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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 督 敎 世 界 觀 스크랩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비판 / 전광식 고신대교수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22 14.07.13 12: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비판|성경적 세계관

신동식 | 조회 100 |추천 0 |2003.06.10. 15:26 http://cafe.daum.net/CPI2002/C2cl/71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비판

(전광식 고신대교수)


"지금 구라파에 하나의 유령이 출몰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이것은 1848년 2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저술한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의 서두이다. 그로부터 대략 한세기 반이 지난 지금 구라파에는 또 다른 하나의 유령이 출몰했는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것이다.

물론 이 두가지 유령은 그 출몰의 배경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지금 나타난 유령은 앞의 것과 달리 어떤 집단이 의도적으로 고안한 것이거나 또 정치성을 띤 것도, 교조적 성향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후자의 유령은 앞의 것처럼 그렇게 강력한 것도 또 무슨 제도나 구조를 만드는 것은 아니면서도, 부드럽고 훨씬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의식과 삶, 사회와 문화전반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그러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유럽에서 태어나 범세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고, 또 예술에서 시작하여 학문과 사회, 그리고 심지어 종교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뻗치고 있다.

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하나의 일관된 개념정의가 없고 또 그 내용규정이 다양하지만, 어떻든간에 현대를 얘기하는 이들은 대부분 현대 정신과 문화가 하나의 근본적인 전환을 맞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전환을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로 규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용어는 많은 이들에게 다른 개념어들보다 훨씬 더 애매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다가오지만 이미 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용어로서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인가

독일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연구로 필명을 날리고 있는 볼프강 ?츠(Wolfgang Welsch)는 이런 현상을 두고 '그릇된 명칭의 마술(Magie des falschen Namens)'이라고 했다.

이 시대를 'Postmoderne'가 아니라 'Postmoderne Moderne'라고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츠는 'Postmoderne'라는 용어는 그것이 사용된 뒤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된 것이 아니라 혼란만 가중되었다고 진단한다.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은 70년대 초 불란서의 철학적 및 사회학적인 사상적 논의와 또 미국에서의 문화과 예술의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지역적, 분야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국내에서는 최근 2,3년 동안 논의가 부쩍 심해져 문학가들 사이에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있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와 북미에서 시대정신의 전환을 표방하며 등장하게 된 사상사적 내지 역사적 배경에는 68년도의 학생운동이 놓여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젊은 세대는 서방자본주의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도 강하게 비판하면서 권위와 전통의 타파라는 자유의 기치를 내세웠고, 또한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표방했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사상은 현상학(現象學)이 내세우는 주체도 구조주의(構造主義)가 내세우는 구조도 다 거부하고, 나아가 전통적 역사철학에 대해서도 거리를 유지하고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이러한 사상은 과학이 실제에 대해 제시하는 유일무이한 방식의 해석을 거부하고 또 헤겔이나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체계의 관념이 무너진다. 그러면서 이 사상은 니체적인 것, 즉 로고스보다 파토스(Pathos)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멀리는 아폴론(Appollon)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것에 관심을 던진다. 나아가 합리적으로 보편화시킨다든지, 일반화시키는 것은 거부하고 개별성과 특수성을 제시한다. 하여튼 이러한 사상적 특성을 지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개념논의는 주로 모더니즘에 대한 규정과 관계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모더니즘을 정확히 어떻게 또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성격을 규정해야 하느냐 하는 점이고 또한 그렇게 규정하여 모더니즘에 과연 'Post'를 붙일 수 있는지, 또 있다면 이 양자는 정확하게 어떤 관계로까지 연결되는지를 고려해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그것을 아예 대립적 관계 속에서 규정하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대표자격인 로타드(J.F.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서 나왔고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논의들에서 아직 정확하게 객관화된 개념규정은 수립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점차 일반화 되어가는 내용이 있음이 보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의 시대정신과 문화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개념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확대되어가고 있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시대현실은 이 개념의 애매함보다 더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미래의 청사진으로 다가온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모더니즘'은 '근세주의(近世主義)' 내지 '근세정신'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이 용어에는 부지불식간에 근세인의 대단한 자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고대 로마사회에서는 키케로(Cicero) 등이 일반인인 '호모(homo)'에 대해 희랍적 교양교육을 받은 로마인을 '야누스(humanus)'라 칭하면서 로마인의 우월성을 전파했다.

