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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부터 나의 별명은 ‘이천’이었다. 이천에서 대도시로 진학한 나를 친구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천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나에게 농담어린 친구의 시비조(“야, 이천! 3·1운동 때 이천 사람들은 만세 안 불렀냐?”)는 창피함을 넘어 자존심까지 조금 상하게 했지만, 정말 친구 말대로 역사교과서에는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에 이천은 비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박 한번 못하고 쓴웃음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이천 시립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펼쳤을 땐 충격을 넘어 미안함까지 밀려왔다. 이천문화원에서 발간된 책의 기록에는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한일강제병합 전까지 이천은 저항 없던 굴욕의 땅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민족자존의 회복을 염원하는 의병운동의 뜨거운 용광로였다는 것이 요지였다.
기록된 내용 중, 먼저 끔찍했던 ‘이천충화사건’을 살펴보자. 1907년 8월1일, 을사늑약 이후 한반도를 차례로 침탈하던 일본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하게 되는데,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군에 가담하면서 보다 체계적으로 의병전쟁이 진행된다. 이때 가장 치열하게 의병전쟁을 일어났던 곳이 바로 ‘이천’이었다.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파견되어온 영국언론 데일리메일의 특파원 멕켄지(Mckenzie)는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병을 만나려면 이천으로 가라.’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의병을 찾기 위해 이천을 직접 방문한 그가 처음 목격한 것은 이미 일본군 수비대가 이천을 휩쓸고 간 뒤, 폐허로 남은 마을뿐이었다. 당시 기록에는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로 이천에서 930여 호의 가옥이 불에 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를 ‘이천충화사건’이라고 한다.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1895년으로 올라가보자. 1895년 10월8일 일본은 폭력배를 고용해 한 나라의 국모를 살해한 뒤, 시신을 강간하고, 석유를 뿌려 사체를 태우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의 실권을 잡고 단발령을 실시하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구연영, 김하락 등이 이천으로 내려와 이천의 무장 방춘식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이천을 중심으로 여주 안성 용인 등 근방의 동지들을 모아 그 유명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해 일본에 대항한다.
다음은 ‘이천수창의소’와 관련된 이천의병전적비의 기록이다. 1896년 1월18일 새벽, 일본군 수비대 100명이 공격해 와서 광현(신둔면 수광리 넉고개)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천의병들과 첫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부터 시작된 이날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 되어 해가 저물도록 그칠 줄 몰랐고, 이날 밤 열 시경 일본군이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수십 명이나 되는 전사자들을 남겨둔 채 도주했다.
이천 지역은 1896년 이천수창의소의 의병항쟁과 1907년 정미의병 전쟁의 보복으로 일제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 상처를 받은 뒤였기에 이천에서의 3·1운동 물결은 파고가 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고등학생 때 알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천의 선배들을 잠깐이나마 부끄러워했던 것에 부끄러움과 함께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천의 후배들에게 역사의 바른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는 책임감까지 느낀다.
정부는 올 하반기에 새로운 한국사 국정교과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여전히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을미의병의 봉기지역을 제천과 춘천 홍주만 표기하고 있다. 을미년 봉기 이래 가장 치열하고 가장 큰 승전을 벌인 이천수창의소의 이천지역은 언급조차 되어있지 않고 있다. 역사편찬위원회의 역할은 미래의 주역인 우리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를 교육하고, 그 역사에서 교훈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편찬위원회와 국정교과서 편찬위원들은 나처럼 고귀한 선조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우매한 후손이 나오지 않도록 이천광현전투가 한국사 교과서에 실릴 수 있도록 이천시민의 염원을 모아 강력하게 촉구하는 바이다.