈주의의 후손이며,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의 자녀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칼빈주의=개혁주의, 혹은 장로교회=개혁교회라는 구도를 한국 교회 안에 정착시킨 것은 매우 의미있는 공헌이며, 매우 합당한 이해입니다. 그럼에도 간혹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차별성에 강조점을 두고서 외국의 개혁교회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보노라면 그 의도에 관해서는 공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문제인 것은 원래의 장로교회가 지향하는 신학적 근거나 신앙고백의 미흡함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르게 적용하지 못한 이유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교회적 현상에서만 찾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듣는 자의 문제이기 이전에 전하는 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장로교회의 정통성이 바르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통 장로교회의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교사가 있어야 합니다.

  • 2012/01/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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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 정통 장로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그를 통해 정통 장로교회 정신으로 무장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지교회나 선교지나 다른 교회 현장에서 정통 장로교회의 가르침을 바르고 온전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이 일환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정통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교리)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입니다. 당회나 노회나 총회와 같은 치리회도 이러한 고백의 정신에 따라 유지하며 운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경적으로 가장 개혁된 교회와 가장 개혁되어가는 교회의 실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성도간의 유대성과 교회의 보편성이 안전하고 강하게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위대하고 소중한 신앙적 유산인 신앙고백(들)이 괄시당하는 현실에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참된 의미로서의 정통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회복과 번성은 요원한 일이며, 나아가 교단이나 교회의 규모와 세(勢)를 떠나서 전체 교회는 부패와 오류의 내리막길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 2012/01/26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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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다시 한번 밝히지만, 이 시대의 교회가 처한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참된 교회와 참된 신앙을 세워감에 있어서 핑계할 수 없는 원인들이 가까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언제나 (교회) 위기'라는 말하며 쉬이 포기하는 것은 성도로서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비록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좋은 유산들이 확보되어 있고, 성의만 있다면 언제나 그것을 통하여 참된 교회의 본위와 자태를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더구나 오늘날에는 과학 문명과 메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이전보다 쉽고 간편하게 참된 교회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정보와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카페도 그러한 선을 도모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하나의 작지만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암튼 어떤 역사속에서도 진리를 밝히시고, 진리로 인도하시고, 진리로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수단들을 잘 활용하여 참된 전심으로 교회와 참된 신앙을 세워 나가도록 함께 마음과 힘과 지혜를 모으십시다!

  • 2012/01/2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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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truthh님... 항상 드러냄없이(?) 좋은 정보 나눠주셔서 고맙고요. 그리고 방금 '개혁교회 & 교회개혁' 목록에 있는 모든 코너들의 글쓰기를 성실회원도 가능하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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