'근세인'은 로마인처럼 그렇게 민족집단적인 자긍심의 발로로 자기들을 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에 못지 않는 시대집단적인 자의식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들이 '근세적(modernus)'이라 할 때 그것은 중세를 지칭하는 '구식적(antiqui)'이란 개념과 대립되는 것으로 중세와의 질적, 즉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상이성을 뜻하는 것이다. 근세라는 시대는 중세에 지배권을 행사한 교권적 타율에서 탈피하여 세속적 정신과 세력이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는 시대였고, 그 정신도 중세적 도덕과 관습에서 결별하여 새로운 윤리와 인생관을 표방하고 나아가 종교적 도그마와 그것에 물든 사상을 팽개치고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관과 철학을 내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근세의 출현을 사람들은 서구정신사에서의 '제 2의 계몽'이라고 한다. '제 1의 계몽'이 탈레스를 비롯한 고대 밀레토스학파의 철학자들에게서 구현된 신화(Mythos)에서 철학(Logos)에로의 변화였다면, 제 2의 계몽은 중세의 종교적 도그마와 타율에서 비롯된 숙면(熟眠)으로부터 이성이 잠깨는 근세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근세는 중세의 교회와 교권이라는 '악한 유모'에 의해 억지로 잠들었던 이성이라는 어린아이가 1천년의 긴 강요된 잠에서 깨어 스스로 움직이던 때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한 논문에서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종교적 도그마와 타율의 굴레 속에서 생각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생각함'의 자율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신철학을 전개한 헤겔은, 근세는 중세에 갇혔던 정신이 해방된 때라고 크게 평가하면서 이런 정신의 해방과 자유는 구체적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에 기인한다고 했다. 루터는 그의 [교회의 바빌론유수]라는 글에서 중세에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천주교의 교권에 포로된 상태라고 하면서 자신의 종교개혁운동은 참 교회의 해방운동이라고 하였다.

반면 칼빈은,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이 갇힌 때라고 지적하고 종교개혁은 복음을 자유케하고 성경을 성경되게 한 사건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사실 복음과 성경은 물론, 교회와 정신도 그 본질은 구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과 성경, 그리고 정신은 그 누구도 가둘 수 없고 얽맬 수 없는 것이다. 중세는 다만 이것에 관련된 공개적 활동이나 정신에서 나오는 공개적 표현을 막을 수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는 어떤 집단이나 제도가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근세는 이런 정신의 공개적 활동금지상태에서 정신이 해방되고, 이성이 잠든 척하고 있다가 보란 듯이 잠에서 깬 시기이다. 우리가 잠에서 깨면 낮에 일을 하듯이 이 중세 천년의 잠에서 깬 정신은 근세의 낮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이성이 맞은 첫 아침은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였다.

북부 이태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문예부흥에서는 고대 희랍문할과 철학이 재생되고 또 단테, 복카치오, 페트라르카 등의 문인과 벨리니,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이른바 베네치아파의 화가들이 문학과 미술에서 근세의 정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뒤 종교개혁을 지나 16-17세기의 신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 시대의 오전을 거쳐, 17-18세기의 신고전주의, 19세기 초까지의 낭만주의의 정오를 통과하고 19세기의 산업혁명과 불란서 대혁명의 오후나절에 이르면서 이 스스로 생각하고 일하는 이성은 많은 일을 수행했다.

이렇게 처음에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과학의 혁명에서 일어나던 이성의 활약은 점차 기술사회분야로 확산되었고 급기야는 근세시민사회를 총체적으로 개막시킨 불란서혁명(1789년)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말하자면 여기에서 근세의 이념은 사회의 총체적 현상으로 구현되고, 또 근대성의 이념은 일단 마무리된다. 이렇게 볼 때 근대화란 곧 합리화요 세속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근대주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간의 기능가운데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극대적으로 강조되고 이성적 주지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전적 타락론이 거부되고, 나아가 성경의 계시된 진리보다 이성이 잣대와 시금석, 그리고 거울로 등장하게 되었다.

둘째, 신적인 계시와 갖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을 제거하고 현세적 내재주의가 나타났다. 학문과 삶의 주인공이 된 이성은 더 이상 자기가 인지할 수 없는 요소는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마저도 비초월화 시키고 현세만 의미있는 영역으로 삼았다.

셋째, 가치와 이념, 인생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합리적 절대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 근세에서는 이성의 독단이 가치와 이념에서 획일성과 일의성을 고집하게 되었다.

넷째, 고대 희랍과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적 자연관이 물러나고 계량과 계측의 엄밀한 방법론에 기초한 근세적 자연관이 등장하므로 수학적 과학주의가 표출되었다. 이 입장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과학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현혹하며, 또 과학적 방법에 의해 기술되는 물리적 세계만이 영원자족하며,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고대와 중세에서는 진보사관이 발전이 안된데 비해서 근세에 와서는 이성에 의한 신념과 삶의 점진적 합리화를 통한 낙관적 진보주의가 주장되었다. 이 입장에서는 역사는 점진적으로 발전한다고 보고 또 이런 발전의 주체는 인간의 이성적 플랜이며 그 방향은 물질적 부요와 삶의 안락함을 지닌 지상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계몽시대에서 시발하여 18,9세기에 만개한 모더니즘의 정신은 결국 주지주의, 내재주의, 절대주의, 과학주의, 진보주의의 성격을 띠면서 합리적이고 희망에 부푼 미래의 청사진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태동의 역사적 배경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견고해 보이던 근대주의가 와해되고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로 이행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상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첫째는 근대사상, 특히 그것의 합리주의적 세계관과 낙관론적 역사관이 지니는 문제점에 대한 깊은 자각이다. 우선은 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성 중심의 낙관론이 산산조각 나버리게 되었다.

역사는 근대사상의 프로그램대로 진행되어 무한히 진보하며 따라서 유토피아가 오는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은 물론 사회집단과 국가집단도 합리적 자아보다 욕망적 자아가 지배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도 욕망의 법칙이 지배함을 보게 되었다.

둘째, 막스 베버가 제시했고 그 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dorno)가 발전시킨 사상으로 근대주의에서 생겨난 독버섯과 같은 이른바 합목적적 합리성 내지 도구적 이성(instrumentale Vernunft)때문이었다. 이런 합리성은 근대주의가 본래 표방했던 온건하고 바람직한 합리성이 아니고, 인간이나 집단이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꾀를 부리는 이성으로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기주의적 성격이 생겨난다.

셋째, 근대가 준 외적 부산물 때문인데 여기에는 무엇보다 먼저 산업화로 인한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에서는 기계화로 인해 인간의 물질화와 비인간화 현상이 일어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계화로 계속 전쟁무기, 살상무기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넷째, 근대주의가 산출한 규격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비규격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전도서의 지혜자는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전 1:9).

다섯째, 오늘날은 근대처럼 정치권 등 기타 사회영역에서 중앙집권적인 구조가 무너지고 지방분권적 내지 개별중심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주변적인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섯째, 근대에서 시작된 산업문명은 오늘날 고도의 복합적이고 다양한 문화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삶과 문화의 영역이 매우 다양화되었고, 또 다양한 가치관과 인생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곱째, 중세 봉건사회아래 근대까지 성행했던 상하구조 등이 와해되고 이른바 서민층의 의식이 향상되고 질도 상승되었다. 따라서 과거와 달리 이제는 예술이나 문화가 상류층 사람들만의 향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향유 가능한 것이 되었고, 이런 경향과 함께 이른바 대중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볼 때 근대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근대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주인(主因)이 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결과에서 근대성의 한계를 보는 것이다. 근대는 자기가 찾고 계발한 합리적 사유의 자아와 그것이 세운 세계관과 정신을 과시하고 우상시했지만, 그것 역시 한계에 부딪혔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스스로 찾고 만든 것의 근본적인 한계를 본다. 지상의 인간이 계발하고 성립시킨 것 가운데 온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모더니즘에 속하면서도 대립되는 이중성

하여튼 포스트모더니즘은 한편으로는 서양의 근대사회가 추구하려고 했던 것에서 파생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시대와 문명이 바뀌어가므로 그것을 대하는 태도도 바꾸는 것에서 발발하였던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더니즘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대립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다음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요타르(Lyotard)나 데리다(J.Derrida) 등이 주장한대로 해체주의(Deconstruction)를 표방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로고스 중심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실존주의의 실존이나 구조주의의 구조도 닫힌 체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비판한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그것은 그 대상, 상태, 균형적 구조 등의 해체작업을 시도한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와 탈중심을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 있는 후기구조주의는 '개방된 구조'를 얘기하고 있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에서 탈피하여 비합리주의 내지 탈합리주의(Irrationalism)를 표방한다. 말하자면 아폴로적인 것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지향한다. 듀부페트(Dubuffet)는 인간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은 더 이상 합리적인 수단들로 포착되지 않는다고 한다.

푸코는 이상이나 합리성 못지 않게 광기도 하나의 에피스테메(episteme)의 형태라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은 프로이드의 무의식(libido)의 이론을 도입하여 합리적 자아보다 욕망적 자아를 앞세우고 이 후자가 우리의 정신과 문화에서 더 지배력을 행사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은 합리성을 완전히 배격하지는 않고 그것을 다만 상대화시킬 뿐이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미의 일의성(一意性)보다는 다의성(多義性)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에 한가지 의미만 찾고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찾고 부여하며, 또 의미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그것의 상대성을 내세운다. 그래서 이 사상을 표방하는 이들은 실존주의에서는 주체성과 주관성만 전면에 부각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개별적 사상'이라고 칭한다.

넷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인간중심주의(Deanthropocentrism)를 표방한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합리적 자아만 거부하는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마저도 더 이상 우주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철학 내지 생태윤리학은 이러한 사상의 영역 안에 드는데, 그것의 주창자인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자연의 주체성과 생존권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자연은 인간의 연구나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은 주체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요즘의 뉴에이지 이념이나 힌두교 계통 종파들의 사상에서도 보인다. 이런 것에서는 인간이 우주 속에, 우주의 힘과 질서 속에 함몰되어진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표방한다. 1968년의 좌익계 학생운동은 유럽 현대사상사의 큰 전환점이 되는데, 그로부터 이어진 70년대 초,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 등을 통해 소련사회의 실상을 알고 또 '죽(竹)의 장막' 중공 속에 감춰진 공산주의의 허위와 모순을 경악과 함께 발견한 뒤에 학생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현실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으로 정치참여를 포기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즉, 샤르트르의 사상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 정치참여의 낙관론은 거의 쇠진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이 집중적으로 비판한 마르크스주의에도 인간성 회복이라는 미명아래 권력 본능의 모순적 구조가 감춰져 있음을 보았다. 이제는 어떤 담론이 민주적인 것이든지 혁명적인 것이든지 간에 아무런 가치론적 준거가 없는 일종의 욕망의 자연주의에 귀착되고 그것에 의해 해체되어진다고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체주의, 구조주의, 보편주의 대신에 해체주의와 탈중심주의를, 로고스와 논리적 절대주의 대신에 파토스와 탈합리주의를, 의미의 일의성과 절대주의 대신에 개별성과 다양성?상대성을, 인간중심주의 대신에 탈인간 중심주의를, 그리고 정치적?역사적 관심 대신에 탈정치화와 탈역사화를 그 본질로 가지고 있다.


그 정신과 현상들

현재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선 예술 및 문화현상 속에, 다음으로는 인간과 삶의 현상 속에, 그리고 종교의 현상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보다 먼저 이 시대의 문화운동 내지 현상으로서 '새롭고 복잡하고 충격적인'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 낸다.

특히 건축에서 잘 드러나는 이런 현상은 건물을 과거처럼 피타고라스적인 균형비(Symmetrie)에 따라서 세우지 않고 불균형적이며 파격적인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다. 회화들도 시각적인 즐거움과 미적 카타르시스를 주려 자기 반성과 정신성을 중시한 창작행위로 등장한다.

그리고 작품의 결과와 그것의 의미보다 과정과 행위, 또 참여가 중시된다. 나아가 자연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일어나고 감각이 중시되는 파토스적 성격이 강하게 대두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또한 삶의 현상에서도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중세에는 교의적인 타율로 인생관이 제시되었고, 근세에는 이성과 합리적인 자아와 그것의 행위가 득세한데 비해 이 시대에는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자아가 부각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고 감각적인 삶을 영위한다.

또한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 중세에는 절대적인 종교적 가치, 근세에는 절대적인 합리적 가치가 지배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가치상대론이 전개되었다. 그밖에 공동체성을 무시한 극단적 개인주의, 무관심의 자세와 냉소주의도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의 특징이고, 이런 형편에서는 삶의 의미가 잊혀지기 쉽고 또 삶의 점진적 개혁도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교 내지 기독교계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오늘날은 노방전도를 해도 시비거는 이가 없고 무관심적 방임의 자세를 취한다.

이런 현상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배경에는 인간의 개별적 세계관과 사상에 대한 상대주의적 인정과 자기 중심적 태도가 있다. 중세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계시다"라고 외치고, 근세의 합리주의는 "하나님은 안계시다"라고 하는데 비해, 작금의 시대는 "하나님이 계시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경전과 전통적인 교리, 또 교회적 규범을 부인하려 하고 탈경전화 내지 탈교리화의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신앙과 교회를 성경과 바른 교리 내지 신학 위에 세우려 하지 않고 체험이나 신비, 그리고 느낌 위에 세우려 한다.

다미선교회의 종말론 해프닝은 이런 연유에서고, 따라서 1992년 10월 28일이 지난 뒤 그들은 전통적 교리, 즉 웨스트민스터 신조로 돌아간다고 표방하였다. 또 이 시대의 기독교는 성부 하나님 대신 내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유독 강조한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에 참여하고 과정 속에 있는 하나님을 주장한다. 근대의 신학이었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오늘날의 신학은 탈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으며 종교다원주의와 토착화신학, 그리고 민중신학 내지 정치신학을 주장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과 현상들을 비판해본다면 우선 이것은 절대적 상대주의를 주장해 다양성과 함께 자유방임성을 말하고 나아가 사고와 가치관의 혼란은 물론 윤리적 미풍양식을 무너뜨리면서 윤리의 무정부상태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를 상대화시키든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배격한다. 따라서 종교적 가르침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종교의 구속력도 거부하여 결국 종교다원주의와 종교배격으로 귀결되고 만다.

나아가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조장하여 결국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성이 사라지고 사회의 관계적 기반이 약해진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는 대표적인 것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이성과 그것의 합리성을 과소평가하거나 배격하고, 느낌과 부딪힘, 욕망적 자아를 강조하므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무시하고 결국 원시 내지 동물성대로의 회귀를 부추긴다.

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에서의 주체가 상실되고 진보성을 부인하므로 개혁의지가 약해짐은 물론 근대화 내지 삶의 합리적 변화를 포기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바른 자세와 대안을 가져야

결론적으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시대의 정신과 문화를 잘 대변하고 사람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잘 표출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사회는 모더니즘의 시대를 제대로 겪지 않았으므로 그것과 대비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그것의 여러 측면은 유럽이나 북미처럼 강하게 느끼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사회가 여러 측면에서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정신과 현상을 다분히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종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절대유일의 진리를 부인하며, 또 초월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보편적인 가치와 전통, 역사와 인생의 의미마저도 부인한다. 또 이 시대의 인간은 상대주의와 다의성을 얘기하고, 개방성을 말하며, 지성 못지 않게 감성적?욕망적?의지적 기능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이 실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이 시대를 따라 변형적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창자들은 인간심령과 집단 속에 있는 근본적 죄성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쩌면 이 시대를 해석하는 설명자에 머물지 않고 인간을 그릇되이 이끌고 가는 거짓 안내자인지 모른다. 또 영적으로 조명한다면 이것은 시대를 떠도는 악한 영이 선도하는 바람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이런 시대정신을 너무 무시하지도, 또 그렇다고 너무 민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의 활동영역과 대상인 이 시대의 사회와 인간들이 지니는 모습이므로 잘 알아야 할 것이고 또 바른 자세를 취하고 대안들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먼저 교회와 신앙영역에서 교리와 바른 신학을 교육하고 그것을 강조해야 한다. 특히 우리 자신은 물론 믿음의 동지들이 신앙생활에서 영적이고 신비적인 체험과 가슴의 부딪힘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런 그릇된 세계관과 시대정신에 도전하는 세계관 운동과 바른 윤리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상대주의적 가치관과 윤리론을 비판하고 절대적 윤리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존중하도록 권면하고 가르쳐야 한다. 또 온건하고 참된 학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나아가 교회와 사회에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우리가 먼저 희생과 섬김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바른 성경적 역사관을 제시하므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는 그의 경륜대로 변함없이 흘러갈 것임을 얘기해야 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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